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풍속

일본인 조상들의 만행/광복절 8. 15 특집

ilman 2019. 8. 14. 14:45
일본인 조상들의 만행(蠻行)/광복절 8. 15 특집
                                                                              -ilman
광복절(光復節) 국경일이다.
국경일(國慶日)이란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는 날로, 우리나라 국경일은 3.1절(3/1), 제헌절(7/17), 광복절(8/15), 개천절(10/3, 한글날(10/9)로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 53호로 공포한 날이다.
이 5대 국경일 중에 2/5가 일본(日本)과 관계있는 날이다.
3. 1절은 일본의 강제 보호 정책과 강압 정치로부터 자주 독립할 목적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 강압정치에 반항한 민족적인 의거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른  날이다.
  이 운동에 참가한 단체가 600여 단체, 참가한 인원이 50만여 명이고, 이때 죽은 사람이 550명, 부상당한 사람이 1,400 명, 투옥 당한 사람이 9,400여 명이나 되었다. 조선인구가 2,000만일 때의 일이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에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후 36년 동안 수 없는 압박과 차별대우를 받아오다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절이었다. 
제국주의(帝國主義)란 선진국들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후진국(後進國)을 정복하여 대국가(大國家)를 건설하려는 야심의 침략 주의(侵略主義)를 말한다.
  그런데 인도(印度)가 식민지로서 영국(英國)에 필요했던 것은 자국 영국의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면, 일본(日本)의 경우는 달랐다.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하여 조선(朝鮮)을 통째로 영구히 일본화(日本化) 하려는 야욕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빼앗긴 국권(國權)을 되찾았으니 8.15 광복절(光復節)은 국경일 중에서도 가장 경사스러운 날이다.
이 날은 1945년 일제 강점기(强占期)를 끝내고 국권을 회복한 날인 동시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樹立)한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가. 대대로 우리 민족들은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해 왔다. ‘왜놈’이란 일본 남자를 욕으로 하는 말로 ’왜이(倭夷)‘라고도 하고 ’쪽발이‘라고도 하였다. '쪽발이'란  한국인을 비하하는 '조센진'이란 말에 대하여 일인들이 게다라고 하는 왜나막신을 신었던 일본인을 모욕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3. 1절 이전에도 왜놈들은 대대로 우리 민족을 괴롭혀 온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들이었다.
우리들은 삼국시대부터 이들을 왜구(倭寇)라 불러 왔다. '倭)'는 일본이요, '寇(구)'는 도둑 '구' 자다. 한 마디로 일본 도둑놈이란 말이다.
왜구(倭寇)란 13~16세기에 중국과 우리나라 근해를 항해하며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을 이르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 출몰한 왜구는  해안(海岸)은 물론 내륙(內陸), 심지어는 한양(漢陽)까지 깊숙이 침략하여 재물을 약탈하며 갖은 만행을 자행하던 도둑의 무리들이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준동하던 이 일본 도적들은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가 대마도(對馬島)를 중심으로 하여 그 노략질이 극심하여, 고려(高麗) 멸망(滅亡)의 원인이 되기까지 하였다. 고려 마지막 왕 우왕의 재위 14년 동안만도 378회나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1396년에는 120척의 대함대가 침입하기도 하였다니 왜구의 노략질은 일본의 국가적인 행사였던 모양이다. 그런 약탈 행위는 임진왜란(壬辰倭亂)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장가계(長家界) 가는 길에 금문도(金門島) 앞 해안도시 샤먼(廈門)에 들렸더니 왜구를 퇴치했다는 언덕과 그때 사용한 대포와 그 기록을 보니까 중국은 물론 동남아까지 왜구의 약탈(掠奪)이 심했던 모양이다.
  약탈(掠奪)이란 폭력을 써서 남의 금품을 빼앗는 강도질이요 도둑질이다. 일본인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조상의 후손(後孫)이라는 것을 알고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가해자(加害者)는 잊어버리는 일이지만, 피해자(被害者)는 잊지 못하고 영원히 기억한다는 것을 일본인(日本人)들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구(倭寇)들은 왜 그런 만행을 지속적으로 거침없이 자행한 것이었을까? 

