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옛날에는 손님을 맞는 첫인사로 대객 초인사(對客初人事)라 하여 담배를 권하였으나, 지금은 담배 대신 커피 대접이 일상화되었다.
그래서인가. 대형마트 단일 품목 중 매출 1위가 커피믹스가 될 정도다.
옛날 한국에 온 외국인들의 눈에 가장 신기하게 비치는 것이 외국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교회요, 다방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그 복고풍(復古風)인가, 거리에 넘쳐나는 것이 커피전문점이다. 그 수가 2012년 현재 무려 1만2,000여 개로 연간 매출액만도 2조5,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1912년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커비 소비량은 어른 1인당 한해 약 293잔씩 커피를 마셨다 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커피를 아주 좋아하는 민족이로구나 하였더니, 이웃나라 일본인들은 한국보다 더해, 한 주 동안 1인당 6.5잔의 커피를 마시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대개 가정에서 마시고 커피전문점에서 마시는 양은 0.2잔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 젊은이들은 가정에서보다 커피전문점을 이용하는 비율이 높다.
값비싼 안주와 함께 여러 병을 마시는 술집과 달리 한 잔의 커피만을 마시는 커피전문점은 얄팍한 지갑의 젊은이에게는 부담 없이 들릴 수 있는 곳이어서 자주 찾는 것 같다.
그래서 커피전문점은 젊은이들에게는 만남의 장소요 우정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대학가와 학원가나 아파트 주변의 카페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기호식품(嗜好食品) 1순위인 커피를 인류는 언제부터 먹게 된 것일까?
*. 커피의 역사
나는 지난 여름 일산 Kintex서 열린 커피박람회를 가서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하면서 언젠가 커피 박물관에 가서 이를 보충하고 싶었다.
커피박물관을 가려고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전국 각지에 15개나 되어서 그 중 내 집에서 가장 가까운 '파주 헤이리 커피박물관'(파주시 탄현면 헤이리 마을길 23)을 찾았다.
‘헤이리’란 파주지방에 내려오는 농사꾼이 농사를 지을 때 기운을 북돋기 위해 ‘헤이리~ 헤이리~’ 하고 노래를 부르던 농요(農謠) ‘헤이리 소리’의 후렵구에서 따온 이름이다.
헤이리 커피 박물관에 도착하고 보니 ‘커피는 예술이다’라는 현수막이 있고 그 옆에 커다란 커피 보드 조형물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관람요금은 '핸드드림' 체험료가 포함되어서인지 입장료가 8,000원으로 비교적 비싼 편이다.
'핸드드림'이란 핸드드립을 통하여 내가 직접 뽑은 커피를 야외 테라스에서 시음할 수 있는 체험을 말한다.
-본 박물관은 1800년도부터 최근까지 3세기에 걸쳐 인류가 사용하여 왔던 커피 유물을 전 세계에서 5년 간 수집하여 모은 역사적 자료 박물관입니다.
커피박물관은 제1관, 2관이 2,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옆 1층에 커피숍을 겸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동안 거기서 구한 자료 등을 중심으로 한 나의 커피 이야기이다.
*. 커피Coffee)의 발견과 전파
우리는 커피의 원조를 남미 부라질 등으로 알고 있지만 커피의 원조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였다.
-6~7세기경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칼디라는 양치기 소년이 양을 몰고 가다가 한 곳에 정착하여서 잠을 자고 있는데 양들이 밤새 자지 않고 이리저리 뛰노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소년이 다음 날 주위를 관찰하여 보고 양들이 나무의 빨간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가까운 이슬람 사원 승려에게 알렸더니 승려는 여러 가지 실험 끝에 그 빨간 열매가 잠을 쫓는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뒤로 여러 사원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디오피아를 발원 점으로 한 커피 나무는 초기에는 홍해를 건너 아리비아 지역에 이슬람교 세력권 내에 한정되어 재배되어 왔다.이슬람교(회교)에서는 술을 금하므로 술을 대신하는 음료로 이용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후 11세기~ 13세기 사이 서유럽의 그리스도 교도들이 성지(聖地)인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일으킨 십자군(十字軍)이 커피맛을 보고 유럽에 전파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겉으로는 이교도의 음료라 하여 이를 배척해 오면서도, 그 특유한 방향(芳香) 때문에 커피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르네상스 시대라.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카도릭교회 지도자들은 교황 클레멘트 8세에게 이교도의 음료인 커피 마시는 풍습을 금지시켜 달라고 청원하였다.교황은 판결에 앞서 커피를 마셔 보고는 그 오묘한 향과 맛에 감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이 훌륭한 음료를 이교도만의 음료로 두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도다. 앞으로는 기독교의 음료가 되어 악마의 콧대를 꺾도록 이 음료에게 세례를 주노라."
이후 폭발적인 유럽의 커피 수요로 아라비아반도에 한정되어 재배되던 커피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인도네시아에 전파되었다. 남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에의 전파는 프랑스의 대위드 클뢰외에 의해 시작되어 중남미 전체가 재배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유럽에는 1651년, 인도에는 17세기 초에 커피가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 한국 커피 Caffee)의 발자국
1895년 8월 20일 명성왕후 민비(閔妃)가 궁궐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弑害)되는 을미사변 이듬해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였다.
러시아공사 베베르(Weber.K.I.)의 처형인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孫澤, Antoinette Sontag) 여사가 일인의 독살 위협 속에 시달리고 있는 고종 황제의 음식수발을 돕고 있었다. 그 무렵인 1902년 고종은 손탁을 통하여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환궁 후 고종황제는 중구 정동 16번지의 황실 소유 땅 (옛 이화여고 본관 터) 184평을 하사하니 손탁여사는 그 자리에 서양식 2층 건물을 세우고 1897년부터 그 1층에 레스토랑 겸 커피숍을 열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이다.
그보다 더 빠른 끽다(喫茶)의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조선 풍물지'(영, 윌리엄 칼스)에는 저자가 1883년에 조선에 온 독일인에게 커피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미. 퍼시벌 로웰)에는 "1884년 1월 추운 어느 날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에서 유람을 즐기던 중,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 "는 기록을 보면 아관파천(俄館播遷) 이전에 커피가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조선일보 2013. 12. 2
그때 커피는 설탕덩이 속에 커피가루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커피는 당시 가배, 가배차, 카피차, 가비차 등으로 불렀는데 서민들은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것이 마치 한약 탕국과 같다 하여 커피를 '양탕(洋湯)국'이라 불렀다.
오늘날과 같이 커피가 한국 제1의 기호품이 된 것은 8.15와 6.25 무렵의 미군의 역할도 컸지만 그보다 동서식품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커피믹스 개발 덕이었다.
커피믹스란 파우더와 프리마 그리고 설탕 등을 한국인의 표준 입맛에 맞게 적정 배합하여 봉지에 담은 커피를 말한다. 처음에는 야외용 인스턴트 커피를 목표로 한 것이 가정과 사무실, 각종 공사현장과 레저 현장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대박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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