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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가는 길(상)/ 고구려 유적지

ilman 2007. 2. 11. 11:02

 

 
고구려가 숨쉬는 유적지를 찾아서(상)/


(2005. 6.29~7. 4/‘위화도- 졸본성- 국내성터 /'백두산트레킹'’ 따라 전: 02-2611-0062 )

*. 만주(滿洲)에 살아있는 고구려의 얼 
  백두산(白頭山)을 만주(滿洲)를 통하여 오르면서 고구려 유적지를 보지 못하고 오는 것은 경주에 갔다가 불국사나 석굴암 첨성대를 보지 않고 오는 것과 같이 허망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로 인천항을 떠나 백두산 트레킹을 떠나는 경우 단동(丹東)에서부터 장백산 서파(西陂) 입구까지 버스로 11시간을 오고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맑은 날씨가 아니라서 천지(天池)를 굽어보지 못하고 오는 복(福)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허망함을 조금이라도 달래 주는 곳이 고구려 유적지(遺跡地) 답사다.
 요번 백두산 트레킹에서 그 유적지 답사와 아울러 분단의 비극을 실감하게 하는 압록강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곳은 다음과 같았다.
갈 때 "위화도- 국내성터- 광개토대왕 비와 릉-장군총(장수왕릉)"이었고, 다녀올 때는 "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환인의 졸본성터- 독립군의 청산리 싸움으로 유명한 청산골 여진족민속촌- 만리장성 끝이라는 호산장성과 - 압록강 철교"였다.
간도(間島, 젠따오)를 가보고 싶었지만 우리들 일정에는 없었다.
우리나라 한족(韓族)들이 많이 사는 간도(間島, 젠따오)는 서(西) 젠따오와 동(東) 젠따오 둘로 나누는데 우리가 말하는 북간도(北間島)란 동(東) 젠따오로 우리들이 가보지 못한 길림성(吉林省) 두만강 주변을 말한다.  
길림(吉林)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主都)로서 인구 약 30만 중 우리 조선족이 59.6%요, 시 전체의 면적은 747.4㎢이지만 도심만 따진다면 18.6㎢에 지나지 않는다.

  만주(滿洲)를 중국어로는 '뚱뻬이'라고 한다. 중국의 북동부의 3성인 요녕성(遼寧省, 랴오닝), 길림성(吉林省,지린), 흑룡강성(黑龍江省, 레이룽장)으로 이루어진 지방이다. 심양(瀋陽)과, 장춘(長春), 하얼빈은 각각 그 성도(省都)이다.  일본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 일대를 점거하고 이듬해에 일본의 괴뢰 정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이후부터 이 뚱베이를 우리들은 만주(滿洲)라고 부른다.
원래 이 지역은 여진족(女眞族)이 살면서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지역으로 우리 한반도의 6배나 되는  123만㎢의 크기다.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미작지대(米作地帶)가 바로 이 만주 지역이기도 하고- . 

 

*. 통한의 섬 위화도(威化島)를 지나며 
어제 저녁에 인천항을 떠난 배가 신의주(新義州)가 빤히 보이는 압록강 하류인 중국 단동(丹東)에 도착한 것이 아침 9시였다.
거기서 상류 쪽으로 2km 거리의 압록강 가운데에 여의도와 같이 산과 언덕 하나  보이지 않은 기다란 섬이 위화도(威化島)였다.
여의도의 1.6배로 길이는 9km나 되는 길쭉한 예부터 북방의 국방 요새(要塞)가 되는 섬이었다.
 멀리서 보니 초원인데 띄엄띄엄 보이는 건물은 다 군 시설물 같았다. 이 위화도는 토질이 비옥하여 옥수수, 조. 콩, 수수 산출량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다.
 고려 공민왕이 친명(親明)을 친원(親元) 정책으로 바꾸면서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였다.
 명 나라가 함경도 영흥 땅을 무단 점거하려 하자 최영 장군이 8도 도통사가 되어 요동(랴뚱) 정벌에 나섰으나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왕명을 거역하고 5월 20일 개경(開京)으로 회군하여 돌아와서,  최영장군을 지금의 고양시에 유배시켰다가 죽이고, 우왕은 강화도에 유배시켜 버렸다.
그래서 고려로 보아서는 위화도(威化島)는 회한(悔恨)의 섬이지만 이성계에게는 조선 왕권의 기반을 구축하된 회심(會心)의 섬이고, 분단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통한(痛恨)의 섬이 되었다.

*.  425년 간 고구려의 수도 집안(集安, 지안)

  단동(丹東)에서 집안(集眼)까지는 버스로 5시간을 달려야했다.
옛날 우리들의 땅이라서 그러한가. 한가한 우리나라의 시골 농촌 길을 달리는 것과 같았다.
유난히 평야가 길었고 옥수수 밭이 계속되고 있었다. 길 가에 보이는 집들은 거의 단층인데 창문을 통하여 보이는 내부는 어느 집이나 텅 비어 있었다. 커튼과 가구가 없이 사는 가난한 농촌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북동부 변경이라서 그러한가, 금년 봄에 다녀온 상하이(上海)나 항저우(杭州)를 지나 황산(黃山) 가는 길에서 본 사람들과 생활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았다.
  집안(集案)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총 203.5km나  북한과 접하고 있는 국경도시로 최근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고 이를 자축하고 있었다..
 집안은 우리 고구려의 425년간의 수도여서 고려 유적이 많았다.
유명한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將軍塚), 해동 제일의 고비(古碑)로 알려진 광개토 대왕 비廣開土大王碑), 동북아의 돈황(敦煌)이라는 오회총(五회塚)  4, 5호 무덤 등이 여기저기 산재하여 있기 때문에 한국의 관광객이 몰려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23만6천 인구에 3,721㎢의 넓이의 이 집안에는 조선족은 물론 한족 만주족 등 18개 민족이 살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 문화 유명도시로, 우수 관광 도시, 국가급 생태 시범구, 건설 시범 도시이자 압록강 국가수리 풍경구, 세계문화 유산지로서 이 지역 주민들은 지금 한창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를 우리 한국 역사 속에 고구려로 보지 않고 있었다.
'중국 집안(中國集安)'이란 관광책자를 150원(元, 2만원)에 샀더니 거기에도 우리의 고구려가 아니라 "기원전 3세기부터 427년 까지 중국의 고대 소수 민족 정권인 고구려가 무려 425년 동안 집안을 수도로 삼고 있으면서 수많은 찬란한 역사 유적을 남겨 두었다."로 집안을 자기 나라 역사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관(史觀)으로는 고구려를 '중국의 고대 소수 민죽 정권'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첫 번째 수도 졸본(卒本)/ 오녀산성(五女山城)
 