-일본은 땅의 크기(37만 2천313 km²)가 남북한을 합친 한국(22만 1,000 km²)보다 1.7배, 남한(9만 9,015 km²)보다는 4배가량이나 큰 나라다. 거기에서 인구가 남한 인구 5,000만보다 4. 5배나 많은 1억 2천5백만으로 세계에서10 번째로 많은 사람이 사는 나라다. 
  산악국가인 스위스는 국토의 26%만이 평야인데 비해,  일본은 그보다도 적은 평야가 국토의 20%뿐이라서 인구에 비하여 농사지을 땅이 아주 부족하였다. 자고로 농산물로는 자급자족(自給自足)하여 살 수 없는 나라였다.  그래서 역사 이래 수 없는 왜구(倭寇)들이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 일대까지 진출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왔고, 그때 그들이 노린 것이 주로 식량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36년 간에도 일제는 한국에서 수많은 곡식을 공출하여 갔다.
일본은 자기들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서의 식민지 한국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1900년 세대인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몹시 배고프게 살았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에 자란 사람들은 키가 지금의 젊은이들보다 작다. 

                 

 

 *. 왜구들의 약탈과 임란의 피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 민족은 자고이래(自古以來) 얼마나 많이 우리를 괴롭혀 오던 민족이던가.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일본 역사 탐방 길에 강원대학 손상철 교수의 선상대학(船上大學) 강의에서 고려 시대의 저들의 만행을 들어 보자.    

  -출동 규모:    2~3척에서 500여 척(1만여 명)
  -고려말(1350~1392년):  495회 침입
  -침입 대상 지역: 도서, 해안지방은 물론,  강을 타고 내륙 깊숙히
  -약탈 대상:   식량(조창 습격), 가축, 사람 납치(부녀자, 아이 등 3만명), 관청 습격
  -문화재 약탈: 고려 종 50여 개, 불화 95점, 불상 80여구 등.
  -잔혹상:       서너살 짜리 여자 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었다.
 그뿐인가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은 조선 정벌로써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국위 를 선양한 위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오시(豊臣秀吉)를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임진왜란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 

   -인명 피해:  전국 328읍 중 182읍 유린
   -경제적 피해:  150만 결 -30만 결   *결(結): 논 밭 넓이의  단위로 백 짐 또는 만 파(把)
  -문화적 피해: 경복궁 등 궁궐, 불국사 등  전국 사찰, 사고 소실, 서적, 도자기, 문화재 약탈
  -여성들의 피해:  집단 성폭행, 살인 및 납치  


  다음 그림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젖을 먹이는 김씨 엄마를 목잘라 죽이는 모습이요, 죄없는 백성인 배씨를 3토막으로 살해하는 장면이요, 이씨의 사지를 잘라 죽이는 왜놈들의 만행의 그림이다.
 
 
 역지사지(逆地思之)하여 당시에 조선(朝鮮)이 일본(日本)보다 국력(國力)이 강하여 왜구(倭寇)들의 죄를 물어 일본 국토에 쳐들어갔다고 하자. 그때 조선이 일본 전국의 모든 문화재(文化財)를 불태우고 빼앗아 왔다면 지금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을 어떻게 볼까? 이런 차원에서 일본은 한국인을 보아야 할 것인가 묻고 싶다.

*. 귀무덤(耳塚)인가, 코무덤(鼻塚)인가 
 출처:Paran미디어
 일본 교토시(京都市) 가시야마(東山區)에 히데요시 신사 바로 건너에 '귀 무덤'(耳塚., 미미즈카)이 있다.
이 귀 무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살해한 조선인 중 12만 6천명의 귀와 코를 베어다 전승(戰勝)의 증표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내어 거기 묻은 귀무덤이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만명이었으니 전국민 중 1.3%의 무고한 백성을 죽여서 그 귀와 코를 베어서 여봐라 하는 듯이 자랑삼아 묻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옛문헌에 코와 귀가 없는 이들이 시내를 수 없이 다녔다는 기록을 보면 숫자를 채우기 위해 산 사람의 코와 귀/까지도 짤라간 모양이다.
 
