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 가는 길(상)/ 포토 에세이 (222000인천제1국제여객터미널-14h↣단동↢5h-集安-2h-통화-3h-송강하-1h-백두산 西坡/백두산트레킹여행사와 *. 가자, 죽기 전에 백두산으로 백두산(白頭山)에 가보겠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엄두도 못 내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ilman 선생 우리 함께 가봅시다, 백두산에-. 북한을 통하여 백두산에 오르기를 기다리다가는 생전에는 어려울 듯하니.” 같은 아파트에 함께 살면서 노년을 함께 하는 하(河) 형이 말이었다. 하(河) 형은 기록상으로 북한산 백운대를 2,500번 넘게 오르고 있는 산꾼이요, 시집 애산송(愛山頌)을 지은 시인이기도 하신 분이다. '백두산트레킹'을 따라 가면 백두산 오가는 길에 6.25 때에 동강난 압록강 대교와 위화도(威化島)도 보고, 고구려의 유적지인 국내성(國內城) 터, 졸본(卒本) 산성이라는 오녀봉(五女峰)과 광개토대왕비(光開土大王碑)와 장수왕릉(長壽王陵)을 둘러볼 수 있다 하니,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냐. 비록 지금은 남의 나라 중국을 지나 장백산으로 오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곳은 이렇게 옛날에는 우리의 조상 고구려인이 뛰놀던 우리의 땅이 아닌가. 그래서 떠나는 날까지 나의 머리에는 백두산으로 꽉 차서, 서점과 인터넷을 들락날락 손품 발품 다 팔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 비야, 비야. 제발 모래만은 오지 말아다오 백두산 가는 길은 비행기를 타고 심양(瀋陽)으로 해서 백두산을 향하는 길도 있으나, 우리는 인천 부두에서 동방명주(O.P)라는 중국 국제여객선을 타고 신의주 건너에 있다는 단동(丹東)을 향하고 있다. 값도 값이지만 그보다 하늘을 넘나드는 해외여행을 하면서, 바다를 건너가는 여객선을 이용하는 여행은 얼마나 더 멋있는 낭만일까 하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올 때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용하는 여객선은 화물선을 개조한 중국의 선박이라서 잠자리, 식당, 화장실 등이 국내 여객선보다 이를 데 없이 조악(粗惡)하였으나, 그보다 우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틀 후로 예정된 백두산 트레킹에서 천지(天池)를 굽어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저녁에도 그랬지만, 자다가 수시로 일어나 갑판에 나가보아도 짙은 안개 속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궂은 날씨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였다. 백두산의 봄은 6월부터 시작한다. 봄은 여름 없이 가을로 접어들고 9월부터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겨울이 9개월이나 계속된다. 일년 중 비 오지 않고 맑은 날이 20일이라는데-, 8급 이상의 큰 바람이 225일을 불면서 맑다가도 갑자기 운무가 낀다는데-. 연평균 안개 낀 날이 242일이라는데-, 그래서 백두산을 찾은 관광객이 천지(天池)를 볼 수 있는 확률은 2/10밖에 안 된다는데-, 백두산은 우리들 16명 일행에게 그 아름다운 얼굴을 아낌없이 열어 줄 것인가. 일행 중에는 백두산 천지를 보고나서 죽겠다고 3년을 벼르다가 온 8순 노인이 있었다. 이 간절한 친정 아빠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희수(喜壽)의 어머니와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의 두 딸과 함께 온 딸 내외가 있는데-. 그래서 조선영조 때 산수갑산으로 귀양왔다가 1766년에 백두산에 다녀와서 쓴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에는 다음과 같은 제문이 있다. "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중국의 상상적인 성스러운 산)과 같은데, 만약 해동(海東)의 편협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백두산에 올라 그 웅대한 경관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전하기를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 중에는 풍우와 운무 때문에 제대로 경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곤류산의 신령이 중국인들에게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데, 어찌 백두산의 신령만이 그러하겠습니까? 산신은 우리를 보우하셔서 해와 달이 밝게 비추어서 만상이 밝게 드러나고 산의 풍광을 모두 다 볼 수 있께서 하십시오." *. 백두산 가는 길의 ‘빵빵’ 기사 우리들의 백두산 가는 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버스 여행이었다. ‘인천제1국제여객터미널-14h①-단동-5h-集安-2h-통화②-3h-송강하-1h-백두산西坡-10h- 북파 장백폭포③’ 대부분 중국 기사들이 그러하였지만 우리들의 버스 기사는 유난히 클랙션을 자주 울리며 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빵빵 기사’라고 불렀다. 차를 몰고 가다가 사람이 보인다고 ‘빵빵’, 그 옆을 지나간다고 ‘빵빵’, 꼬부랑길이라고 ‘빵빵’, 추월하겠다고 ‘빵빵-’. 그런데 갑자기 시렁의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치고는 너무 큰 소리가 들리면서 차가 심하게 흔들리며 ‘찌이익-’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 빵꾸가 난 것이 아니라 타이어가 완전히 찢어지고 터져 버린 체 100m 이상 스피드 마크를 그리며 차가 전진한 것이다. 백두산도 못보고 큰일 날 번한 것이다. 백두산 가는 중국의 버스들은 대개 선진국에서 쓰다 버린 중고 버스였고, 그 네 바퀴는 한결 같이 다 달아버린 바퀴 위에 덧붙여 만든 재생 타이어였다. 까만 주부가 흉하게 길거리에 나둥굴어 있었다. 