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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內延山) 12폭 산행기/포토 에세이

ilman 2007. 2. 11. 11:02
 
내연산(內延山) 12폭 산행기/포토 에세이
일만성철용  (Homepage) 2005-07-19 05:24:16, 조회 : 1,415, 추천 : 7

 내연산(內延山)을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등산이 취미라는 사람들을 만나면 넌지시 물어보는 말이다.
서울에서는 당일치기로는 도저히 다녀오기 힘든 경북 포항의 내연산(內延山)을 다녀왔다면 그의 등산 경력을 인정해 주어야야 한다. 건강을 위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명산을 찾아다니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산꾼이기 때문이다.
그 포항의 내연산을 당일치기로 산행하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서 고양시 ‘신도시산악회’를 따라 나섰다.
새벽 5시 30분에 일산을 출발한 버스는 장장 6시간을 달려 포항에서 30km밖에 있는 보경사 주차장에 우리를 풀어놓은 내연산(內延山)의 7월의 여름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여기 온 만큼 6시간을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때문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 30분이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동해 바닷가에 가서 회에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에 어느  누가 거역할 자 있겠는가.
오늘 우리들의 등산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보경사 주차장→ 매표소→ 보경사→ 내연산→연산폭포→ 상생폭포→주차장>
그 일정을 가만히 듣다 보니 거기를 따라 갔다가는 요산요수(樂山樂水)는 고사하고 염천의 고행(苦行)으로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할 것 같아서, 집에서 떠나 올 때의 생각대로 경북 8경의 하나라는 보경사와 내연산 12폭만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옛날에 구입해 두었던 “관광 내연산, 보경사”라는 책자를 보니 지금부터 19년 전인 1987년 1월24에 보경사의 삼보여관에서 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기록은 천재의 머리보다 낫다고 하나 보다.
아내와 함께 울릉도를 가려다가 폭풍을 만나 할 수 없이 아름아름하여 발길을 돌린 곳이 보경사요, 그때 처음 만난 것이 12폭이었다.
그때의 아담했던 보경사와 우렁찬 폭포 소리에 놀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직장 사람들을 꼬여서 다시 또 왔었으니 이 번이 세 번째 내연산 보경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계곡만 완상하다가 갔다.

*. 전설어린 보경사(寶鏡寺)
 주차장을 지나니 지나칠 정도로 많은 상가가 시작되더니 거길 벗어나니 오른쪽에 내가 본 어느 절보다 큰 고목이 주욱 줄이어 늘어서서 고찰 보경사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신도시산악회 회원들은 보경사(寶鏡寺)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폭포 길로 향하고 있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란 고은의 시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내 경험에는 올라갈 때 지나친 절을 내려오다가 보고온 절이 드물다. 귀가 시간에 쫓겨서 그러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하산주(下山酒)가 더 옷깃을 붙잡아서다.
  산이 자연이라면 사찰은 인공이다. 그 고장에서 가장 오랜 역사 교과서와 같은 것이 한국의 절이다.
그 산의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서서 그 산을 빛내주고 있는 것이 한국의 절이다. 산을 찾다보면 절이 되고 절을 찾다보면 산이 되는 것이 우리들 등산인의 세계다. 풍경소리 목탁소리는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와 어울려 산의 흥취를 더욱 깊게 하여 주지 않던가. 


"보경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인 신라 진평왕 때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한 고찰이다.
법사가 진(晉) 나라에 유학할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전수 받아가지고 신라에 돌아와서 왕께 아뢰었다.'동해안 명산을 찾아 이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와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고 삼국을 통일하리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함께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산이 있었다. 그 산 기슭에 큰 못 용담호를 30m 깊이로 파고 이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못을 매워 금당(金堂, 寂光殿)을 건립한 뒤 이름을 보경사(寶鏡寺)라 이름 하였다.”


내연산(內延山)의 원 이름은 종남산(終南山)이었는데, 진성여왕이 여기서 견훤의 난을 피한 후부터 내연산(內延山)이라 하였다 하는데 왜 내연이라 했을까.
어디에도 그 기록이 안보여서 그 ‘延’(연) 자를 이렇게 풀어보았다. 여왕도 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구경하였을 것이니 폭포와 연관된 이름일 것 같다. ‘延’(연)은  길게 굽은 '長曲貌(장곡모)'라. 25리를 굽이쳐 흐르는 보경사 계곡의 폭포가 염주처럼 길게 굽이쳐 흘러 내려서 내연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계곡의 폭포를 빼고 내연산을 말할 수 없기에 생각해 본 것이다.
보경사에 대한 나의 추억은 다른 절에 없는 친절한 당우(堂宇)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기둥에 붙여 두어 산남선녀들에게 불교의 세계를 가르쳐 주고 있던데 지금 보니 하얀 쇠판에 새기어 있었다. 나도 기회에 절의 이모저모를 소개하여 볼까 보다.

보경사는 고찰이어서 경내에는 유적도 많았다. 

