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隨筆)☎

시묘살이

ilman 2012. 11. 28. 09:54

소석 김영덕 시인의 생신 잔치가 있어 단양에 갔다가 그 시묘 살이 여막(廬幕)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행운을 얻었다.

  시신이 묻혀 있는 곳에 죽은 사람의 혼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우리의 조상들은 상을 당하면 성분(成墳)한 다음 그 서쪽 묘 아래에 여막(廬幕)을 짓고 상주가 3년 동안 시묘(侍墓) 살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막(廬幕)은 반 칸 정도의 크기로 여막 속에는 짚으로 3면을 가리고 거적을 펴놓고 짚 베개를 만들어 놓는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감히 훼손하지 않은 것이(不敢毁損) 효도의 시작이라 하여 시묘 살이 하는 동안 머리와 수염을 일체 깎지 않고 아침 점심 저녁에 때를 맞추어 부모님 묘에 공양을 올리고 절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무덤을 관리하였다.
선비들은 남은 시간에 글을 읽거나 과거 준비를 위해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옷가지와 시묘에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가끔 집에 가기도 하였다.
산속에서 모든 것을 전폐하고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에서 밤낮으로 무덤만을 돌본다는 일은 보통의 인내로는 지속하기가 힘든 일이어서, 효를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하던 유교 사회인 조선시대에도 권장 사항은 아니었다. 그래서 옛날에도 3년 시묘 살이는 드문 경우였고, '시묘 살이' 하면 3달 시묘 살이 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당시에 이 시묘 살이는 돌아가신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효성스러운 행위로써 율곡 이이(李珥), 송강 정철(鄭澈) 등의 시묘 살이가 문헌에 전하여 온다.
이 제도는 시신을 매장한 후에 본가로 혼백(魂魄)을 모셔오는 반곡(返哭)이라 하던 신주(神主) 제도가 확립되기 전까지 일부 사대부(士大夫) 층에서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시묘(侍墓) 살이는 사회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아서 연산군 때에는 3년 상을 1년 상으로 하게 하는 단상법(單喪法)을 엄히 시행하기도 하였다.
옛날에 이렇게 효가 인생의 목표이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농경 사회였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결혼하면 아버지에게 땅 떼기를 나누어 받아 살던 시절이기 때문에 서민들에게는 효는 생활의 방편이기도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부모는 농사의 선배였고, 사대부 집안들의 경우는 한문의 세계라. 자식들이 도달하여야 할 길 역시 아버지 세대와 같은 한문의 세계라.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의 스승이 되는 경지에 있었다. 그래서 효가 중요시된 세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식들은 부모에게서 받거나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땅도 없고 사회에서의 일과 역할이 다르다.

그래서 효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나 보다.
그래선가. 효도 여행을 빙자하고 부모님을 제주도에 모시고 가서 그냥 버리고 가는 소위 신판 고려장이 있다는 요즈음에, 이러한 시묘 살이는 옛날의 아름다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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