하회마을(河回-)
한국에서 가장 한국적인 마을이 어디일까?
지금까지 나는 경주 가는 길에 들렸던 양동마을인가 했더니 그보다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회마을'임을 알았다.
화회마을은 전통적인 한옥과 초가집이 정자(亭子)와 정사(精舍)와 서원(書院)이 한데 어울려서 풍산 류씨(柳氏)들의 집성촌이 되어 600년 간 대대로 오늘날까지 옛날 삶을 그대로 이어오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씨족마을이요, 전통적 문화를 간직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UNESCO는 하회마을을 한국에서 10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다음은 그 등재 이유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하회마을에 나는 두 번 갔다.
처음 하회마을에 가서는 실망하여 돌아왔다가 두 번째는 감격하며 돌아왔다.
처음엔 하회마을의 집들만 건성 대충 보고 와서 그랬고, 요번에는 하회마을의 진면목을 보고 왔기에 그랬다.
옛날에 갔을 때는 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 앞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서 1.2km 뒤로 물러난 자리인 하회세계탈박물관 근처에 주차장이 있다.
그 주차장에서 옛날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무료셔틀버스가 손님이 타는 대로 수시로 떠나고 있었다.
그 근처에는 화회먹거리 장터가 있고 옛날에 없던 '안동한지공예전시관'이 있었다.
그 먹거리 장터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안동간고등어' 간판이다.
*. '안동간 고등어' 맛 비결
북쪽산 아래 흙을 파서 서쪽 바위 모퉁이에 소나무 심었네. 흙은 삼태기에 차지 않고 나무 크기 한 자가 되지 않네. 흔들어 돌 틈에 옮겼으니 뿌리도 마디마다 상했으리라. 땅은 높아 시원하여도 가꾸기엔 물이 적을 듯한데 비 이슬 젖기엔 더디면서 서리 바람맞기엔 빠르겠구나. 늙은이 일 좋아 억지 부려 보는 이 속으로 어리석다 웃을 테지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 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비롯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은 알겠지. 천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조선 조 사37년 1604년 2월 29일14대손 端夏 근역.
그 옆에 있는 이정표를 보니 부용대까지는 250m 산길이 시작이다.
*. 부용대(莩蓉臺)에서 드디어 부용대(莩蓉臺)다. 연꼭 '부(芙)', 연꽃 '용(蓉)' 연꽃의 또 다른 이름이 부용(莩蓉)이로구나 하는 것을 하회마을 부용대 와서야 분명히 알았다. 이렇듯 건성 지나치면 모르게 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이 무엄하게도 그 안내판에 걸터앉았다가 일어서는데 그 모습이 하두 좋아 다시 앉아 보게 하였다. 하회마을도 아름답지만 모자간의 다정한 모습은 그에 못지 않구나 생각해서다.
보라, 하회마을을.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 같지 않은가. 다음은 하회 마을이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 된 유래다.
-풍산 류씨(豊算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다. 그 7세 류종혜 공이 하회터가 너무 좋아 진산인 화산에 올라서 살피다가 지금 같니 하회에 풍산 류 씨가 세거(世居)하게 될 터를 잡았다.그 이전에 이곳에는 허 씨(許氏)와 안 씨(安氏)가 먼저 세거하고 있었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의 일부다. 이후 풍산 류 씨들이 입촌하여 살다가 입암 류중영(1515~1573)이 중종 무렵 과거 급제하여 관찰사에 이른 이후 그의 두 아들 겸암 류운룡과 특히 서애 류성룡이 영의정까지 올라 찬란한 풍산 류 씨의 시대를 열자 차즘 허 씨와 안 씨가 떠나서 오늘날 같은 풍산 류시의 집성촌이 된 것이다
.
위 하회마을 안내도를 보며 굽어 보는 몇 개나마 말해 보자. 우리가 있는 곳은 지도의 우상단 강건너 절벽지대다.
거기서 강건너 마주 보이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만송정(萬松亭,천연기념물 제473호)이다.
-위에서 말한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그 좌측 이 마을 중심부에 '삼신당 신목(수령 600년보호수 느티나무)'이 있다. '삼신'이란 아이를 점지해 주고 해산을 맡은 신목(神木)으로 이곳이 하회 탈출의 중요한 무대가 되는 곳으로 여기 있는 한옥들이나 초가집들은 남향을 하지 않고 강을 향하여 문을 내고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간고등어에 안동소주 한 잔 기울일 시간을 남기느라 시간에 쫓겨 서둘다 보니 아차!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를 잊었구나.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인데-.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는 하회마을을 가장 잘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라는데. 거기 쓰여 있는 현판 글씨가 스승 퇴계 이황으로 받은 글씨라는데.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을 지나친 아쉬움은 깊기만 하다. 강을 건너 운치 있게 간고등어 집을 향하고 있는데 먹거리 장터 부근에 있는 '하회 세계 탈박물관'이 옷깃을 잡는다.
간고등어와 안동소주 대신에 탈이 된 것은 물론이다.그러나 여자 스커트나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는데 어찌 내가 여기서 장황한 이야기를 하랴. 하여 일화 한 토막 처용 이야기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마누라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아아, 이를 빼앗겼으니 어지 할까?"
하는 노래를 부르며 처용(處容)은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한 놈은 병을 옮겨주는 역신(疫神)이었다.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움에 감격하여 다시는 처용이 나타나는 곳에는 가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든 자 있을 때 처용이 나타나면 병을 옮겨 주은 역신이 도망가는 바람에 병이 낫곤 했다. 처용이 죽자 처용의 탈을 쓴 처용무(處容舞)가 생겨나고 그래서 병이 든 것을 우리들은 '탈 났다고' 한다. 탈을 써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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