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3 11:01:06, 조회 : 1,059, 추천 : 0 |
문경 새재 도립공원 Photo 에세이
(2009. 3. 25/문경 제1관문(조흘관)→여궁폭포(0.8km)→혜국사(2.0km)→대궐터(3.0km)→주흘주봉(4.5km)→꽃밭서들(7.0km)→제2관문(9.5km)→제1간관문(12.5km)/ 산내음 따라 홈 http://cafe.daum.net/sweetsannaeum *. 문경 새재 이야기 낯선 고장을 찾아 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젊은 날의 추억을 더듬는 길이다. 역마살이 있어 젊어서부터 국내 명승지는 거의 다녀본 셈이지만 그때는 남들을 따라 다녀온 곳이라서 대충 보고 온 곳들이었다. 그러다가 글쟁이가 되어 글의 소재를 찾아다니는 입장이 되고 보니 떠날 때는 행선지의 정보는 물론 지도와 디카와 Mp3로 무장하고 찾아가기 때문에 현지의 하나하나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평생을 살아온 몸이라 나는 그 지명이나 전설에 남다른 애착과 관심을 갖고 살게 되었다. 내가 '우리내음산악회' 따라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문경새재 도립공원'이다. 우선 ‘문경(聞慶)’의 어원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문경은 ‘聞喜慶瑞(문희경서)’의 준말이다. ‘聞喜(문희)’란 들을 ‘聞(문)’ 기쁠 ‘喜(희)’이니,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뜻으로 고려시대 이 고장의 옛 이름이 ‘문희(聞喜)였다. ‘慶瑞(경서)’는 경조와 같은 말로 경사스런 조짐이란 뜻이니, 문희경서(聞喜慶瑞)란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 경사스럽고 상서로운 조짐의 고장이란 말이 되겠다.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는가. 옛날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오가던 영남 지역 선비들이 좋은 소식은 장원 급제(壯元及第)였다. 그 소식을 듣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문경(聞慶)이란 말이다. <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가 바로 ‘새재’다. 이 고개는 낙동강과 남한강의 뱃길을 이어 주는 고개로 이 새재를 넘어가 충주에서 배를 타면 남한강으로 해서 한강 나루터까지 수로(水路)로 연결되던 중요한 고개다. '새재'는 청운의 뜻을 품고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길에서 만나 넘던 고개요, 영남의 보부상(褓負商)들이 고장의 산물(産物)을 지고 넘던 교통의 요지는 물론이요, 국방의 요충지며 충북과 경북의 도계를 긋고 있는 고개다. 이 ‘새재’의 어원으로는 다음과 같은 유래담이 전하여 오고 있다.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嶺)’라 해서 새재(鳥嶺)라고 했다는 말도 있지만, 부근에 있는 지릅재(鷄立嶺)와 이우리재(伊火峴:이화령)의 사이에 있는 재라서 ‘새(間)+재(嶺)’라 했다는 전설도 전하여 온다. 이와 약간 다른 이야기로는 그 두 고개 보다 뒤에 새롭게 생긴 재라 해서 ‘새(新) +재(嶺)’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헌상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사'에는 이 고개를 '초점(草岾)'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점(草岾)이란 풀 ‘草(초)’ 고개 ‘岾(점)’으로 억새풀이 많은 고개란 뜻이겠다. ‘새’는 억새의 준말이다. 그래서 ‘새(억새)+재(嶺)’라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새재의 유래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조령(鳥嶺)’이란 우리 말 ‘새재’의 한자어다' 라고. 우리가 흔히 경상도 지방을 영남(嶺南)이라고 하는데 그 명칭도 이 조령(鳥嶺) 의 남쪽 지방이라 해서 생긴 말이다. *. 