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歲暮)에/ 행복했던 ilman의 2010년
어제(2010년 음 11월 19일)는 우리 아버지 기일(忌日)이었습니다.
아들 직장은 서울과 멀어 제 손자 손녀(孫女孫子)와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상 앞에서 초등학교 1학년 손자가 축문(祝文)을 읽고, 손녀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춤을 추었으니 선친(先親)께서도 즐거우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날이 크는 손자손녀를 볼 때마다 내가 이렇게 늙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아내와 내가 헛되이 늙기만 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금년에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집 가족 납골묘(納骨墓)를 마련한 것입니다.
옛날 우리들 형제가 가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우선으로 한 일이 충남 대덕군 구즉면 아버지 어머님 묘소에 석물(石物)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상석(床石)과 비석(碑石) 그리고 망주석(望柱石)을 세워 놓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우리들의 한 풀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통이 너무 불편한 외지(外地)여서 자식인 우리조차 차일피하다가 찾아뵙지 못한 불효를 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가 지나고 자식들의 시대가 오면 성묘(省墓)를 가지 않을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후손이 선산(先山)을 찾아가지 않을 때 사람은 또한 번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금년에 우리 창녕(昌寧) 성씨(成氏) 우리 파 종중에서는 충북 옥천(沃川)에 선산(先山)을 구입하여 선조를 한 곳에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에 한 자리를 얻어 우리 조부모, 부모님을 이장(移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곳에 저의 후손이 오게 하는 것이 우리 형제도 거기에 함께 묻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둘레 석과 비석이 세워진 가묘(假墓)에 우리 형제 내외의 이름도 함께 넣어 비명(碑銘)에 새겼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충북 옥천(沃川)이 제2의 고향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언제가 옥천(沃川)에 들러서 ‘옥천 기행(沃川 紀行)’을 써볼 생각입니다.
금년은 제 아내가 건강한 칠순(七旬)을 맞는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1년 전부터 저는 커다란 돼지 저금통장을 하나 구해다가 푼돈을 저축을 하여 그것으로 아내의 칠순을 우리 가족끼리 조촐히 차렸습니다. 거기서 아들에게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읽게 하고 아내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몸이 약하여 둘째 아들을 찾아온 아내에게 형네 대신 치매와 중풍 든 가난한 우리 아버지를 모시게 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까지 모시게 한 감사와 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저 세상이 또 있다면 다시 부부(婦夫) 되고 싶다.
아내는 내가 되고, 당신은 남편 되어
녹발(綠髮)이
백발(白髮)이 되도록
우리로 살고 싶다.
잔소리 않는 아내 당신에게 되어주고
아내만 위해 사는 나의 남편 당신 되어
저 세상
부(夫婦)가 되어
지금처럼 살고 싶다.
-미안한 남편 ilman 성철용
아내의 칠순에 맞추어 지은 저의 저서 ‘국립공원 산행 Photo 에세이’ 모두(冒頭)에 실은 글입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저는 10여 년 이상 한국의 명산을 헤매면서 많은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의사의 말대로 제 몸이 남보다 심장이 약하여 자주자주 쉬어야 하는 몸인데다가, 칠순(七旬)이 훨씬 지난 고령(高齡)이라서 다른 산도 그렇지만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등은 단독으로만 그 종주가 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한국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가장 늦게 가는 기록 말입니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가보았더니 제 책이 매진(賣盡)된 모양입니다. 저에게도 직접 주문을 해 와서 제가 독자에게 부쳐 드린 서적만도 150권이 넘었습니다. 우체국에 드나들 때마다 저는 한없이 행복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처녀 출판인 ‘하루가 아름다원 질 때’(시문집)를 한 권도 팔아 보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자들의 반응으로 보아서 요번 책은 베스트셀러는 못되더라도 재판(再版)하면 많은 책이 팔릴 것 같은데 출판사에는 그런 계획도 여유도 없는 모양입니다. 제가 그 자금을 내어서라도 재판(再版)을 하고도 싶지만 그랬다가는 돈은 내가 내고 판매대금은 출판사로 돌아갈 것이니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국립공원(國立公園) 산행기’ 에 이어 그 시리즈로 ‘도립공원(道立公園) 산행기’ 라도 내서 그 한(恨)을 풀어 볼까 하지만 제 무릎이 그걸 허할지가 염려 됩니다. 내년에는 무릎 주사를 맞고서라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11월에는 아내와 함께 자식들이 5년 전부터 어머니 칠순을 위해 저축한 효도 자금으로 남태평양(南太平洋)의 섬나라 팔라우(Palau)를 다녀왔습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세계 최고의 청정바다라는 남태평양의 물속을 물안경을 쓰고 수영하면서 스노클링으로 1m가 넘는 조개, 유네스코가 지정한 수백만개의 독없는 해파리 떼를 만져 보며, 2차 대전 때 수몰된 군함과 비행기, 아름다운 산호에서 노니는 갖가지 열대어에게 식빵을 나누어 주며 행복하였습니다.
