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라산역(都羅山驛) 이야기/ ilman의 판문접 여행
도리산역/ 도리산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역이 파주 민통선 안에 있는 도라산역(都羅山驛)이다.
북한에서는 가장 남쪽에 있는 역은 판문역(板門驛)이다. 개성공단 화물을 위한 역으로 우리 측에서 자재를 지원하여 지어 준 역이다.
도라산은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에서 700여m 떨어진 최북단에 있는 역이다.
이 도라산역의 이름은 해발 156m의 도라산(都羅山)에서 역 이름을 따왔다.
건물의 모양은 손에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지붕의 태극무늬는 남북통일의 연결고리를 상징하였다.
우리는 '도라산!' 하면 북녁땅을 바라볼 수 있는 도라산 전망대나 땅굴을 연상하지만 도라산이란 이름 속에는 신라의 경순왕의 망국(亡國)의 설음에 관한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 56대 경순왕(敬順王)은 후백제 견훤의 도움으로 등극하였으나 국력이 쇠잔하여 후백제의 침략으로부터 도저히 나라를 지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기 879년(경순왕 10년) 경순왕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고 군신들을 이끌고 고려 수도 개성(開城)까지 와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에 왕건은 자기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주어 경순왕을 부마(駙馬)로 삼아 위로하였다.
낙랑공주는 나라를 잃고 시름에 쌓인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이 산 중턱에 암자를 지어 주었더니 경순왕은 조석으로 이곳에 올라 도읍('都'邑)이었던 신라(新'羅')를 바라보며 망국의 애통한 눈물을 흘렸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 산 이름을 ‘도라산(都羅山)’이라 하였다.
경순왕은 천년을 넘어선 옛날 망국의 슬픔 어린 눈으로 신라의 도읍지 경주를 눈물로 보았다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분단의 슬픔으로 북녘을 우러르고 있다.
그 도라산역 내에서 본 다음과 같은 글귀가 우리들의 마음을 때리고 있었다.
남쪽의 마지막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 ‘
'오늘 우리는 보았다. 녹슨 철마가 56년만에 부활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싶다. 철마가 대륙을 향해 달려 나가는 모습을 '
'2007년 5월 17일 남북열차 시험운행 하던 날'
도라산 지킴이들
남북은 2000년 북한 3대 경제 협력 사업의 남북공동선언에 의거 서울과 신의주선인 경의선 연결공사를 위해 임진각역에서 도라산역, 도라산역에서 개성까지 연결식을 갖고
드디어 2007년 5월 17일 문산-개성의 시험 운행을 하였더니 개성까지는 15분 거리였다. 우리는 그때 통일이 오는 듯 희망하였으나 북한 측의 생트집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를 위해서 새로 신설되는 경의선 노선에 사용할 침목을 기증한 우리 한국 분들의 명단 앞에 서니 동참하지 못한 내가 왜 이리 부끄러워 지는가.
그 공동선언이 오늘날까지 실현되었다면 경의선은 물론 유라시아까지 물류를 수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해양을 이용하면 뱃길로 1달 이상 걸리던 길이 그 1/3인 15일, 물류 운임도 1/3 로 줄어들 것이다.
유라시아란 'Europe and Asia'로 극동 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한 대륙으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 도라산 전망대
도라산 전망대에 오니 우측에 평화의 종각(鐘閣)이 있다.
그 1층에는 불상을 모시고 한국전쟁에서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다 산화한 호국영령을 기원하고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전진평화사(前進平和寺)란 절이 있다. 그러나 그 범종각의 종은 정전협정으로 울리지 못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도라산역(都羅山驛)은 경의선(京義線)을 넘어 유라시아(Eurasia)로 통하는 철길이지만 승객이 원해도 떠날 수 없는 Korea의 안보 1번지 (安保1番地) 종착역(終着驛).어느 때부터일까 북으로 향하는 첫번째 역이 될 날은?
