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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가는 길(0)

ilman 2021. 12. 23. 17:57

백 산행
*.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白頭山) 가는 길로는 서파(西坡), 북파(北坡), 남파(南坡) 3 코스가 있다지만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가 북파(北坡)이고, 등산으로 종주를 하고자 하는 이는 서파(西坡)로 가야 한다. '坡(파)'란 언덕이란 뜻이다.
서파와 북파를 가는 분기점이 백두산 바로 아래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있는 이도백하(二道白河)란 큰 중국인 마을이다. 여기서 30km 거리에 우리들의 목적지 백두산 입구인 북파 산문(北坡山門)이라는데, 반갑지 않은 비가 오고 있다. 백두산 등정 길에 가장 꺼리는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의 봄은 6월부터 시작된다.
그 봄은 여름 없이 가을로 접어들고, 9월부터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겨울이 9개월이나 계속 된다.
일 년 중 비 오지 않고 맑은 날이 20일뿐이라는 것이 백두산의 기후다.
연평균 안개 낀 날이 242일이라 하며 여름에는 -8급 이상의 큰 바람이 225일을 불면서, 맑다가도 갑자기 운무가 끼는 종잡을 수 없는 게 백두산 날씨다.
 그래서인가.  우스갯소리로 백두산을 '백' 번 올라와도 천지(天池)를 '두' 번 이상 보기 어려워서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고, 백두산에 와서도'천지(天池)'를 보지 못한 사람이 '천지'여서 '천지(天池)'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였나. 이조 영조 때 산수 갑산(山水甲山)으로 귀양 왔다가 1766년에 백두산에 다녀와서 쓴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제문이다.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중국의 상상적인 성스러운 산)과 같은데, 만약 해동(海東)의 편협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백두산에 올라 그 웅대한 경관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전하기를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 중에는 풍우(風雨)와 운무(雲霧) 때문에 제대로 경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곤륜산의 신령이 중국인들에게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는데, 어찌 백두산의 신령만이 그러하시겠습니까?
산신(山神)은 우리를 보우하셔서 해와 달이 밝게 비추어서 만상이 밝게 드러나고 산의 풍광을 모두 다 볼 수 있게 하소서.'

이도 백하 백두산의 관문

 북파 산문(北坡山門)에서는 표 2장을 사야 한다. 하나는 입장료로 버스를 타고 천지 길목(倒站口)까지 오르는데 쓰고, 또 한 장은 지프차를 타고 20여분 동안 꼬불꼬불한 10.5km의 관광도로 해서 기상대까지 오르는데 쓰는데, 길은 차를 너무 심하게 몰아서 커브마다 수없이 좌우로 쏠리는 두려운 길이어서 그 가는 도중에 있다는 고산 스키장(高山滑雪場)과 관망대(觀景臺)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이 길을 등산길이어서 등산인들과 함께 어울려 천지를 향하여 소영(逍遙吟詠)하면서 걸어서 오른다면 흑풍구(黑風區)를 지나 오르는 길은 1시간 코스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저 아래 북파 산문에서 우리의 소원과 달리 차창을 때리던 비가 수목한계선을 지나 들꽃이 무성한 정상에 가까울수록 그치는 것이 아닌가. 그친 게 아니라 이 백두산 천지 부근에는 비가 아예 오지 않은 것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들 만세!'였다.
기상대가 보인다. 그 뒤로 왼쪽에 여기서는 가장 높은 천문봉(해발 26,70m)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이 천문봉을 향할 때 나는 기상대 쪽을 향하였다.
거기 옛날 서파를 종주할 때에 보던 국경 5호선 경계비 같은 것이 서 있어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냥 네모진 기둥이고 국경 6호선 경계비는 거기서 동쪽으로 20분을 더 가야 볼 수 있다 한다.
백두산 천지 쪽 내윤(內輪)은 누구라도 감히 내려갈 엄두를 내릴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라서 위험하여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봉이 있어 철벽 봉인가 해서 다른 팀 가이드가 있어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싱겁다.
"이 봉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천문봉의 일부지요."
여기서 천지 수면까지는 467m인데 천문봉 정상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철조망을 돌아 정상에 서야 호수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두려워 생략하고 말았다.
천지로 향한 '천상은 병풍'에는 비취를 박아 놓은 듯이 바위가 드문드문 박혀 있고 수리바위가 그 주둥이를 쳐들고 있다.