문경 새재 도립공원 집에서 떠나올 때는 문경의 진산이라는 주흘산(1,075m ,主屹山) 등산 가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나섰다가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들어서니, 정성껏 깔끔하게 꾸며 놓은 하나하나가 등산을 할까 관광을 할까 망설이게 한다. 오늘 우리들의 등산 코스는 제1관문에서 시작하여 주흘산 정상에 갔다가 제2관문으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있는 옛길박물관이나 KBS촬영장도 그냥 지나쳐야 한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새재의 어원이 되는 조령관(鳥嶺關)이라는 제3관문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이 좋아 산악회를 따라 온 내가 어찌 산행 아닌 관광을 하랴. 그렇다고 언제 다시 온다고 그냥 지나치랴. 해서 다리와 카메라가 바빴다. 관리소를 지나니 멋진 한옥식 전통가옥 모양의 흰 3층의 건물이 나타난다. '옛길 박물관'이었다. 세 개의 전시실에 문경의 역사와 생활상과 관계있는 260여종 4,200여점의 유물을 교체 전시한다는 곳이다. 그 바로 옆에 '縣監申吉元忠烈碑'(현감신길원충렬비, 유형문화재 제145호)는 이곳이 임진왜란 때의 격진지임을 생각게 한다. 이곳에는 비가 있지만 제1관문 근처에 공의 충절을 기리는 지방 유지들이 나라를 위하여 살신호국(殺身護國)한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공의 사당 '충렬사'가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임종 시는 단지를 하여 연명케 할 정도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문경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문경으로 왜적이 다가와 모두들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고 충복 하나와 함께 의관을 정제하고 관인을 차고앉았으니 적병이 칼을 들고 항복하고 길 안내를 하라고 협박하는 적을 꾸짖으며 항거하다가 사지를 절단당하여 순국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좌승지로 추증하고 이 비를 세워주었다. 문경새재와 임진왜란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신립(申砬) 장군이다. 선조 25년이던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 1진이 열흘만에 조령을 넘어 탄금대에 당도하였을 무렵이었다. 그때 삼도 순찰사(三道巡察使)가 되어서 충주에 내려왔더니 군관 60여 명과 군졸 40,00여명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온 순변사 이일(李逸)이 울면서 왜군은 맞설 수 없는 대군(大軍)이라 하였다. 그때 지형이 험준한 조령에서 잠복하여 전투를 벌이자는 수하 장수 김여물의 의견을 듣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서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기다리다가 고니시(小西行장將)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참패하여 수많은 충주 백성과 관속이 죽자 부하 김여물, 박안민 등과 함께 남한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하였다. 그런데 신립장군은 왜 천험의 요새 새재를 버리고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게 된 것일까. 정사(政事)에서는 신립이 기병전의 달인으로 기병전(騎兵戰)으로 그 동안 여진족을 물리쳤기 때문에 산보다 들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 하였을지도 모르는데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항간에는 그보다 젊어서 산 속에서 만나 구해준 여인이 함께 살고 싶다는 청을 거절하고 돌아오다 보니, 집에 불을 붙이고 지붕에서 타죽은 처녀의 원혼이 꿈에 충주의 배수진을 치면 전승할 것이라는 현몽 때문이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 타임캡슐광장 타입캡슐광장을 지난다. 서울남산에서 보던 타임캡슐광장과 같은 것 같다. 경북 100주년이 되던 1996년에 첨성대 모양의 이 타임캡슐을 지하 6m에 묻은 것이다. 