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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桂陽山) 산행

ilman 2021. 12. 23. 11:42
계양산(桂陽山) 산행
 
계양산(桂陽山) 산행

*. 계양산 가는 길

김포공항 뒤에 높이 서 있는 산을 무심히 늘 보고 다니다가, 일산(一山)으로 이사 와서 보니, 이 산이 일산까지 따라와서 한강 너머에 우뚝 솟아 있다. 계양산(桂陽山)이었다.

서해와 수도 서울 사이 지켜 우뚝 서서
눈 아래 누워 있는 부평, 공항 굽어보며
계양은
공중선(空中線) 높이 꽂고
무얼 감정(監聽)하고 있나?

떠나가는 우리를 배웅하는 아빠처럼
귀국하는 피붙이를 마중하는 엄마처럼
그리움
크게 켜 놓고
등대처럼 서 있네.
                                            -계양산
 
10년 전에는 계양산의 진달래가 강화 고려산 버금간다기에 그래서 계양구의 구화(區花)가 진달래꽃이라 하기에, 꽃 피는 춘 4월에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한 연무대(演武臺)를 들머리로 하여 산행을 시작했었다. 연무대는 국궁(國弓)터로 계양산의 대표적인 코스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공항 전철을 이용하여 계양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연무대를 갔는데, 오늘은 그 계양역에서 인천행 전철로 환승하고 계산역(桂山驛)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하였다. 계산역 바로 앞이 바로 계양산이기 때문이다.
그 계양산 가는 길에는 저렴한 가격의 먹거리가 우릴 유혹하고 있다.

*. 왜 '부평' ‧ '계양산'이라 하였을까
 부평(富平)과 부천(富川)을 혼동하는 이가 많은데 부평은 인천광역시 부평구(富平區)요, 계양산이 위치한 곳은 계양구(桂陽區)다.
부천(富川)은 옛날의 '소사'로 '소래'를 아우른 독립된 '부천시(富川市)'다.
  옛날 부평 서부지역은 황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굴곡이 많은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한 해안 지역이었던 것을 둑을 막고 개간하여 오늘날과 같은 부평 평야를 만들었다.
 이렇게 한강유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거기서 수확하는 곡식으로 '富'(부)를 거두는 넓은 '平'野(평야)란 뜻에서 '부평(富平)'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지금은 예부터 부평이라고 불려오던 부평읍(富平邑) 지역은 계산동(桂山洞)이 되고, 1899년 경인철도가 생기면서 새로 생긴 부평역 지역이 부평동(富平洞)이다.

 계양산은 부평 평야 북서쪽에 있는 높이 395m로 강화를 빼고는 인천에서는 가장 높은 부평의 진산(鎭山)으로, 1986년에 계양공원(桂陽公園)으로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산은 고려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또는 안남산(安南山)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이후부터 계양산(桂陽山)으로 불렀다. 그런데 왜 산 이름을 계양산(桂陽山)이라 하였을까?

-옛날에는 이 산에 계수(桂樹)나무와 회양 나무( - 陽木)가 많아서 계수나무 '桂'(계) 회양나무 '陽'(양)의 각각 한 자씩을 따서 '桂陽山('계양산)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계양구청에서는 등산로를 중심으로 몇 년 전부터 계수나무, 회양목, 진달래 등을 3,300여 주를 심어 수종 갱신 사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  계양산성(桂陽山城)
 우리나라 산을 오를 때마다 우리가 감격하고 고마워하게 되는 것은 산을 가꾼 그 고장 사람들의 마음이다.
연무대에서부터 시작되는 돌길이 그러한 것들이다. 수마(水磨)로 잘 다듬어진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층계는 하늘이 맞다은 능선이 시작되는 곳까지 계속되는데 밟고 가기에 황송할 만큼 멋지고 아름다웠다.
 십여 년 전에 왔을 때는 능선이 시작되는 어름 우측에 번호가 매겨진 하얀 표지판을 단 수많은 무덤이 있었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인 계양산성 복원사업을 위한 이장을 위해서 연고자 신고 안내 표지였다. 산이 적은 부평 평야와 김포평야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계양산은 옛날에는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여기는 산성(山城)의 일부인지 계양산성을 설명하는 표지가 있다.
이런 산성은 평상시에는 곡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두는 창고(軍倉)로 쓰다가 적이 침입하면 평지의 백성들을 모두 산성에 들어오게 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킨다[籠城].
산성은 적으로 하여금 많은 힘을 기울여 공격을 어렵게 하고, 아군은 적을 내려다보며 수성(守城)하기 위하여 쌓는 것이다.