천왕문(天王門)은 물론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 숙종 34년에 중건한 것이다. 사천왕(四天王)이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고 아래로는 불법을 수호하는 8 신장인 팔부중(八部衆)을 거느린 불교의 수호신이다.
그러니까 사천왕문(四天王門)이란 절을 지키기 위하여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만들어 좌우에 세운 문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卍' 는 가슴 '만'(卍) 자로 부처님의 가슴에 있는 모양이라서 기독교의 십자가와 같이 절
의 상징으로 쓴다는 데 왼쪽의 둥근 원 3개의 문형은 무슨 뜻일까. 

이 절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원진국사비(보물252호)가 있다.
이 보경사 창건 이후 그 중건에 크게 기여한 분이 원진국사다. 큰 스님 지눌(知訥)로부터 불법을 배워 대선사(大禪師)로 머물다가 뒤에 국사(國師)가 된 스님이다. 팔공산 염불암에서 입적하매 제자들이 오랜 동안 주지로 있던 보경사로 영골을 옮겨와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높이 183cm로 여의주 머금은 거북의 등에 비신을 얹었는데  다른 비에 있는 갓이 없다.
이 절에서 제일 오래된 것은 980여 년 전인 고려 현종 때 세웠다는 5층 석탑(경북유형문화제 203호)이고, 현전하는 건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5층탑 바로 뒤에 보이는 적광전(寂光殿)이다. 
   적광전(寂光殿)에다가는 주존(主尊)으로 비로자나불(毘盧자那佛)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로 모시고 있다. 이 적광전(유형문화제205호)은 창건 연대가 미상인 보경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비로자나불이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불법의 세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천태종에서는 법신불 등으로 달리 일컫는 부처인데 오른손의 엄지를 왼손이 감싸 쥐고 있는 부처가 바로 비로자나불이다.
이 절에 숙종이 당(唐) 시인 맹호연의 한시를 양각한 어필 각판이 있다는데 어디에 있을까?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 봄잠에 새벽을 깨닫지 못하는데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 곳곳에 우는새 소리라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간밤 비바람 오는 소리에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꽃이 많이 떨어졌겠구나. 

절에 가면 사물(四物)이 있다. 종루에 있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그것이다.
범종은 지옥 중생들을, 법고는 뭍에 사는 온갖 짐승을, 목어는 수중 생물을, 운판은 날짐승을 제도하기 위해서 치는 것인데 요즈음 절에서의 운경은 식사공양에서 치는 모양 이다.

*. 보경사 청하골 12폭
 물이 맑다 하여 '청하골(淸河골)'이이라 하는 이 계곡은 천년 사찰 부근이라 하여 '보경사 계곡'이라고 하고, 내연산의 폭포가 염주처럼 여럿이 있는 곳이라 하여 '폭포골'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정조 무렵  보경사에서 일생을 보낸 동봉 김시습이 이곳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쪽의 신구산과 북쪽의 내연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합하여 한 곳으로 흐르는데 그 수원이 30리나 되며 폭포와 절벽과 층벽, 기암괴석이 굽은 소나무와 함께 면면이 진열되었으니 이곳 사람들은 소금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 청하골 12폭을 향하여 간다.
이정표를 보니 보경사에서 제1폭 상생폭포까지는 1.9km,  제7폭 연산폭까지는 2.7km인데 옛 기억에 의하면 어린이도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길이었다.


보경사에서 200m 쯤 올라가니 좌측에 예보던

‘한흑구문학비’가 나를 반긴다.
한흑구(韓黑鷗) 선생의 본명은 한세광(韓世光:1909.6.19~1979)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지만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수필창작에 주력하였다.  1948년부터는 포항에 이주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당시에 열악하였던 한국 수필문학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분이시다. 비문에 쓰인 수필 '보리'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기억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아마도 이 문학비는 그의 제자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뜻을 모아 세웠으리라.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 들인,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정성껏 묻어 놓았었다. 크고 작은 흙덩이를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땅속에 곱게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묻히면, 싹이 나기 힘든다."
고 하는 옛 사람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었다.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까마귀들이 날개를 자주 저어 깃을 찾아간다.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를 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여기서 좌측으로 50m 되는 곳에 아치 같은 다리를 넘어 절의 지붕이 보이는 곳이
서운암(瑞雲庵)으로, 거기에는 보경사가 자랑하는  동종(銅鐘, 보물제11-1)이 보고 싶지만 폭포를 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지나친다.
보경사에서 0.7km에

