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낙안읍성 이야기

ilman 2013. 7. 5. 11:12

낙안읍성(樂安邑城) 이야기

 

 

 읍성(邑城)이란 한 읍(邑) 전체를 둘러싼 성(城)으로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그 읍성이 15 곳이나 있는데 고창, 경주, 거제, 낙안, 동래, 보령, 언양, 진도, 청도 등 바닷가의 읍(邑)에 주로 있는 것을 보면 왜구(倭寇)로부터 군현(郡縣)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틀림없다.

왜, 왜놈들은 이렇게 우리나라를 수없이 괴롭혀 온 것일까. 일본과 같은 나쁜 이웃을 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 이웃 나라 일본(日本)은 산(山)이 많은 나라다.

산악국가인 스위스는 국토의 26%만이 평야인데, 일본은 그 평야가 20%뿐인데다가 인구는 한국의 2배 이상이나 많은 나라여서 농토가 절대 부족하여 자고(自古)로 농산물을 자급자족(自給自足)을 할 수 없는 나라였다.

그래서 역사 이래 수 없는 왜구(倭寇)들이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까지 진출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왔고, 그때 그들이 노린 것이 주로 식량(食量)이었던 것이다.

왜구(倭구)가 무슨 뜻인지 아는가. 일본 '倭', 도둑 '寇' 자로 우리나라와 중국 근해를 항해하며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海敵)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다음 통계는 이 사람이 일본에 가면서 강원대학 손상철 역사학 교수에게 들은 고려 시대의 왜구들의 만행이다.

-출동 규모: 2~3척에서 500여 척(1만여 명) -고려말(1350~1392년): 495회 침입 -침입대상지역: 도서, 해안지방은 물론, 강을 타고 내륙 깊숙히 -약탈 대상: 식량(조창 습격), 가축, 사람 납치(부녀자, 아이 등 3만명), 관청 습격 -문화재 약탈: 고려종 50여 개, 불화 95점, 불상 80여구 등. -잔혹상: 서너살 짜리 여자 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읍성 중에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읍성(邑城)으로, 그 성 내에서도 지금도 주민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읍성이 낙안읍성이다.

 

*. 낙안읍성/순천시

KCCA 회원과 함께 ‘순천세계정원박람회’ 촬영 여행을떠나 순천을 가는 길에 제일 처음 들린 곳이 낙안읍성이다.

성이란 대개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에 자리하는 법인데 낙안읍성은 들판 한가운데인 평지 낙안면에 위치한 동서 방향으로 긴 네모꼴로 쌓은 성이다.

낙안읍성(사적302호)은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동내리, 서내리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 읍성으로서 둘레가 1,385m,  높이가 4m인 성으로 현재까지 성벽과 동,서,남 문지(門祉)와 옹성 등의 시설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옹성(擁城)이란 성(城)에서 외부 적을 치기 위해서 성문 바로 밖에 반달 모양으로 쌓아놓은 성을 말한다. 

고려 말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므로 조선 태조 때 토성으로 쌓은 것을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군수로 재직하면서 석성(石城)을 완성하여 개축한 것이 낙안읍성이다.

 

*. 성문 이야기

낙안읍성에는 동, 서, 남에 3개의 성문을 두고 있는데 우리는 그 중 치성이 있는 동문(東門)을 통하여 입장한다.

그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이 동산으로 그 쪽에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군사를지휘하던 장대가 있었다.

 

이 성곽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도끼처럼 생겼다 해서 풍수지리학적 용어로 '금부형(金斧形)'이라 한다. 
그 도끼 날은 동쪽을 향하였고, 도끼 뿔은 서북의 대밭이 되며, 도끼자루는 남문 쪽 골목길이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도끼로 왜구의 목을 치는 형국이라는 것이 풍수학의 설명이다

.

 

그 동문(東門)에서 관아(官衙)까지 가는 길가 주변 길에는 옛날처럼 저자 거리가 있어 잡화점도 있고 주막도 있고 대장간도 있다.

 

*, 임령업장군 선정비

 

좌측에 비각이 있어 보니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 선정 비각(도지정 문화제)'이다.

병자 호란 무렵 낙안군수 때 큰공을 세우며 선정하던 임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곳 군민(郡民)이 세운 비였다. 

 임경업 장군은 난세의 충신이요, 세상과 타협을 거부하고 살다가 김자점 등의 모함으로 불행히 형장에서 숨진 비극의 영웅이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에 청나라가 쳐들어왔으나 무장으로서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한 불행한 영웅이었다.

비극적 인생을 산 영웅이어서 최영 장군처럼 임경업 장군도 무당이 받드는 무속에서 신(神)으로 등장한다.  다음은 임장군에 대한 전설이다.

