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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가는 길(하)/ 고구려가 숨쉬는 유적지를 찾아서

ilman 2007. 2. 11. 11:03
 
 


*. 고구려 유일의 금석문(金石文) 광개토대왕 비

翩翩黃鳥(편편황조) 펄펄 나는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가 서로 노니나다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누구와 함께 돌아갈꼬.
               - 黃鳥歌(황조가)/ 고구려 2대 유리왕

 
한글로 전하는 백제 노래가 정읍사(井邑詞) 하나뿐이더니, 오늘날까지 그 내용이 전하여 오는 고구려의 노래도 하나뿐이다. 위의 황조가(黃鳥歌)가 그것이다.
 한글이 없던 때라 위와 같이 한역(漢譯)되어 전하여 온 것 뿐이듯 고구려 금석문(金石文)으로 전하여 오는 것도 광개토대왕 비(廣開土大王碑) 하나뿐이다.
 기원전 414년에 세운 비석이니,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선 광개토대왕의 신하들이 직접 쓰고 세운 글이요, 비석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했다. '집안(集安)의 현지를 한 번 둘러보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더 낫다'고-. 

  국내성(國內城)을 둘러서 광개토대왕 비(廣開土大王碑)를 찾아가는 집안현(集安縣) 거리의 모습은 우리들의 가난했던 옛날을 뒤돌아보게 하는 일이었다. 용달차보다도 더 초라하고 엉성한 포장친 세 바퀴 택시와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집안시(集安市) 대로를 오가고 있었다.
 현청 소재지인 통구성(通構城)에서 약 4.5km 거리에 있다는 태왕촌대비가(太王村大碑街)로 해서 찾아갔더니 입장료가 30원(元)인데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 받고 있는 것이 씁쓰름하다. 우리의 광개토대왕을 팔아 중국인들이 주머니를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경내에 들어서니 초원으로 사방이 탁 트인 곳 한가운데에 그 아들 장수왕 '거련(巨連)'이 세웠다는 말로만 듣던 비가 비각 속에 있다. 거기서는 광개토대왕이라 하지 않고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명에 나오는 시호(諡號)의 원래 명칭은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였다. ‘국강상(國岡上)’은 비가 있는 언덕(岡) 위치를 말하는 것이요,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생전의 왕의 업적을 말함이요, '평안(平安)'은 백성을 평안히 다스렸다는 뜻이고, '호태왕비(好太王碑)'란 왕중의 왕의 비란 뜻이다.
 18세에 왕위에 올라 40세에 승하하기까지 23년의 짧은 동안에 고구려의 전성기를 만든 왕 중의 왕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본명은 담덕(談德)이었는데, 재위 중에는 고구려의 연호가 '영락(永樂)'이라서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불리던 왕이다.
 이 비석은 장방형의 기둥 모양의 사면 석비(四面石碑)로 크기가 보통 사람 키의 4배나 되는 6.39m 높이에, 무게가 37톤이나 되는 한국 최대의 비석인데 다른 비석과 달리 머리에는 갓이 없다.
비각이 없는 사진으로 보던 것과 달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이후부터는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단층 비각에 최신식 적외선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접근은 물론 얼비치어서 카메라로는 도저히 그 글자들을 일부나마 잡을 수가 없다.
 그 입구에 상점이 있어 높이 20cm 정도의 모형 호태왕 비를 하나 사서 대조해 보았더니 비신의 4면에 모두 44행 1,775자의 예서체(隸書體) 한자가 14∼15cm 정도로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글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 광개토대왕 비의 내용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비의 내용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추모왕(鄒牟王 : 주몽)의 건국 신화와 비의 건립 경위 등이요. 2부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호태왕의 업적이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고구려왕들은 자기들을 하늘의 자손이라 하여, 시조나 왕들에 대한 제사를 하늘에 대한 제사와 동일시 하여 그 능을 지키는 일을 무엇보다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 광개토대왕 비의 발견과 탁본 이야기