-이런 만행을 일본이 저지른 가장 부끄러운 치부라고 생각한 일본인 할아버지가 2대에 걸쳐서 그 무덤을 돌보고 있다. 귀 무덤 동쪽에 사는 시미즈(93세,淸水四郞) 할아버지였다.    출처: 서울 =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보라. 그런 일본이 한 술 더 떠서 반만년 역사의 나라 조선의 국권을 36년 동안이나 빼앗아 짓밟고 조센진이라고 온갖 천대와 차별 대우를 하며 우리민족 문화를 말살하려 하고, 심지어는 우리 민족의 성(姓)과 이름까지 창씨 개명(創氏改名)을 하였으니 어찌 일본 민족이 우리 민족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가 아니겠는가.
 당시 소학교(지금의 국민학교)에 다니던 10살이었던 나의 일본식 이름이 '나리다 데스요(成田哲鏞)'였다.
학교에 가면 일본어만 쓰게 하였고 우리말을 쓰면 이를 적어 담임선생님께 보고하게 하였다. 내 소학교 친구 중에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다가 걸려서 얼음 위에 1시간 이상 무릎을 꿀리는 바람에 다리가 미비 되어 평생을 불구자로 사는 친구도 있다. 
 10여 년 전에 폴란드의 '아우스비치 수용소'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치 독일(獨日)이 무고한 민간인 유태인(猶太人) 남녀노소를 잡아다가, 일을 못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노인과 어린이 부녀자들을 개스실에 넣어 잔혹하게 죽인 수용소였다. 그 입구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그와 같은 짓을 일삼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우리의 처녀들을 강제 동원하여 성노예(性奴隸)로 데리고 놀더니, 이제 와서 돈 벌이로 자청(自請)한 일이라고 파렴치한 변명이나 하며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민족이 지금의 일본 민족이다. 생각해보라. 유교지국(儒敎之國)이었던 조선인이 어떻게 딸을 성노예로 보내어 돈을 벌게 하였겠는가.

  일본인에게 묻고 싶다. '우니나라가 일본보다 서구 문물을 더 일찍 받아 들여 부국강병하여 일본에 쳐들어 가서 일본 처녀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성노예로 대리고 놀았다면 지금의 일본인들은 우리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를. 
*.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일본 정신
   화혼양재(和魂洋才)란 말이 있다.

1868년 明治維新(메이지유신)이래  '일본정신 + 서양기술= 和魂洋才' 가 당시 일본의 슬로건이었다.  
일본이 이렇듯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일본을 살지우던 그 황금같던 그 귀중한 시기에, 우리의 대원군(大院君)은 우리나라를 서구문명으로부터 꼭꼭 닫아 놓은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조선과 통상하러 온 미(美) 함정과 오히려 일전(一戰)을 벌이며 망국(亡國)의 길로 허송세월 할 때, 일본은 나날이 국력을 키우며 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내가 안타까와 하는 것은 북한 위정자들이 쓸데없는 전쟁 준비에 심취하여 대원군 이상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하는 기회를 놓지고 있어 남한과의 경제 격차가 1/24 이상이나 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일본(Japan)과 쿠바(Cuba) 두 나라는 둘 다 비슷한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쿠바(Cuba)의 건너편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렇다 할 고대 문명이 없었던 반면, 일본의 건너편인 한반도와 중국에는 자가네들 보다 몇 배 이상 뛰어난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곶감을 빼어먹듯이 알자배기만 쏙쏙 뽑아 가면 되었다.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  서문 일본 경제기웍청 장관 사카이야 다이치

  이런 시각의 말은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미국의 에드윈 라이샤워의 글에도 나타난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서 자가(自家)의 약탕기에 넣고 달여 스승을 능가하는 문화 꽃을 피웠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서 배운 문물에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서구로 눈길을 돌려 서구 문물이 거세게 밀려올 때 실기(失機)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에 108명의 사절단 등을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배워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일본으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해군은 영국군인, 육군은 독일군인에게 교육을 맡기고, 신식 교육은 미국식을 채택하였다.
인구 3,500만 명 시절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전문가 1만 명을 불러들여다가 조선이 영원히 따라올 수 없는 일본의 국력을 키운 것이다.
 
일본인의 국민성 중 나쁜 하나는 자기보다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게는 아첨하고, 자기보다 못한 나라는 짓밟는 나쁜 국민성이있다. 북해도(北海道)나 오끼나와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이 그 예다.
그래서인가. 지금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한류(寒流) 열풍’을 시기하여 혐한사상(嫌韓思想)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분단의 비극(分斷悲劇)은 일본(日本) 때문이었는데, 어째서 패전국 일본이 분단(分斷) 되지 않고, 오히려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된 죄없는 우리 민족이 비극의 분단국(分斷國)이 되었느냐 말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한 마디 사과를 했는가 묻고 싶다.
 오늘은 우리 아파트 관리실을 찾아 가야겠다. 젊은 관리소장에게 “제발 국경일(國慶日)이나 국가기념일(國歌記念日)에 국기를 달지 않는 집이 없도곡 방송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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