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해인사(海印寺) 사진무

ilman 2017. 6. 6. 13:32

*저자 주: 이 글을 쓸 당시에는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용량을 줄이기 위해서 저자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그림을 지워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배꼽 그림이 많습니다.
책으로 발간할 때에는 이를 보완하겠단 말씀으로 변명을 대신합니다.

 

*, 법보종찰(法寶寺刹)  해인사(海印寺)  

 가야산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해인사(海印寺)는 법보종찰(法寶宗刹)로 대한 불교 조계종 최대의 총림(叢琳) 종합수도장)이다.
1921년 몽고군의 침입으로부터 국난을 극복하려고 애국심과 신앙심으로 이룩한 고려 대장경판(국보32호)을 삼재팔난(三災八亂)이 없는 10승지라는 해인사에 강화 선원사에서 이운(移運)해 온 대장경으로 인하여 해인사는 법보종찰(法寶寺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신라 애장왕 때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과 그의 제자 이정(利貞) 스님이 있었다. 일찍이 양무제 때 중국에 가서 불법을 구할 때였다. 보지공(寶誌公)대사 문도로부터 '海東踏山記'(해동답산기)를 전하여 받고 대사의 설법을 들으며 게시를 들었다. '너희 나라에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환국하거든 절을 창립하라.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란 말은 '대방광불 화엄경' 속의 '海印三昧(해인삼매)의 준말이다.
'바다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비치듯이 부처님의 지혜 바다에는 온갖 불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런 화엄의 진리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해인(海印)이라 한 이 절은 화엄 10찰 중의 하나이다.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이야기
  8만대장경을 참배하러 갔더니 장경판전 보수공사가 한창이라서 정문을 폐쇄하여 옆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분위기가 참배객들을 거절하는 것 같아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해인사의 주산(主山)인 가야산 일원은 삼재(三災: 火災, 水災, 風災)가 미치지 못하는 삼재불입처(三災不入處)로도 유명하다.  8만대장경을 모시기 위해서 조선 9대 성종 때부터 8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전각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도 오대산, 소백산과 함께 전화(戰禍)가 미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인사는 임란 후 200년 사이 7차에 걸쳐서 대화재를 당하여  당우 50여 동이 다 불타버렸으나, 부처의 도움에서인지 장경각(藏經閣)만은 화를 면하여 600년 이상 이렇게 완전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외우내환(內憂外患)이 잦았던 시절, 몽고족의 침략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8만 대장경은 고려 23(1236) 년부터 16년간에 걸쳐서 만들어 강화도 선원사(禪院寺)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그 후 이 8만대장경(국보 32호)을 영구히 보존할 곳을 찾다가 조선 태조 때에 이곳 해인사로 옮겨왔다. 그 대경판전의 특징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 국보 중에 국보인 8만 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藏經板殿, 국보52호)은 대적광전 위에 있어서 비로자나 부처가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위치에 있다.
 
 - 본 터를 지대가 높은 곳으로 하고, 그 바닥에 소금과 숯과 횟가루와 마사토를 섞어서 방충과 습기로부터 안전하게 하였다. 건조기에도 습도를 자연 조절하게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다. 
 건물의 창을 앞쪽은 아래 창이 위 창보다 세 배나 크게 하였고, 뒤쪽은 그 반대 꼴로 하여 독창적인 과학적인 통풍 방법을 썼다.

8만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그 판수가 81,258장이고, 인간 세계의 8만4000 번뇌를 생각하여 8만 4천 법문(法文)을 수록하였기에 '8만대장경'이라 하였다.
 - 대장경 판목은 남해와 거제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베어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그늘에서 말린 나무였다.
 - 16년이란 긴 세월 동안 16명이 썼으나 글자가 일정하고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누락된 것이 없다. 그 글씨를 종이에 쓰고 거꾸로 부쳐서 각자(刻字)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찾아간 장경판전(大藏經版殿)이었다.
그 입구부터나마 사진으로 그 경판을 보게 하고 화살표 따라 장경판전으로 돌아 찾아 가게 하였다.
장경판전 주위는 대장경에 관한 사진 자료로 가득하여 행복하게도 카메라에 가득 담아 가지고 내려오다 보니 구광루와 해탈문 절 마당에 탑이 하나 서 있고 미로 찾기 같은 형상을 돌로 박아 놓았다.

 

' 해인도(海印圖)'였다.
이 해인도를 안에서 부터 합장한 체 한 바퀴 돌아 나오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 하는데, 신라 의상대사가 창안한 것으로 이 길은 팔만대장경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이름난 모든 사물은 이름값을 하는 법이다.
해인사에는 이런 국보 2점 외에도, 민속자료 3호인 광해군과 왕비의 옷 등 70여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 여행은 생략의 예술인가

해인사 일주문에서부터 8만대장경이 있는 대장경판전(大藏經版殿국보 제52호)까지 108 번뇌를 상징하는 108 층계를 거꾸로 밟아 일주문 밖에 서니 '원당암/ 홍제암/ 용랍선원/ 외나무다리' 를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원당암은 통일신라시대 왕실의 원찰이요, 홍제암은 사명대사께서 열반하신 호국의 도량으로, 임란의 공으로 나라님이 내린 '홍제존자'라는 시호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용탑선원은 기미독립운동 33인 중에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주석하신 암자다.

