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하회마을(河回-)------ 원본

ilman 2013. 9. 10. 10:22

 

 

하회마을(河回-)
  

 한국에서 가장 한국적인 마을이 어디일까?

지금까지 나는 경주 가는 길에 들렸던 양동마을인가 했더니 그보다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회마을'임을 알았다.

화회마을은 전통적인 한옥과 초가집이 정자(亭子)와 정사(精舍)와 서원(書院)이 한데 어울려서 풍산 류씨(柳氏)들의 집성촌이 되어 600년 간 대대로 오늘날까지 옛날 삶을 그대로 이어오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씨족마을이요, 전통적 문화를 간직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UNESCO는 하회마을을 한국에서 10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다음은 그 등재 이유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하회마을에 나는 두 번 갔다.

처음 하회마을에 가서는 실망하여 돌아왔다가 두 번째는 감격하며 돌아왔다.

처음엔 하회마을의 집들만 건성 대충 보고 와서 그랬고, 요번에는 하회마을의 진면목을 보고 왔기에 그랬다.

 

옛날에 갔을 때는 하회마을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 앞에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서 1.2km 뒤로 물러난 자리인 하회세계탈박물관 근처에 주차장이 있다.

그 주차장에서 옛날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무료셔틀버스가 손님이 타는 대로 수시로 떠나고 있었다.

그 근처에는 화회먹거리 장터가 있고 옛날에 없던 '안동한지공예전시관'이 있었다.

그 먹거리 장터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안동간고등어' 간판이다.

 

*. '안동간 고등어' 맛 비결

간고등어 간판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을 보니 안동과 간고등어에 얽힌 어떤 유래가 있었던 것 같다.
 

-옛날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육지 깊은 곳에서 사는 안동 사람들에게 생선은 아주 귀한 반찬이었다.장사치들은 등짐을 지고 안동에서 제일 가까운 영덕, 강구 항구에서 150리 길을 걸어 황장재를 넘어 안동 '쳇거리 장터'까지 생선을 운반해와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빨라도 1박 2일이나 걸렸다. 그러나 ‘살아서도 썩는다’는 고등어가 그 사이에 상하는 것은 어절 수가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고등어가 상하지 않도록 소금을 뿌려 염장(鹽藏)하여야 했다. 고등어는 잡자마자 즉석에서 배를 따고 간을 하거나, 포구에 도착하여 간하여야 하는데 간고등어는 소비지역인 안동 가까이까지 운반하여 와서 간을 하였다 한다. 생선의 맛이란 상하기 직전에 나오는 효소가그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안동간고등어의 맛의 비결이 된 것이다. 

   *. 하회(河廻)마을 어원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 지류인 화천강(花川江)이 'S' 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이 하회마을을 '물돌이동(-洞)'이라고도 하였다.
동쪽에 화회마을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 327m)이나 서쪽의 부용대(莩蓉臺)에서 하회마을을 굽어 보면
마을 모습이 태극기 모양과도 같고,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과도 같고, 한척의 돗단 배가 떠 가는 형국이다.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서 말하는 '山太極 水太極' 모양으로 태극형(太極形)으로  행주형(行舟形)이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인데 이는 하회마을이 연화(蓮花) 같다 해서 생긴 말이다 그래서인가 이곳은 6.25의 참화가 미치지 않은 길지(吉地)였다.
  오늘 나는 창녕성씨 종친회 모임을 따라 소수서원(소수서원)을 들려 온 몸이라서 우리들에게 하회마을 관광은 2시간 30분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에 가본 마을 구경 대신에 나룻배를 타고 마을 서쪽의 기암절벽의 부용대(莩蓉臺)에 올라 하회마을을 굽어 보로 했다. 
 우리는 하회 16경 중에 하나인 '도두황주(渡頭橫舟)'라는 옥연정 앞 강나루에 매어둔 배를 타고 운치있게 화천을 건너 간다.  배삯은 왕복 요금에 3,000원을 받고 있었다. 강물은 깊이 5m 내외의 백사장 위를 흐르는 물이라서 몸을 담그고 맨발로 걷고 싶은 맑은 강물이었다.
갑자기 옛날 내가 애송하던 두보의 '강촌(江村)'이 생각난다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구비가 마을을 안고 흐르나니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날 강촌에 일마다 유심하도다.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절로 가며 절로 오는 것은 집 위엣 제요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여 서로 가까운 것은 물 가운데 갈매메리로다.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장기판을 만들거늘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젊은 아들은 바늘을 두두려 고기 낚을 낚시바늘을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약물뿐이니 
微軀此身更何求(미구차신갱하구) 조그만 몸이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그러다 보니 나도 시흥심(詩興)이 감돌아 49세에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쓴 7언율시의 한시 '강촌'을
두보의 마음이 되어 하회마을을 읊조려 보게 한다.


