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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ilman 2013. 6. 7. 14:23

북한산 국립공원/ 북한산 이야기

  서울에는 산(山)이 71개가 있다는데 그 총 넓이가 138.5㎢라니 서울(6,274㎢)의 22%가 산(山)인 셈이다.
그 산 중에 북한산(北漢山)은 가장 크고(78.45㎢) 높은 산(836.5m)으로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이다.
  서울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도 명당 중에 명당이다.
풍수(風水)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을 두고 땅의 방위(方位)와 지형(地形) 따위의 좋고 나쁨으로 땅의 길흉(吉凶)을 따지는 학설이다.
서울은 우리나라 국토의 중앙에 있는데다가, 서울 한강 하류는 예성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다.

게다가 서울은 도읍에서 필수적으로 꼽아야 하는 지세(地勢)가 넓어 풍수 지리학상 양택(陽宅)에 해당한다.
서울은 북한산(北漢山)을 뒤에 업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풍수지리에서도 제일 좋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자리다.
자고로 서울을 ‘漢陽’(한양)이라고 불러왔다. ‘漢’(한)은 ‘漢’江(한강)이요, ‘陽’(양)은 물의 북쪽 [水之北曰‘陽’]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수재, 화재, 풍재의 삼재(三災)였다.그 중에서도 두려워 하던 것이 수재(水災)였다.

한건물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서울 시내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은 한강 물과는 역(逆)으로 '서에서 동으로 역류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큰 홍수가 난다고 해도 도성은 안전하다.

 북한산(北漢山)의 명칭을 삼각산(三角山)으로 바꾸자는 주장에 이 사람은 반대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백운대(836.5m), 만경대(799.5m), 인수봉(810.5m)의 ‘삼각산 지구’와,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선인봉(708m), 만장봉(718m), 자운봉(740m)에 사패산(賜牌山, 552nm)을 포함한 ‘도봉산지구’로 크게 둘로 나뉘기 때문이다.
이 북한산은 잿빛 도시 서울시 한복판에 있어서 전철에서 내리면 대부분 어디서나 오를 수 있는 산으로 북한산을 오르는 그 들머리만도 83여개가 넘는다. 그래서 연 450만 이상이 찾는 단위 면적당 세계에서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세계적인 명산(名山)이 북한산이다.
이 산은 옛날에는 한산(漢山), 화산(華山,)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숙종 때 산성(山城)을 축성한 뒤 남한산성(南漢山城)과 대가 되는 이름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하여 산 이름도 북한산(北漢山)이라 하게 된 것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형 비류와 함께 도읍을 정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이곳은 산 전체의 형상이 마치 어린아이를 업은 듯하다 하여 부아산(負兒山) 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불린다.
                                                                                     ― 북한지(北漢誌, 영조21년 1745 性能 지음)
족두리봉 이야기
6호선 전철 독바위역에서 내려 족두리봉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역 이름을 왜 독바위라 하였을까?
독바위는 이 동네 옛 이름 '독박굴'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독박굴’은 ‘독바위굴’의 준말로 독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한 이곳에 인조반정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덕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고도 한다.
민가에서 항아리와 독을 많이 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덕’을 ‘독’ 같이 생긴 바위라 해서 독바위라 하였다는 것이다.
역에서 500m 거리에 불광사(佛光寺)가 있고 바로 그 옆에 불광탐방지원소가 있다.
거기서 직진하면 1km의 '비봉길'이요, 우측 산길로 1.3km를 가면 '족두리봉'이다.
족두리봉 가는 길은 가파른 돌길의 오름길이지만 큰 나무가 없어서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시내로 향한 전망이 일품이다. 이 족두리봉은 쳐다보는 방향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서 족두리봉 이외에도 '수리봉', '시루봉', '독바위봉' 등 다양의 이름을 갖고 있다.
'족두리'란 오늘날 신식 혼례를 치르고 폐백을 드릴 때, 연둣빛 옷에 자줏빛 깃을 단 원삼을 입고, 머리 위에 올려놓아 쓰던 여섯 모의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다.
원(元) 나라의 풍습이 우리의 풍습으로 화한 것으로 옛날에는 예복을 갖출 때 부녀자들이 으레 쓰던 모자다.
쇠줄을 잡고 오른 족두리봉(358m)은 야산이다. 봉 하나가 그대로 거대한 바위 지대여서 추락 위험지역으로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곳이기도 하다.
족두리봉은 시내와 가까운 산인데다가 바위뿐이라서 전망이 일품이다.
남산 뒤로는 청계산이, 그 오른쪽으론 관악산이 운무 사이에 두덩실 뜬 것이 너무 환상적이다.
족두리 봉에는 비둘기가 살고 있다. 등산객이 던져 주는 먹이가 그들의 중요한 먹이거리기 때문이다. 마침 준비해간 검은 콩이있어 던져 주니 순식간에 30여 마리가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집어주어도 겁도 없이 다가와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다.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어떤 이는 바위 위를 그대로 걸어서 내려가면서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여 따라가다가 오금이 저려서 그만 뒤돌아 우회를 한다. 우회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우회(右回)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迂回(우회)로 멀리(迂) 돌아간다(廻)는 말이었다.
거기서 1km를 더 간 곳에 향로봉(535m)이 있는데 그 코스는 위험 표지판이 있는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옛날에 그 길로 더 올라가서 능선으로 해서 향로봉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가 본 일이 있었다. 그 길도 칼바위처럼 능선이 좁은 것이 만
만한 길이 아니어서 뒤돌아선 기억이 생생하다.
향로봉은 주위 높이로 정상을 따지지 않고 오르기 힘든 그 곳의 끝을 정상이라고 하는구나 하면서-.

