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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 도립공원(2)/ 오죽헌(烏竹軒) 이야기

ilman 2014. 5. 23. 11:02
*. 오죽헌(烏竹軒, 보물165호)  이야기
 
 오죽헌은 15세기 후반 강릉 유현(儒賢)인 최치운(1390~1440)이 지은 건물로 형조참판을 지낸 아들 최응현(崔應賢)에게 물려 준 것을 후에 그의 둘때 사위 이사온(李思溫)이 물려 받은 집이다. 
이사온은 다시 외동딸 용인 이씨(龍仁李氏)과 결혼한 사위 신명화(申命和, 사임당의 부친)에게 오죽헌을 물려 주었다.
신명화는 딸만 다섯을 두었다. 그 중 둘째 딸이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사임당의 외할머니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내려와 머물러 있을 때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을 낳았다. 그후 사임당도 서울 선비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하였으나 아들 없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강릉에서 지내다가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사임당은 이 오죽헌을 세째 딸의 아들인 외손자 권처균에게 신씨 조상묘를 돌보라는 조건으로 물려 주었다.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줄기의 대나무가 많아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지어 오죽헌(烏竹軒)이란 이름은 이로부터 비롯 된 것이다. 
 

 *.어머니며 스승인 신사임당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女性) 한 분을 말하라면  누구를 들겠는가.
한 마디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강릉 오죽헌에 가면 신사임당 동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남성들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많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 민족의 만세(萬歲)의 여성상(女性像)이라 이를 것이다.
  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란 어떤 여성일까?
 중종 때 수구파(守舊派)가 신진파(新進派)인 조광조, 김정 등을 사사하거나 유배시킨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난을 면한 아버지인 진사  신명화(申命和)와 이사온의 외동딸 용인 이(李)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부자집의 다섯째 딸 가운데 둘째 딸로 오죽헌에서 태어난 이가 사임당이다.
사임당은 감찰 벼슬을 지낸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맏딸이 '참새', '달과 새', '묵매도'로 유명한 여류화가 이매창(李梅窓)이고, 그 세째 아들이 우리나라 백세의 스승이라고 일컬어 지고 있는  율곡 이이(栗谷李珥)
선생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지향하던 최고의 여성상은 주(周) 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이었다.
아들 문왕이 강태공(呂尙,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평정하고 손자 무왕으로 하여금 주나라를 건국하게 한 문왕은 유가(儒家)에서 성천자(聖天子)로 숭앙 받는 황제이다.
그래서 율곡의 어머니의 당호는 사임당(師任堂, 思任堂, 師妊堂, 任師齋)·시임당(媤妊堂)·임사재(任師齋)로 어느 호(號)나 '임(任)'자가 들어간다.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같이 그런 아들을 키워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율곡은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조선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한 사상가요, 철학자이자 대정치가가 되었다. 신사임당의 위대함은 그보다 조선 사회가 바라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여성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여 자아실현(自我實現)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7세에 벌써 조선 초기의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여서 안견의 화풍에다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더하여 역대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 중 '산수도', '묵포도도', '초충도'를 잘 그렸다. 
그가 그린 풀이나 벌레의 그림을 볕에 말리려고 마당에 놓았더니 닭이 다가와 쪼아 먹으려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을 정도였다.
19세에 덕수 이씨 원수와 결혼하였지만, 친정이 무남 오녀(無男五女)라서 신혼 초에는 남편의 허락을 얻어 친정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이것은 시가(媤家) 일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숨은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혼인한 지 몇 달 후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을 대신하여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친정에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가운데에 강릉(江陵)에서 셋째 아들 이이(李珥)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사임당의 문장은 아들 율곡(栗谷)이 본받고, 그의 그림은 딸 이매창(李梅窓)이 이어받아 후세에 활짝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렇게 율곡 이이는 문필가요 화가인 어머니를 스승으로 두고, 화가인 누나를 가진 행운아였다.
게다가 당시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의 교유는 그의 학문을 드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였으니, 황강 김계휘(金繼輝), 김장생의 스승인 귀봉 송익필(宋翼弼), 고향의 우계 성혼(成渾)들이 당시의 친구요,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한  동년배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평생의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역사를 살펴 보면 성현이나 위인들은 우리네 같이 혼자 태어나지 않고 한 시대를 공유한다. 율곡보다 36세 위인 퇴계 이황이 바로 율곡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함께 '조선 유학(儒學)의 쌍벽'을 이룬 분이시다.
율곡은 1558년(명종13년)에 대선배이신 퇴계 선생을 찾아 그분의 고향인 경북 예안을 찾아내려 갔을 때 퇴계 이황 선생은 율곡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한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더니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
그의 재능에 탄복하면서 어린 율곡에게 나이의 고하를 불문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이를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율곡은 동방의 대성(東方 大聖)"이라고 하였다 한다. 율곡이 구도장원(九度壯元)으로 9번이나 장원 급제하기 전의 일이었다.
  잠깐, 그런데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한번 던져 보자. 율곡 선생과 퇴계 선생은 어떤 분이 더 훌륭할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덕수(德水) 이(李)씨 율곡의 후손들과 진보(眞寶) 이(李)씨 퇴황의 후손에 물어 보라.
그와 연관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1,000원 짜리는 앞에는 퇴계의 영정과 뒤에는 도산서원이 있고, 5,000원 짜리 앞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과 뒤에는 오죽헌 모습이 있다. 이 돈이 처음 찍혀 나오자마자 진보 이씨인 퇴계의 후손들이 조폐공사에 몰려가 시위를 벌렸다. 어째서 우리 할아버지 퇴계가 5,000원 짜리 화폐가 아닌 1,000원 짜리에 쓰였냐는 것이다.
그 결과는 조폐공사 측의 재치 있는 해명에 싱겁게 끝나 버렸다. "우리도 그걸 압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훌륭한 사람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 율곡 이이(栗谷 李이) 선생의 호(號) 이야기 