거기서 뒤돌아보니 북저남고(北低南高)라는 풍광이 만주 벌판의 끝없는 평야를 향하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옛날의 나의 '백두산 서파 종주' 이야기로 돌린다.
서파(西坡)의 마지막 버스 주차장까지는 눈이 막혀서 차가 더 이상 오를 수 없어서 우리는 도중에 차에서 내려걸어야 했다.
그곳은 1,700m 이상의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을 넘어선 지점이어서 나무 하나 없는 초원에는 갖가지 들풀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7월인데도 길가에는 10cm 이상 두께의 눈이 쌓여 있었고 초원에는 들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그 들풀, 그 들꽃이 무성한 초원 사이로 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5호 경계비까지 꼬불꼬불 계속 올라가고 그 돌층계도 멋있다.
층계도 가파른 층계가 아니다. 두어 걸음 걷다가 한 계단 오르는 식의 조각까지 해 놓은 여유로운 층계다.
이러한 층계 1,386개를 거의 다 오르는 곳 능선에 감격하며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에서 최고로 높다는 1,950m의 한라산보다 40m나 높은 천지를 굽어보는 위치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5호선 국경 비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단순한 붉은 음각 ‘中國5 1990“, 파란 음각 ”조선5 1990'의 키에도 못 미치는 작은 비이지만 청나라가 완력을 앞세워 휴전선이 한반도를 가르듯이 천지를 갈라놓은 역사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 조선조 숙종 때 청나라와 두만강의 국경을 정할 때였다.
청나라 황제의 특사로 온 총관 목극동에 맞서야 할 중신 접반사(接伴使)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란 작자가 늙은 나이를 핑계하여 목극동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지도 않고 산 아래에 그냥 머물고 있어서, 우리의 국토 두만강 안쪽 700리를 잃게 하였으니 이완용보다 더 못난 위인들이다. 힘든 것을 핑계하다가 국토를 영원히 잃었기 때문이다.
목극동이 제 마음대로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소국(小國)에 인물이 없어서 좋은 자기들 땅을 많이 잃었구나.”

이렇게 백두산은 많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뿐인가. 일제시절에 왜놈들은 남만주 철도부설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間島)를 청나라에게 넘겨주는 협약을 자기들 멋대로 체결하고 말았다.
북한(北韓) 위정자들도 그랬다. 1962년 경  6.25의 중공군 참전 대가로, 한민족의 상징인 백두산과 천지의 절반을 중공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라니, 오늘날에도 옛날의 그 못난 박선부, 이선부 같은 자가 북한에도 있었던 것 같으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일이다.

단군신화가 깃들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요, 조산(祖山)인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와 중국 길림성 국경선에 있는 한국에서 2,744m로 제일 높은 산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이름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불려 왔다.
문헌에 나오는 백두산(白頭山)의 최초의 이름은 중국 옛날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서다.
“넓은 광야 한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 부르는데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불함산(不咸山)'이란 속뜻은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말이다. 최근 중국의 1 인자인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갔다는 것을 그 예로 들을 수 있다.
불함문화(不咸文化)라는 말도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배달계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고대 문화를 말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 8 가지를 들고 있다.
연대별로는 한대(漢代)에는 단단 대령(單單大嶺)이라 하다가, 개마산(蓋馬山:남북조 魏), 도태산(徒太山: 魏), 태백산(太白山: 唐)이라 부르다가 금(金) 나라 때부터 장백산(長白山: 창파이산)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장백산(長白山)이라 할 때 여기서의 장(長)의 뜻은 어른이란 뜻으로 새겨야 한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받들어 모시는 산이 백두산이어서 이곳에는 여러 가지의 영웅 탄생 설화가 전하여 온다.