우리는 백두산 오르는 길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수리하여 떠나느라고 통화(通化)의 휘풍호텔소에 도착한 시간이 11시가 넘어서 우리들은 2시간 내외의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도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강행군이어서, 통화(通化)에서 송강하(松江河)를 거쳐, 백두산까지 가는 4시간 동안에 버스에서나 자지- 하였다. 그러나 걱정하던 날씨가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소원대로 맑아 있었고 백두산이 점점 가까와 오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빵빵 기사가 몰던 버스가 요번에는 팬벨트의 나사가 부러져 나가는 바람에 우리들은 속절없이 또 다시 한참 동안 다음에 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바꿔서 타야 했다. 그러나 중요한 좋은 것 앞에는 모든 결점이 덮어지는 것인가. 맑은 날씨는 이 모든 것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드리게 하였다. 잠 못 잤다고 걱정하는 우리들을 위로하는 여행사 가이드의 말이 우리들을 더욱 신나게 하였을 뿐이었다.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요, 너무 흥분해서 피곤도 배고픔도 잊어버린답니다.” *. 왜 백두산(白頭山)이라고 하였는가 단군신화가 깃들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요, 조산(祖山)인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와 중국 길림성 국경선에 있는 한국에서 2,744m로 제일 높은 산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이름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문헌에 나오는 백두산(白頭山)의 최초의 이름은 중국 옛날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넓은 광야 한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 부르는데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불함산(不咸文化) '이란 속뜻은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뜻이다. 최근 중국의 1인자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갔다는 것을 그 예로 들을 수 있다. 불함문화(不咸文化)라는 말도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배달계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고대 문화를 뜻하는 말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 8 가지를 들고 있다. 연대 별로는 한대(漢代)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하다가, 개마산(蓋馬山:남북조 魏), 도태산(徒太山:魏), 태백산(太白山: 唐)이라 부르다가 금(金)나라 때부터 장백산(長白山: 창파이산)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장백산(長白山)이라 할 때 여기서의 장(長)의 뜻은 어른이란 뜻으로 새겨야 한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받들어 모시는 산이 백두산이어서 이곳에는 여러 가지의 영웅 탄생 설화가 전하여 온다. 세 자매 선녀들이 천지서 목욕할 때 까치가 붉은 열매를 셋째 선녀 옷에 놓았더래요. 그 열매 먹고 낳은 아들이 청황제(淸皇帝) 조상이랍니다. -청제(淸帝) 탄생설화: ‘開國芳略’) 백두산에 왕건 아비 도선(道詵)에게 집터 얻어 아들을 잉태하니 그 왕건 쑥쑥 자라, 궁예를 물리치고서 고려 태조 됐답니다. -왕건 탄생 설화 이렇게 장백산은 신성한 사람들이 태어난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은 산상(山上)에서 함부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산에서 용변을 보더라도 그릇에 담아갔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 북사(北史)에 전하여 온다. 우리들의 선조들도 예로부터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낸 후에야 백두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문헌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조에는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는 말이 나오다가, 고려사(高麗史)에서 비로소 “압록강 밖으로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白頭山) 바깥 쪽에서 살게 하였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란 말이 처음 나온다. 그런데 왜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을까? 어떤 까닭으로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의 이름에 왜 ‘白(백)’자가 들어있는 것일까? 내가 백두산에 오른 것이 7월 1일인데도 백두산 정상 곳곳에는 눈이 가득하였고, 장백폭포 밑은 두께가 8m도 넘게 눈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이산의 산정(山頂)은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눈[雪]과 부석(浮石)으로 인하여 하얗게 보여서 '백두산(白頭山)'나 '장백산(長白山)'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통된 견해다. *. 서파(西坡) 오르는 길 백두산 오르는 길에는 동파(東坡), 서파(西坡), 남파(南坡), 북파(北坡) 4코스가 있다. '坡(파)'란 언덕 파(坡) 자다. 그중 동파(東坡)만은 북한 쪽에서 오른 길이고, 압록강을 끼고 오르는 길인 남파 (南坡)를 현지인들은 '압록협곡'이라 부른다. 