‘금년에는 산을 몇 군데나 다녀와서 글을 썼는가.' 헤아려 보니 예전과 달리 10여 편 정도입니다.
강원도 제왕산(帝王山, 840m),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1186.4m), 서산(瑞山)의 팔봉산(八峰山, 361.5m), 울산의 가지산(迦智山, 1,1186.4m), 운문산(雲門山, 1195m), 욕지도의 천왕산(天王山, 392m)과 연화봉(212m), 파주의 심학산(尋鶴山, 194m)과 북한산과 그 둘레길을 5~6번 다녔을 뿐입니다.
금년에 제가 쓴 글 중에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월간잡지 ‘실버愛’에 ‘십장생 이야기’를 연재한 것입니다.
덕분에 소나무, 대나무, 학, 거북이, 불로초 등에 대하여 남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년 세모 때만 해도 제가 쓴 글이 60여 편이 훨씬 넘었던 것이 이렇게 적은 것은 금년 들어 무릎 통증이 심해진 탓도 있지만 컴퓨터 동화상을 배우러 다녔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동화상(動畫像)은 디카로 찍은 사진을 움직이게 하면서 여러 가지 효과를 주어 다채롭게 꾸미는 것입니다. 물론 캠코더 촬영 편집도 포함됩니다
동화상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무비 메이커(Movie maker)나 플립 앨범(Flip album)를 위시해서 포토 스토리(Photo story), 포토 슬라이드(Photo slaid), 유리드(Ulead) 등인데 이를 통하면 결혼식을 위시한 각종 행사 사진, 가족 엘범 등에 움직임이나 효과와 음악을 넣어 만들 수 있는 기술입니다.
그 동화상의 전국 고수(高手)들이 오금동 주민자치센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아낌없이 각기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어 주어서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의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선비 ‘士’(사) 자는 ‘十’ +‘一’의 합성어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而知十)는 뜻이라는데, 저는 하나를 들어도 열은커녕 그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머리 탓일까요 나이 탓인가요? 배움은 시작이니 익히기만 하면 될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 공부하는 곳이 3호선 종점인 오금동(梧琴洞)이라서 시발점인 대화역(大華驛)에서 종점까지 오고 가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가는 바람에 이에 열중하느라 산(山)을 멀리하게도 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덕분에 남이 잘 모르는 하나의 동화상이란 분야의 기술을 장기(長技)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금년은 행운(幸運)이 뒤따른 행복한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세권이 아니라서 불편했던 우리 아파트 부근에 몇년 전 국제종합전시장 킨텍스가 생기더니, 금년 8월에는 아파트 건너편에 현대백화점과 삼성의 홈플러스가 들어선 것입니다.
그중 홈플러스는 24시간 운영하는 곳이어서 술꾼인 나에게는 더욱 큰 축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각종 막걸리와 안주를 원가 가까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선택하여 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파장인 오후 10시쯤이면 당일 팔아야 할 회(膾)나 치킨 등을 50~70%로 구매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술마시고 돌아오다가 항상 동네 생맥주 집에서 한잔 걸치고 오는 것이 습관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일찍 들어온다고 아내가 싱글벙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맥주집에서 쓰는 2만원이면 1주일분의 일용할 술과 안주가 확보되니 말입니다.
불편하던 교통이 아주 좋아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나도 늦복은 있구나 생각게 하는 한해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부모님께 중요한 유산(遺産)을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며칠 후면 75세에 들어서는 이 나이에 혈압, 당뇨 같은 성인병(成人病)은 물론 아픈 곳 하나 없으니 건강이란 유산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가. 뒤돌아보는 2010년은 한 마디로 행복한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욕심을 부리며 살았나 봅니다. 저의 하루는 보통의 경우, 새벽 4시에 KBS 라디오 7번의 ‘지금은 실버시대’를 듣습니다.
때에 알맞은 시사나 건강 정보를 사계(斯界)의 권위자가 해설하여 주는 가장 새로운 유익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녹음해 두는 것이 3년 정도나 됐습니다.
이어 5시에 KBS prime(케이블)의 ‘생로병사’, 6시에는 EBS에서 ‘세계여행’ 등을 DVD에 녹화하는 것이 제 아침 일과입니다. 그래서 ilman의 하루는 항상 새로운 충전을 하는 행복한 아침으로 시작됩니다.
인생의 시간(時間)으론 밤인데
한낮처럼 몸을 부리며 살았습니다.
몸은 겨울인데
마음은 한창의 여름을 산 한해였구요.
‘새해도 금년과 같이만 살게 해주세요.’
세모(歲暮)마다 하던 기도입니다.
그 무서운 질병을 넘어,
암(癌) 환자가 그렇게도 꿈꾸던
오늘을 건강히 살아온 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2010년 세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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