이렇게 장백산은 신성한 사람들이 태어난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은 산상(山上)에서 함부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산에서 용변을 보더라도 그릇에 담아 갔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 북사(北史)에 전하여 온다.
우리들의 선조들도 예로부터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낸 후에야 백두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문헌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조에는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는 말이 나오다가, 고려사(高麗史)에서 비로소
“압록강 밖으로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白頭山) 바깥쪽에서 살게 하였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란 말이 처음 나온다.
그런데 왜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을까?
  어떤 까닭으로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의 이름에 왜 ‘白(백)’자가 들어가는 것일까?
내가 백두산에 오른 것이 7월 1일인데도 백두산 정상 곳곳에는 눈이 가득하였고, 장백폭포 밑 양쪽에는 두께가 8m도 넘게 눈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이산의 산정(山頂)은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눈[雪]과 부석(浮石)으로 인하여 하얗게 보여서 백두산(白頭山)나 장백산(長白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 백두산과 천지 이야기

오늘은 2005년 7월 1일 11시, 맑은 하늘 아래 천지(天池)를 굽어보면서 우선 나는 큰절을 올렸다.
천지(天池)를 처음 뵙는다는 인사요, 맑은 하늘 아래서 천지(天池)를 굽어볼 수 있는 날씨를 허하여 주시었다는 것에 감사요,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의 절이었지만, 그보다 분단의 통한을 엎드려 눈물로 하소연하고도 싶은 마음이기도 하였다.
그런 울부짖는 이 마음을 한 편의 시(詩)에 담았다. (백두산 산행(1)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두산과 천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은 곧 장백산이다. 산이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 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혀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 리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이요,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화강과 속평강,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천지에 대한 기록은 영조 40년(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에서다.

- 석봉(石峰)이 늘어선 것이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君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 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여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

백두산의 넓이는 8,000㎢로 우리나라 전라북도(8,052 ㎢)와 비슷하고, 천지의 넓이는 여의도보다 약간 더 넓다.
그 높이나 넓이는 중국과 북한 자료가 서로 차이가 난다.
그것은 한국은 인천 앞바다를, 북한은 원산을, 중국은 천진을, 일제(日帝)는 동경만 앞바다를 해발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왕이면 우리 동족인 북한의 자료를 주로 따르기로 한다.
백두산의 높이가 2,750m(한국 2,744m, 중국 2.749.6m)인데 천지 수면은 2,190m로 백두산 서파 종주 길에서 500m 정도 아래에 있다.
내가 준비한 카메라는 광각을 겸한 것이련만 한 컷으로는 잡히지 않는 천지 둘레는 14.399km, 평균 수심은 213m이고, 최고 수심은 384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산정(山頂) 호수가 바로 우리 천지다.
저수량은 19억 5천500만㎥로, 만약 어느 누가 1초에 1톤씩 퍼낸다면 60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이 물은 어디서 온 물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북쪽 화구벽을 뚫고 저 달문(達門)을 통하여 사시사철 장백폭포(長白瀑 일명 飛龍瀑)를 이루어 떨어지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만이라고는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천지의 물 60% 이상이 지하에서 솟아나는 용출수라고 하는데 16봉과 천지 수면의 고도차가 4~5백 m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깊은 산 정상에 호수를 이루다니 신비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1931~1932년에 천지를 답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는 천지의 깊이를 442m 이상으로 보고 천지를 세계 10대 호수 중 하나로 꼽았다.
유명한 곳은 이름 하나로 말할 수 없음인가. 천지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대지(大池)’라 하는 것을 위시해서 '천상의 호수', '대택(大澤)', '용왕담(龍王潭)', '용궁지(龍宮池)', '신수분(神水盆)', '천상수(天上水)', '달문지(達門池)' 등이다.