 
  장군이 젊은 시절 태백산에 사냥을 가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검술이 신통한 한 나뭇군을 만났다. 그는 자기 아내를 농락한 세 남자를 검술로 죽이는 장면을 보여 준 뒤, 임 장군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뒷날 반듯이 검술을 쓸 날이 있을 것이라 하면서         

                                                                   

 
*. 노거수(老巨樹)

 

 이 읍성에서 그냥 지나쳐서 안되는 것에 노거수(老巨樹)다.

노거수(老巨樹)란  2~300년 이상이 넘는 수령의 큰나무를 말한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이 고장의 지나간 슬픈 역사를 지켜 본 고령의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거수를 보려면 객사 뒤편 성벽을 따라 150m를 가면 10여 주의 노거수가 한 줄로 서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낙민루 앞 은행나무는 높이 10.2m에 수령이 400년이나 되는 노거수이다.    

 

*. 낙민루(樂民樓)
낙안읍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락은 낙민루다.
백성과 더불어 즐기는 낙민루(樂民樓)라니 그 이름도 그 모습처럼 아름답다. 누를 올라가는 돌층계는 뒤에 있고 누 위에는 커다란 북이 있고 그 앞에 커다란 노거수 은행나무가 그 멋을 더해 주고 있다.

낙민루는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名樓)의 하나라서 백성들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한 나눈 누각이지만 안타깝게도 6.25에 불탄 것을 근래에 17평의 8각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낙안읍성 객사(客舍 도지정 문화제)란  관사나 객관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고을에 내려오는 사신들이나 귀빈들을 영접하고 머물게 하는 곳이다.

중앙마루를 정당(正堂)이라고 하며 그 마루 안쪽에 '殿'자를 새긴 전패(殿牌)를 모셔 놓고 매월 삭망(朔望)에는 군수 이하 관속들이 나라님 계신 조정을 향하여 향망궐배(向望闕拜)하였다. 그 좌우에 방이 있어 동쪽 방에는 문관이 서쪽 방에는 무관이 사용하  

 

                                                                         도록 하였다.

 

 

 

 

 

 

동헌(東軒)은 사무당(使無堂)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왕조 때 지방 관청으로으로 원님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이다. 

 

 

 

 

 

 

 

 

 

 

 

 

동헌 서쪽에 있는 집은 지방 수령의 생활처소로 내아(內衙 또는 西軒)가 있다. 그 내아의 동편에 위치하여 있다 하여  동헌(東軒)이라 하는 것이다.

그 앞에 곤장을 맞기 위해 볼기를 들어내고 있는 죄인이 안스러워서인가 맞추어 오는 비가 고통스런 죄인의 얼굴을 모자이크 해주고 있다.

 

낙안읍성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낙민루 뒤에 있는 '낙안관 자료전시관'에 가 보았더니, 옛날에 주민들의 생활 모습, 그 기구, 돌, 혼인, 장례 모습까지 역사적 자료 일체를 전시해 놓았다.

 

 

 

 

 *. 성을 거닐며

낙안읍성 구경의 백미(白眉)는 성터길을 걸으면서 자기가 다녀온 성 내의 동헌, 관아, 초가집 등을 살피는 일이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계획도시인 낙안읍성은 지금도 120세대 288명이 직접 농사 짓고, 민박하며 사는 223㎡

 크기의 Korea의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성곽1,410m와 중요민속 가옥 9동이 국가지정 문화재요, 객사, 노거수 13주와 임경업 장군의 비각은 도지정 문화재다.

낙안읍성은 마을 전체가 국내 최초로 우리나라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세계적인 명승지다. 이곳은 'CNN 선정 Korea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내가 만약 건축학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급어 보고만 가는 저곳에 살펴 보고 갈 곳이 많았을 것이다.

곽영두 가옥(민속자료 제100호, 남문 서쪽), 김대자 가옥(중요민속자료 제96호, 동문서문 잇는 중앙대로 서쪽 초가), 박위준 가옥(민속자료 92호,사옥터에 위치한 ㄱ 자형의 향리집) 등등이 무엇이 어떻게 각각 다르고 현대 집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를 살폈을 것이다.

  그보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일본이나 서구에서는 전쟁이 나면 삼국지에서 보는 전쟁 장면처럼 들판에 나가서 군인들끼리 서로 싸워 승패를 가르기 때문에 백성들의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백성들을 다 성 안에 불러 모아 함께 싸우기 때문에 적에게 패한다는 것은 백성까지 모두 몰살 당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니 왜구가 왜족이 한없이 미워진다.

얼마나 많은 우리 백성들이 왜구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죽어갔을까?
일본 여행을 가서 보니 전승기념으로 한국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다가 코무덤 귀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분개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나라가 약소국이어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치욕이었다.

 이제 서둘러 우리는 순천만을 향하고 있다.

순천만에 가서 만사 제폐하고라도 용산에 올라가 못보고 와 벼르기만 하던  순천만의 생태갯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겠거니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허나 반갑지 않은 궂은비가 순천만을 향하는 버스 창가를 적시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