도라산 전진평화사(前進平和寺) 범종각(梵鐘閣)에는안으로 안으로만 슬픔을 씹으며 울릴 날을 기다리는 울리지 못하는 종(鐘) 이 있다.
어느 날일까
조국 위해 산화하신 젊은 영령(靈靈)을 위해보은(報恩)의 까치처럼 우리들 머리가 부숴지도록 그 종을 울려볼 그날은?
- 울리지 않는 종
도라산 전망대에서는 전망대 내부는 물론 북을 향한 모든 곳이 촬영 금지구역이었다.
전망대 밖 망원경 뒤 노란 선이 촬영가능한 비전이 될 뿐이다. 북한 쪽보다 북한을 향한 우리들 OP들의 안보를 위함인 것 같다.
우리는 그 전망대에서 그 뒤 송악산 아래 개성공단과 군사분계선 등을 굽어 보며 비무장지대와 공동경비구역 그리고 휴전선 소개를 듣고 있다. 휴전 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북한군 18,00명과 한국으로 돌아온 8,200명의 포로교환 등의 이야기였다.
*. 6. 25 이야기
위 지도('세대공감 6.25 &미래들': 국방부)의 번호 따라 6.25 이야기를 전개 하려 한다.
(1) 북한군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인 1950년 6월 25일(일요일) 모두가 잠들어 있던 새벽 4시에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하여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여 버렸다.
당시 인천에서 살던 나는 시내에 나가 보니 배다리 파출소 앞 태극기는 총탄에 숭숭 뚫려 있었고, 모두가 겁에 질려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빈 집들의 집기를 훔쳐 가는 인천 시민이 많았다.
(2) 당시 우리 국군의 군사 장비는 공군은 연습기, 연락기가 22대/북한: 전투기와 폭격기 211대, 우리의 해군은 전투함 등 28척/ 북한: 30척, 우리의 육군은 장갑차 24대/ 북한: 장갑차 54대, 전차 242대 등 비교할 수 없는 군사장비였다.
당시 국군의 전투병마저 북한군은 우리의 배 이상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낙동강 이남까지 밀려서 국운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였다.
이때 미국을 비롯한 UN은 6월 28일 북한군의 남침을 응징하기 위한 군사제재 결의안을 채택하고 국군은 물론 학생들과 해외동포가 참가 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있었다.
당시 UN군으로 한국에 파병한 나라는 16개국, 물자 지원국이 41개국에 달하였으니 세계 68%가 우리의 우방이 되어 우리를 도운 것이다.
(3)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함포 사격으로 북한군의 진지 월미도를 초토화시켰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는데 이때부터 북한군은 전진에서 후퇴로 전략을 바꾸게 되었다.
(4) 국군과 UN군은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태국기를 날리며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환하고 백두산 아래 혜산진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때 압록강 초산까지 진출한 국군은 수통에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고 있었다.
(5)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난데 없는 중공군의 참전에 그 두려운 인해전술로 말미암아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는 바람에 우리 가족도 남들처럼 1.4 후퇴 피난으로 아버지의 고향 논산 노성으로 피난 갈 수밖에 없었다.
(6) 한국 전쟁이 한창인 무렵 UN군과 북한은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때 고1이었던 우리들은 이를 반대하는 정부 시책에 따라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과 함께 체코 폴랜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머물고 있던 월미도 제방 입구에 모여 체코 폴랜드는 물러가라며 휴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375회 이상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남북이 38 선 대신 휴전선(休戰線)으로 분단된 조국을 오늘처럼 살게 되었다.
김일성에 의한 6.25의 깊은 상처는 300만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1,000만명의 이산 가족, 수많은 상이군인과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를 잔국토가 초토화 된 속에 허무한 골육상쟁의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
이 휴전이 시작되면서 한국은 1953년 10월 1일 한미동맹이 탄생되었지만, 북한은 이 날을 '전승의 날'로 요란하게 기념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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