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유달산(儒達山) 답사기

ilman 2013. 6. 28. 10:20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에 들렀다가 먼 남도(南道)까지 왔던 김에 항상 벼르며 살던 추자도(楸子島)가 보고 싶어 완도(莞島)를 가려  박람회 임시시외버스매표소에서 갔더니, 완도행 버스비가 목포 버스차비의 두 배인데다가 시간은 3배 걸린다는데 버스마저 자주 있지 않았다.

하여 1시간 거리라는 목포(木浦)에 왔더니 어렵쇼. 지긍은 오후 3시 반인데 추자도 배편은 내일 오후 2시에나 있다 한다.

여행객에게는 피같이 중요한 게 시간과 자금(資金)이다. 백수(白壽)의 처지라서 시간은 부자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지박 사정이라 반듯이 타협해야 했다.

식사와 잠자리는 물론 초행길이라서 이동수단을 택시로 잡는다면 돈을 물쓰듯이 쓰고 다닐 수밖에 없다. 

내일 2시까지 무얼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낸다?

산(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하릴없어 소일할 겸해서 유달산(儒達山)을 찾았다.
서울 근교 산과는 달리 유달산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여행객들로 한결같이 나와 같이 찜질방 이용객들이다.


*. 노적봉(露積峰) 이야기
 

여행을 왔거나 산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관광지나 유원지 입구나 들머리에서 관광안내나 자료를  구하지 않고 입장을 서두르는 것이다. 

유달산 안내소를 찾아서 친절한 안내원에게 이것 저것을 구하고 그 옆의 노적봉을 우선 찾았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 놓아 큰 노적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술이 전해 오는 해발 60m의 바위산이다.

그런데 왼쪽 그림을 왼쪽으로 돌려 보자. 이마, 코, 입 턱이 사람의 얼굴 같지 않은가. 그래서 이곳 사는 분들은 노적봉을 나다니엘 호돈의 '큰바위얼굴'이라고도 말하고 있다.그 우측으로 빙 돌아 올라가니 커다란 광장이 나타나고 거기에 멋진 종각이 있다. '새천년 시민종각'이었다. 새천년인 21세기를 맞아 목포 시민의 소망을 담아 희망과 영광의 새천년을 기리는 종각으로, 그 현판은 이 고장 출신인 목포인이 존경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다.그 부근이 '목포 기상대'가 있던자리고  구 MBC 방송국이 있던 자리도 그 근처였다.

 -80년대 일어난 5. 18 민주항쟁하던 당시의 시민군과 시위대를 MBC가 폭도로 방송하자 분노한 목포시민들이 습격하여 방화해 버린 구MBC 방송국 자리다. 광장을 돌아 큰길로 내려 오다 보니 기묘하게 생긴 느티나무가 있어 얼굴을 붉히게 한다.

-이 느티나무는 150년 넘은 어미나무의 뿌리에서 싻이 나와 성장한 나무로 여자나무(女人木), 다산목(多山木)으로 부르며 인근 주민들은 이 나무가 다산(多山)을 이루게 한다는 믿음의 대상이다. 그 영향이었는가. 이 인근 지역은 다른 곳보다 유난히 출산율이 높다고 한다.

*. 유달산 이야기 

  유달산은 해발 228m의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첩첩함으로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니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오르면  다도해와 목포항의 전경이 한 폭의 동양화로 우리 눈아래 들어 온다.

 유달산을 왜 한자로 '儒達山'이라 썼을까?

문헌을 뒤져 보면 유달산 한자는 '鍮 達 山, 楡 達 山, 諭達山, 鍮達山' 등으로  그 중에 '鍮達山'(유달산)이 제일 많이 쓰였다.

유달산의 '유' 자를 놋쇠 '鍮(유)'자로 쓴 것은 아침 햇살을 받으면 놋쇠가 산에 흐른 것 같아서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오늘의 '유달산(

儒達山)'에는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하여 온다. 

 

 

-구한말 무정 정만조(戊亭 鄭萬朝)란 문신이 경복궁 화재사건과 명성황후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완용 등 권신들의 모함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었을 때 무정이 목포에 자주 와서 유학(儒學)을 진작시켰다. 목포시사(木浦詩社, 지방문화재 21호) 등을 무정의 발의로 짓는 등 이 고장의 문운(文運)을 일으켜 주었는데 이 무렵 유달산(鍮達山)의 ‘鍮’자를‘儒’자로 고친 것 같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유달산의‘鍮’자를 구태어 선비 '儒'(유) 자로 바꾸어 쓰게 한 것은 근처 무안읍에서 남쪽으로 10km 지점에 있는 '승달산(僧達山 해발 318m)'의 ‘僧’자를 의식하고 배불승유(排佛僧儒)의 사상으로 인하여 '儒’자를 썼을 것이라 유추된다.  .

*.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이야기
  

  이순신 동상을 지나니 오포대(午砲臺, 지방문화재 제138호)가 나타난다. 午(오)는  정오(正午)의 준말일 것이니 낮 12시를 알리는 신호로 쏘던 대포 포다.

내 젊어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정오(正午)에 소방소에서 사이렌이 울렸는데 이를 목포에서는 데포(大砲)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후 사이렌으로 대체하였지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 드는데

부두에 새아씨 아롱지 옷자락이 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은 와세다 대학 출신의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이 1935년 '조선일보'가 OK레코드사와 함께 신민요 노랫말 공모에 '목포사랑'이란 제목으로 1등 당선한 가사이다.