 주몽(朱蒙)이 북부여(北扶餘)의 일곱왕자의 추격에 쫓겨 오리, 마리, 협부 세 사람과 함께 송화강 유역인 엄리대수(奄利大水)에 이르러 길이 막히매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뒤쫓는 군사가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때 갑자기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그들에게 강을 건너게 하였다. 그리하여 비류수(혼강=졸본천)에 이르러 도성을 짓고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니 그곳이 졸본(卒本)이었다.

 졸본(卒本)은 토양이 비옥하고 산과 내의 지세가 험하여서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여서였다.

 졸본(卒本)은 환인(桓仁)에서 10km 북쪽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을 말한다.
오녀산성은 비류수 골짜기의 홀본[졸본] 서쪽 산 위에 쌓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잠수함 같이 생긴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성이었다.
오녀 산성(五女山城)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성벽의 높이는 5~6m로 정상은 넓고 평평한데 거기에 천지(天池)라고 하는 못이 있고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샘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주몽은 기원 전 37년부터 약 18년간 이곳 환인 지역 졸본(卒本)에서 백성을 다스렸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주몽 시절의 고구려 연호는 다물(多勿)이다. '다물(多勿)'이라는 말은 고구려 말로 '옛땅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宋대 '자치통감') 옛땅은 물론 고조선과 부여의 땅이니 그것을 되찾는 것이 고구려의 건국 이념이었던 것이다.
이 부근에 많은 고분군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정은 버스에서 잠시 내려 졸본 성을 멀리서나마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 졸본성이 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란 이름으로 전해 올까? 현지에 전해 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물론 고구려와는 관계없는 남의 나라 전설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장천룡 장군이란 사람이 있어 오랑캐 호적(胡狄)을 물리치러 이곳에 왔다가  서민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쫓아내고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이곳에 눌러 살게 되었다.  주민 남녀 각각 5명씩을 뽑아 무예를 가르쳐 백성들로 하여금 청, 홍, 흑, 백, 황 오룡봉(五龍峰)을 지키게 하였다.
어느 비 오는 날 호적(胡狄)이 침입하였을 때 봉화를 올릴 수 없는 다섯 여장부들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이곳에서 장렬히 죽으매 그 이후부터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그래서 이 봉우리들의 이름이 천녀봉(天女峰), 옥녀봉(玉女峰), 삼녀봉(參女峰), 수녀봉(秀女峰), 춘녀봉(春女峰)으로 여(女)자가 들어가는 여자 이름이다. 환인현 혼강 가 시가지 입구 삼거리에는 이 오녀(五女)의 호국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가 1998년에 세운 '오녀상(五女像) 동상'이 있다.

*. 두 번째 수도 국내성(國內城)

졸본이었던 수도를 고구려 2대 유리왕 3년에 통화에서 버스로 3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국내성(國內城)으 로 옮겼다.
국내성(國內城)은 졸본보다 인근 다른 부족국가와의 투쟁에서  유리한 곳이었다. 압록강 지류를 끼고 있어서다.
게다가 농사가 잘 되고, 짐승과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천연적인 좋은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성 둘레가 2,686m로 북문, 남문이 한 개씩, 동문 서문이 2개씩 총 6개의 문을 가졌다는 곳이다.

*.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의 수도에는 삼경(三京)이 있다.
첫 도읍지 졸본(卒本)과 두 번째 수도 국내성(國內城)과 세 번째 평양성(平壤城)이 그것이다.
 우리는 백두산 오가는 길에 그 졸본성과 국내성을 잠깐 들려 사진 몇 장 찍고 일정에 쫓겨 왔지만 백두산을 향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소홀히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마치 옛날 우리 조상이 살았다는 집을 잠깐 둘러본 격이었지만 지금 그곳은 남의 땅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서 감회가 여느 곳과 다른데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의 고구려 땅이 남의 땅이 되어버린 것일까?
오랫동안 수(隨)와  나라가 당(唐) 나라에 맞서 싸우면서 적들을 물리치긴 하였지만 70년 전생으로 국력이 쇠진해진 고구려였다.
그런 와중에 집권자인 연개소문(蓋蘇文)이 666년 죽은 뒤, 큰 아들 남생(男生)이 동생 남건(男建) 남산(男産)과 서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두 아우가 당나라에 투항해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고구려의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는 바람에 나당 연합국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고 따라서 아깝게도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땅이 허무하게도 당 나라의 영토가 되고만 것이다.
한 집안의 골육상댕(骨肉相爭)이 우리의 국토를 영원히 남의 수중에 넘겨주게된 것이니 분단국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反面敎師)하여 명심 명심해야 할 일이다. 

                                      -계속 고구려가 숨쉬는 유적지를 찾아서(하)/광개토대왕과 비,
                                                                                                            장수왕릉/ 압록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