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늙어 직장을 떠나게 되면 준비된 노년을 살아야지- 하며 젊어서 열심히 저축하여 사놓은 나의 상가가 시내에 둘이 있는데, 하나는 2년 넘도록 비어있고, 또 하나는 불경기로 세가 제 때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술 약속이 있어 광화문에 나가면서, 다 큰 양보다 더 늙은 양인 내가 입만 가지고 나가는 것이 부끄러워서 남대문 모자 가게를 들렸다. 오늘 같이 춥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에는 문인들이 즐겨 쓰는 빵모자가 제격이라 그걸 사기 위해서다.
1차는 샤부샤부로 청암님께, 2차는 따끈한 정종으로 석우님께 공술을 얻어 마시고, 나를 염려하며 제 각기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정류소에 가보니 버스가 끊긴 지 오래다. 벌써 밤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찜질방을 찾아 세종로 지하도를 지나다 보니 홈 리즈가 술판을 벌이고 있기에 나도 그 사이에 끼어 노숙자(露宿者)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한옷을 입은 도사풍의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40대 초반 강 씨, 깨끗한 모습의 60살 노인, 30대 중반 총각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 찜질방 갈 돈 거금 1만 5천 원이 금년 들어 최고로 춥다는 초겨울 한밤중의 우리들의 노상 만찬의 군자금 총액이었다.
"여보, 택시 타고 어서 들어와요, 택시 비 준비하고 나갈 테니-.'
급히 핸드폰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지금 막 성찬이 시작되려는데 이 무슨 재 뿌리는 소리인가. 한옷을 입은 강 씨가 떨고 있기에 두툼하게 입고 간 세타를 벗어주었더니 주위가 그렇게 권하건만 입지 않고 떨고만 있다.
'주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거지가 아니다. 강 씨는 인생에서 가장 넘기 어렵다는 가난이라는 고개를 넘고 있는 중일뿐이었구나.' 하였다. 그는 코 수염을 길게 기르고 머리가 어깨를 훨씬 내려갈 정도로 긴 머리를 열심히 뒤로 넘기고 있었다.
세 사람 다 한결같이 담배가 가장 필요하다고 해서 카드를 긁어서라도 사주고 싶어서 동아일보 쪽과 그 건너 교보 쪽 24시 슈퍼를 찾아갔건만 담배는 팔지 않았다.
사람이 몇이기 때문에 왜 홈 리즈가 되었는지, 가족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노숙하면서 어떤 일들이 제일 괴롭히는 일들인지-. 묻고 싶은 것은 생략한 체 엉뚱한 이야기만 하다가 앉은 체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은데 어깨를 곱게 흔드는 이가 있다.
지하철에 파견 근무하는 전경인 것 같았다.
"함께 식사하러 가시지요?"
긴 머리 강 씨가 근처 교회에서 노숙자들에게 주는 아침을 먹으러 가자는 부탁을 가볍게 거절하다 보니 그것이 그분들과의 마지막 만남이고 이별이 되고 말았다.
한참이나 기다렸다가 5호선 첫차를 타고 가다가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 타고선 깊이 잠들었다가, 아내의 전화 소리에 문득 눈을 떠보니 시간은 9시인데 충무로를 막 지나고 있지 않는가. 분명 일산 가는 차를 탔는데 그 3시간 30분 동안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다가 어디서 내리지 못하고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일까?
지금 나는 아내와 냉전 중이다. 말없이 차려 놓고 나간 아침밥을 점심으로 먹고, 아내의 도끼눈을 피해 가며 저녁을 먹고 그리고 자면서-.
나는 지금 내가 아내에게 무엇을 잘못한 줄도 모르는데 사이렌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 지금 내가 갈 곳은 찜질 방밖에 없는데, 찜질 방 갈 돈은 엊저녁 다 마셔 버렸는데 사이렌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울려오고 있다.
"잔소리 경보, 잔소리 경보! 지금은 빨리빨리 외출할 때다. 대피할 때다. 잔소리로부터 몸을 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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