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 선착장에서 우리를 실은 관광버스는 다리를 넘어 왕가(王家)의 계곡(溪谷)을 향하고 있다. 9년 전에는 배로 건너던 곳이다. 왕가의 골짜기 가는 길에서도 많은 당나귀가 끄는 마차와 타고 가는 당나귀가 있다.
우리들이 자가용이 필수품이듯이 여기서의 당나귀는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이기도 한가 보다.
이 불쌍한 당나귀들이 인간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불평 없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짐승같이 부려먹는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옛날 왕가의 계곡, 왕비의 계곡, 귀족의 계곡을 꾸미던 시절의 당나귀들은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그런 고마운 짐승이면서도 이집트 속담에 '당나귀 같은 놈!' 하는 것이 욕이 되는 것을 보고, '다음에 태어날 때는 절대로 당나귀로 태어나지 말아야지-' 했더니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요? 만약 말로 태어난다면 종마(種馬)로 태어나고 싶어요. 씨말 말예요."
왕가의 계곡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왕가의 계곡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후예가 사는 페이르 엘 마지나(Eeir el- Madina) 인부 마을이다. 도굴꾼의 후손이 산다고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나무 하나 없는 사막의 바위산에 어느 귀인들의 묘인가 .구멍들이 벌집 같이 숭숭 뚫린 아래에 닥지닥지 사막을 닮은 색깔의 초라한 집들이 있는 곳. 관광객들에게는 출입금지구역인 달동네 중에도 달동네들이다.
*. 멤논의 거상Colossi of Memnon)
그곳을 지나 네크로포리스(죽은 자의 거리) 입구 들 한 복판에 우뚝 선 두 개의 커다란 석상이 있다.
상, 하 이집트를 통치하던 아멘호텝 3세의 석상인데 머리는 머리인데 뭉개지고 깨어져 괴물 같은 모습이다.
이 석상 뒤로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의 신전이 있었다는데 오랜 세월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흔적도 없어지고 지금은 그 신전을 지키던 9.5m나 되는 이 두 거상만 남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싸움에서 죽었다는 이디오피아 왕 멤논과 닮았다 해서 ‘멤논(Memnon)의 거상(巨像)’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지진 때문에 균열이 난 북쪽 석상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면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새벽의 여신 오로라에게 멤논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여서 생긴 이름이다. 그 후 수리가 되어 지금은 그 소리를 잃었다.
*. 왕가의 계곡
해는 나일 강 동쪽에서 떠서 나일 강을 넘어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노을을 드리우며 사라진다.
태양신을 숭상하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해가 뜨는 것을 인간의 탄생으로 보아, 나일 강 동안에다가 마을을 만들고 그 마을의 번영과 안전을 위하여 신전을 지었다.
해가 지는 것은 죽음으로 보고, 나일 강 서쪽을 사자들의 세상으로 보고 거기에 무덤을 만들고자 하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내세에 영혼이 깃들 육체가 있어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영술(靈術)이나, 주력(呪力), 위력(威力), 무력 등을 가졌던 자의 시체를 보존하면, 그의 힘이 사후에도 머물러서 자기들을 보호하여 준다고 믿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그 몸을 미라로 만들어서 거기에 살아생전의 젊은 모습의 얼굴을 마스크로 만들어 씌웠다. 그리고 부속실을 두어 생전에 쓰던 호화로운 물건을 보관하고자 했다.
생전의 부귀를 사후까지 가지고 가고 싶었던 왕들은 왕들이 즉위와 동시에 왕묘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고 왕이 죽으면 완성이든 미완성이든 중지하여 그곳에 묻었다.
피라미드가 너무 오푼 된 공간이어서 얼마 안 되어 도굴 되는 것을 알게 된 파라오들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산속의 절벽, 바위를 직선 또는 곡선으로 혹은 수직으로 뚫어 그 산속에 마련한 왕들의 묘가 바로 '왕가의 계곡(The Valley or The Kings)'이었다.
이 왕가의 계곡은 피라미드보다는 도굴꾼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였고, 산이어서 나일 강물의 범람도 피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왕가의 계곡을 품고 있는 이곳의 산이 왕관 모양 같기도 하고 피라미드 모양 같기도 한 신령스런 모습의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왕가의 계곡에다가 처음으로 왕묘를 쓴 이가 투트모스 1세 에요, 발굴된 64개의 왕가의 무덤에서 가장 큰 규모가 세티 1세의 묘였다.
길이가 100m요, 현실(玄室)이 15개나 되지만
1922년에 발굴된 제18왕조 투탕카멘 왕릉을 제외한 모든 유물은 물론 왕의 미라조차 도굴 되고 말았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이 왕가의 계곡에 깊이 잠들었던 왕들이 자기의 무덤의 부장품은 물론 시신마저 도둑맞고 이렇게 세계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보았다면 파라오의 생각은 어떠할까?
그러고 보면 이 왕들의 계곡에서 사후의 우리들의 덧없는 사후의 세상을 미루어 생각하여 보게 한다.
이 왕가의 계곡의 왕묘들은 이집트 무덤 변천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다.
이 왕묘들은 신 왕국 시대 제 18왕조에서부터 20왕조까지의 왕들의 64개인데 우리들은 그중 세 왕릉을 관람한다.
*. 왕묘(王墓) 안의 모습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매표소 입구에 이르니 입장권 하나로 세 곳을 관람한다는데 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개찰할 때 '뽕- ' 하고 구멍을 뚫어주는 기계가 없어 터번을 쓴 관리원이 일일이 손으로 세 번이나 찢고 있다.
개인 카메라의 사진은 절대로 찍을 수 없다 해서 촬영은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몰래 카메라를 할 수도 있었지만 잡아서 큰 돈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살피고 있을지도 모르는 감시자 때문이기도 하였다. 카이로 박물관에서 고가로 사온 CD에도 왕가의 계곡의 내부 사진은 없는데 어떻게 한다?
왕묘의 대개의 경우는 "길-전실-현실(玄室)- 옆방(부장품)" 이런 식에다가 벽 좌우와 천장에 그림과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있거나, 현실(玄室)에만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왕가의 계곡의 각 무덤의 앞에 있는 그림들을 보고 흥분하고 있었다.
오픈 된 묘도 그러하였지만 거기에는 '모든 64기의 묘의 구조와 그 속의 벽화의 그림까지 영어로나마 설명까지 있어서'마음 놓고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기었다.
그뿐인가, 10불이나 주고 들어갈 수 있다는 투탕카멘의 묘 앞 안내판에는
그 발굴 당시의 생생한 현장의 모습과 부장품이 그대로여서 여기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수많은 귀한 사진을 찍어올 수 있었다.
서구인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그 의자 같은 것을 카이로 박물관에서 보고온 것인데 금장식으로 찬란한 하로루의 목우 침대였다.
거기서 찍어온 무덤의 벽화를 수없이 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으나 이 역시 용량을 생
각해서 일방적 배꼽 사지만 남아 생략하고 왕가의 계곡 답사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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