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장생(十長生)4/ 대나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
위 고시조는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의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중 ‘대나무’를 노래한 것이다.
이 오우(五友)의 다섯은 모두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하나다.
그런데 대를 보고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라’고 한 고산(孤山)의 탁견(卓見)에 우리는 감탄하게 된다.
현대 식물학자들에게도 대나무가 풀인가 나무인가 논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식물(植物)은 크게 나무와 풀 두 가지로 나뉜다.
겨울을 당하면 지상부(地上部)의 줄기가 죽어 버리는 것이 ‘풀’이요,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면서 지상부에 있는 줄기에 나이테를 더하며 점점 몸집을 굵게 하는 것이 ‘나무’다.
한 마디로 나이테가 없는 것이 풀이요, 있는 것이 나무다.
그런데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그래서 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라 하고, 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나무’라고 한다.
건축에 쓰는 나무를 목재(木材)라고 하지만, 대나무만은 구별하여 죽재(竹材)라고 하는 것도 그러한 예다.
대나무는 참으로 신비로운 나무다.
모든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봄에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자란다.
그러나 대나무는 5월 중순서 6월 중순이 되서야 죽순(竹筍)이 돋기 시작하는데 처음의 죽순 굵기로 1년만에 쑥쑥 다 커버리고 해마다 겉만 단단하게 할 뿐이다.
그러다가 꽃이 피면 주위의 모든 대나무와 함께 일시에 모두 죽어버리는 나무가 대나무다.
대나무는 1,000여 종(種)이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대나무라고는 부르고 있는 것은 10m 이상 크게 자라는 왕대[王竹]다.
여기서는 왕대와 산에서 자주 보는 산죽(山竹, 조릿대)만으로 제한하여 이야기 하려 한다.
대나무는 양지(陽地) 식물이어서 충남 이남에서는 1년에 10~20m 자라지만 그 위의 추운지방에서는 5m 안팎까지만 자라다가 성장을 멈춘다. 그러나 조릿대는 우리나라 전국 어디서나 생장하는 나무다.
대나무[왕대]는 죽순으로 돋아나서 하루 평균 30cm 이상 자라서 불과 50일 이내에 키가 15m에서 20m까지도 자란다.
그 후로는 해가 지나도 자라거나 굵어 지지 않고 굳어지기만 한다. 죽순이 하루에 1m 이상 자랐다는 기록도 보인다.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라는 대나무는 얼마나 살까.
꽃이 피면 죽는 것이 대나무이니까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대나무 수명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대나무 꽃이 피는 것은 나라의 불길할 징조라고 걱정하기도 하고, 살아 생전 대나무꽃을 보는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상서로운 일로 말하기도 한다.
그 꽃이 피는 시기는 대나무 종류에 따라 그 간격이 다르다.
조릿대는 5년, 왕대와 솜대는 60년 주기로 핀다. 잎이 나야할 자리에 꽃이 피는 것이어서, 대 꽃이 피면 모죽(母竹)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그동안 부지런히 땅 속 줄기에 저장한 양분이 개화로 인하여 양분을 다 소모하는 바람에 다음 해에 돋아나야할 죽아(竹芽)의 싹이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나무 수령(樹齡)은 보통 60년이지만 길게는 120년을 사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대나무의 생명줄은 땅속줄기인 지하경(地下莖)이다. 그 마디에 있는 곁눈이 죽순(竹筍)으로 돋아나는 것이다.
땅속줄기가 왕대의 경우 300평당 총 연장 6km 이상 빈틈없이 엉켜 있어 지진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지진(地震)이 나면 대숲으로 피할 정도라 한다.
대나무가 자기보다 오래 사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 등을 제치고 십장생(十長生)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나무처럼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나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나무 밭을 ‘생금(生金) 밭’이라 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대나무를 소중히 키워왔다.
대나무는 죽순일 때는 식용이나 차 원료로도 쓰이지만 약재로도 많이 쓰인다.
그보다 대나무는 옛날에 전쟁에서 중요한 무기였던 활, 화살, 죽창(竹槍)은 물론 방어용 울타리 등의 재료였다.
각종 죽세공품(竹細工品)은 물론 조리 ·부채 ·발 ·담뱃대 ·낚싯대 ·광주리 ·죽부인 ·지팡이 등 생활용품들은 다 죽재(竹材)로 만들어졌다.
피리로는 대금(大芩), 중금(中芩), 소금(小芩), 퉁소나 단소(短簫) 같은 악기도 대로 만든 것이다.
그 대나무 악기에 달군 인두로 지져서 여러 가지 모양을 그리는 낙죽(烙竹)으로 악기를 예술적인 공예품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대의 늘 푸른 속성과 구부러질망정 꺾이지 않는 성질을 ‘대쪽 같다’ 한다. 그래서 대는 충절과 절개를 상징한다 하여 선비들에게 사군자[四君子: 매·난·국·죽], 세한삼우[歲寒三友:송·죽·매]의 하나로 꼽히면서 사랑을 받아왔다.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도 대나무를 아주 좋아하였다.
“고기 없는 식사는 할 수 있어도 대나무 없는 생활은 할 수 없다. 고기가 없으면 몸만 수척해지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저속해 진다.”
그런데 대나무는 왜 속이 빈 것일까?
대나무는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말처럼 성장 속도가 다른 나무에 비해 100배나 빨리 크는 나무다.
1년도 안되어 줄기가 15m 이상 자랄 때 가장 경계하여야 할 대상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람일 것이다.
그 바람에 휘긴 하지만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안전장치로서 대나무는 속을 비운 것이다. 휘되 꺾이지 않기 위해서 마디도 여럿 만든 것이다.
이 대나무의 마디가 절도를 갖춘 군자(君子)와도 같다고 하여 대나무 같은 사람을 ‘포절군(抱節君)’라고도 하였다.
대나무 마디 사이는 진공(眞空)이다. 그래서 불에 넣으면 ‘뻥-’하고 터진다.
그래서 폭죽(爆竹)이 탄생한 것이다. 영어로 대나무를 ‘bamboo’라고 하는데 이는 폭죽과 관계되는 의성어(擬聲語)다.
대나무를 한자로는 ‘竹’이라 쓰는 것은 죽순의 모양을 딴 상형문자(象形文字)이다.
초순, 중순, 하순 할 때의 ‘旬(순)’이 10인 것도 ‘竹筍’(죽순)의 ‘筍’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죽순(竹筍)은 10일이 지나면 대나무가 되어서 먹을 수 없어서라는 것이다. 그 ‘筍’이 旬‘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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