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2.13~ 15/삼공매표소-백련사(920m)-향적대피소(1)-향적봉(1614m)-중봉(1,594.3m)-백암봉(m)-무룡산(1,491.9m)- 삿갓재대피소(1)-삿갓봉(1,419m)-월성재(m)-남덕유산(1,507.4m)-영각사(700m) 총 26.7km(11:50)/내 아내의 유랑의 남편과-
*.꿈꾸던 설산(雪山) 덕유산(德裕山) 종주
덕유산 종주는 지리산(성삼재나 화엄사~대원사), 설악산 종주(소공원-대청봉-귀때기청봉-12선녀탕)와 함께 남한 능선 3대 종주 코스 중의 하나로 산악인들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꿈꾸게 되는 것이 종주산행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백두대간 종주가 된다.
그 종주 중에서도 겨울의 종주는 남한에서 한국에서 4번째로 높은 산인 덕유산(德裕山)을 으뜸으로 친다.
서해 습한 공기를 실은 바람이 호남과 영남을 나누는 장쾌한 능선에 눈보라를 쳐오면 거기 온갖 나무에 설화(雪花) 만발한 새로운 세상을 연출해 내기 때문이다.
덕유산은 한국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북덕유산과 남덕유산을 통털어 덕(德)이 많고 품이 크고 넉넉한(裕) 너그러운 산이라 하여 덕유산(德裕山)이라 이르는 말이다.
무주구천동을 지나 백련사에서 시작하여 주봉인 향적봉(1,614m)에서부터 1,000m가 넘는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30여 km나 파도치다가 지리산 가기 전에 1,507.4m의 남덕유산의 동봉(東峰)과 서봉(西峰, 일명 장수봉)을 일으켜 세운다. 거기까지 가서 700여 개의 철계단을 내려가서 영각사(靈覺寺)까지가 장장 26.7km가 덕유산 종주 코스다.
덕유산은 한반도 남부 한복판을 남북 능선으로 흐르면서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을 긋던 산이다. 지금은 영호남을 가르는 경계선으로서 동쪽이 영남지방 산수갑산 거창군이요, 서쪽이 호남의 첩첩산중 오지에 해당하는 무주이다.
정형외과의사는 무릎관절이 1/3이 망가졌으니 이젠 그만 등산을 접으라 한다. 떠나올 때 내과 의사는 요즈음 감기는 무서우니 찬바람을 쐬지 말라 하였다. 아내는 당신이 그렇게 꿈꾸던 '네팔과 인도의 해외여행이 1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 나이에 엄동설한 중에 처음 하는 덕유산 종주가 가당이나 한 일이냐고 한다.
스스로도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이런 만류를 뿌리치고 나선 것이다. 왜그런지 이번이 아니면 설산 덕유산 종주는 영원이 불가능할 것 같이 생각되어서다. '지리산과 설산 설악산을 단독 종주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서파에서 동파까지 백두산을 종주한 내가 아닌가' 이런 경험에다가 완벽한 장비와 준비를 하고 동네 산악회 '산속 세계'를 따라나섰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것은 짐의 무개가 늘어난다는 것과 통하는 말이다. 줄여도 줄여도 12kg 이하로 베낭 무개를 줄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무리가 될지도 모르는 이 여행은 해가 갈수록 나쁘게만 달라지는 나의 몸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은 오기라 생각하자.
덕(德)이란 사람의 품성을 말할 때 쓰이는 말이다. 밝고 크고 옳고 빛나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따스하여 바른 길을 행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말이다. 그것을 산을 두고 말하면서 거기다가 넉넉할 '裕 '(유) 자까지를 더하여 이 산 이름을 덕유산(德裕山)이라 이름 하였다.
덕유산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산 이름으로 가진 것 같이, 산으로서도 덕유산은 주능선 17.5km에 1,200m가 넘는 봉우리를 20개 이상이나 거느리고 있는 중후한 산이다.
봄에는 해가 철쭉꽃밭에서 떠서 철쭉꽃밭으로 진다는 철쭉의 산이요, 여름에는 원추리꽃이 만발하는 녹음 속에 구천동 33 경이 몸과 마음의 더위를 식혀주는 산이다. 가을이 오면 단풍이 손짓하여 우릴 부르는 산 중에 명산이다.
