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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逍遙山) 산행기

ilman 2013. 10. 23. 08:25

소요산(逍遙山) 산행기
                                
(2004. 9.17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동 소요산/나 홀로)

*. 왜 소요산이라 했을까
 
슬슬 거닐어 돌아다니는 산책을 '소요(逍遙)'라고 하니까 소요산은 산책할 정도로 높지 않은 산이란 말인 것 같은데 또 다른 어원의 유래는 없는가?
  흔히 말하기를 화담 서경덕(徐敬德)과 봉화 양사언(楊士彦)과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이 산을 좋아해서 늘 찾아와 소요했대서 소요산이라 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문헌에 나타나는 '소요산(逍遙山)'란 이름이 고려 광종 때도 나오는 것을 보면 앞서 말한 분들은 조선 때 분들이라서 그런 분들이 자주 찾아와서 소요했다는 말로 고쳐야 될 것 같다. 그분들처럼 나도 오늘 하루를 소요산에서 소요(逍遙) 해 보기로 하자.


소요산 일주문(一柱門)에는 '京幾小金剛'이라는 현판이 있다. 소요산을 한강 북쪽의 소금강이라는 말인데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답다는 말인가.
산이 아름다운 것은 산세도 그렇지만 무성한 숲과 어울린 바위와 깊은 계곡과 거기에 있는 폭포와 사계절 따라 변화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쇼산은 그 모든 것을 다 갖추어 가진 산이란 말일 것이다.
  봄에는 소요산의 진달래와 철쭉이 유명하듯이, 가을에는 소요산 단풍을 경기도에서는 으뜸으로 친다.

여름에는 하늘을 가리는 무성한 숲과 계곡이 그렇고, 그 계곡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유명한 폭포  원효(元曉瀑布), 청량 폭고(淸凉瀑布)가 있다. 게다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전설과 함께 전하여 오고 있고 그 결실이 신라 십현(新羅十賢)의 한 분인 대유학자 설총(薛聰)이 있다.
그래서 소요산은 국민 관광지로, 도립공원의 하나로 지정하여 동두천(東豆川市)의 자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 요석 공주(瑤石公主)의 사랑

소요산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오벨리스크(Oelisk) 모양으로 우뚝 서 있는 '반공 희생자 위령탑(反共犧牲者 慰靈塔')을 막 지나니 길 가에 요석 공원(瑤石公園)이 있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한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부인으로 설총을 낳은 무열왕의 둘째 딸이다. 무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춘추다.
무열왕의 둘째 딸로 일찍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몸으로 서라벌 요석궁에서 살고 있었다.
이 무렵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나이 30대 초반의 원효라는 스님이 있었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하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왕이 그 노래를 듣고 '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이로구나. 신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하고 개천에 빠져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원효를 요석공주가 있는 요석궁으로 불러 공주에게 말리게 하여 자연스럽게 짝을 지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낳은 이가 경주 설 씨의 시조 설총(薛聰)이다. 아버지 원효의 속성이 설 씨(薛氏)였던 것이다.
파계승(破戒僧)이 된 원효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고 '무애(無碍)'라 하는 표주박을 두 드리면서,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무애 춤(無碍舞)을 추면서, 가난하고 몽매한 서민에는 물론 어린이들에게까지 널리 부처를 알게 하여 오늘날까지 '민중불교(民衆佛敎)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 후 38세에 이 소요산에 들어 원효대에서 참선을 하며 도를 깨우칠 때였다.
 요석공주는 어린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소요산 기슭에 자그마한 요석궁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낭군 계신 원효대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 이야기는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를 서동요(薯童謠)라는 노래로 꼬셔서 아내로 삼았다는 것과 절묘하게도 과정이 비슷하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황태자의 사랑 이상으로 멋진 사랑이 있었구나.

  일주문을 지나 왼쪽의 수량이 유난히 풍부한 약수터를 막지나면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효대가 있고 거기 '원효폭포'가 있어 소요산을 찾은 사람들을 반겨 주고 있다.
거기서 속리교(俗離橋)로 넘어서면 우리는 속세를 버리고 선경에 들어서게 된다. 왼쪽 층계 길로 올라 300m 가면 자재암이 있고 , '자연보호 헌장비' 있는 우측으로 가면 공주봉(公主峰)이다. 나는 4시간이라는 소요산 종주 코스인 공주봉을 향하고 있다. 한적한 길이고 공주봉은 내게는 초행길이기 때문이다.