갈림길이 나온다. 나보다 앞선 우리 신도시산악회 회원들은 0.7km의 문수암 코스를 통하여 샘이 있는 504m고지를 지나 622m 문수봉을 향했을 텐데 무더위에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까. 바닷가에 있는 산이라서 표고가 해발과 거의 같아서 옛날에 문수암까지 가는데도 아주 힘들던데, 그때에는 노파 비구니가 있는 한 일(一)자의 초라한 암자던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계곡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하더니 여기가  
제1폭 상생폭포로구나. 5m 높이에서 두 갈래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하얀 포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명 쌍생폭포(雙生瀑布)라고도 한다.
이런 폭포가 위로 500~1,000m 간격으로 12폭까지 이어지면서 접입가경으로 빼어난 산세의 기암괴석과 함께 세계적으로도 드문 12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재1폭 쌍생폭포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인가
제2폭포은 삼보폭(三步爆)이었다. 염불소리 목탁소리가 요란한데  
보현암 (普賢庵)이 길 바로 위에 있다. 층계에는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층계를 오르려고 기를 쓰고 있다.
암자라고 이름 붙일 정도도 아닌 초라한 보현암이지만 거기 멋진 부처의 말씀이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 지족제일부(知足第一富)" -Budha 만족함을 아는 것이 제일가는 부(富)다.
그런데 이 보현암 들어오는 길에는 해우소(解憂所) 건축을 위해 시주하라는 글이 있더니, 또 수각(水閣) 시설을 정비한다고 시주하라는 글이 있어  부다의 말씀을 무색게 하고 있다.
보현암에서 볼거리는 암자에서 1분 올라간 곳에 있는 갓부처다. 팔공산의 갓부처를 생각하고 올라가 보았더니 그 크기와 주변 환경이 가벼운 실망을 준다. 

청하골 12폭은 좌측에 그 비경을 펼쳐 놓고 있지만 그 이정표가 중요한 몇 개뿐인데다가 나무가 우거져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계곡을 내려가서 일일이 체크하면서 올라가지 못하여서 그 진면목을 아쉽게도 제대로 담지 못하였다. 상생폭포에서부터 연산폭포까지 10km에 걸쳐 나타나는 폭포들은 이 청하골 12폭의 하이라이트인데, 그중에도 백미(白眉)가 보이기 시작한다. 제6폭 관음폭포과 제7관음폭포였다. 

보라, 우리의 폭포의 장관을, 나는 보름 전 백두산 트레킹을 갔을 때 빼앗긴 땅의 장백폭포를 바라보며  아파하던 마음을 나는 여기서 일부나마 씻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연산 청하골 폭포는 제폭 1상생폭포, 제2폭 삼보폭포도 쌍폭이더니

제6폭 관음폭포(觀音瀑布)도 72m 높이에서 쏟아지는 쌍폭인데 그 오른쪽  바위 벽에는 뻥 뚫린 두개의 10평 정도의 관음 굴이 있고 폭포 위를 가로질러 걸린 연산구름다리가 환상적으로 놓여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발하게 한다.
옛 선인도 그냥 가기 아쉬웠던지 수많은 흔적을 남겨 두었다. 

등산객들이 이 관음폭포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흔히들 잊고 가는 경치가 있다. 내연산 봉우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암 기봉으로 이루어진 관음폭포에서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
선일대 말이다.
제7연산폭포 

연산구름다리를 지나니 관음폭포보다 더 우렁찬
제7폭 연산폭포(延山瀑布)가 학소대(鶴巢臺) 바위에서 수직으로 우렁차게 떨어지고 있다. 12폭 중 가장 큰 폭포였다.
이 자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 앞에서는 말을 잊는 법이다.

제1 상생폭포  제2 삼보폭포  제3 보현폭포  제 4잠룡폭포  제5 무풍폭포  제6 관음폭포  제7연산폭포
길은 연산폭포에서 끊기고 내연산의 최고봉인 930m 향로봉으로 가는 길은 다시 관음폭포로 내려가서 계곡을 건너서 나 있는데 제8폭 은폭(隱瀑), 제9폭 시명폭(是名瀑), 제1, 제2, 제3 복호폭(伏虎瀑)이 있지만 주어진 일정에 마치다보니 여기서 되돌아갈 수밖에 없구나. 옛날에는 그 계곡에 길이 끊겨서 신발을 벗고 건너야 할 곳이 있어서 마추어 혼자 온 미모의 처녀를 업어 건네준 즐거운 추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내연산 정상를 욕심 하던 신도시산악회 회원들은 올라갔던 문수암 코스에서 시간에 쫓기어 내연산을 가는 도중에 되내려오고 있었다. 서울에서 무박으로 2일로 해도 빠듯한 산행을 하루로 너무 무리한 계획을 잡았던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 먼저 도착하여 서성이다 보니 등이 유난히 진줏빛 청색인 물총새 한 마리 고기를 물고 건너편 계곡으로 날아 간다. 일산의 이산포에서 낚시 하다가 헬리리콥터처럼 공중에 멈추었다가 물속으로 수직 강하하며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더니 여기서도 보는구나.
내연산 산행은 산과 계곡과 바다 3박자를 갖춘 여름 산이다. 요산요수를 함께 할 수 있어 처음 약속대로 포항해수욕장 방파제에 옹기종기 않아 오징어 활어무침으로 바다를 회하다 왔다. 버스 두 대에 가득 싣고 온 90명의 우리 산꾼들에게 어떻게 그 비싼 회를 먹자고 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즐겁게 풀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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