*. 무주구천동 전설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계곡은 덕유산 향적봉에서 시작되어 나제통문(羅濟通門)까지 36km에 이르는 계곡이다. 거기서 흐르는 물이 계곡을 깎고 바위를 갈아 만들면서 금강 상류의 지류인 원당천(元唐川)까지 흘러간다. 그 계곡 따라 '한국의 10경'의 하나라는 '구천동33경'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이란 이름 자체가 자못 시적(詩的)이어서 '그 어원에 대한 전설이 없는가?' 찾고 또 찾다가 드디어 '암행어사 박문수 전설'을 보고 무릎을 쳤다.
-초라한 차림의 박문수 어사가 덕유산 계곡에서 밤이 깊어 인가를 찾아 헤메다가 불이 반짝이는 외딴집 한 채를 발견하고 하룻밤을 유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주인인 듯한 한 노인이 젊은이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지 않는가. 질겁을 한 박 어사는 주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저는 구(具)재서라는 훈장입니다. 그런데 아랫마을에 사는 천(千) 석두라는 부자(父子) 놈의 흉계에 빠져서, 내일 오후에는 아내와 며느리를 뺏기게 되었습니다. 그 천가 놈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죽자고 하던 참이었지요.'
박 어사는 구재서를 안심시킨 다음 그 길로 무주현으로 내려가서 네 광대에게 청,황,흑,백 네 가지 색깔의 옷을 입혀 가지고 이 골짜기로 들어왔다. 다음날 구재서의 집으로 가서 천가 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사모관대를 한 천석두 부자가 나타나자 누런 털 달린 도끼와 귀신을 그린 깃발을 든 한 괴물이 들이닥치며 초례상을 타악- 치며 저승사자 넷을 불러내더니
'내가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너희를 잡으러 왔으니 저승사자는 더 천석두 두 부자를 잡아가지고 돌아가라.'
하니 저승사자가 천가 부자에게 달려 들어 결박 지어 가지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후 박 어사는 천석두 부자를 귀양 보내고 구재서에게 부인과 며느리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무주(茂朱)에서 구(具→九)씨와 천(千)씨가 살던 마을(洞)이라 하여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 이야기는 좀 황당한 얘기 같아서 다른 이야기가 또 없나 찾아보았더니 백련사(白蓮寺)와 연관된 전설로도 전하여 온다. 사찰 측에서는 신라 흥덕왕 5년에 무염(無染)국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지만 다음 전설에서는 그 연대가 조금은 차이가 난다.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白蓮禪師)가 이곳에 초암(草庵)을 짓고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 자기의 이름과 같은 하얀 연꽃(白蓮)이 솟아 나와 그 위에 절을 짓고, '백련암(白蓮庵)'이라 하였다. 불교 전성기 때에는 14개의 암자가 있을 정도로 사세가 융성하여서 9,000여 명의 불도들이 도를 닦던 곳이어서 '구천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백련사의 이름을 한 때는 '구천 동사(九千洞寺)'라 하였다 한다.
내가 따라 온 일산 '산속 세계 산악회'의 일정은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올라가서(20분 소요) 향적봉, 중봉 오수자굴(吳秀子窟)로 해서 무주구천동으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종주에 앞서서 구천동 33경을 가능한 하나라도 더 디카에 담으려고 일행과 떨어져서 그 차를 타고 그분들의 하산 지점인 삼공리 주차장까지 홀로 왔다.
*. 구천동 33경 전설
출처: 무주군청 홈피 사진
덕유산에서 나제통문(羅濟通門)에 이르기까지 약 28km에 걸친 무주구천동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이 빚어 놓은 수림과 기암이 어울린 곳을 이 고장 사람들은 '구천동33경'으로 지정하여 놓고 자랑하고 있다.
무주구천동은 13개의 대(臺)와 10개의 소(沼)에다가 폭포와 계곡을 더하여 아름다움이 이루어지지만 이는 다시 둘로 나뉜다.
