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대원사(大原寺)

ilman 2017. 6. 6. 13:04
*. 백제의 고찰 대원사
 절은 답사여행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문화재다.
그 고장의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가 사찰(寺刹)이기 때문이다.
대원사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신라 지증왕 때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천봉산 기슭에 초창한 백제 고찰이다. 천봉산(天鳳山, 609m)은 보성, 화순, 순천의 경계를 이룬 산이다.

- 선산군 모레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던 인도(?)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은 하룻밤 꿈속에 봉황의 꿈을 꾸었다.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밤 너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오는데 어찌 편안히 누워 있느냐? 어서 일어 나거라, 아도, 아도!”
봉황의 소리에 깜짝 놀라 아도화상이 눈을 떠 보니 창밖에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봉황의 인도를 받아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더니 봉황이 홀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도화상은 석 3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 일대의 산을 헤메다가, 마침내 봉소형국(鳳巢形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을 찾아내고 기쁨의 춤추며 산 이름을 천봉산(天鳳山)이라 부르며 그 기슭에 대원사를 창건하였다.

그런데 누가 왜 아도화상을 죽이려 하였는가에 대하여 진기한 전설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여 온다.

-신라 21대 소지왕의 6촌 동생 지철노(智哲老)는 남근(男根)이 지나치게 커서 배필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모량부 상공의 딸 거녀(巨女)를 소개한 이가 바로 아도화상이었다.
소지왕이 죽자 아도화상은 은근히 지철노(智哲老)를 왕위로 밀었는데 이것이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 되어, 요승을 죽이고자 결의하는 바람에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대원사는 20여 전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다 소실되어. 극락전(전남 유형문화재 87호)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현장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 절이다.
나는 몇 년 전 이 절에서 고양시 1대 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허준 선생과 1박한 일이 있고 이번 방문이 두 번째다.
그때나 오늘이나 이 절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티베트박물관도 그랬지만 그보다 태아령이라 생각한다.
태아령(胎兒靈)이란 부모와 인연은 맺었지만 이 세상 햇빛을 못 보고 죽어간 가엾은 어린 영혼들이다.
더 쉽게 말해서 산아 조절을 위해서 부모로부터 살해당한 불쌍한 태아 영가(靈駕)를 천도(遷度)하는 절이란 말이다.
일찌기 이 절의 주지 현장 법사가 임신 중절을 하려고 의사가 메스를 들이댈 때 도망가려는 태아의 모습을 CT촬영으로 보고 깊게 감명을 받아 태아령을 위한 천도제(遷度祭)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모의 무거운 죄업을 참회하고 전생과 금생의 나쁜 인연을 없애어 삶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절의 멋진 연못을 지나 연화문을 지나 있는 대원사귀자모신(大原寺鬼子母神)도 '하리티라'는 부처다.
어린 유아들을 보호하고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사랑의 신이다.
거기서 좀더 올라가면 이 절의 본당인 극락보전 우측에 지장보살이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입상이 있고 그 아래 빨간 모자를 쓴 동자 석상이 여럿이 보인다.

  -빨간 모자 동자승: 아버지의 씨앗은 두뇌에 깃들어 있으며 이를 '백(白)보리'라 한다.
어머니의 씨앗은 단전에 깃들여 이를 '적(赤)보리'라 한다.
빨강색 동자승은 어머니로부터 버림 받은 낙태아의 영혼이 지장보살을 어머니로 하여 업을 풀고 새로운 환생을 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태어나는 어린이가 65만명이지만 어머니의 뱃속에서 그 부모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생명이 160만이 된다니 이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그 태아를 위한 것이 태아령이니, 부모된 자 대원사(大原寺)에 들리거든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 산 기슭에 '황희 영각'(黃喜影閣)이 있다. 조선왕조 전체 재상 중 가장 명망있고 후세에 추앙을 받는 재상이 방촌 황희 정승이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방촌 황희 정승이 청백리(淸白吏)였기 때문이니 오늘날의 위정자들은 깊이 본받을 일이다.
대원사는 방촌 황희가 남원에 유배 왔을 때 동향의 대선배이신 원오국사(圓梧國師)를 찾아 사찰 환경 개선과 불사에 조력하여 주었던 것이요, 방촌 황희의 네째 아들 직신공(直身公)이 척불숭유(斥佛崇儒)로 탄압 받던 대원사를 보호한 인연 때문이었다.
이런 때 내가 시조시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 웬만한 어느 누구보다 많은 시조를 암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고 먼 황희 영각에 와서 방촌 선생의 시조를 나직히 읊조릴 수 있으니 말이다.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듣드르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수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방촌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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