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월미도(月尾島)
인천(仁川)을 간다. 인천 월미도공원(月尾島公園)을 간다.
인천이 고향이라서 매월 서울에서 인천향우회(仁川鄕友會) 모임에 나가고 있어, 그 회원들과 1년에 한 번씩 인천시의 협조로 인천광역시의 곳곳을 둘러 보았지만 월미도공원은 처음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공원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일본강점기 시절에 인천에서 태어나서 해방과 6.25를 인천에서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휴전이 논의 되고 있던 무렵이라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월미도 제방 앞에서 전국에서 모여 든 학생들과 함께 휴전 반대 데모를 외치던 기억이 새롭다.
휴전 후 월미도는 미군에 이어 국군 군부대 주둔으로 시민의 출입이 50여년 간 제한되다가 2001에 와서야 시민들의 품에 돌아왔다.
그후 조성된 월미(月尾公園)이라서 휴전선 비무장지대 다음으로 남한에서 자연생태계가 가장 잘 보전되어 있다하여 그걸 보러 월미도를 가고 있다.
*. 월미도의 역사 이야기
월미도는 면적 0.7㎦로 월미산의 정상이 겨우 해발 105m가 되는 작은 섬이다.
섬 모양이 남북으로 긴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반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월미도(月尾島)'라 하였다.
이 월미도는 개항 이전까지는 하나의 한가한 어촌(漁村)에 불과 하였다.
그러다 월미도는 조선 시대 한양 경비의 요충지가 되었고, 개항기(開港期)에는 외국인들이 조선에 들어 와 머무는 첫 기착지가 인천이어서 월미도는 외국의 근대 문물이 들어 오는 관문(關門)으로서 한가한 섬에서 깨어나 근대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섬이 되었다.
월미도가 인천과 육지로 연결된 것은 1906년이다. 처음에는 목교(木橋)였다가 1918년 제방둑길로 축조하여서 해방 전 월미도를 경인지역 최대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해양경비대' 기지가 되어 한국인의 출입이 통제되더니, 6.25 한국전쟁 시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 되어 UN군의 함포 사격으로 그때 월미도는 완전히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후 월미도는 다시 군부대의 주둔지가 되어 그 이후에도 민간인의 출입이 50여년간 통제 되었던 섬이다.
*.그 때 부르던 군가
아내와 함께 동인천 역(東仁川驛)에서 내려서 철룩다리 옆길로 홍여문을 향하여 오르다 보니 숲 사이 제물포고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나는 6.25가 나던 해에 인천중학교(仁川中學校) 1학년에 입학하여 1. 4 후퇴 이후 미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저 좋고 큰 켐퍼스에서 2개월밖에 다녀 보지 못하여서 저 건물에 남다른 감회가 깊다.
우리는 신흥 초등학교(新興初等學校) 강당을 빌어 칸막이를 하고 거기서 졸업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당시 중학교는 6년제이었다가 중, 고로 분리되던 시절이어서 내가 졸업한 이후에 제물포고(濟物浦高)가 생겼기 때문이어서 누가 나에게 제물포고 몇회 졸업했나를 물으면 -1회 졸업생이라고 대답한다.
6. 25 이전 인천에는 38선에서 북한군과 싸워서 노획한 따발총 같은 무기를 시내 길 거리에 전시하며 우리 국군의 위용을 자랑하는 전시회가 자주 열렸다.
그 무렵 김석원 장군이 하던 말도 생각난다.
" 이 대통령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우리 국군은 북진하여 아침은 해주(海州)에서, 점심은 평양(平壤)에서, 저녁은 압록강 물을 떠서 밥을 해서 먹으며 백산에 태극기를 꽂겠습니다."
그러던 우리 국군이 북괴가 남침 해 오자 아침은 수원(水原)에서, 점심은 대전(大田)에서, 저녁은 대구(大邱)에서 먹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당시 위정자(爲政者)들은 북한을 몰랐던 것이다. 당시 인천 시장이었던 박학전씨가 군인을 일선에 보낼 때 격려사를 하며 울던 모습도 생각난다. 그때는 전시여서 가서 죽어 유골(遺骨)로 돌아오는 자가 아주 많았다. 휴전 이후 고교생이었던 우리들은 하얀 마스크에 흰 장갑을 끼고 목탁소리에 발 맞추어 기차로 모셔온 유해를 가슴에 안고 군악대의 장송곡(葬送曲) 밴드에 맞추어 해인사(海印寺) 절까지 운구(運柩)하곤 하였다.
우리 집 바로 위에 신혼부부가 살았는데 결혼 삼일만에 남편이 영장을 받아 입대하게 되었다. 그때 그 부인은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만큼 태연자약히 웃는 얼굴로 남편을 군에 보내더니 그 후 일주일 이상 식음을 전폐하고 방문을 굳게 닫은 채 통곡하는 그 부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함께 눈시울을 닦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부르던 노래를 나는 지금도 가끔 부르먀 옛날을 회상하곤 한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가마귀 싸우는 골에 저는 갑니다.