지금부터 경북 500년이 되는 2396년에 후손들에게 현재 경북의 생활 풍습 문화 등의 삶의 모습을 전하고자 하는 큰 뜻에서 세운 탑이다. 그 속에는 100품목의 475종의 유물을 묻었다 한다. 경북 인들은 어느 고장보다 애향심이 강한 것 같다. 안동 권씨가 가문을 자랑하는 것처럼 선비 정신을 기리는 선비 탑을 세운 것 또한 그러하다. 조선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가장 우러르는 대상이 양반들에게는 선비요, 양반과 서민들의 최고의 덕목이 효자 열부였다. 이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는 영남의 관문으로 선비는 한국인의 상징으로 인간과 지성의 모델이었다. 그래서 갓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선비를 중심으로 둥근 광장 6면에 선비와 관련된 부조와 함께 그들의 시를 시비에 음각하여 놓았다. 소학(小學)에 이런 말이 있다. 立身行道하고 揚名於後世하여 以顯父母하면 孝之終也라(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 즉 출세하여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쳐서 부모를 현저케 하면 효의 마지막이니라. 그 입신출세 길이 과거길이요, 그러기 위해서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넘던 고개가 바로 이 새재다. 이 문경 새재 길은 우리나라 교통부가 지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에 하나로 지정 된 아름다운 길이다. 이 고개는 임란 이후 군사요충으로 중요시 하여 제1, 제2, 제3관문을 세웠는데 세월에 훼손되어 제2문 주흘관만 남아 있던 것을 나머지도 다시 복원하니 그 멋진 모양이 기대 이상이었다.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는 문경새재 외에도 죽령과 추풍령이 더 있었다. 그러나 '죽령' 길은 너무 먼 길에다가 죽령은 ‘주욱 미끄러지는 고개'. 또는 '죽 쑤는 고개'라는 속설 때문에 가장 힘들다는 문경새재를 주로 넘었다는 것이다. '추풍령(秋風嶺)'도 그랬다.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과거에 떨어진다는 방정맞은 뜻이 내포 되어 있어서 선비들은 이를 외면하고 급제의 길에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문희(聞喜, 문경의 옛이름)의 새재를 택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 높이를 보니 제1관문 주흘관이 겨우 244m이고 제2관문 조곡관도 380m밖에 안되지만, 당시로는 워낙 깊은 오지 산길인데다가 산짐승이나 산적이 많아서 10일 단위로 사람이 모여 함께 넘어야 할 정도로 험한 길이었다. *. 문경관문(聞慶關門, 사적 제147호) 관문(關門)이란 국경이나 요새에 세운 문으로 적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기 때문에 적을 막기에 좋은 목이 되는 문이 관문이었다. 그래서 문경 새재에서 가장 볼거리가 제1, 제2, 제3 관문이다. - 이 관문은 동쪽에 있는 계립령과 더불어 중요한 관문이다. 고려 태조가 경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문경의 옛이름)을 지날 때 성주(城主)인 흥달(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소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 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임란 때 이곳이 함락되자 충주의 의병대장 신중원(辛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고 왜병을 기습하였다. 숙종 때 3중의 관문을 완성하여 제1관문(主屹關), 제2관문(鳥東門, 鳥谷關), 제3관문(鳥嶺關)이라 이름하였다. *. 주흘산의 정상은 주봉인가, 영봉인가 문경새재 제1문인 주흘관을 나서서야 내가 드디어 지금부터 주흘산 등산이 시작되는구나 하였다. 그만큼 새재 영남대로 길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때는 봄이고 여기는 수도권보다 남쪽이라서 꽃을 덤으로 볼 수 있겠구나 하였는데 꽃은 고사하고 손이 시려서 장갑을 끼지 않고는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주흘산까지는 4.5km인데 가는 길에 여궁폭포로 해서 해국사를 거쳐 가는 모양이다. 