*. 비봉과 사모바위

 오름길은 언젠가 끝나고 능선(稜線)이 나타나는 법이다. 숨 헉헉, 땀 뻘뻘 - 고된 오름길이지만 ‘머지않아서 능선이 나타나겠지’ 하는 생각에 고행의 산길이 즐거운 산행이 되는 것이다. 능선부터는 여유로운 산행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능선 길은 오르내림의 고도 차이도 적은데다가 양쪽으로 탁 트인 시야가 눈을 시원하게 하고 발을 편하게 하여 준다.
지리산 노고단서 천왕봉까지의 능선이나, 덕유산 종주 능선, 설악산 공룡능선이 다 그러한 능선 산행 길이다.
특히나 비봉능선은 수도 서울의 산이라서, 전후좌우의 풍경이 자연과 천년 고도(古都)와 현대문명이 어울려서 만든 파노라마가 연출되는 곳이니 어찌 다른 산이 이에 비길 수 있을까.
 향로봉을 지나서 얼마를 오르니 드디어 비봉능선(碑峰稜線)이다.
그 능선 상에서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이 ‘비봉(碑峰)’이요 그너머가 ‘사모바위’다. 산에 와서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이 비봉 능선에 신라 진흥왕과 무학대사, 김시습의 발자취가 남아있으니 말이다.
비봉(碑峰, 560m)은 승가사 뒷산에 있는 암봉으로 진흥왕 순수비(사적 228호인)가 있는 명승지다.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아 영토로 편입한 기념으로 568년경에 세운 북한산비다.