-이 성은 계양산(해발 395m) 중턱에 있는 삼국시대의 퇴뫼식[山頂式, 산의 정상부만을 두른 것]산성이다.
한강 하류 초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중요한 군사 기점이었고 고려 시대에 와서도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부평 도호부와 불과 2리 밖에 있는 산성으로서 역시, 교통, 통신, 전략 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고, 성벽의 외부는 잘 다듬은 돌로 약 5m 높이로 쌓아 올리고, 내부는 흙으로 쌓았다.
 그곳이 말끔히 정리되어 지금은 문화재 조사지역으로 출입금지를 하고 있다. 이부근이 산성터인 모양이다.
 산에서 정자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정자(亭子)는 아무데나 세우는 것이 아니다.
정자란 경치 좋은 산수(山水)의 높은 곳에 1층 정도 높이로 쌓고 마루를 깔아 거기서 휴식하거나 운치 있게 놀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정자는 다락 식으로 짓되 지붕과 기둥만으로 사방을 바라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벽이 없다.
이곳에 오기 전에 널찍한 안부 공터 한 모퉁이에 사각정자가 있었는데 이곳 정자는 돌로 8개의 석주 위에 세운 웅장한 계성정(桂城亭)이란 8각 정자였다.
8각정자를 주로 짓는 이유는 우리의 옛 조상들은 天圓地平(천원지평)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자의 지붕을 네모로 지으면 땅을 상징하는 4각 정자요, 그 사각의 네모퉁이를 잘라내어 원에 가깝게 8각 지붕을 만든 것이 8각정인 것이다.
 
*.하느재 쉼터
 팔각정자에서 시작된 멋진 통나무 층계를 오르니 내리막 길이고 그 나무 계단이 끝난 지점 안부(鞍部)에 쉼터가 있는, 거기가 하느재 쉼터였다.

-하느재는 부평 쪽 경인 여대(京仁女大) 쪽에서 오르는 300m 길이 어찌나 가파르고 높던지 하늘에 오르는 것 같다 하여 '하늘재'라 하던 것이 ‘하느재’가 된 것이다. 우리말에는 '불삽'이 '부삽', '솔나무'가 '소나무'처럼 두 낱말 사이의 'ㄹ'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하느재를 소반재라고도 불렀다는데 헐떡거리며 올라와서 쉬어가야 할 그 고갯마루 모양도 그랬다지만 크기가 자그마한 밥상인 소반(小盤) 같다고 해서 '소반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계양산 정상 가는 길
   정상은 헬기장을 지나서도 한참 가야 만날 수 있다더니 드디어  정상이다.
계양산의 높이는 395m로 낮지만 평지부터 올라가는 산이라서, 높이에 비해 오르는 길이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능선 길 내내 시야를 가리는 큰 나무가 없어서 전망이 좋고, 안테나가 꽂혀있는 높은 산정을 능선 내내 바라보며 가는 산행이어서 재미가 쏠쏠하였다. 산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온 등산로가 나를 따라 꼬불꼬불 오르고 있는 것은 더욱 멋져 보였다. 가다보면 곳곳에 도치카(tochka)가 있어 이곳이 국방을 위한 전략상 요지임을 직감케 했는데 그게 다 정비되어 없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평의 계양산은 강화도와 함께 수도 서울의 서쪽을 방어하는 군사적인 요충지(要衝地)였다.
그러던 산이 오늘 등산 중에 만난 계양산은 무성한 나무가 전망을 막고, 굽어보는 부평 평야의 번영한 모습이 서울 같은 대 도시로 커졌다. 그보다 당시에는 가볍게 올라온 정상이 한여름 무더위 탓도 있겠지만 10년이란 나이가 도중에 정상 등반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에 버거워졌다.
 산을 오르다 보니 검은 색깔의 돌이 유난히 많아서 이것이 유명한 계양산의 부싯돌을 만드는 돌이라고 신기해 하였는데 그 돌들도 숲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라이터나 성냥이 없던 옛날에는 부시[火刀], 부싯돌[石英], 부싯깃을 이용하여서 불을 얻었다.
왼손에 부싯돌과 불똥이 잘 붙는 말린 쑥이나 수리치 또는 칡잎을 대고 오른 손으로 힘껏 쳐서 불똥을 일으키는 것인데 이 세 가지를 부시통이나 부시쌈지에 넣고 쓰는 당시에는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었다.
그 부싯돌 산지가 계양산이어서 이 고장 사람들은 안남산[계양산] 돌을 떠다가 부싯돌을 만들어 팔러 다녔다고 한다.