삼팔선을 돌파하여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백골이나 돌아 오리다.
아내여 굳세게 이 세상을 사세요.
우리가 만날 적에 백 년 살자고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가오나
죽어서 백골이나 돌아오리다. ♩♪ ♫ ♬ ~
*. 자유공원 이야기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88년 11월 9일 응봉산(鷹岩山)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한 후 '각국공원', '서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려지던 공원이다.
만국 공원(萬國公園)이라 한 것은 서양사람들이 살던 조계지(稠界地)인 만국지계(萬國之界) 안에 만든 것이라 하여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부른 것이다.
6.25가 발발하자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서 대승한 UN군총사령관 맥아더(MacArthur. D.S) 장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의 동상을 세우고 그 후부터 '자유공원'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우뚝서서 인천상륙작전을 하던 서해 바다를 응시하고 있고 그 뒤에 참모들과 함께 바다를 걸어 인천으로 상륙하여 오는 씩씩한 모습의 동판도 있다. 이 자리는 원래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세창양행'(독일 무역회사)의 사택이 있던 자리다. 맥아장군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마도로스 담배 파이프는 그 부근에 대형 조각품으로 남아 있다.
*. 인천 상륙작전
6.25 동란이 일어나자 우리 국군은 막강한 적의 화력에 밀리고 밀리어서 최후의 보루 낙동강까지 후퇴하여서 완강히 버티고 있을 수밖에 없던 전세(戰勢)였다.
그때 맥아더 장군은 인민군이 인천 바다는 조석 간만의 차이가 커서 인천상륙 작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방어에 소홀한 점을 간파하고 맥아더 장군을 반대하던 세력을 물리치고 둔 무리수가 인천상륙 작전이었다.
1950년 9월 15일 밀물 때인 새벽 5시 45분 인천에 폭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천 앞바다에 떠 있던 항공모함에서의 함포 사격과 그 함재기(艦在機)의 공중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인천 하늘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불타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6.25를 생각할 때마다 함포 사격의 그 포의 총알이 머리 위를 지나가며 내는 소리를 듣는다. 그 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 소리를 6.25의 소리라고 기억하고 있다.
처음 월미도 그린 비치에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 병력이 17척의 수륙 주정(水陸舟艇)을 타고 그날 새벽에 상륙한데 이어 3척의 대형 상륙 주정(上陸舟艇)이 9대의 탱크를 싣고 상륙하여 적들로부터 월미도를 탈취하여 확보하였다.
이어 저녁 5시 30분 밀물이 들어올 때에 만석동(萬石洞) 적색해안에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가, 용현동 청색해안에는 미 해병 1연대가 상륙주정(LCVP)과 상륙장갑차(LVT)를 이용하여 상륙 돌격해 들어왔다.
이어 이틀 후인 9월 17일에는 드디어 미 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상륙하였다.
이 맥아더(MacArthur. D.S) UN 총사령관의 인천상륙 작전은 수세(守勢)에서 공격(攻擊)으로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쾌거였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 공산군 주력 부대의 군수품을 조달하는 병참선(兵站線)이 끊기는 바람에 북한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서울을 탈환한 아군은 이어 낙동강 전선에 밀집된 적을 포위 격멸하기 시작하자 북하군은 어쩔 수 없이 전진(前進)을 접고 후퇴(後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로 아군은 인천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병참시설을 북진 작전을 위한 병참기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 1만 4천명을 죽이고 7천명 포로를 잡았지만 UN군의 손실도 컸다.
주력부대인 미 해병대 1사단은 전사자 415명에 부상 2,029명, 실종 6명이나 되었고, 한국 해병대도 전사자 97명, 부상자 272명, 실종 47명이었다. 그뿐인가 미 육군 7사단도 전사자 66명, 부상자 272명, 실종 47명이나 되었다.
그때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동원된 제7합동 상륙 기동부대는 미국 (225척), 캐나다(3척), 호주(2척), 네델란드, 프랑스 각각 1척과 더불어 한국 15척의 대함대였다. 그때 동원상륙부대 병력이 총 7만 5천명에달하였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6.25 한국 전쟁 때 우방의 도움이 아니었더면, 그 중 미국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멕아더 장군의 작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적화 통일 되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공산주의 나라의 국민이 되어 북한 동포들처럼 어버이 수령만 암송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멕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느니, 천안함(天安艦)이 폭침(爆沈)이 아니라 침몰이라니 하고 있으니 이는 배은망덕하는 일이 아닌가.
옛부터 우리가 그렇게 미워하던 빨갱이란 말도 없어지고 '친북자나 종북자'란 말이 이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고, 이런 분들이 기고만장하며 언론계, 법조계, 심지어 국회에까지 진출 한 세상이 되어 있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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