하회 마을 굽이도는 맑은 화천강(花川江)에
백로(白露) 지나 배 띄우니 제비도 절로 강남 갔구나.
바다가 멀어 갈메기도 날지 않는 고희(古稀)와 불혹(不惑) 지난 처자(妻子)와 함께인
시절 탓인가,
내 복(福)인가
부모 덕(德)인가. 
부용대(芙蓉臺) 행 나룻배의 늙은 나는

약물(藥物) 없이도 건강(健康)은 아직도 안녕하구나.                                    
                        -하회마을 화천강에서                                    

강을 넘어 백사장을 걸어 추월암(秋月岩)과 옥연암(玉淵) 제자를 절벽에서 찾으며 오르기 잠간인데 '옥연정사(玉淵精舍, 민속자료88호)'가  문을 활짝 열고 우릴 반긴다. 
이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임란에 대해 기록한 '징비록(懲秘錄, 국보 제132호)'을 쓴 장소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이곳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고택체험객과 함께 이곳 주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화산서원을 지난다.특히 '地山樓(지산루)'란 문루가 유난히 멋지다. 여기에 오르면 드넓은 백사장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화천이 한눈에 들어 온다는데 앞서가는 일행으로 뒤로 미룬다. 들러서 사진을 남긴다는 것은 돌아올 때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화산서원(花山書院)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諡號 文敬公 1539-1601년) 선생의 학덕(學德)을 흠모한 유림(儒林)들이, 정조10년(1786년) 때 윤안(金允安) 선생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을 종향(從享)했는데, 두 분 모두는 사승 관계에 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춘추로 향사해오다 고종 5년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
 
그 후,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여러 건물을 복원 1996년 서원을 완성하고 복설고유를 올렸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그곳을 지나니 마당이 나오고 유성룡의 한시 등의 석물이 있다.

 

북쪽산 아래 흙을 파서 서쪽 바위 모퉁이에 소나무 심었네. 흙은 삼태기에 차지 않고 나무 크기 한 자가 되지 않네. 흔들어 돌 틈에 옮겼으니 뿌리도 마디마다 상했으리라. 땅은 높아 시원하여도 가꾸기엔 물이 적을 듯한데 비 이슬 젖기엔 더디면서 서리 바람맞기엔 빠르겠구나. 늙은이 일 좋아 억지 부려 보는 이 속으로 어리석다 웃을 테지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 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비롯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은 알겠지. 천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조선 조 사37년 1604년 2월 29일14대손 端夏 근역.

 

 

 그 옆에 있는 이정표를 보니 부용대까지는 250m 산길이 시작이다.
*. 부용대(莩蓉臺)에서  드디어 부용대(莩蓉臺)다. 연꼭 '부(芙)', 연꽃 '용(蓉)' 연꽃의 또 다른 이름이 부용(莩蓉)이로구나 하는 것을 하회마을 부용대 와서야 분명히 알았다. 이렇듯 건성 지나치면 모르게 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이 무엄하게도 그 안내판에 걸터앉았다가 일어서는데 그 모습이 하두 좋아 다시 앉아 보게 하였다. 하회마을도 아름답지만 모자간의 다정한 모습은 그에 못지 않구나 생각해서다.

 

 

보라, 하회마을을.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 같지 않은가. 다음은 하회 마을이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 된 유래다.

 

-풍산 류씨(豊算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다. 그 7세 류종혜 공이 하회터가 너무 좋아 진산인 화산에 올라서 살피다가  지금 같니 하회에 풍산 류 씨가 세거(世居)하게 될 터를 잡았다.그 이전에 이곳에는 허 씨(許氏)와 안 씨(安氏)가 먼저 세거하고 있었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의 일부다. 이후 풍산 류 씨들이 입촌하여 살다가 입암 류중영(1515~1573)이 중종 무렵 과거 급제하여 관찰사에 이른 이후 그의 두 아들 겸암 류운룡과 특히 서애 류성룡이 영의정까지 올라 찬란한 풍산 류 씨의 시대를 열자 차즘 허 씨와 안 씨가 떠나서 오늘날 같은 풍산 류시의 집성촌이 된 것이다

.

 

위 하회마을 안내도를 보며 굽어 보는 몇 개나마 말해 보자. 우리가 있는 곳은 지도의 우상단 강건너 절벽지대다.

거기서 강건너 마주 보이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만송정(萬松亭,천연기념물 제473호)이다.

 -위에서 말한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그 좌측 이 마을 중심부에 '삼신당 신목(수령 600년보호수 느티나무)'이 있다. '삼신'이란 아이를 점지해 주고 해산을 맡은 신목(神木)으로 이곳이 하회 탈출의 중요한 무대가 되는 곳으로 여기 있는 한옥들이나 초가집들은 남향을 하지 않고 강을 향하여 문을 내고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간고등어에 안동소주 한 잔 기울일 시간을 남기느라 시간에 쫓겨 서둘다 보니 아차!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를 잊었구나.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인데-.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는 하회마을을 가장 잘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라는데. 거기 쓰여 있는 현판 글씨가  스승 퇴계 이황으로 받은 글씨라는데.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을 지나친 아쉬움은 깊기만 하다. 강을 건너 운치 있게 간고등어 집을 향하고 있는데 먹거리 장터 부근에 있는    '하회 세계 탈박물관'이 옷깃을 잡는다.

 

간고등어와 안동소주 대신에 탈이 된 것은 물론이다.그러나 여자 스커트나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는데 어찌 내가 여기서 장황한 이야기를 하랴. 하여 일화 한 토막 처용 이야기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마누라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아아, 이를 빼앗겼으니 어지 할까?"

 

 하는 노래를 부르며 처용(處容)은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한 놈은 병을 옮겨주는 역신(疫神)이었다.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움에 감격하여 다시는 처용이 나타나는 곳에는 가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병든 자 있을 때 처용이 나타나면 병을 옮겨 주은 역신이 도망가는 바람에 병이 낫곤 했다. 처용이 죽자 처용의 탈을 쓴 처용무(處容舞)가 생겨나고 래서 병이 든 것을 우리들은 '탈 났다고' 한다. 탈을 써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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