주흘산은 문경의 진산(鎭山)이다. 주흘산(主屹山)에서 '屹(흘)'은 산 우뚝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산에는 진산이라는 1,075m인 주흘산보다 더 높은 1,106m의 영봉이 그 1.3km 서북쪽에 있다. 거의 모든 등산서적에는 주흘산 정상을 '주흘산(영봉)'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문경 주흘산 등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현지의 거의 모든 안내도에는 '주흘산 정상/ 영봉 정상' 아니면 '주흘산 주봉/ 주흘 영봉'으로 표기 하고 있다. 관리소에서 나누어 주는 주흘산 안내도에서는 아예 '주흘산(주봉)/영봉'으로 표기 되어 있다. 그것은 문경에서 보면 영봉보다 주봉이 두렷이 바라보여서 그런 것 같다. 주봉 아닌 영봉에 가면 볼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을 듣고 보면 정상의 전망이나 정상의 모습이 주봉이 영봉보다 더 좋아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주흘산에는 주봉이란 말이 덧붙게 된다.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이 문경에 왔으니 문경 분들의 의견에 좇자. 산 높이로만 따져서 그래도 영봉이 주흘산이라고 생각한다면 중국의 태산(泰山)을 보자. 중국의 태산은 높이가 한라산(1,950m)보다, 지리산 천왕봉(1,915.4m), 설악산 대청봉(1,709.9m), 덕유산 향적봉(1,614m)보다 낮은 1,450m이면서도 방대한 대륙인 중국 10대 명산 중에서도 제1로 꼽히는 것이 태산이 아니던가. 곡층골을 오른쪽에 끼고 산을 오르는데 충렬사에 개나리가 피었을 뿐 다른 꽃은 눈에 띠지 않았고 오히려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여궁폭포를 향하다 보니 길 좌측 위로 건물이 보이더니 이어 갈림길이 나타난다. 아까 그 건물은 여궁휴게소로 그 길은 혜국사 가는 길이었다. 여궁폭포 가는 길을 생략한다면 혜국사 가는 지름길이었다. 직진하여 여궁폭포를 향하다 보니 멋진 다리 건너 큰 바위 절벽이 막아서고 그 절벽사이로 높이 20m의 여궁폭포(女宮瀑布)가 중천에서 바위 사이로 하얀 포말을 떨구고 있다. 여궁(女宮)이란 궁중에서 봉사하는 여자의 관직을 뜻하는 말인데 그 폭포의 아래 모습이 여체의 궁둥이와 연관하여 여궁폭포라 한 것이라 생각된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전설어린 여궁폭포(일명 파랑소)를 뒤로 하고 가는 길은 역 U자 형의 길로 아까 혜국사 지름길의 합류지점까지 다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다 다시 올라가면서 저 아래로 환상적인 여궁폭포 다리를 굽어보며 가는 길이 된다. 혜국사(惠國寺)는 주흘산 가는 길 건너에 있었다. 그래서 절 뒤로 해서 일부만이라고 보고 가려고 올라갔더니 길은 도중에 끊어지고 절 쪽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비탈길이어서 되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혜국사에 이르는 임도가 따로 있는 것을 보니 차로도 방문이 가능한 고찰 같았다. 혜국사(惠國寺)는 신라의 고찰로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주흘산 기슭에 법흥사(法興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 가는 길에 이곳에 파천(播遷)하여서 나라가 은혜를 입은 절이라는 의미에서 혜국사(惠國寺)로 개칭하여 불리게 되었다. 이 절은 해발 550m에 있어서 옛날에는 등산객들에게 급수공덕(汲水功德)이나 긴급 피난처였던 외진 고찰이었다. 혜국사에서 주흘산 정상까지는 2.0km였다. 안적암(安寂庵)을 찾아 거기서 무성한 소나무 수림을 지나 안적암 가는 갈림길인 해발 640m의 지점에 이정표가 '주흘산 1.6km'를 가리키고 서 있다. 그러나 안적암은 매정하게도 등산객이 못 들어오게 나뭇가지로, 포장으로 철옹성 같이 굳게 막아 놓고 있다. 이 양 갈래 길은 주흘산 가는 길로 합류되는 길이어서 그 모습이나마 먼발치로라도 보고 싶었는데 '수도중이니 외인출입금지'라는 것이다. 주흘산 정상 못 미쳐 해발 860m 지점에 공민왕 행궁터가 있다. 생각보다는 넓지는 않았지만 올겨울 가뭄으로 말라붙은 대궐약수터가 있는 것을 보면 공민왕과 얽힌 혜국사의 이야기가 여기와도 연관되는구나 생각하게 한다. 