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풍속

10월 1일 국군의 날의 유래

ilman 2013. 9. 30. 20:48

*. 10월 1일 국군의 날의 유래
S#:7: 미아리 고개 

  (평화로운 미아리 고개 차량행렬을 배경으로 나레이션)

(학살 이미지를 배경으로) 6.25는 소련의 지원 하에 전차와 야크전투기, 야포 등으로 중무장하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남침했으니 6.25 전쟁은 준비된 북한군과 준비 안 된 우리 국군과 싸우는 일방적인 불행한 싸움이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군은 낙동강까지 밀리다가 그냥이면 적화 통일 될 것을 고마운 UN군 참전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하면서부터 실지 회복을 위한 북진이 시작된거야. 

휴전이 가까워 질 무렵 후퇴하는 인민군은 많은 애국지사를 인민재판이란 이름으로 학살했어.

이 미아리 고개를 통하여 애국자들과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  8만 3천여 명이 쇠사슬에 묶여 납북되어 갔구. 

 당시 UN군의 파병 목적은 38선을 지키면서 휴전하는 것이었어.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 전군에게 명령했단다. "내가 이 나라 최고 군총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을 따르라. 북진하라, 북진하라."그 명령에 따라 국군 제3보병사단 제35연대가 강원도 양구에서 38선을 돌파하여 진격했어. 그날이 1950년 10월 1일이라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지.그후 평양, 원산을 진격하여 중국과 국경인 초산진에서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았단다.손녀:(혼잣말로) 어마, 그래서 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었구나. 그러면 그때 우리는 통일을 할 수가 있었겠네요

할아버지: 그럴 수도 있었지. 그런데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 간에는 그 전부터 약속이 있었어. 6.25에 미군이 참전하면 우리 중공군이 도와준다구.

그래서 중공군 정예군  5만 명이 쳐들어 온 거야. 그 5만명은 당시 북한군 전체의 1/3이나 되는 병력이었어.

그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꾕가리와 피리를 불며 미아리고개를 통하여 또 서울로 쳐들어 온 거야.

그래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서둘러 피난을 떠난 것이 1.4 후퇴라는 거였지.그 때 서울에 남아 있는 서울 시민이 겨우 20만이이었다는구나.

UN군이 아니더면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처럼, 중공군이 아니면 북진통일이 될 뻔 한 것이 6.25였단다.

(배경에 피난 길, 피난 살이, 학살 현장 등이 전개 되면서) 6. 25는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룰 주었어.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동안우리측의  인명 피해만도 사상자 수가 약 150만, 20만명이 행방 불명, 25만이 부상, 10만명의 납북은 물론 전쟁 과부, 고아, 전국민의 피난살이와 전국토는 재기 불능의 초토화가 되었단다.
이런 전쟁은 다시 또 없어야 하는데 북한은 한술 더 떠서 핵무기로 우리를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이냐?

                                                                  

 -필자의 '시나리오 " 한 많은 미아리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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