마음 먹지 않고는 차로 그냥 지나치게 되는 '삼공 탐방 주차장'에 이르기까지에 있는 1경 나제통문~ 14경 수경대(水鏡臺)까지 14개 경을 '외구 천동(外九千洞)'이라 하고, 그 주차장 위 15경 월하탄(月下灘)~ 33경 향적봉(香積峰)까지 19개 경을 '내구 천동(內九千洞)'이라 한다.
'외구천동(外九千洞)'은 자가용이나 몰고 와야 볼 수 있는 곳이니 아쉬운 대로 '무주군 홈피'에서 소개하는 그림이나 보면서 뜻글자인 한자로 그곳 이름을 바꾸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어리 짐작으로나마 대신하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구천동 계곡은 오른쪽으로 끼고 가다 다리를 넘어서면 계곡은 다시 왼쪽으로 흐르게 되는데 그 계곡은 길 따로 계곡 따로가 아니라 계곡이 길과 함께하는 탐방로였다.
다음은 구천동33경 중 선인들의 전설이 어린 곳을 중심으로 나도 그 전설 속의 하나가 되어 아름다움을 완상 해 보려 한다.
제일 먼저 만난 곳이 조그만 두 개의
폭포가 달밤이면 선녀가 춤을 추는 듯하게 보인다는 15경 월하탄(月下灘 )이었다.
이어 나타나는 16경 인월담(印月潭)은 반석위로 흐르는 작은 폭포수가 소(沼)를 만든 곳으로 수목이 하늘을 가린 구천동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오직 한 곳이란다.
- 인월담(印月潭)은 신라 때 인월화상이 절을 짓고 수도했던 인월 암자(印月庵子)가 있던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인데 새로 세웠는지- 아치형의 다리 너머에 '인월암' 화살표가 보인다.
덕유산은 산세가 높고 웅장하여 삼국시대부터 산악 요새지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의병대장 문태서(文泰瑞)가 일본군의 총을 빼앗아 일본군 4명을 사살하여 노획 한 총 4정을 의병의 기본 무기로 삼았다. 어느 날 구천동 백련암 부근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리다가 의병 10여 명이 죽자, 백련암에서 전사자들을 장사 지내주고 돌아가던 중 사자담 모퉁이에서 일본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의병들은 중과부적(重過不敵)으로 산으로 도주하고, 장군은 인월담 폭포의 안 움푹 들러간 바위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가 후에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호국의 역사적인 장소가 인월담이기도 하다.
구천동 입구에 구천동 수호탑이 있는데 그 옆에 한일합방 때의 영웅 '의병대장 문봉서 순국비'가 있다. 돌림자도 위 문태서 공과 같은 분이니 후답자가 연구해 볼만한 자료다.
17경 사자담(獅子潭)은 소 옆에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거암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옛날 칠봉[사자봉]에 살던 사자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던 곳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는 곳으로 칠봉을 지금도 사자목이라 부르고 있다.
-9경 비파담(琵琶潭)은 옛날 하늘에서 7선녀가 내려와 비파를 뜯으며 즐겼다는 곳으로 그 모습도 몇 개의 폭포가 모여 이루어진 비파 모양의 큰 소다.
-22경 금포탄(琴捕灘)은 바위 사이를 흐르는 여울소리와 무성한 수목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거문고 타는 소리를 낸다는 곳으로 삼공 삼탐방 지원센터와 백련사의 각각 2.8km의 중간 지점에 있는 여울이다.
23경 호탄암(虎嘆岩)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지금부터 약 35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덕유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산신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신의 명으로 지리산으로 특약(特藥)을 구하러 가던 중 안개가 자욱한 이곳을 뛰어넘다가 바위에서 미끄러져서, 소(沼)에 빠진 호랑이(虎)는 100일간 꼼짝 못 하고 울부짖으며 탄식만(嘆) 하였다 한다.
-25경 안심대(安心臺)는 김시습의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도망 다니며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였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깊은 산속 이곳에 와서야 마음을 놓아 안심(安心)하게 되었다는 곳이라 한다.