외나무다리는 숭유척불(崇儒斥佛)의 조선 시대라서 양반들이 무엄하게도 말을 타고 법당까지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소나 말이 건널 수 없게 만든 다리다.
 

-불심이 깊은 선남선녀가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모든 업장이 소멸 된다는 수백 년 전부터 설치되어 있다는 다리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묻는다 한다.
-해인사에 가 봤는냐? 해인사의 외나무다리를 건너 봤느냐?

 가야산 해인사에서 홍제암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가서 임진왜란 때 터무니없이 왜놈에게 당한 그 한을 풀어준 '사명대사 탑비'(보물 제301호)와 홍제암에 모셨다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였다.
거기서 만년을 해인사에서 보내다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체 입적하였다는 임진왜란의 영웅의 향취를 맞고 싶었다.  
그러나 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겪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뒷맛이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못보고 남겨 두고 가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은 생략의 예술이니 다음에 다시 또 오고 싶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내일로 미루며 사는 것이 나그네 길의 인생인가 보다.

*. 해인사 부도(浮屠)들 
  부도(浮屠)란 승려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이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고승의 묘탑을 말한다.
부도는 가람의 앞이나 뒤쪽에 위치하는데 해인사 부도는 일주문 앞에 즐비해 있는 '해인사 비림'이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자운대사의 사리탑과 비 바로 위에 있는 성철대종사의 사리탑이다.
그 사리 탑 앞에서 그 설명을 읽으며 님이 남기고 가신 화두(話讀)를 뇌어 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도 한 마디 남기고 가야겠다.
  '가야산은 가야산이요, 해인사는 해인사로다.'  
성철 스님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 불교 조계종의 6, 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한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둥근 것은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 홍류동(紅流洞)이야기 
홍류동은 해인사 입구인 치인리 무릉교(武陵橋)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4km의 계곡을 말한다.
장자골 진대밭골 등의 계곡수가 합류한 계곡이 홍류동 계곡이다. 합천 8경 중에 3경이 바로 홍류동(紅流洞)으로 가야천을 이루는 계곡이다. 
울창한 송림과 절벽 사이로 흐르는 이 계곡수는 봄이면 진달래와 가을에는 선혈 같은 단풍으로 하여 붉게 붉게 흐른다 해서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을 얻었다. 
  여름에 비라도 내리게 되면 침식된 화강암 흰돌 위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옥 같은 물이 금강산의 옥류천(玉流川)을 닮았다고 하여 '옥류동(玉流洞)'이라는 이름을 갖는 이 홍류동은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서 그들이 노닐 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조선 초 대학자 김종직도 이 가야산 홍류동에 와서 그 경치를 읊은 시가 전하여 온다.

 

九曲飛流激怒雷  구곡비류격로뇌
落紅無數逐波來 낙롱무수축파래
半生不識桃源路 반생불시도원로
今日應遭物色猜 금일응조물색시         
                         -紅流洞/金宗直

아홉 굽이 물결이 우레 소리 같더니
단풍 든 낙엽은 물결 따라 오누나.
반평생
무릉도원(武陵桃源) 모르다가
비로소 아름다움 만나네.
         -ilman 시조 역

 홍류동은 이보다 고운 최치원이 만년에 살다가 신선처럼 사라진 곳이라 해서 그 유명함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 가야산에는 고운 최치원이 살다간 흔적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홍류동 '농산정(籠山亭)'이다.
농산정은 고운 선생이 은둔 수도하며 노닐던 정자로, 그 건너편 절벽이 제시석(題詩石)으로 '遁世詩'(둔세시)가 바위에 깊게 음각 되어 남아 있다.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亂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尙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류수진농산

                                -고운 최치원

바위 사이 휘돌아 산을 울리는 건
시비하는 말소리 들릴까 두려워서
고의로
물소리 흘리며
온산 감싸 흐르네
                               -ilman 시조 역
 
  이중환의 택리지 '명산명찰조'에 이런 글이 전하여 온다.

  -경상 일도에 암석으로 횐 산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족뾰족 솟아 잇는 화산(火山)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불꽃 같아 지극히 높고 또 수려하다.
동구에 홍류동과 무릉교가 있으며 폭포와 너럭바위가 수십 리 뻗쳐 있는데 세상에 전해오기를 최 고운(崔孤雲)이 여기서 종적을 감추어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이 농산정도 찾아가서 최 고운 선생의 얼을 우러러 보고 싶지만 당일 등산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서둘러 900리 길을 달려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가야산을 거쳐서 해인사 탐승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서, 홍류동에 이르렀을 때는 낮장 밤단의 초겨울이라서 벌써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그래서 홍류동의 아름다움은 계절지수가 좋은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종일 나 혼자 가야산을 헤매며 누구보다 행복하였다.
  따라 온 산이 아니라 찾아간 산이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그 온 산, 온 하루를 온통 나 혼자 가져서 그런 것 같다.

산에 가면
산뿐이더라.

산사는 계류처럼

옛이야기로 속삭이고
나뭇잎으로 오가는 계절 속에
까옥 까옥
배고파 우는 까마귀처럼
山 고파 헤매는
시장한 하루도 있었지만
내 눈
내 귀
내 마음에는
山뿐이더라.
가야산과


사뿐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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