출처:Google
집안현은 커다란 고구려의 무덤 지역이라고 할 만큼 12,000여 개에 달하는 고분이 있다. 광개토대왕릉과 비도 이 중 하나로 잊혀진 체 1,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청나라는 한인(漢人) 등을 만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오랜 동안 막았다. 이를 봉금령(封禁令)라 한다.
그러다가 그 봉금이 풀린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77년 어느 날 환인현 지금의 이 풀숲 개간에 참여하였던 농민 초인복(初天復)이 이끼가 가득 끼어 있는 글자가 쓰인 비석을 발견하여 신고하였다.
그곳의 지사는 관월산(關月山)이란 자를 시켜 비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말똥을 여러 번 비석에 바르고 불을 질렀다. 가득 덮고 있는 이끼를 태우기 위해서였지만 이로 인해 이 세계의 보물 광개토대왕 비는 결정적으로 금이 가는 큰 손상을 입히고 말았다. 그때 그 일부가 탁본으로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비로소 광개토대왕 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 비의 중대함을 눈치 챈 농부는 아들 초균덕(初均德)과 함께 각각 30년 이상을 이 비 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이를 지켰다. 이후에 점점 커지는 이 비에 대한 관심은 탁본을 하는 과정에서 또 망가지기 시작하였다.
고가(高價)로 매매하기 위해서는 선명한 탁본이 필요하여서 비면(碑面)에 석회칠[石恢付塗]까지 하게 되면서 비는 더욱 망가져 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일인(日人)들의 변조설(變造說)이 등장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당시 만주를 점령하였던 일본군은 이 비를 군함에 실어 일본에 가져가려다가 중국 당국의 반대로 무산되기까지 하는 수난을 겪기까지 하였다.
 일본이 이렇게 광개토대왕 비에 연연하였던 것은 비문 중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정설로 정착시켜서 고대 한국이 일본이 경영하던 곳이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일제 침략을 합리화시키기 위함이었다.
1,600여 년 전 아들인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효심이 세우고, 위대한 호태왕을 위하는 당시 고구려 신하가 써서 세운 이 비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다니 후손된 작은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설움에 벅찬 눈물이 앞선다.
 다른 사람도 아닌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그 땅을 다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외로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더욱 그 후손된 나그네를 서럽게 우리의 미약했던 국위를 뒤돌아보게 하여서 더욱 그러하였다.

 

울어도 울부짖어도, 소리, 눈물 바이 없었다.
광개토(廣開土) 영광의 비가 통곡의 벽이 되어
선 자리
남의 땅이 되더니
국적(國籍)마저 앗기려 하는가.

*. 고구려가 삼국통일 했다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그 시기는 광개토대왕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과 같은 시절의 고려인들의 생각은 우리들의 통일 개념과 너무 달랐다.
  고구려왕들은 자기들을 단군처럼 시조 주몽도, 그 후왕들도 일월지자(日月之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 생각하여서, 영토 확장은 하나로의 병합이 아니라 역대 중국의 황제들처럼 고구려의 질서 속에 함께 사는 것이었다. 호태왕(好太王)이란 그런 뜻에서 쓴 말이다.
 당시에는 백제가 그러하였듯이, 신라도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던 나라였다.
그것은 해방 이듬해에 처음으로 경주에서 고분 발굴 작업에서 나온 '호우' 항아리 밑에 쓰인 16 글자가('乙酉年岡上光開土王地好太王壺우十') 이러한 설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

*. 도굴꾼에게 훼손된 광개토대왕릉 

  호태왕의 비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에 갔더니, 
이 고분은 도굴꾼에 의해 심히 파손되어 돌무더기만 무심이 쌓여 있었다. 광개토대왕릉이란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훼손된 채로 그냥 방치되어 오다가, 이 봉토에서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瓦)가 출토되는 바람에 태왕릉이라고 인정되어 복원하는 중이었다.
발견된 이 기와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컨대 태왕릉이 산악같이 편안하고 견고케 하소서)라는 글이 양각(陽刻)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태왕릉은 길이 67m, 높이 30m로 장군총보다도 훨씬 큰 규모이지만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그 올라가는 층계도 간이 철층계였고 그 무덤에도 간이 철문을 달아 놓았는데 옛날에 그 속을 구경한 이들의 말로는 벽화의 일부가 남아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거기서 바라보니 저 남쪽이 북한 땅 만포진(滿浦津)인데 동 제련소의 높은 굴뚝이 '하얀 연기를 계속 뿜어내고 있었다.