-26 경 신양담(新陽潭)은 속칭 '새양 골'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신양사(新陽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으로 기암과 맑은 담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28경 구천폭포 는폭포가 적은 덕유산에서 만나기 어려운 아담한 작은 2단 폭포이지만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3단 폭포가 되는 곳이다. 5개의 부도가 있는 것을 보니 백련사가 가까워졌나 보다. 여기가 김시습의 '매월당 부도(梅月堂浮屠, 전북도 유형문화재 43호)로 25경 안심대 전설과도 연관된 곳이다.
외구천동도 그냥 지나치기 섭섭하니 몇 군데나마 소개한다.
-제1경 나제통문은설천면과 무풍면의 암벽을 높이 3m 길이 10m로 뚫은 문으로, 이름 그대로 신라와 백제 때의 문은 아니고 일제시대 이 고장 일대에서 체굴한 금과 농산물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서 뚫었다는 문이다.-제6경 일사대(一士臺)는 구천동 입구에서 약 6km 지점에 있는 일명 '수성대'라고도 일컫는 곳으로 구천동의 3대 경승지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일사대(一士臺)의 '一士(일사)'는 구한말 우국지사며 학자인 송병선의 호 '동방일사(東方一士)'에서 유래된다. 이곳 경치에 혹한 일사 선생이 이곳에 서벽정(捿碧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가르치며 소요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수백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너럭바위 위에 '인간사를 영원히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인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8경 가의암(可意岩)은 손으로 일일이 마치 다듬어 놓은 듯한 반석이 층을 이룬 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이다. 그 당시 이곳을 탐승하던 노인들이 앉을자리가 없어 불평들이 많았다. 지나가던 고승이 노인들의 뜻대로 너럭바위를 만들어 편히 쉬게 했다고 하여 가의암(可意岩)이라 했다고 한다
-9경 추월담(秋月潭)은 주위에 암석이 아름다워 소금강(小金剛山)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였다. 김천일 장군의 장인 양도사(楊道士)가 이곳에서 선경 같은 주변 경치 속에 가을밤 물에 잠긴 달의 신비로운 아름다움 속에 취하여 드디어 도(道)를 깨우쳤다 하여 추월담(秋月潭)이라 부르게 되었다-14경 수경대(水鏡臺)는 신라 때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수경선생이 소요하였다는 곳이다.
*.무주구천동에서의 유감
나는 요번 기회에 무주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구천동 33천을 하나라도 더 촬영하기 위하여 구천동에 왔다.
그러나 내구천동만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던 내 마음이 왜 이리도 허전해지는 것일까.
요번에 내가 본 내구천동은 15경부터 32경까지였지만 겨울이라서인가. '아아!' 하고 탄성을 지를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다음은 그 중에 한 구천동 33경에 얽힌 이야기다.
백련사를 향하는 길에 작달막한 폭포 같은 것이 있어서 사진을 찍을까 말까 하다가 보니 '구천폭포'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래서 한 컷 찍으려는데 마침 하산하던 한 여인이 지나가면서 말한다.
'어마나, 저것도 폭포래!'
