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隨筆)☎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연애편지

ilman 2023. 2. 6. 08:40

 신도시 일산 아파트에 살다 보면 이사 가는 이가 많다.
이분들은 가족 형성기(形成期)와 확대기(擴大期)를 거쳐, 자식들이 결혼하여 떠나가는 가족 축소기(縮小期)를 사는 주민들이 많아서 작은 아파트로 집을 줄여 나가는 사람들이다.
넓은 집에서 살 필요가 없어, 관리비도 저렴하고 청소하기 편한 소형 중형 아파트를 선호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분들이 버리고 가는 것이 많아 가끔 횡재를 할 때가 있다. 그중에도 귀한 서적들이 많았다.
 며칠 전만 해도 한 번도 보지 않고 버린 듯한 호화장정의 '세계문학전집' 28권과 그 외 몇 권을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날름 집어다가 서재를 꾸미다 보니, 그중 사형수가 쓴 낡은 이야기가 있기에 침실에 놓고 지내다가 어느 날 자세히 보니 '최영오 일병의 옥중수기(獄中手記)'가 아닌가.
빨간 색깔로 쓰인 제목 '이 캄캄한 무덤에서 나를 잠들게 하라'(1963년 합동문화사 발행 양성일 편)의 옥중의 최영오와 그의 애인의 수기였다. 그 표지마저 검푸르러 우중충한데 붉은 핏방울까지 있어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4.19가 한창이었던 암울한 세대를 살던 1960년대의 자유당 독재 시절, 나는 그보다 다섯 살 가량 위였지만 같은 시기에 군대에 교보(敎保)로 가서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다닐 때였으니 최 일병은 1년 6 개월의 학보(學保)병으로 갔을 때였을 것이다.  교보(敎保)란 교사들에게 군 근무를 1년으로 단축하여 주고, 학보(學保)란 대학생들에게 1년 6개월로 병역을 단축해 주던 제도다. 이 책은 그때에 한국 사회를 강타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한쌍 연인의 연서(戀書)를 둘러싼 슬픈 이야기다.