창녕비(국보 제33호),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함께 4대 진흥왕순수비의 하나로, 정복한 곳을 직접 순수
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다.
그 후 1,200여 년 동안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로 오인되어 오다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그 비석의 68자를 해독하여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비석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과 6.25의 상흔으로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국립박물관 전시실로 옮겨 보호를 받고 있는 국보 제3호다.
지금 비봉에 있는 비신은 그 자리에 세운 모조품이니, 거기 오르거든 그 비석보다 그 비신(碑身)을 꽂았던 장방형의 홈을 주의 깊게 보고 올 일이다. 오르는 길은 사모봉 쪽은 완만해서 웬만하면 누구
나 오를 수 있는 길이고, 그 반대편에서는 한 군데가 급경사지만 거기만 조심하면 더 쉽게 오를 수가 있다.
그 비봉의 정상은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대로 카메라 촬영의 포인트가 되는 곳이다.
비봉에 이어 나타나는 사모바위는 그 모양과 그 크기가 너무나 두렷하고 멋있다. 그 모양이 벼슬아치나 결혼식의 예모인 사모관대(紗帽冠帶) 같아서 저 아래 족두리 봉과 짝이 되는 사모바위가 아닌가 하였는데, ‘사모(思慕)바위’로 설명하고 있는 표지가 있다. 여기에는 돌문도 있다.
문수봉에 가까워질수록 북한산의 속살을 엿보는 것 같아서 초행 길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아기자기한 기암절벽과 부득이 겪게 되는 바위 타기의 적당한 모
험은 설악산 공룡릉을 오르내리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산성 이야기
 문수봉 넘어서 조금 지나니 우측으로 북한산성(北漢山城) 대남문(大南門)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기동에서 승가사 오르는 길에서 우러러 바라보면 보현봉(714m) 아래 안부에 있는 뻥 뚫린문으로 허공을 보여주던 바로 그 문이었다. 북한산 종주와 함께 북한산성 성터 순례는 북한산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 길은
북한산성입구(구파발쪽)→ 대서문→의상봉 → 가사동암문→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용암문→위문→백운대→위문→북문→원효암→북한산성입구’  13.59km 길인데 부지런한 이는 하루 품을 팔아야 볼 수 있는 코스다.
 성터 순례하다가 만나게 되는 북한산 성문은 시내 성문과 구별하기 위해서 ‘남대문→대남문, 서대문→대서문, 동대문→대동문’ 등으로 첫 글자와 둘째 글자를 뒤바꾸어 이름 지은 것이다.
다음은 대남문 앞에서 본 북한산성과 그 복원 이야기들이다.
이 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던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도성을 지키기 위해서 쌓은 성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리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였던 토축(土築) 산성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때 왕명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6 개월만에 완성하였다. 당시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14개의 성문과 동장대·남장대·북장대와 행궁·군창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는 것이 북한지(北漢誌, 영조21년 성능 지음)에 전하여 온다.
현재의 성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00여만 평으로 1990년부터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을 일부 보수 복원하였다.
 오늘 비가 온다기에 산행을 망설이다가 늦게 출발하여서 대남문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어 코스를 중흥사로 해서 중문, 대서문, 산성매표소를 향한다. 이 길에는 북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 터, 유영, 창고는 물론 승군(僧軍)의 총지휘자가 기거하던 중흥사(中興寺)가 있다.

중흥사(中興寺)
 오늘날 북한산의 절 중에 가장 큰 절은 도선사(道詵寺)이지만 옛날에는 중흥사(中興寺)가 가장 큰 절이었다.
그러나 1904년에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에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15년 8월의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로 폐허가 되어, 오늘날에는 그 축대와 여기 저기 흩어진 주춧돌과 널찍한 터만 남아서 뜻있는 공양주(供養主)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산 중흥사지(경기도 기념물 제136호) : 중흥사는 구암봉 아래에 있던 사찰로 고려태조 왕건 때 창건하였다 하지만 자세하지가 않다. 고려 말 고승 태고 보우(普愚)가 이를 중수하였다 한다. 그 중흥사 위 태고사에 보우대사의 원중국사탑비(보물 제611호)가 있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중흥사는 북한산성 축성 시와 이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산성 내 11개 사찰의 승군(僧軍)을 총지휘하기 위해서 승대장(僧大將)이 머물던 승영(僧營)이었다. 그래서 본래 30여 칸의 소규모 사찰이 136칸의 대찰로 증축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텅 빈 터만 남아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 주변에는 역사적인 곳이었지만 홍수 때에 역시 떠내려 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만약에 난리가 났다고 가정할 때 나라님은 어느 문으로 출입을 하였을까? 고양시 쪽의 대서문(大西門)이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유사시에는 임금님이 백성들과 함께 경복궁이나 창경궁에서 연(輦)을 타고 무악재를 넘어 피신하여 들어오는 문이었다.
그런데 대서문은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해서, 북한산성 축성 다음 해에 산성수비의 보완대책으로 축조한 문이 대서문 위에 있는 중성문(中城門)이다.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중성문 일대의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行宮), 유영(留營), 창고(倉庫) 등의 성내 시설물과 인명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문이다.
이 문도 1915년 8월의 대 홍수로 무너져 떠내려 간 것을 최근에 복원한 문이다.266 북한산 국립공원 노적봉(露積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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