얼마를 오르니 구 절터가 보인다. 긴 의자 둥근 의자와 기둥으로만 만든 멋진 쉼터가 가을 아침에 싱그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지난 여름 그렇게 극성이던 매미소리도 그친 지 오래였다.
평생 한 번 세수도 하지 않은 풀잎이나 나뭇잎들이 어떻게 저리 깨끗할 수가 있을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풀잎마다 작은 털이 소복이 있어서 먼지를 잎에 닿지 못하게 하고 아침마다 이슬로 깨끗이 씻어내는 거란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아침에 굳게 박힌 쇠말뚝에 매인 흰 밧줄에 거기에 통나무로 정성껏 만들어 놓은 층계 길 따라서 나는 환상적인 등산을 하고 있다.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이런 순간에는 모든 것이 나만을 위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정상 가까이 토치카가 보이더니 드디어 526m의 공주봉(公主峰)이다. 동두천시가 한 눈에 보이는 산마루는 가을꽃 구절초가 한창인 평평한 헬기장이었다. 일주문에서 1.0km 왔고, 가야 할 의상대(義湘臺)까지는 1.0km인데 그 모습이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산에 와서 목표하던 하나의 봉에 선다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났구나 하고 생각하던 시절 같이, 고생에서 벗어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리 선선한 가을이라도 여기까지 이르게 되기에는 땀 흘려 전력을 다한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조금씩만 땀을 더하면서 등산의 즐거운 열매를 따 먹으며 가면 되는 거다.

*. 왜 원효대(元曉臺) 아닌 의상대(義湘臺)일까


소요산에서 최고봉인 587m의 의상대의 정상에는 표지석과 함께 Ham 안테나가 서 있고 화강암 정상 표지석이 있는 암반이었다.
이 정상에서 자재암(自在庵)을 향하여 서서, 두 손을 활짝 펴면 왼손 끝이 공주봉이요, 오른손이 나한암(羅漢岩), 상백운대로 이어지다가 아래로 중 백운대, 하백운대로 내려간다. 이 바위들은 석영 암반으로 암벽이 산 능선을 이루며 병풍처럼 저 아래 자재암을 향하여 성벽 같이 둘러싸고 있는데 앞은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져 가지만 뒤로는 가파른 절벽 길로 천혜의 요새와 같다. 한 마디로 일주문이 하나의 주머니의 입이라면 이 산을 둘러싼 봉들은 주머니의 불룩한 부분의 일부 일부가 된 형국이다.
 그런데 이 봉의 이름에 의문이 간다. 소요산은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전설이 어린 곳이다.
공주봉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서 이 봉은 의상대보다는 원효대란 이름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왜 의상대란 말인가. 원효가 살아있다면 통곡할 일이다. 자재암이 당대의 고승인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함께 모신 곳이라고 해도 그렇다.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인생 나이로 보아도 원효보다 9살 후배였다.
두 대사는 함께 두 번씩이나 당나라 유학을 꿈꿨으나 첫 번째는 둘이서 요동까지 갔다가 고구려 첩자로 오인하여 실패하고 돌아왔으나 두 번째로 다시 시도하여 의상대사는 10년 동안 중국에 가서 화엄(華嚴)을 배워 화엄종(華嚴宗)의 시조가 된 사람이다.
그는 70세에 입적한 원효보다 19년이나 더 살면서 88세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한국불교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진오, 지통, 표훈, 등 10 대덕 고승을 길러낸 사람이다. 원효가 도달하지 못한 모든 스님들이 부러워하는 경지에 후배인 의상이 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누가 썼는가. 논어와 맹자는 누가 썼는가. 제자가 쓰지 않았는가. 의상대사가 불교의 정도를 걸어온 사람이라면 이에 비하여 원효는 파계승에 지나지 않는 기승(奇僧)이었다. 그래서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이봉을 의상대라 이름 하였을 것이다.
맑은 날이면 북으로 한탄강이 보인다지만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라 보이지 않고, 서쪽에 있다는 감악산이 어느 산인지 지도가 없어 알 수가 없었다. 산이란 그냥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봉우리가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칼바위로 가는 길은 뾰죽뾰죽 기기괴괴한 바위들이 많은데 그 바위틈을 비집고 몇 백 년을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가가 꼬불꼬불 자란 것이 이름 그대로 낙락장송으로 바위와 어울려 한바탕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칼처럼 생긴 것이 칼바위려니 하고 바위를 찾아가다 보니 지나쳐 온 것 같다. 지도를 보니 칼바위는 그 능선 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선 아래쪽에 있었던 것이다.
 해발 571m의 '나한대(羅漢臺)'를 지난다. 표지 이정표가 있어 그렇지 그냥 지나칠 정도의 평범한 곳이었다. 나한(羅漢)이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보통은 부처의 제자를 말한다. 불제자들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의 경지의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 1.2km를 더 간 곳에 559 m의 상백운대'이정표를 지나면 530m의 봉이 있다. 여기서 직진하면 535.6m의 감투봉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이시랑고개를 넘어 신북온천이 나온다지만 자재암을 가기 위해서는 거기서 조금 내려가 있는 중뱅운대 하백운대으로 내려가야 한다.