천지 빼놓고 백두산을 말할 수 없듯이, 천지를 말하려면 천지를 병풍처럼 빙 둘러 있는 16 봉우리를 말해야 한다. 이 천지와 16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옛날 옛적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이 산 한 마을에 흉년이 들었답니다. 심술궂은 흑룡(黑龍) 한 마리가 있어 불칼(벼락)을 휘두르며 물곬을 막아 놓은 탓이지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백(白) 장수와 합심하여 물줄기를 찾아놓았더니, 그 위에다가 백두산 돌을 굴려 돌산을 만들어 버렸답니다. 물론 흑룡의 심술이었지요.
하릴없어 마을 사람이 다 떠난 자리에 앉아 백장사가 탄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리따운 공주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간밤에 꿈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어요. 그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신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장수와 마을 사람들의 지성에 감천하여 왔노라. 백 장수에게 옥장천의 샘물을 석 달 열흘 마시게 하여 힘을 길러 흑룡과 싸워 이기게 하라. 이건 네 나라의 일이니 네가 직접 알려야 하느니라.”
지 금의 백운봉 정상에 있는 옥장천을 찾아가서 석 달 열흘 동안 샘물을 마셔 기를 키운 백 장수는 가장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삽이 얼마나 컸던지, 그 기운이 얼마나 세었던지 한 삽을 파내서 던지면 봉우리 하나씩이 생기더랍니다. 백 장수는 이렇게 동서남북을 향하여 16 삽을 파 던졌더니 그 흙을 버린 자리에 16봉이 생겨나고 움푹 팬 밑바닥에서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아나더랍니다.
이때 검은 구름을 타고 달려와서 훼방하는 흑룡을, 흰 구름을 탄 백 장수가 공주와 합심하여 물리치고 나서보니 방금 파놓은 흙구덩이에 물이 지금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백장사와 공주는 흑룡이 다시 또 와서 심술을 부리지 못하게 천지 속에 수정궁을 지어놓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전설을 가만히 살펴보니 백장사의 흰 ‘白(백)’과 산머리를 팠다 해서 머리 '頭('두)로 白頭山(백두산)이라 했다고 하는 옛날 사람들의 민간어원설이 그럴듯하게 여겨지고 천지를 용왕담(龍王潭)이라고 한다는 것에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천지를 둘러싼 2,500m 이상의 높이라는 16봉들의 이름은 중국과 북한이 다르고, 그 이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 산 높이 역시 북한과 중국이 말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
우리가 서파 5호 경계비로부터 북파 쪽으로 가면서 볼 수 있다는 산을 차례로 들어보면

북한 쪽으로는

더 자세히 말해 보면 18봉 중 6개는 북한에, 7개는 중국에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이 16봉은 천지 쪽으로는 거의 90도 경사로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경사로 이를 내륜(內輪: 안둘레)이라고 한다. ,
그 반대쪽에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초원보다 더 아름다운 들꽃이 막 피기 시작한 '천국의 화원' 같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외륜(外輪:바깥 둘레)이라고 한다.

서파(西坡) 트레킹에서 온 분들은 5호 경계비에서 둘로 나뉜다.
종주에 자신 있는 사람은 청석봉으로 하여 장백폭포가 있는 북파 쪽으로 트레킹을 시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의 서파에서 북파까지의 백두산 외륜 종주는 13km로 9시간 정도 걸리는 모양이다.