 당시 조간신문의 1단 톱기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연서(戀書) 눈 도둑 죽인 격정(激情) - 학도병 두 상사 사살(死殺) 죄로 사형 구형"
한국일보 사설에서는 "학보병 최영오 일병의 경우"라는 제목 하에, 피살된 사병 상관 두 사람은 남의 사신(私信)을 가로채어 그 내용을 소대원들 앞에서 폭로하고 야유까지 함에 격분한 최일병은 상관에게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들 상급병인 두 사람은 오히려 부당한 기합을 가하는 바람에 마침내 최오영 일병은 이성을 잃어 불행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는 5.16 직후라 국방분과 김재춘 위원장과 육군참모총장 김종오 대장이 나서서 그 직속상관을 직무 유기죄로 구속하면서, 사신(私信) 검열은 육군 규정을 어긴 것이라 하였고, 사적(私的) 제재의 금지와 서신의 기밀 유지로써 인권 옹호에 만전을 꾀할 것을 강조하겠다고 대국민 유감의 담화를 발표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문인들도 한 목소리가 되어 '브라우닝'의 말대로 사랑이라는 인생의 목적을 살고 있는 이 한 쌍의 연인을 위한 구명 운동을 위하여 연판장을 돌려가며 서명운동에 앞장섰다.
 이 책은 최영오의 옥중수기(獄中手記)와 그의 애인 장현숙 양의 고백수기와 두 연인들의 사랑의 일기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최 군에게 보내는 장양(張孃)의 편지가, 구상 시인의 서문과 함께 엮었다.
  부하의 편지를 허락도 없이 먼저 뜯어보고 여러 사람 앞에서 조롱하며 기합을 주다가 비명의 죽음을 자초한 두 선임은 수원농고를 졸업한 총각이요, 또 한 사람은 전남 정읍농고를 졸업하고 임신한 아내를 두고 제대를 3개월 앞둔 기혼자였다.
사랑을 방해하면 지옥도 못 간다는 말을 그들은 왜 모르고 있었을까?
이들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최영오 일병과 함께 죄인이라 치더라도, 죄 없이 당한 그들의 부모 처자 형제들의 괴로움들은 어떠했을까? 책에 실린 꾸밈없는 당시의 이야기는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다음은 최영오가 쓴 행복했던 시절의 일기의 일부이다.
"그동안 j양에게서 잡지책도 소포로 받고 편지 두 통도 받았다. 그리고 오늘 또 소포를 받았다. 우표 20장과 봉투 만년필이었다.
새로운 만년필을 사보낼 수 있는 일이지만 만년필을 사용할 때, j는 그 만년필로 쓴 편지를 받았을 때 피차 서로 상대방을 생각하자고 자기가 쓰던 손때 묻은 만년필을 보냈던 것이다. 알뜰한 성의의 선물이었다. 덩달아 함께 부러워 하고 좋아하는 전우도 있었다."
누가 이보다 더 귀한 선물을 받은 자 있는가. 누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누린 자 있는가 생각해 보면, 그들의 짧으나마 굵고 깊었던 사랑이 우리들을 부러워하게까지 한다.
그러나 죄 없는 죄인이 된 최 일병의 애인 장현숙 양의 고백수기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적 세계였다.
연인의 수기가 실린 '東亞春秋' 창간호를 사서 들고 근처 다방에 뛰어들어가 보면서 장양은 이렇게 울부짖고 있다.
 '그렇다. 영오 씨가 먼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빼앗으려 계획하고 노력을 경주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은 우리 영호 씨의 발랄한 생명을 빼앗으려고 오히려 필요 이상의 노력을 쏟은 것이다.
영오 씨가 누구를 죽였단 말이냐? 저 인간 됨을 죽인 것이지-.' 
하나의 인간이 인간을 인간 이하의 노리개로 여기고 향락하려는 씹고 싶도록 잔인한 인간성을 죽여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노리개로 취급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눈물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현실이다.  (후략)

고백수기에는 결국은 원인이 된 자기의 편지로 인한 연인의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연인(戀人)을 대신해서 어떠한 형극의 형벌이라도 대신 받게 해달라고 처절히 호소하기도 하면서-.
장양이 다니던 대학의 한 교수는 이러한 마음을 헤아려 독신을 지키며 평생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여 주기 위해서 문과대학에서 약학대학으로 전과토록 주선해 주어 장래를 준비하게 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 비극의 여주인공은 지금쯤은 이 세상 어디에서 팔순(傘壽)의 나이에 쓸쓸히 노처녀의 몸으로 어느 약국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인생이 고해(苦海)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네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그 대신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겠다고 명문대학을 다니며 졸업을 벼르며 살던 최일병이었다. 정양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요일이면 어머니를 모시고 영화 구경이나 남산 KBS 홀등으로 재미있는 공개 방송 찾아다니던 효자였다.
가정교사로서 고학을 하거나 또는 스케이트장에서 날을 갈며 고학하는 피곤하고 불안정된 인생만을 살다 간 우리의 최영호 대학생이었다.
 4. 19 때에는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앞장서서 광화문에서 청와대를 향하던 젊디 젊은 서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이 젊은이가 쏘고 간 것은 결국은 무엇일까?
나이나 혹은 그 알량한 보잘것없는 지위를 앞세워 약자를 괴롭히는 사회를 쏘고 간 것은 아닌가.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자존심을 향해 방아쇠를 담긴 것은 아닌가.
아랫사람에게는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부도덕을 쏘고 간 것은 아닌가.
지순한 사랑의 완성을 지키려는 방아쇠는 아니었던가.
이러한 일이 지금 군대에서 일어났다면 지금 우리 국민들이 그를 사형장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식의 구명운동을 위해 신문사로 경무대(景武臺, 지금의 청와대)로 찾아다니며 울부짖던 병약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바로 그날,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살아온 그 한 많은 인생을 , 아들 '영호야, 영호야!'를 외치며 한강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