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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미아리 고개

ilman 2013. 5. 30. 20:58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미아리 고개’의 유래

미아리 고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서울 성북구 돈암동(敦岩洞)에서 길음동(吉音洞)을 지나 의정부(議政府)로 이어지는 고개로 국방의 요충지가 되던 곳입니다.

그 원래 이름은 ‘되너미고개’라 하였는데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또는 호유현(胡踰峴)이라 부르던 고개입니다.

이 고개는 서대문구의 무악재와 함께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목의 첫 번째 큰 고개요,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오직 하나의 고개였습니다.

이름을 ‘되너미 고개’라고 하였던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되놈(여진족,‘狄’, ‘胡’)이 이 고개로 침입하였다가 이 고개로 넘어갔다(踰) 해서 생긴 고개(峴) 이름이라지만 다른 설도 있습니다
- 이 고개는 의정부로 통하는 오직 하나의 길목이라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일하려 갈 때나 귀가할 때 꼭 ‘되’ 넘어올 수밖에 없는 고개라 해서 ‘되너미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옛날에 이 고개는 우마차(牛馬車)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길이 매우 경사지고 험준한 고개여서 도보로 가는 사람들만 이용하였고, 우마차들은 종암동의 말행길(馬行路)을 이용하였답니다.
그래서 이 고개를 올라오면 허기가 져서 밥을 ‘되’(다시) 먹어야 하는 고개라 해서 ‘되너미 고개’라고도 하였답니다. 돈암동(敦岩洞)의 ‘돈암’도 되너미가 변하여 한자로 음차(音借)하여 된 말이라고도 합니다.  -이 고개를 미아리고개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미아 제7동에 있는 불당골에 오래 전부터 있던 ‘미아사(彌阿寺)’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미아(彌阿)는 원래 불교 용어로 ‘저승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이승으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뜻의 용어랍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와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반야월 작사의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보다 훨씬 이전에도 미아리고개는 우리 민족에게 한 많은 고개였습니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 태조가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와서 넘던 고개가 미아리 고개입니다. 이때 우리나라 부녀자들이 공녀(貢女)란 이름으로 죄 없이 잡혀간 50만(당시 조선 인구 1천만)이 울면서 넘던 한(恨)의 고개였으니 어찌 한 많은 고개가 아니겠습니까. 일제강점기에는 삼양로 좌우 야산과 미아 제3· 4동 일대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서울시내에서 그 공동묘지로 가는 길은 미아리고개뿐이어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거나 보내면서 울면서 넘어가던 한만은 고개가 미아리고개였습니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의 6.25 때에는 북괴군7개 보병사단 등이 11만 1,000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침한 그 주력부대인 1군단이 서울 침략을 위해 넘던 고개가 바로 비정(非情)의 미아리고개였습니다. 전쟁이 휴전(休戰)이란 이름으로 끝날 무렵, 한국의 애국자들과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 8만 5천여 명이 강제로 쇠사슬에 묶여 북괴에 납치되어 북으로 가며 혹은 떠나보내던 고개가 바로 미아리고개였습니다.

 

*.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

노래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노래 중에는 기쁨을 노래하는 음악도 있지만  대중가요는 한(恨)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기쁨과 정열은 기적 같이 순간적이지만 슬픔은 바다와 같이 깊이를 갖는 것이지요.

동족상쟁(同族相爭)의 6. 25의 비극은 반야월에 의해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태어났습니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 ♬ ~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여기서 노래의 화자(話者)는 6.25에 남편을 납북 당해 미아리고개에서 울고 있는 납북자의 아내입니다.

화약연기 자욱한 6. 25 격전지 미아리고개에서 쇠사슬에 묶여 뒤돌아 보며 떠나는 님을 보내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아내의 절구가 그 1절의 내용입니다.

2절 첫행의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라는 노랫말에는 6. 25 남침에 희생되어 죽은 네살박이 딸 '수라'가 오버랩 되어 있습니다. 

