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만난 베트남 가이드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내가 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나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웠다.
하노이 공항에 우리를 마중 나온 차 문에 '자동문'이라 한글로 쓰여 있었고, 호텔의 TV Arirang이란 채널에서는 '사랑이 뭐길레' 옛날 연속극과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라오스에서도 그랬다. 한국산 관광자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호텔에 가니까 LG가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대우가 만든 TV를 보는 것은 먼 이국 땅에서의 눈물어린 감격이었다.
일본은 수 십년 전부터 우리보다 먼저 이들 나라에 진출해 있었으나 그들은 한국을 더 부러워하고 있었다.
일본은 존경하나 한국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와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더 가까웠고,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일본은 과거의 침략자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베트남이 따라가고 싶어하는 국가 발전 모델이 바로 우리 korea였다.
이들 나라에서는 한국 탤런트나, 코리아 가수가 영웅처럼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한국 물건은 무엇이나 값으로도 우리 나라의 몇 배의 대접을 받으며 거래되고 있었고, 한국 상표를 붙인 물건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의 자랑 거리였다.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난 베트남 사람은 배트남가이드였다.
"저는 황정입니다. 우리, 성 부르지 않고 이름 부릅니다. 그러니까 정, 정씨라 부릅니다. 저는 1960년부터 6년 북한 김척대학에서 수력발전 전기과 배웠습니다. 졸업했습니다.
우리 나라 인구는 7천 3백만입니다. 북한 남한 합한 것과 같습니다. 베트남 농사 85% 농업 나라입니다. 농업 부지런 하는데 고생하고 있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먹는데 문제없습니다. 어려운 일도 많지만 잘 뚫고 나갑니다. 여기 농사 농사 이모, 삼모작도 합니다. 물이 계속 있다면 삼모할 수 있지만 대부분 이모작입니다. 외국에도 쌀 보내 줍니다. 쌀 수출 세계 2위입니다.
우리 나라 민족 다민족(多民族)입니다. 전체가 64개 민족입니다. 그 중에 우리 비엣족 85%인 6,000만입니다."
정년해서 연금을 타 먹고 있는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밖에 안 되어서 이렇게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58세의 이 가이드의 말은 뇌성마비자가 말하듯이 어눌하고 떠듬거려서 이해하기에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묻는 말만 대답하는 정도여서 답답하기 그지없는데다가 그는 고집이 셌다.
월남 사람의 단점이라고 하는 체면과 특유의 고집과 자존심에다가 그는 외국 유학을 할 정도의 인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선가, 길가에는 넘쳐흐르는 오토바이 자전거의 물결, 인력거 씨클로나 길가에 주욱 계속되는 옥수수나 사탕수수 짜서 파는 것이나, 뿔이 팔자(八字) 모양으로 우람스런 물소나, 바나나 나무 사이로 신기하게도 돌아다니는 돼지라든가, 논 가운데 있는 묘지의 특이한 모습이나, 월남 특유의 전통 여성 모자라는 팜 잎으로 만든다는 꼬깔모양의 '누'나, 노동자들이 주로 쓰고 다니는 베트콩 전투모인 국방색 모자 무컹(Mu Cung) 같은 것을 보고 싶어 찾아온 우리 에트랑제들이 처음보는 낯선 풍물에 대하여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 수없이 많건만, 뒤에 멀거니 앉아 있거나 옆 사람과 잡담만 하고 있었다. 걱정하던 대로 가이드로서는 최악의 가이드를 불행하게도 우리는 만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다음날 가기로 일정이 잡혀 있는 후치민 묘소나 박물관 군사기념관이 월요일이어서 휴관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을 남의 일처럼 태연히 말할 정도로 우직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은 많은 돈을 들여 찾아간 하노이 시내 관광을 못하고 엉뚱하게도 베트남대학 운동장에 우리를 풀어 놓아 허송세월을 하게 하더니, 엉뚱하게도 오후에 후치민 묘소나 박물관 군사기념관을 연다고 우리를 인도하여 헛발길을 하는 우행까지 범하였다. 이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현지 가이드의 잘못 같지만은 않고, 이러한 것을 모를 정도의 무능한 여행사 같지도 않다. 가만이 생각해 보니 비행기표 사정으로 여행사 사장이 알고도 밀어 붙이라고 한 것 같다.
그러니 그런 회사를 선택히야 온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 같다.
차창 밖에 곱게 리본을 단 차가 지나간다.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세 가지 꿈을 갖고 산다고 한다.
직업, 혼인, 집을 갖는 것이다.
북베트남의 경우에는 결혼식은 마을 어디에나 있는 전통의 공회당인 딘(亭)이라는 곳에서 한다.
이곳에서는 혼수는 신랑 쪽에서 모두 부담하고 신부는 달랑 반지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된다.