*. 계양산 전설

 서울 서쪽으로는 높은 산이 별로 없다.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인 덕양산(124.8m, 행주산성), 그 건너 개화산(128m), 강화의 마니산(469.4m)' 부평 쪽에 있는 철마산도 겨우 127m다.
부평평야와 김포평야에 우뚝 솟아오른 395m의 계양산에 올랐으니 날씨가 맑기만 하다면 인천바다까지가 아울러 한 눈에 들어올 터인데 우리는 그런 안복(眼福)이 없었다. 날씨 때문인가. 스모크 현상 때문인가.
계양산은 정상이 유난히 넓다는 것, 정상 석에 이 산의 소개가 음각으로 써 있다는 것. 그리고 여러 사람이 앉아 쉴 수 있는 나무의자를 만들어 놓은 것 등이 특이했다.
하느재에서도 그랬지만 정상에도 먹을거리를 파는 장사꾼이 있어 운치스러웠다.
서울에서 보는 계양산은 하나의 봉우리지만 부평에서 보는 계양산 정상은 봉우리가 둘이다. 그 동쪽 봉우리의 남쪽에 큰 바위에 굴이 있는데 이굴을 '장사굴'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였다. 부평에 침입한 왜군들이 마을과 향교를 불태울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향교에서 모시던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이 굴 속에 가져다가 숨겨서 화를 면했다 한다. 이 굴을 '장사굴'이라고 하는 것은 이 굴에서 옛날에 장사가 나왔다 하여 장사굴이라고 하였다 한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남쪽으로 멀리 강화의 마니산(496.4 m)이 보인다. 계양산은 그 마니산의 일부였던 것이었는데 그 일부가 떠내려 와서 지금의 계양산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마니산(摩尼山)을 '형산(兄山)', 계양산(桂陽山)을 '아우산'이라고 부른다.

*. 이규보(李奎報) 시비
  요번에는 계양산성을 꼭 보아야지 했는데 산성은 예산이 없어 아직도 준비 중인 모양이다. 1870년경 경명현 능선에 세워졌다는 중심성도 보고 싶었으나 중심성도 해방 후 성곽돌을 이용하여 하던 각종 토목공사와 진맹이고개의 대로가 뚫리면서 사라져 버렸다 하여 하산 길은 지선사 쪽을 향하였다. 거기에 고려시대 최대 문장가였던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시비가 있다 하여서다. 지선사까지는 1.220m로 몹시 가팔랐다.
이규보 시비는 5m 정도의 큰 오석에 음각으로 우중에 농사짓는 농부를 보고 쓴 한시와 그 해석을 내용으로 하는 비석이었다.

-이규보는 고려 중기의 무신집권 시기의 시인이며 대문호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을 두루 읽기 시작하여 14세에는 시를 빨리 지어서 선배시인들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리다가 22세에 과거에 장원 급제한 시인이다. 만년에는 시(詩)와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렸다.
민족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 '백운소설', '동국이상국집' 등을 쓴 고려시대 대 시인이며 문호로 8천여 수의 시를 남겼지만 그는 철저한 입신출세주의자며,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을 깊게 고심하여 쓰는 문인이 아니라는 평을 받기도 한 분이다.

一國濟肥民力內   나라가 잘 되고 못됨 민력에 달렸고
萬人生死稻茅中   만민의 살고 죽음 벼 싹에 매였네
他時王粒堆千凜   가을날 옥 같은 곡식 일천 창고에 쌓이리니
請記今朝汗滴功   땀 흘리는 농민들 오늘의 공을 기록하게나

그 시비 아래에 있는 지선사를 들렀으나, 백양사를 옮겨다 지은 것으로 너무나 새 건물이어서 고풍스런 미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절에 왔는가, 아파트에 왔는가 착각할 정도라서 지선사는 안 가볼 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