*. 동아시아의 피라밋(Pyramid) 장군총(將軍塚) 

  광개토대왕 비에서 동북쪽으로 오륙백 m 가량 용산(龍山)을 향하여 아스팔트길을 오르니 그 산 기슭에 저 멀리 피라밋 같은 석조물이 보인다. 장군총(長軍塚)이었다.
 이 무덤은 옛날부터 이 고장 사람들에게 변방을 지키는 장군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전하여 왔기 때문에 장군총(將軍塚)이라 부르게 되었된 것이다.
 그러다가 광개토대왕 비에 가까이 있는 거대한 무덤이라 하여 광개토대왕의 능이 이 아닌가 생각하여 논의 되어 오다가 위에서 말한 태왕분묘에서 발견된 기와의 글자로 그건 아닌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일개 장군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걸맞지 않게 웅장하고 정교해서 요즈음 고고학자들은 장수왕릉(長壽王陵)일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장수왕은 국내성(國內城)에서 도읍을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하고 거기서 승하한 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에 대한 현지 중국의 고고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왕들은 살아 생전에 무덤을 준비하여 둔다. 이런 관습에 따라 장수왕도 평양성에서 시신을 이곳에 옮겨 이곳에 장사지냈던 것이다."
한 일본인 학자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의견들은 이 장군총이 1,500년의 세월을 빗겨가듯이 너무나 완벽하게 온전한 모습으로 전하여 왔지만 도굴꾼들에 의해 무덤의 주인을 말하여 주는 모든 수장품을 도굴 당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방의 피라밋, 혹은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로 광개토대왕 비와 함께 고구려 2대 보물인 것을 생각하면 광개토대왕이나 그의 맏아들 장수왕 아니면 이곳에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없다 하여 장수왕 릉으로의 추정에 나도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장군총의 비밀 
  고구려의 고분 중에 집안 통구에 1만기 이상이 넘게 흩어져 있는 무덤들은 돌만으로 무덤을 만든 적석총(積石塚)이 많았다. 광개토대왕의 능이 막돌을 성의없이 함부로 쌓아 놓은 적석총으로 훼손되어 남아 있다면 장군총은 너무나 완벽하게 보존 된 계단식 적석총(積石塚)이었다.
이 장군총을 멀리서 보면 이집트 룩소르에서 보던 피라밋에서 꼭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데 가까이 가서 올라가서 보니까 전체 구조는 4각형으로 되어 있다.
밑변의 길이 한 변이 31.58m, 높이가 12.4m이다. 1층부터 5.5m 정도의 긴 네모 장방형 화강석 석재 한층 한층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지는 돌로 조금씩 뒤로 드려서 1,100여개를 쌓아서 전체 1만 9천 톤의 압력이 위에서부터 가해져도 밀려나지 않도록 하였다.
 그 하나하나의 상하의 돌이 요철(凹凸)로 홈에 아귀가 맞게 정확하게 들여쌓았기 때문에 장군총을 기둥 하나 없이도 수천 년을 완벽하게 지금처럼 버텨오게 한 것이다.
기단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신비함에 더욱 놀라게 된다. 밑돌 상단의 자연스런 굴곡에 맞추어 웃돌 밑을 깎은 그램이 공법이다. 그래서 이를 주시한 세상 고고학자들이 고구려 사람은 돌을 다루는 솜씨가 마술사와 같다고 찬탄을 하게 한다.
 무엇보다 또 하나 의문이 생기는 것은 적석총을 둘러싼 동서남북에 있는 3개의 커다란 자연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15톤이나 되는 내 키의 두 배나 되는 거석(巨石)이었다.
 장군총의 돌들을 물러나 허물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배려한 호분석(護墳石)돌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작았다.
아니면 혹시 십이지(十二支)를 상징하는 호석 (護石)이 아닌가. 신비함은 더해만 간다. 그 중 1개는 세월이 앗아가 버리고 11개만 남았다.
뒤쪽으로 놓여있는 쇠층계를 따라 올라가니 중국 관리인들이 사진을 못 찍게 지키고 서 있다.
 현실(玄室: 널방)은 5층 중앙에 있는데 길이 5m 높이 5.5m 내부에 천정에는 무게 50여 톤의 덮개 돌을 덮었다. 그 아래에 잘 다듬어진 장방형의 관대는 장수왕과 왕비의 주검이 놓여 있던 자리다.
  장군총을 지켜주는 호석(護石)이 또 하나가 있다면 동북쪽에 있는 고인돌 같기도 한 작달막한 배총이 있다.
배총(陪塚)이란 딸린무덤이라고도 하는데 무덤과 관계있는 무덤으로 원래는 5기의 딸린무덤 중 남아있는 1기다.
현지 가이드 말에 의하면 장수왕의 3번째 후궁(後宮) 릉인 것 같다고 한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20대 고구려 왕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분이다.
신체가 크고 모습이 괴걸하고 기개가 호탕하한 왕으로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왕이기도 하다.
40세에 돌아가신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달리 98세까지 장수하여서 시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한 분이다.