아름답다란 됨됨이가 기쁨과 만족한 느낌을 줄 만한 사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물을 보거나 들을 때 좋은 느낌을 가질 만한 사물을 이르는 말이란 말이다. 그 아름다움은 누구에게서나 느끼게 되는 공통적인 마음이어야 하며, 그것은 일시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합적인 판단에서 우러나와야 할 구천동을 무주(茂朱)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구천동33경으로 너무 세분화하여 놓음으로써 그 경치를 스스로 폄하하였다면 나만의 지나친 억설일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많으면 잔소리가 되는 법이다. 어느 선생님이 있어 중요하다는 말을 도가 지나치게 쓰면 오히려 그 역효과가 나타나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구천동을 지금까지 33경으로 나누어 온 것보다는 이를 몇 가지로 축소하여 묶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1)라제통문-2.9km-2)은구암-0.5km-3)청금대-1.9km-4)와룡담-인근-5)학소대-0.3km-6)일사대-0.4km-7)함벽소-0.3km-8)가의암-2.0km-9)추월담-0.6km-10)만조탄-1.2km-11)파회-0.4km-12)수심대-1.8km-13)세심대-인근-14)수경대-3.0km-15)월하탄-0.3km-16)인월암-0.2km-17)사자암-0.2km-18)청류동-km- 19)비파담-인근- 20)다연대-0.3km-21)구월담-0.9km-22)금포탄-0.7km-23)호탄암-1.1km-24)청류대-인근-25)안심대-0.2km-26)신양담-0.3km-27)명경담-0.5km-28)구천폭-0.2km-29)백련담-인근-30)연화폭-인근-31)이속대-0.3km-32)백련사-2.5km-33)향적봉
덕유종주: 구간별 거리
삼공탐방지원센터-5.6km-백련사(920m)-향 적대 피소-향적봉(1,614m)-1.0km-중봉(15,94.3m)-1.0km-백암봉(1,480m)-송계 3거리-2.2km-동업령(1,320m)-? km-무룡산(1,492m)-2.1km-삿갓골 대피소-삿갓봉(1,418m)-2.9km-월성재-1.4km-남덕유산(1,507m)-3.6km-영각탐방지원센터--0.5km-영각사 입구(740m)
설산(雪山) 덕유산(德裕山, 1614m) 종주(중)/ 덕유산 종주
*. 덕유산 종주 들머리 백련사
삼공탐방지원센터→백련사→향적봉→남덕유산→영각사 26.7km [11시간 50분]
덕유산 종주 들머리는 백련사에서나 영각사. 아니면 백두대간의 육십령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겨울철이라면 안전을 위하여 2박 3일로 종주를 해야 하지만 낮이 긴 여름철에도 준족이 아니라면 1박 2일을 해야 하는 총 26.7km의 거리다.
세상 만물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법이다.
60령 코스는 '5.6km/3:30'로 영각사 코스보다 멀지만 완만한 등산길에 '서봉→동봉'까지 아우를 수 있는 코스다.
그러나 이 코스로는 덕유산의 명물인 700여 여 개의 환상적인 철계단을 밟아 볼 수가 없이, 종주를 위해서 삿갓봉으로 향하여야 하는 단점이 있다.
이에 반하여 '영각사 -3.3km/1:50→백련사 코스는 능선이 시작되는 남강의 발원지인 '참샘터'까지가 너무나 지루한 너덜겅 길이다. 그러나 돌산 남덕유의 멋과 함께 환상적인 철계단을 밟아 볼 수 있는 코스에다가 향적봉에서는 백련사로 내려 가든, 곤돌라로의 하산 길이든 영각사 코스와 달리 교통이 편해서 아주 좋다.
이에 비하여 백련사 코스는 고진감래 격(苦盡甘來格)이다.
향적봉까지 오르는 2.5m는 오름길로 너무나 힘들고 벅찬 가파른 길이지만, 일단 주봉인 향적봉에 오르기만 하면 향적봉 대피소를 지척에 두고 있다. 거기서부터 남덕유까지는 서서히 내리막 길이라서 좌우의 전망을 즐기며 여유롭게 산행을 할 수 있지만 대신에 영각사에서의 교통편이 아주 불편하다.
*. 덕유산 들머리 백련사
백련사는 해발 920m로 내가 알기에는 암자를 제외한 한국 절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 중의 하나로, 구천동 32경에 해당하는 금산사의 말사이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백련사는 '구천동사(九千洞寺)'의 한 암자였는데 6.25 때에 소실되어 다시 지은 것이다.
덕유산 일주문 바로 우측에 있는 매월 당부도(梅月堂浮屠, 지방문화제 43호)를 대하고 보니 매월당 김시습이 남기고 간 말이 생각난다.
-'登山卽思學其高 臨水卽思學其淸 座石卽思學其堅 看松卽思學其貞 帶月卽思學其明 -雜著, 無思第一'(산에 오르거든 그 높이를 배우고, 물가에 임하거든 그 맑음을 배우고, 돌에 앉게 되면 그 견고함을 배우고, 소나무를 보거든 그 곧음을 배워야 하며, 달을 쳐다보거든 그 밝음을 배울 것을 생각하라.)