파주 임진강 강가를 굽어보는 자리에 화석정(花石亭)이 있다. 그 화석정 아래 층계를 내려가니 도로 건너 마주 보이는 동네가 율곡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율곡리(栗谷里)다. 이이 선생이 호를 밤 '율(栗)', 골 '곡(谷)', 율곡(栗谷)이라 한 것은 자기가 자란 이 율곡리(栗谷里)를 그리며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곳에 방문한 때가 가을이라서 유난히 많은 밤나무 아래 여기 저기 떨어진 산밤을 주워 먹으며 이 율곡 선생의 증조부, 조부의 묘소를 차례로 참배하고 자운서원(慈雲書院)을 향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가장 아쉬웠던 점은 470 여 년이란 세월이 우리의 거유(巨儒) 이 율곡 선생이 살던 가옥 터를 찾지 못하게 한 것이다. 

*. 오죽헌 탐방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가문을 들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퀴리부인(Marie Curie) 가()를 들겠다. 
2대에 걸쳐서 3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4개의 노벨상을 프랑스와 태어난 조국 폴란드에 바친 영웅 가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성공한 가문을 들라면 나는 또 서슴지 않고 이율곡(李栗谷) 가문을 들겠다.
신사임당, 이율곡, 이매창으로 이어지는 학문과 예술의 세계를 어찌 다시 논할까 해서다. 각 국가의 화폐는 그 나라에의 대표적인 인물을을 그 도안으로 한다. 우리나라 5만원 권의 얼굴이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요, 5천원권이 이율곡임에 또다시 무슨 말을 덧붙일까.
그런 입지적인 인물들을  모신 입지문(1)을 들어서니 오른쪽에 자경문(2)이 있다. 율곡선생이 금강산에서 공부하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오면서 앞으로 스스로 경계하여야 할 11가지 좌우명인 자경문(自警文)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 첫째가 입지(立志)여서 오죽헌의 중요한 두 문을 입지문(立志門), 자경문(自警門)이라 한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오죽헌(4)은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에 가장 오래 된 건물 중에 하나로 보물제165호로 지정 된 목조 건물이다. 이곳 강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려웠던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 미치지 않은 곳이어서 병화(兵禍)를 피해 남아 있는 건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夢龍室(몽룡실)' 앞에 서니 이율곡 탄생 전설이 생각 난다.
 
서울 살던 이원수가 청룡 황룡 꿈을 꾸고
사임당 찾아갈 때 대관령 주모(酒母) 유혹했지만
용꿈을 그대로 안고 아내 찾아 운우지락(雲雨之樂).

서울 가던 이 선비 대관령 주모 유혹했지만
그 주모 시기(時期)가 지났다고 거절하고 말았다지-
하마면 율곡(栗谷) 선비 주모(酒母) 아들 될 뻔했네.

  당시 33세를 오죽헌에서 살던 사임당(師任堂)도 봄날 동해 바닷가에 간 꿈을 꾸었다. 
바다 속으로부터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불쑥- 나와 부인의 품에 옥동자를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다.
그해 12월 26일 새벽이었다.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날아와 부인의 침실인 오죽헌 몽룡실의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았으니(1536.12. 26)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다.
그래서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고, 율곡의 아명(兒名)을 태몽에 용이 보였다 하여  '見龍'(현용)이라 하였다.
그 왼쪽 '烏竹軒'(오죽헌)은 율곡이 6세 때까지 공부하던 방이다.
  사랑채[바깥채](5)는 주로 바깥 주인이 거처하며 외부 손님을 접대하던 곳으로 원래는 그 뒤 안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증외조부 이사은과 외조부 신명화, 아버지 이원수 그리고 이종4촌인 권처균이 유하던 곳이다.

  '文成祠'(문성사)(4)의 '문성(文成)'은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아 1624년에 인조대왕이 이율곡에게 내린 시호(諡號)다, 이 문성사에 율곡 이이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이 문성사란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니 주의 깊게 보고 올 일이다.
  어제각(御製閣)(7)에는 율곡이 친필로 쓴 '경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 시절 사용했다는 벼루가 있다.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대왕이 이르 보고 책에는 머리글을, 벼루 뒷면에는 율곡선생의 학문을 찬양한 글을 새겨 소중히 보관하라는 명을 내리자 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오죽헌에서 제일 볼 만한 곳은 율곡전시관 (8)이다.
율곡 전시관에서 구체적인 이율곡과 신사임당의 이모 저모를 보고 입지문을 나서니 넓은 광장 건너에 '시립박물관', '선정비군'(문화재자료 제48호), '향토민속관'과 '야외 전시장' 등이 있다. 거기 들려서 꼭 보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정에 쫓겨 경포대를 향한다.
이렇게 아쉬움을 두고 떠나 그리워하다 다시 찾게 되는 것이 여행(旅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