 이것을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입혀 당시 18세의 소녀 이난영(李蘭影)이 불러 대해트한 불후의 대중가요다.
토르토의 이 노래는 일본식의 엔가풍(演歌風)의 노래여서 일인들도 즐겨 부르던 대중가요였다.

목포시는 작사자와 가창자가 모두 목포 사람이어서 유달산 중턱에  한국 최초의 노래비를 세워 가왕(歌王) 이난영을 기리고 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鼻音)에다가 노래의 곡이 제목 처럼 서글퍼서인가. 이난영의 일생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난영은 22살에 당시 천재적 가수겸 작곡사였던 김해송과 결혼한 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남편 김해송이 실종되어 홀로 살다가 43세에 동료 가수 남인수와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았으나 남인수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그후 도미(渡美)하여 딸들인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50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사망했다.

 

*. 일등봉 가는 길의 정자와 바위들  

 산악인 김장호(金장호)  시인은 그의 저서 '韓國百名山記'에 명산(名山)의 조건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명산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위치, 모양, 품격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한다고.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경승지라고 말하여 왔다.

유달산은 그 한반도 남서쪽에 기기괴괴한 바위들 거느리고 우뚝히 서서 다도해를 굽어 보며 있는 산으로, 228m 산 치고는 그 우람한 모습이나 품격으로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이라 칭하기에 부끄럽이 없는 명산이다. 

이런  산을 소유한 목포 사람들은 다른 고장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렇듯 산 좋은 곳에 정자도 많다.

계곡이 깊지 않아서 물은 없으나 곳곳마다 식수대에서는 수도 꼭지만 들어도 물이 콸괄나온다.정자란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 있어 사방을 둘러볼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지은집이다.

그 정자가 대학루(待鶴樓), 유선각(儒仙閣), 관운각,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니 어찌 유달산을 명산과 경승지라 아니하겠는가. 

 

그뿐인가 가는 길에 기묘한 바위가 줄을 잊는다.

노적봉, 투구바위, 고래바위, 종바위, 애기바위, 낚시바위, 나막신 바위 입석바위, 마당바위 등등. 

나는 오늘 아침 순천만 용산 전망대에 올라 갯벌사이  S자로 흐르는 바닷물과 수많은 원을 만들고 있는 갈대 밭을 굽어보았더니, 오늘 저녁은 일등바위에 올라 유달산의 진면목을 보고 있으니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헌데 그 바위에 근심 걱정이 가득한 사람 하나 커다란 우산을 들고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어디서 왔냐 물으니 못 알아듣는 말로 어눌하게 더둠 거리더니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신분증은 장애자란 글이 있는 것을 복사한 것이다. 63세의 영등포에서 온 걸인 같았는데 제주도로 가는 길이라 했다.

밥을 못 먹은 것 같아 가방 속 준비해온 간식을 요기하라 꺼내 주니 거침없이 맛있게 받아 먹는 모습이 며칠을 굶은 것 같다. 오늘은 어디서 잘 것이냐고 물었더니 일등바위를 가르킨다.

하산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가 오지 않는데 그가 갖고 있던 우산은 탠트용으로 쓰고 자는 우산 같았다.

그렇게 어려운 그를 보니 무리해서 추자도를 꼭 가야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저녁이 벌써 밤으로 향하는 시간이어서 저 멀리 고하도와 다리가 불을 켜고 밤을 맞고 있다.

 

 고하도(高下島)는 유달산 아래의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로  보화도(寶化島), 고하도(高霞島) 또는 칼섬이라고 부르는 목포항의 관문이 되는 섬이다. 그 모습이 반달모양으로 목포를 감싸 안은 모습이다.
맨 오른쪽이 용머리요 저 다리가  2012년 국도 제1호선이라는 자동차 전용 다리로 목포 외항과 서해안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대교(木浦大橋)였다. 

 

하산하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순천을 다녀오느라 쓰고 남은 여행 경비는 절대가 부족한데 카드를 쓰게 되면 7월 보내는 것이 난감하다. 그래도 여정(旅情)은 추자도를 강행하고 싶다. 

유달산 아래가 바로 목포역이라서 역에 가서 서울 가는 KTX가 있으면 서울로 향하고 아니면 무리를 하자 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나를 유혹하는 '빛의 거리'를 지나며 -.

여기는 기차가 다시 더 남으로는 갈 수 없어 북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는 목포역이다.
비싼 차비 들여 목포에 왔으니 KTX가 없을 시간일 것 같으니 하루 저녁 자면서 목포의 오미(五味)라는  세발낙지,홍탁삼합, 꽃게무침이나 꽃게장, 민어회, 칼치조림을 먹고 가고 싶다.

그런데 그런데 0시 32분에 용산에 도착한다는 차표를 귾을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내가 내가 묻는다. 너는 어떻게 할레? 추자도 갈 여비는 부족하지만 '목포 5미'를 먹고 갈 여유는 있지 않은가.

 

여행을 끝내도 남는 아쉬움들

노름처럼 옷깃을 부여잡는 미련아  

                                                       허기진저 아름다움에

                                                       돌아보고 

                                                       뒤 돌아 보네 

                                                                        -허기진 아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