이 절에는 한석봉(韓石峯)이 썼다는(?) 대웅전의 현판, 108 층계를 올라서 있는 사천왕문 앞의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수계사(授戒師)인 일선 대사(一禪大師)의 부도 등이 유명하지만 그보다 백련사는 북덕유산 산행 들머리로 더 유명한 고찰이다.
그 등산길이 사찰 경내를 지나서 우측으로 멋진 나무다리가 숲 속으로 꼬부랑 쳐 올라가고 있다.
오늘 오후부터 있다는 비 소식 때문인가. 산행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점심 식사도 걸은 체인데다가, 배낭은 묵중한 무개로 어깨를 짓누르는데 등산길은 계속 오름길이다.
겨울산 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 때문인가. 아니면 남향한 길이기 때문인지 눈길은 아니었다.
산을 중간쯤 올랐는가 싶은데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그것도 계속되니 옷이 촉촉이 졌어오기 시작한다. 급히 우의를 입고 배낭 카바를 덮었다.
등산복 하의(夏衣) 위에 걸친 방풍복이 이렇게 편한 줄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겠다. 남보다 더 자주 쉬어야 하는 나의 체력에 언제나 앉고 싶으면 어디서나 부담 없이 철퍼덕 앉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안내 책자에는 오르는데 1시간 30분이라지만, 너무 힘들어서 쉬엄쉬엄 오르느라고 3시간 이상이나 걸려서 오르다 보니 정상 바로 아래에 드디어 갈림길이 나타난다. '우측으로 100m가 향적봉, 좌측으로 100m가 대피소'.
이정표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내일 새벽 일출을 찍으러 왔더니, 눈이 오시네요."
"대신 설화(雪花)를 구경하실 수 있겠지요."
이 우문현답(愚問賢答)이 대피소 직원과 주고받던 말이다.
평일에다가 눈비가 온다는 기상 예보 때문인지 60명 수용 능력이 있다는 이 대피소(전화: 063-322-1614)에는 부산과 대전에서 온 분을 합하여 나까지 6명이었다.
따뜻한 온돌을 아침까지 켜 주었지만 밤새도록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일도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로 허탈한 마음 때문에다가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 때문에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 그 소리에 잠 못 들어하는 대전에서 온 분의 요란한 불평 소리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하릴없이 밖에 나가보면 강한 비바람이 쳐서 나를 실망시키더니 새벽녘 밤하늘에는 눈이 펑펑 오고 있지 않은가.
*. 설천봉 상제루
새벽밥을 지어먹고 나가 보니 눈은 그쳤지만 날씨가 흐리다.
일출 보기는 포기하였지만 서둘러 출발할 수가 없었다. 눈 덮인 초행길을 혼자 나설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9시 넘어 향적봉에 오르는데 고맙게도 갑자기 구름 사이에 햇빛이 나타난다.
향적봉 주변에는 주목 군락지(朱木群落地)가 있어서인가. 예로부터 은은한 향기가 그득히 쌓여 있는 봉우리라서 향적봉(香積峰)이라 하였다는 정상에 올라섰으나, 향적봉(1,614m) 일대는 구름 속에 잠겨 있다.
그러다 간혹 구름 사이에 언뜻언뜻 보이는 0.6km 저 아래 설천봉의 누각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모습이란, 천국(天國)을 훔쳐보는 것같이 착각하게 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겠다고 설화 만발한 눈길을 밟고 차츰차츰 내려가다가 보니 설천봉(1,520m) 정상 마당에 이르고 말았다. 가는 도중에 주목과 고사목과 주상 나무와 바위에 설화 만발(雪花滿發)한 모습이라니-. 적지 않은 산을 다녔지만 네 평생 이런 설화의 나라를 만나 보긴 처음이다.
거기 고풍스러운 누각(樓閣)은 겉으로는 삼층인데 안에 들어가 보니 천장이 높은 하나의 층으로 된 누각이었다.
현판에 '上帝樓(상제누)'를 보니 여기가 하늘나라 옥황상제(玉皇上帝)가 계신다는 누각인가 보다.
그 밖의 누각(樓閣)을 두른 기둥은 간밤 내린 눈보라가 닥지닥지 둥근 구슬로 아롱지게 얼어붙은 것이 동화 속에서 듣던 영락없는 백옥루(白玉樓)다.