반야월은 이 노래를 짓게 된 사연을 후일 ‘뿌리 깊은 나무’에서 펴낸 ‘털어놓고 하는 말’ 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6. 25가 터졌을 때, 저는 그 소식을 들은 바로 그 이튿날 홀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 때 제 가족이라고는 아내와 맏딸 수라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미처 피난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일이 그리 크게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을 않았기 때문에 가족을 수유리 집에 그냥 남겨 두고 저만 혼자 피난을 간 것이지요.저는 우선 처가가 있는 경상도 김천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가에 도착한 지 며칠 뒤에 아내가 들이닥쳤습니다. 그의 몰골은 말할 수 없이 초라했고 마땅히 함께 왔어야 할 귀여운 딸 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어찌하고 홀로 왔느냐?”는 물음에 망연하던 표정이 바뀌어 마구 소리치고 울면서 아내는 두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혼자 떠나고 미아리가 적의 손에 들어가자 아이를 데리고 수유리 집을 떠났는데, 그 새 잘 먹지 못하여 굶어 있던 터에 총소리, 대포소리가 요란해지자 공포에 질리고 무서워 떨다가 수라는 미아리고개를 채 넘지도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대요. 피난길이 너무도 화급하여 아이를 매장할 곳도 찾지 못해 아내는 고갯길에 맨손으로 흙을 파고 묻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지만 9. 28 수복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미아리고개 그 근처의 여러 군데를 파 보았지만 아이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그때의 비통한 심정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 속에 담았지요

.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제작한 이 노래는 전쟁의 참상과 이산가족(離散家族)의 뼈저린 슬픔이 구슬픈 곡조를 타고 대중가요 중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애창되어 불려지던 곡이었습니다.
  산이나 언덕을 넘어 오르내리는 비탈진 곳을 고개라 합니다. 일의 어려운 고비나 절정을 고개라고도 합니다. 40고개 50고개처럼 사람의 나이 다음에 쓰이어 그 나이를 인생의 한 고비를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산행을 하다 보면 고개까지는 수없이 힘든 고난이 있겠지만 그 고개를 넘으면 평탄한 능선길이 시작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고난에서 극복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고개입니다.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미아리고개도 우리 민족이 반듯이 극복하고 넘어야 할 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못된 이웃나라 청(靑)나라가 일방적으로 저지른 천인공노(千人共怒)할 만행입니다.

6. 25는 배달민족의 통일의 염원을 무력(武力)으로 달성하려는 오판(誤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앞으로 반듯이 넘어야 할 고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통일(統一)이란 고개입니다.

우리는 그 통일(統一)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야 할까요?

온 국민이 합십하여 경제력과 국방력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국력(國力)을 키우면서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원한 우방(友邦)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영원한 적(敵)도 없을 것입니다. 북한의 위정자들도 무력통일이 불가능하다는 6, 25의 산 교훈을 깨닫는 것은 시간 문제일뿐이 아니겠습니까?

북한 인민의 체격(體格)이 대한민국 국인보다 왜소(矮小)하다는 것이나, 평균수명(平均壽命)도 대한민국 국민보다 10년이나 짧다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을 저들이 인정할 때 통일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목숨을 건 북한을 탈출의 기사는 통일이 가까워졌다는 징조입니다.
 

*. 통일의 노래

  우리는 통일의 노래 ‘우리의 소원을’ 부르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란 통일의 노래는 1947년 KBS 3.1절 특집 어린이 방송극에서 처음 불리기 시작 한 이래로 그동안 남녀노소, 국내외 동포는 물론, 남(南)과 북(北)이 손에 손잡고 60여년이나 부르고 있는 국민의 노래요, 민족의 노래이니까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 ♫ ♬ ~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 동요

ilman도 통일을 염원하며 시(詩) 한 수를 우리 겨례에게 바칩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 허리 끊겨

제 각각 한(恨) 세월(歲月)

흘깃흘깃 혈육(血肉)으로

따로따로 반 백년반(반百年)

저 산하(山河)

이 산하(山河) 되어

우리 함께 살아보자 

 

그리움이 북향(北向)하다

천지(天池)에 고이었고

서러움이 남향(南向)하다

백록담(白鹿潭)에 담기었다

언제나

천지(天池), 백록담(白鹿潭)에

기쁜 눈물 더해 볼까

 

 

             -우리의 소원/ i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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