산죽길에 이어 능선길이 시작된다. 추운 봄날씨여서인가 오름길에도 지금까지 그리 힘든 길이 아니었는데 능선 길에 들어서니 좌우에 전망이 트여서 몸도 눈도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편안한 길로 10분을 오르니 '주흘산 0.1km/ 제2관문 4.2km'라는 이정표가 갈림길을 긋고 있다. 그 이정표에서 10분을 더 오르니 거기가 정상으로 시야가 열리며 문경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등 조망이 일품이다. 남쪽으로 보이는 멋진 봉이 관봉(1039.1m, 일명 꼬깔봉)이고 그 반대쪽이 영봉(1,106m)이다. 내가 올라온 길은 험하지 않은 육산이었지만 문경 방면에서 보면 깎아지른 절벽의 우람한 봉을 자랑하는 것이 주봉 주흘산인 모양이다. *. 주흘산 하산길 생각 같아서는 영봉으로 해서 제3관으로 하산하고 싶었지만 초행길인데다가 함께 온 산악회 회원들과 너무 떨어진 후미에 있어서 욕심을 버리고 다시 갈림길로 되 내려왔다. 거기서 하산 길은 제2관문까지 4.2km로 북쪽으로 해가 비치지 않는 눈길에 계속되는 내리막길이었다. 그 길은 조곡골을 끼고 내려가는 길로 눈 덮인 계곡에는 멋진 고드름이 자주 발길을 묶고 카메라의 눈을 열게 하였다. 금년에 마지막으로 밟아보는 눈길 같았다. 이 길 도중에 영봉 하산 길과 합류지점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꽃밭서들'이 있다, 거기도 꽃은 피지 않아 풍광은 그렇고 그럴 테지- 하였다. '꽃밭서들'은 주흘산과 제2관문 중간지점이 되는 3km 거리의 해발 615m 지점에 있었는데 이를 본 순간 '아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봄이면 진달래꽃과 물박달나무 군락이 자라는데 봄은 일러 아직 꽃은 볼 수 없었지만, 여기엔 꽃보다 더 아름다운 돌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서들'이란 '서덜'의 사투리다. 서덜은 너덜겅처럼 냇가나 강가에 돌이 많은 곳을 말한다. 이곳을 지나가던 길손이 자기의 소원 성취를 빌기 위해서 조곡골의 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쌓은 것이 수천 개의 불탑이 되어 있었다. 그 곳은 꽃밭서들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 넓게 걸쳐 분포한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듯이,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들끼리 모여 어울리는가. 층층으로 쌓은 것 같은 기암괴석이 계곡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나는 그 계곡을 '무릉서들'이라고 명명해 주고 싶다. *. 영남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여행은 생략의 예술이다.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그 전체를 버리고 그 일부만 보고 가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해발 380m의 ‘영남 제2관문 조곡관’에 오니 가야할 제1관문 주흘관이 3km 거리라서 여기서 3.5km라는 제3관문을 보겠다는 욕심을 접고 서둘러야만 했다. 일행은 벌써 주차장 근처에서 뒤풀이를 시작하녀 나를 부르고 있다. 문경새재에서 볼거리는 산보다 새재계곡의 영남대로의 길 따라 있는데 거기까지 서둘러 가도 1시간 내외다. 어찌 도중의 교귀정, 원터 등을 보랴. 그렇다고 다음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어서 달려가듯 경보(競步)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우측에 조곡폭포였고 교귀정이었다. 조곡폭포는 겨울 가뭄으로 말라버렸는데 그 다음에 만난 '조령 산불됴심 표석'(경북문화재자료 제226호)이 국문학인 나의 발을 멈추게 한다. -157cm의 이 표석은 행인의 발길이 잦은 이곳의 길손들에게 산불예방은 물론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무엇보다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한 순수 한글로 인하여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는 이 고개를 넘던 이들이 선비 같은 양반들보다 서민들이 더 많았다는 것과 그 한글비가 쓰인 연대를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됴심→죠심→조심'에서, '됴심→ 죠심'은 18세기 이후에 생긴 구개음화현상이요, '죠심→ 조심'은 19세기 이후에 생긴 단모음화 현상이기 때문이다. 