*. 청산리 청산골 여진족 민속촌(女眞族民俗村)의 여정

출처:google청산리대첩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는 만주 청산리에서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이 이끈 우리의 독립군이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을 이룬 날이다.

망국의 한을 품고 절치부심하던 우리의 독립군과 이의 섬멸을 위해  현대무기로 무장하여 파견된 일본군과 벌린 10여 회의 전투에서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여 망국의 한을 시원하게 푼 독립군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의 전사자는 100명이었다.

 지난 4월에 상하이(上海)에 들렀을 때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24살의 약관 윤봉길 의사(義士)가 나라를 뺏은 원수 일본을 향하여 던진 폭탄에 감격하면서 윤 의사를 이렇게 정리하여 본다. 

"윤봉길 의사는 중국에 망명하여 한일구국단(韓日求口團)에 가입하였다. 거기서 만난 김구 선생의 지시로 대한 남아의 정기를 세계만방에 고하기로 결심하였다. 드디어 1932년 4월 29일 일본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날에 일인들이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는 곳에 들어가서 폭탄을 투하하여 당시 일본의 전쟁 영웅들이라는 작자들을 죽여 버렸다. 이때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와,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까와 대장이 살해 되고 제3대 사령관, 제9사단장, 주중공사 등에게 중상을 입혀 무력으로 조국을 강제 합방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때 중국인들은 얼마나 고소해 하였을까."


*. 청산리(靑山里) 여진족(女眞族) 민속촌에서
 그 빛나는 전적지 청석골 여진족 민속촌에서 우리는 여진족들이 베푸는 민속공연도 보고, 야외에서 장작으로 굽는 통돼지 바비큐에다가 3元(400원) 하는 병맥주를 양껏 마시며, 밤 깊도록 여정에 젖었다.
 여진족(女眞族)이란 어떤 민족이었던가.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당나라 때는 말갈(靺鞨), 송나라 때에는 여진족(女眞族)이라 부르다가,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부르던 퉁구스계통의 민족이다.
금(金) 나라를 세우고 고려에게 형제 관계를 강요하던 민족이 바로 여진족이다.
그뿐인가, 여진족 우두머리 누르하치는 후금(後金)을 세우고 청(淸)이라 국호를 바꾸어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못살게 굴던 우리 민족에게는 귀찮고 두려운 민족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번 백두산트레킹 여행에서 그렇게 원하던 천지(天池)를 굽어보며 백두산(白頭山)을 종주(縱走)도 하여 보았고, 고구려가 호령하던 만주벌판을 장장 11시간씩이나 오가며, 우리 고구려 유적지를 직접 살펴보았다.
중고등 학교 시절 국사 시간에 무심히 지나치던 역사의 현장에서 저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인(韓國人)으로 와서 얼마나 우리는 감격하고, 안타까워하며 잊었던 옛날을 돌아보았던가.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보고 가는 다시는 또 올 수 없는 뚱베이여, 아아, 우리의 잃어버린 땅 만주여. 거기서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朝鮮族)이여! 이제 우리 이별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