백두산을 남산북야(南山北野)라 하는 말 그대로 남쪽의 우리 북한 땅은 백두대간으로 수많은 산들이 남을 향하여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이루는데, 장백산은 북으로 한반도의 7배가 넘는 드넓은 만주 평야로 열려있다.
그중 저 멀리 구름 속에 쌓인 제일 높은 산봉우리 중 젖꼭지처럼 뾰족한 봉이 백두산의 주봉인 2,749.2m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일명 병사봉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백두봉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 장군의 '장군'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1927년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백두산근참기'에도 '장군봉'이라고 나온다니 말이다.
장군봉을 오르려면 도로를 통할 수도 있으나 끌차(잉크라인 철도)가 있다 한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정상에 높은 안테나와 철조망과 기둥 같은 것을 흉하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북한은 백두산을 명승지 제19호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면서 이 산을 '조선 혁명의 성산'이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쓴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라는 총길이 216m의 초대형 ‘향도봉 친필비’가 거기 호수 바깥쪽에 모자이크로 쓰여 음각되어 있다 한다.
산이 정치의 광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위해 삼지연군 백두산역에서 향도봉(일명 망천후)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한다.

*. 장백폭로(長白瀑布, 창바이푸부) 이야기

 


아야기를 다시 오늘 백두산 여행으로 돌린다.
비 맞고 지프차로 천문봉에 올라 천우신조로 천지를 우러르고 다시 짚차로 천지길목(倒站口)에 내려와서 우리는 다시 장백폭포를 향하고 있다.
장백폭포 가는 길은 멀리서부터 폭포의 모습을 부분에서 전체로, 그 소리를 점점 가까이하며 향하는 길이다.
그 길은 안개 같은 뿜어 나오는 온천수가 짙은 유황냄새와 함께 그 멋을 더하고 있는 길이었다.
장백폭포 우측으로 동굴등산로가 길게 길게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백두산 돌은 박혀 있지 않고 구르는 돌이 많아서 만들어 놓은 안전 동굴등산로였다.
장백폭포는 천지 북쪽의 천문봉(天文峰, 2,670m)과 용문봉(龍文峰, 2,595m) 사이 달문(達門)에서 흘러내린 물이 1km 정도를 승하사(承擄河-뗏목이 흐르는 강), 우랑도(牛郞渡-견우와 직녀가 건넌 곳)를 거쳐 흐르다가 낙차 68m로 떨어져 장백폭포가 된다.
평균 수량이 초당 2.15톤에 달한다는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폭포로 그 소리가 200m 이상의 거리에서도 들린다는 폭포다.
그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무지개를 타고 오르는 모습이라서 장백폭포는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애칭을 갖는다.


폭포를 보고 매표소를 내려오다 올라갈 때 지나친 1,000원에 2개 하는 온천계란을 먹어보니 그 맛이, 그 고장 특유의 먹거리와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체득하게 한다.
그 83도 보글보글 용출되는 온천수로 익힌 달걀은 물론 옥수수, 소시지가 유혹하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라 백두산유황온천탕에 들어가서 온천 목욕을 하였다.
단순하고 어두운 시설과 야외 온천은 그 아름다운 백두산 영봉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아깝게도 그 담장이 그 모습을 가리고 있다. 송성만 지배인이 말한다.
"온천은 좋은 물이 제일이 아닙니까?"
이 말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발가벗은 몸으로 그의 방에 서 술자리를 벌였다.
여행은 만남이다. 자연을 만나고 문화를 만나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조선족으로 연변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니 이 얼마나 황홀한 만남의 시간인가.
우리는 한국과 연변 조선족의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께 묵었던 연길의 호텔에 돌아가서 석식 후에 일행과 함께 호텔 옆에 있는 시장 구경을 나갔다.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비옷을 입고 가서 보았고, 장백폭포와 백두산이 몸으로 삶은 계란을 먹고 온천 목욕도 하였으니 어찌 그냥 잘 수 있으랴.

우리는 야외 포장마차에서 이화주 1병에 맥주 6병에 꼬치안주를 먹었더니 한국 돈으로 21.000원이었다.
4년 전 왔을 때와 달리 위안화는 2배나 올라서 10위엔 1,000원이던 것이 2,000원이나 하였다.
오늘 나는 새벽에 연변장 터를 1시간 이상이나 구경하였고, 백두산 천지를 마음껏 카메라에 담았으며 여기에 장백폭포까지 더 하였으니 어찌 '부라보'를 연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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