곳곳에 옛 선인들이 남긴 한시를 한역하여 음각하여 놓은 것도 있다. 산길은 한 갈래로 나누어졌어라. 해는 용추의 눈을 비추이고 바람은 주흘산 구름을 몰아오네. -목대흥(1575~1638) 소원성취탑을 지나고 있다. 문경새재를 지나던 길손들이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를 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자식이 없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게 된다는 전설어린 탑이었다. 제1관 가는 길에는 오직 하나 남았다는 ‘옛과거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고 새재계곡에는 꾸꾸리바위, 용담폭포 용추폭포, 용추약수가 있었으나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교귀정이요 그 옆 낙락장송의 노송이었다. 교귀정이란 경상감사의 교인식(交印式)이 이루어진 곳이다. 교인(交印)이란 신구감사가 인수인계하던 장소란 말이다. 일행보다 한 시간 이상 떨어진 나를 배려해서 보낸 차가 오고 있다 한다. 어찌 점심까지 굶고 애써 따라가는 이 연로한 나를 두고 우리끼리 식사하겠느냐 하며 보낸 차다. 덕분에 영남대로 상에 있는 주막과 과객이 묵고 간다는 원터를 아쉽게도 그 친절 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구나. 내 마음에는 나를 그냥 놔 두어서 밥보다 더 좋은 그 경치를 카메라에 담아오고 싶었는데-. |
|
글은 인터넷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코멘트 부탁드려요. |
2009-04-05 05:35:23 |
|
드랙하여 이 사이트에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고, 테그로 써서 올리면 위와 같이 되어 수정하려면 그것이 불가능하고 이런 일이 제겐 1년 이상 계속되어 그냥 올립니다. 양해하시며 보시기를. | 2009-04-03 11:06:22 |
|
후미에서 천천히 오르신다고하셔서 혜국사와 여궁폭포 보시고 문경3관문으로 오르신줄 알았는데,.저희와 같은코스로 천천히 살펴보시며 모두 보셨으니 대단하셨습니다. 식당주인의 친절로 다행히 승용차로 걸어서는 한시간정도 걸을거리를 모셔와주어 감사했습니다.. 자세한 유래와 관련이야기를 읽으니 더욱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운 문경새재 부근의 멋진산을 다시 가고파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
2009-04-03 11:29:44 |
|
일만 선생님 늘 건강하시죠. 지금도 MP3 들으시면서 산행하시나요 안전하고 즐거운 발걸음 하시기 바랍니다. |
2009-04-03 16:25:17 |
|
설명 자세하게 해주셔서 우선 감사 말씀 드리겠습니다...제가 아마도 나중에 이곳을 답사 한다면 님께서 산행기 올려 주신 정보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말씀하신데로 흠잡을때 하나 없는 좋은 산은 분명한것같습니다..덕분에 사진 감상 잘 했습니다..즐산행 이여 가십시요..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2009-04-03 20:13:27 |
|
여러번 다녀온 주흘산...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읽으니 다시한번 다녀오고싶네요 멋진후기 즐감하고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
'☎ 일만 산행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산 산행(1)/영실~ 어리목 (0) | 2009.04.14 |
---|---|
한라산 산행 (0) | 2009.04.12 |
덕유산(德裕山) 종주(상) (0) | 2007.04.03 |
덕유산(德裕山) 종주(1) (0) | 2007.02.11 |
북한산 상장봉(上將峰, 534m) 능선 산행 (0) | 2007.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