여기가 1990년대에 국립공원 한가운데를 200만 평이나 파헤쳐서 지었다는 무주 리조트로 한국의 대표적인 자연 파괴의 장소라더니, 오늘 보니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이룬 하모니 같이 그렇게 아름다웠다.
곤돌라는 강풍 속이라서인가 사람이 타지 않은 체 빈 곤돌라만 오르내리고 있었다.
*. 강풍 주의보(强風 注意報) 속에 덕유산 종주
종주를 위하여 다시 향적봉에 올라와 보니 하늘은 쾌 청하게 맑아 있고, 훼방 놓던 구름도 오간 데 없이 사방이 확 트여 있다. 강풍 때문에 시계가 넓어진 것이다.
서쪽은 광활한 벌판이요 북쪽으로 가깝게는 덕유산 국립공원의 일부로 한국 백경 중의 하나라는 적상산(赤裳山, 1,034m)이 다가오고, 멀리로는 황악산, 계룡산(鷄龍山)이 머리를 내 밀고 있다.
남쪽으로는 남덕유산(南德裕山)까지 백두대산 줄기가 힘차고 변화무쌍하게 벋어가고 있고 그 뒤에 지리산 반야봉(般若峯)이 보인다.
그중 무엇보다 백미(白眉)는 동쪽으로 가야산(伽倻山) 금오산(金烏山) 등의 산들이 펼쳐지는 산파(山波)다.
푸른빛이 감도는 산의 물결과 그 뒤에 거듭 중첩되는 저 산들의 능선(稜線)들이 동쪽으로 펼쳐 주는 파노라마의 풍경으로 향로봉이 구천동 33경 중에서도 으뜸을 자랑하고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덕유산 향적봉이 '사진작가의 산'이라고 향적대피소의 투숙객의 80%가 사진작가란 말이 있었나 보다.
향적대피소 근처에 있는 송신탑을 지나서 향적봉에서 1km 거리에 있는 덕유산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중봉(中峯, 1594.3m) 전망대에 올라보니 우리 산악회 일행이 자나 갔을 오수자굴로 해서 백련사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삼공 탐방지 원소→백련사→향적봉: 총 8.5km/3시간// 백련사→오수자굴→중봉→향적봉: 총 5.2km/2:20
어제 함께 온 우리 산악회 산꾼들이 어제 지나간 코스다.
덕유산은 한반도 남쪽의 한 복판을 남북으로 치닫는 능선으로 옛날에는 신라 백제의 국경선이요, 지금은 영호남을 나누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경계선으로 평균 해발 높이가 1,000m를 훨씬 웃도는 능선길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다가 오늘은 기상 예보대로 강풍주의보까지 겹쳐서 종주 길은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었다.
그 중봉에서 송계 3거리까지는 1km의 거리지만 오르내리는 길의 연속이었다.
이정표 때문에 '송계 3거리'로만 알려진 백암봉(白岩峰)은 횡경재를 넘어 신풍령(빼재)으로 가는 갈림길인데, 이 신풍령-백암봉-남덕유 동봉-서봉- 육십령까지가 백두대간 줄기였다.
남덕유산을 향한 능선 길 내내 나는 겨울꽃 설화로 무장한 나무들의 열병식(閱兵式)을 받는 것 같았다.
키 작은 산죽(山竹)이 머리에 눈꽃을 이고 강풍 따라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은 어렸을 때 보던 어느 높은 사람을 환영하러 나와 흔들던 국기 같이 지금은 나를 향해 흔드는 깃발 같았다.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이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디카 한 장 찍고 카메라를 품에 품고, 거기서 뺀 배터리(5개)를 빼어서 체온으로 덥히면서 600 컷 이상을 찍고 또 찍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강풍과 손을 에는 추위 속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중봉 내리막길 이정표 앞에다가 아뿔싸 스틱을 두고 내려왔구나.