대개의 관광객들이 연변을 거쳐 이곳에 와서 찝차로 오르는 곳은 장백폭포가 있는 쪽의 북파(北坡)요, 우리가 오르기로 되어있는 서파(西坡)는 한국의 '백두산 트레킹' 같은 서너 개의 전문여행사를 통하여 중국 당국에 1인당 20$ 정도의 요금을 내고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는 백두산 종주 트레킹 코스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자란 나 같은 사람들의 부끄러움 중에 하나는 나무 이름, 꽃 이름, 풀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백두산 가는 길 좌우에 늘어선 우람한 나무들이 백두산이 가까워질수록 높이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데 그 나무들의 이름을 몰랐다. 그래서 여기서는 장백산 상점에서 산 스카프의 그림으로 대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버스는 활엽수림대(闊葉樹林帶:넓은잎나무숲지대)를 지나더니 침엽수림대(針葉樹林帶:바늘잎나무지대)로 바뀐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백두산이 시작되는 장백산 산문(山門, goqkf 1,500m)을 지나 50분쯤까지 큰나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 버스 주차장까지는 눈이 막혀서 더 이상 오를 수 없어서 우리가 도중에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해야 하는 지점에는 나무 하나 없는 초원지대였다. 1,700m 이상의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을 넘어선 것이다. 여행사에서 권하던 대로 큰 배낭은 버스에 두고 준비해간 작은 배낭에 배급 받은 점심 도시락과 물통을 넣었다. 이때 준비해야 할 것은 비상식, 랜턴, 방풍 상하(또는 우의), 긴 난방도 필요하였지만 스틱은 꼭 있어야 했다. 드디어 백두산 등정이 시작되었다. 7월인데도 길가에는 10cm 이상 두께의 눈이 쌓여있었고 초원에는 들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나무 한 구루 자랄 수 없는 환경에서도 저렇게 푸른 초원을 이룬 풀을 보며 오르다 보니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이 생각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풀’은 우리네 같은 민초(民草)를 상징하고, ‘바람’은 민중을 억압하는 힘을 뜻한다. ‘둥풍에 나부껴’, ‘날이 흐려서’ 그 바람 앞에 눕고, 울게 되지만 자기를 괴롭히던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는 김 시인이 말하고 싶은 그 속 뜻의 '풀'을 여기서 다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들풀, 그 들꽃이 무성한 초원 사이로 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그 돌층계도 5호경계비까지 꼬불꼬불 계속 올라가고 있는 것이 멋지다. 그 길을 따라 오르는 등산객의 모습은 더욱 멋진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층계도 가파른 층계가 아니다. 두어 걸음 걷다가 한 계단 오르는 식의 여유로운 층계다. 전후좌우로 탁 트인 시야에다가 백두산 특유의 바람까지 불어주는 너무나 시원한 오름길이다. 그 초원에 두 여인이 하나는 누어있고 또 한 이는 엎드려 있다. 들꽃을 찍고 있는 모습을바라 보는 것이 천지(天池) 오르는 멋을 더해 준다. 늙은 여인들이었지만 이러한 순간만은 여느 젊음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그중 교향악의 세계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가수, 성악가, 연주가, 지휘자의 몸짓과 표정이 그 음악 속에 푹 빠진 혼신을 다하여 몰아경지(沒我境地)의 오가니즘의 경지에서 만들어 내는 음악의 세계 때문이다. 이러한 층계가 1,386개를 거의 다 오르는 곳 능선에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에서 최고로 높다는 한번(1)만 구경(9) 오십(50)시오로 외던 1,950m의 한라산보다 40m나 높은 천지를 굽어보는 위치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5호선 국경 비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단순한 붉은 음각 ‘中國5 1990“, 파란 음각 ”조선5 1990“의 키에도 못미치는 작은 비이지만 청나라가 완력을 앞세워 휴전선이 한반도를 가르듯이 천지를 갈라놓은 역사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숙종 때 청나라와 두만강의 국경을 정할 때였다. 청나라 황제의 특사로 온 총관 목극동에 맞서 국경의 선을 확인해야 할 중신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란 작자가 늙음을 핑계하여 목극동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지도 않고 산 아래에 그냥 머물고 있어서, 우리의 국토 두만강 안쪽 700리를 잃게 하였으니 이완용보다 더 못난 위인들이다. 힘든 것을 핑계하다가 국토를 영원히 잃었기 때문이다. 목극동이 제 뜻대로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소국(小國)에 인물이 없어서 좋은 땅을 많이 잃었구나.” 이렇게 백두산은 많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본 강압기 시절에 일제는 남만주 철도부설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間島)를 청나라에 주는 협약을 자기들 편한대로 체결하고말았다. 그뿐인가. 북한은 1962년 경 6.25의 중공군 참전 대가로, 한민족의 상징인 백두산과 천지의 절반을 중공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라니, 오늘날에도 옛날의 그 못난 박선부, 이선부 같은 자가 북한에도 있었다 하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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