중백운대와 하백운대는 내리막길이었지만 오늘 종일 걸어온 공주봉, 의상대, 나한봉과 상백운대를 노송 사이로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여기서부터는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어서 하백운대에서 그 멋진 전망에 취해서 일주문 입구에서 사 온 막걸리를 한 잔 마시려다 보니 병마개가 열려 있어서 아깝지만 그냥 버렸다. 남이 먹다 만 막걸리를 모아 판 장사꾼의 상혼에 내 몸을 맡기기 싫어서였다. 평생 술을 버리기는 처음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선녀탕 표지판이 보일 때마다 그리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계곡이 가까워지니 그 이정표가 있는데 어느 못난이가 그 이정표의 거리를 지워 놓았다. 지옥도 못갈 놈 같으니. 장난을 할 때가 따로 있지. 그렇게 할 일이 없던가.
그래도 계곡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가다보니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다.


*. 자재암(自在庵)의 전설
자재암은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개산한 암자다. 개산(開山)이라 함은 절을 처음으로 새우는 것을 말한다.

원효 어머니는 별똥 하나가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하였다. 만삭이 되어서 불지촌(佛支村)의 북쪽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산기가 있어 할 수 없이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서 가리고 거기서 원효를 나았다. 그때 오색 구림이 땅을 덮었다는데 이렇게 태어난 원효는 타고난 총명으로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소년 시절에는 화랑이었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40세 무렵에 설총을 낳았다. 파계승이 된 설총은 전국을 떠돌다가 소요산에 들어와 원효대에서 도를 깨우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비가 몹시 오는 날이었다. 약초를 캐는 한 여인이 비에 풍만한 젊은 여인의 몸에 착 달라 붙은 옷을 입고 하루 밤 유하기를 청하더니 밤늦도록 원효를 끈질기게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때 원효의 거절의 말은 이러하였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自在無碍"라. 마음이 생(生)한 즉 갖가지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滅)한 즉 온갖 법이 멸(滅)하는 것이니, 나는 마음에 막힘이나 거침이 없도다."
하고 유혹을 뿌리치니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물러갔다. 관세음보살이 일부러 젖은 몸매로 원효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원효가 감격하여 그 자리에 암자를 지으니 여기가 곧 그 자재암(自在庵)이다.

이와 같이 원효의 출생 과정이 ‘영웅 일생’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영웅 전설의 주인공들은 고귀한 혈통에서 태나고, 잉태나 출생이 비정상적이며,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기아(棄兒)가 되는 등의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예수도 석가도, 이야기 속의 홍길동도 다 그런 분들이기 때문이다.
  소요산에는 태조의 전설도 전해 오고 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주인공인 이태조가 어가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다가 소요산에 이르러 산으로 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곳에 왕궁 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이 소요산 남쪽에 있는 423m 천보산 기슭에 회암사가 있는데 이 절은 이태조의 왕사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절로 여기에도 그와 유사한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이 자재암을 유명하게 한 것 중에 또 하나는 1994년 암자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낙장 하나도 없는 완전한 '반야심경' 언해본을 발견한 것이다. 언해(諺解)란 번역 중에서 한문을 한글로 번역해 놓은 글을 말하는 것으로 국문학 고어 연구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소요산을 찾는 사람들은 자재암을 먼저 찾지만 법당보다는 나한굴과

그 계곡 건너에 흰 물줄기를 떨어뜨리고 있는 청량폭포를 잊지 못해 한다.
특히 나한전 입구에 있는 원효가 도를 닦을 때 저절로 솟아났다는 샘물은 최고의 물맛으로 이 물로 끓인 차는 차문화의 산실을 열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온다.


자재암에서 전망대를 겸한 최신식 나무 화장실을 지나 원효대 가는 길 우측에 있는 층계 위에 높이 있는 백운암은 언제나 굳게 닫친 것이 아마도 외부와 단절하고 참선(參禪)을 하는 곳인가 보다.

 남보다 두 배나 되는 8시간 이상을 소요해서 소요산을 소요하다가 어둠을 밟고 소요산역을 향한다.
여행을 더욱 여행답게 도와주는 것이 기차 여행이다. 역에는 언제나 광장이 있고 거기에는 짐을 놓고 기다리는 여객이 있다. 의정부역에서 신탄진행 열차는 매 20분에, 소요산역에서 의정부 가는 차는 매 40분마다 있다는데 '버스로는 2시간, 기차로는 30분'이란 말이 후회 없이 보낸 즐거운 하루를 뒤돌아보게 한다.

추석(秋夕)이 다가오고 있다. 소요산의 금년 단풍은 얼마나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