집에서 출발할 때 종주길에 무겁다고 스틱 중 제일 아끼던 가벼운 것으로 가져온 고가의 세계적인 명품이었는데-. 잃은 아쉬움보다 등산 내내 없는 불편함이 나를 괴롭힐 터인데 이를 어쩐다? 특히 하산 길과 눈길에는 더욱 필요한 것인데. '이럴 땐 인심이라도 쓰자.' 하는 마음에서 지나가는 산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보이는 이정표가 있지요? 거기 내 고급 스틱을 두고 왔으니 당신이나 찾아 가지세요."
덕유산 종주의 멋은 목적지를 바라보며 가는 산행이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이 돌아가는 산은 거의 없었고 앞에 보이는 까마득한 남덕유산의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 가장 힘들었던 무룡산
안성 지구의 갈림길인 '동업령' 고개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거기서 4.1km를 더 가야 하는 무룡산(1,491.9m)을 가는 것은 이 종주길에서 가장 힘든 코스였다.
배낭에 넣은 수통은 꽁꽁 얼어붙어서 물을 마실 수조차 없었고 따라서 점심은 어제처럼 그냥 지나친 지 오래여서 시장기가 엄습해 온다.
설화(雪花, 雪華)란 나뭇가지에 붙은 눈발로 우리들의 눈을 황홀하게 하는 것이지만 가만히 보니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칼날 같이 얼어붙은 얼음이었다.
이 지천으로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바람에 나 붓기는 이 설화는 지금은 나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주는 식수원이요, 아이스케키였다. 설화가 얼어붙은 가지를 옆으로 들고 뜯어먹다 보니 산상에서 갈비 잔치를 벌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눈을 건설(乾雪)과 습설(濕雪)로 나눌 수 있는데 습설이란 나무에 착 달라붙는 눈으로 산악사진가들이 기다리는 눈이다. 어젯밤에 비가 오다 눈이 오고, 그것이 강풍 방향으로 얼어붙었으니 그 광경을 어찌 필설로 말할 수 있으랴. 그것이 종주 어디서나 내내 볼 수 있으니 여기서는 설화 아닌 곳이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낙조(落照)가 시작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걸린 석양이라서 부지런히 용을 써서 이를 찍기 위해서 정상에 오르지만 1,492m이나 되는 무룡산이 생각처럼 쉽게 정상을 허하여 주겠는가. 겨우 겨우 정상에 올랐을 때는 해는 벌써 검은 구름 속에 숨은 해가 진 후였다.
산속의 밤은 일찍 오는지 헬기장을 겸한 무룡산 정상에 도착하였을 때는 해드 랜턴을 머리에 둘러야 했다. 믿을 것이 해드 랜턴뿐이라서 아침에 갈아놓은 배터리였지만 '여분을 하나 더 가져올껄-' 하는 공연한 걱정이 앞선다.
까만 하늘에는 별들이 그중에도 겨울별 카시오피아와 오리온 좌가 유난히 빛나고 있다.
밤길이라서 내 뒤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난다. 힘들다고 눈을 감고 쉬거나, 실족이라도 하는 날에는 '나무 아미 불-' 나는 얼어 죽는 길밖에 없구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엄습한다. 어두움은 두려움도 몰아오는지-, 작년 지리산 피아골 가는 길에 곰을 만났을 때의 '곰 대피요령'까지 떠오른다. 이 길이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할 때 스틱은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 물건을 잃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을 잊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법이다.
이런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는 탐방로 11개 구간에 총 146개나 되는 다목적 위치표지판을 500m 간격으로 세워 놓았다. 그뿐 아니라 이동통화 불능 지역에는 중계기를 세워놓아서 그 전면에 있는 녹색 스위치를 누르면 전방 5m 내에서 통화가 3분 정도로 가능하도록 배려하여 놓았지만, 자기 회사 제품 이용자에게만 베프는 제한적인 친절이 얄밉기까지 하다.
무룡산에서 삿갓재 대피소까지는 2.1km이었지만 빙판길 내리막길에다가 밤이라서 더 조심하느라고 밤 8시 가까이 돼서야 삿갓재 대피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피소는 삿갓봉 1km 바로 아래에 있는데, 향 적대 피소보다 더 크고(수용인원 67명 전화:010-5423-1452) 시설도 좋았다.
식수가 60m 가야 있다지만 피곤한 몸 때문에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사 먹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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