그래서 그 과중한 부담 때문에 베트남 총각들은 퍽 결혼하기가 힘든다고 한다. 그럼 돈 없는 총각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월남 속담에 삐뚤어진 그릇에는 삐뚤어진 뚜껑이 있다."
하며 혼자 낄낄거린다. 사흘 동안 그로부터 들은 가장 시원한 대답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결혼하면 신부는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된다.
결혼식 날은 되도록 짝수 날로 한다. 결혼식날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도, 물건을 살 때까지도 짝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신혼 신부 나이 차이도 띠의 차이가 짝수인 넷인 것을 좋아한다. 띠를 말하는 12간지에서 우리와 다른 것은 토끼 띠가 빠지고 대신 고양이 띠가 들어가는 것이다.
결혼하면 신부는 남편의 성을 따르고 집을 구할 때까지 대개가 처가살이를 한다.
우리와 같이 아들 낳기를 좋아하고, 장손은 집안에서 상당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가장이 밧홍(가정제단)에 향불을 키는 것으로부터 일과가 시작하는 것처럼 유교를 숭상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손이 가장 많은 상속을 받고 닷호(dat ho)라고 불리는 제사 명목의 땅을 상속받기도 한다.
베트남에는 환갑 잔치가 없는 대신에 7순 행사가 있다.
시장에서 거리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들은 표정이 밝고 우리네 외국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순하였다.
무례하게 카메라를 허락 없이 들이대도 놀라기는 했으나 곧 밝게 웃어주었다.
자기네들과 싸우기 위해 맹호부대(猛虎部隊) 백마부대(白馬部隊)를 파견한 과거의 적국에서 온 우리들을, 미국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과거의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고 끈기가 있으며 외세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민족이지만, 마음속에 우리 나라가 경상도 전라도로 선을 긋고 사는 것보다 더 크게 하노이시와 호치민시를 중심으로 남북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금을 그어 놓고 속으로 앙앙거리며 살고 있었다.
우리 나라도 통일 후에 어쩌면 겪어야 할 일 같아 학자가 있어 미리 그 연구를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공원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여인이 우리를 보고 까맣게 웃는다.
검은 이빨 흑치(黑齒ramg den)로 웃기 때문이다. 산에서 나는 뱅꿴이라는 나뭇잎을 사용하여 흑치를 만든다는데 흑치를 만들어 주는 상점들이 있다 한다. 그러나 중국의 전족(纏足)처럼 지금은 구세대들이나 하는 없어져 가는 풍습이었다.
야자수 비슷한 크기의 벡텔이란 나무를 심어논 집이 많았다. 이를 씹어 빨개지는 입술과 흑치는 과거 베트남 여인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가난해서인가. 밖에 나가면 끈질기게 걸인이 따라 붙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지뢰에 손발이 짤린 장애인이 너무나 많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아침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니 거리 길가에서 앉아 밥을 사먹는 수없이 사람이 많았다.
장선생과 김교장과 셋이서 어제 생맥주집엘 갔더니 제니파존스가 반갑게 우릴 맞는다. 후리후리한 키에 월남 특유의 곱게 빠진 몸매로 머리를 두 갈래로 따고 청바지를 입었는데, 항상 웃는 모습 중 반달 같은 눈썹이 눈과 시원하게 먼 것이 영화 '모정'에 나오는 제니파존스를 닮았다고 해서 어제부터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저 청바지를 벗고 아오자이를 입는다면 정말 제니파존스 같을 께다.
어제는 생맥주 5잔에 바나나 잎으로 싼 저민고기 2개를 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상위에 동(베트남돈)을 죽 펴놓았더니 12,000동을 가져간다. 미화로 1.5불 그러니까 2,000원 주고 맥주 5잔을 먹었으니 얼마나 싸냐. 거져다 거져.
제니파존스에게 준비해간 비행기에서 얻은 눈가리개를 주었더니 생각 이상으로 고마워한다.
지금도 이 지긋한 나이의 이국인을 생각하며 이국 월남 처녀가 그걸 쓰고 잠자겠지 생각하면 흐뭇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제니파존스는 퇴근시간이 되었는지 옷을 갈아입더니 주방 쪽에서부터 자전거를 끌고 타고 가며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린 서로 오른 손바닥을 타악 마주치며 하이 '화이브(hi five)!' 하는 것으로 영원한 이별을 했다.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해어져야 하는 것이 나와 그녀의 인연인가 보다.
거기서 일하는 그녀보다 더 젊은 5명 아가씨에게 술이나 콜라 사먹으라고 2 딸라를 주었더니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즐겁게 웃으며 건배 시늉을 한다.
볶아온 고기를 양념해서 호기 있게 양껏 마시고 나니 김교장님이 한턱낸다. 4딸라였다. 오늘은 제일 맛있는 술을 먹었다. 공술보다 더 맛있는 게 어디 있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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