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백마고지(白馬高地) 안보 견학

ilman 2013. 2. 28. 20:34

 

백마 고지(白馬高地) 안보 견학

 제2 땅굴 안보견학을 하고 우리의 'KCCA콘텐츠창작가협회' 영상(映像) 모임 24명 회원과 함께 백마고지를 향한다.

*. 철원(鐵原) 이야기

 철원군은 강원도의 북서부에 김화(동), 이천(서), 평강군(북), 연천군(남)과 접하고 있는 고원성 평야 지대의 고장이다 .

군의 동부에 한탄강이 남북으로 흐르면서 하류 지역에 주상 절리(柱狀節理)와 수직 단애(垂直斷崖)를 발달하게 하여 고석정(孤石亭)을 위시해서 곳곳에 절경을 이루고 있다. 역곡천은 군의 서부를 동서로 흐르면서 드넓은 평야를 적시어 비옥한 토지를 형성하였다.

 우리 한반도처럼 휴전선(休戰線)이 옛날의 철원군을 둘로 갈라 가로 막고 있는데다가 주민 출입이 제한 된 민통선이 원 지역의 절반 정도가 해당되어 군인 도시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민간인의 통행이 자유롭지 못한 지역이라서 철원 일대는 희귀조인 두루미와 독수리등의 철새의 낙원이 되었다.

그러나 철원 평야는 강원도 내 제1의 큰 평야로 강원도산 쌀이 1/6이 넘는데 그 쌀이 청정지구 산으로 유명하다는 '오대쌀'이다.

그러나 휴전 후 남한 땅이 되자 그 비옥한 철원 평야에 물을 대어주던 북한 당국이 그 물줄기를 황해도 쪽으로 돌려놓는 바람에 한참이나 물 고생하여야 했다.

지금은 용화저수지, 토교저수지 등을 만들어 그 물걱정은 해결되었다.

철원군 사람들이 강원도의 모든 군 가운데서 가장 넉넉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 가운데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든다."                                                                                                                        -('開闢' 1923)

란 기록을 보면 옛날부터 철원은 살기 좋은 고장이었던 것 같다.

 철원(鐵原) 은 1914년에 강원도에서 제일 먼저 경원선(京元線) 열차가 달리던 지역이었다.

내륙지방인 철원 사람들은 당시에는 그 경원선을 타고 자유롭게 서울, 원산, 함흥 같은 대도시를 드나들며 원산 해산물로  싱싱한 생선(生鮮)을 밥상에 올려 놓기도 하고,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遊學) 보내며 살던 고장이었다.

 1936년에는 이 고장에  ‘철원~금강산 장안사행’ 기차역이 생겨서 금강산 관광 여행객들이 붐비던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철원은 어느 무엇보다 반공 안보교육의 현장으로 유명한 고장이 되었다.

철원은 6.25로 인한 수복 지구(收復地區)여서 철원 안보관광의 대표적인 경유지다. 이곳에는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월정역(月井驛)이 있고, 철원읍 관전리에는 1946년 공산 치하였을 때 이 지역 주민들을 감시하고, 반공 인사를 구금하고 심문하던 노동 당사(勞動黨舍)가 휴물처럼 남아 있다. 

-월정역(月井驛): '서울↔원산'(221.4km)을 달려가던 열차가 잠시 쉬어가던 역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한일 합방 당시였던 1914년 8월 강원도 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한 산업철도로  서울-원산 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 철길이었다. 역 내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과 6.25 무렵 유엔군 폭격으로 부숴진 화물열차 몇 칸만이 앙상한 골격으로 옛날을 말하고 있다.

그 월정리(月井里)에는 지명 유래담으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전설이 전하여 온다.


아주 먼 옛날 이 고장 산골에 원인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그 아비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는 딸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아버지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밤마다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 백발도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달의 화신인데 네 정성이 지극하여 왔노라. 네 집 옆 바위 위에 가 봐라. 거기에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니 달이 지기 전에 너의 두 손으로 천 모금을 길어 아버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소녀는 허둥지둥 꿈에 들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지의 입에 넣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달이 지기 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달은 벌써 서편으로 기우는 것이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온몸을 바위에 부딪히고 찢겨가며 가냘픈 손으로 드디어 천 번째 물을 아버님께 마시게 하자 달도 서천에 지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버지 병환은 나았으나  그 효녀는 쇠진하여 영영 회생되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마을 사람들은 달의 우물이라 하여 '월정(月井)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 역시 '월정리(月井里)'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 월정역 내에는 인경이 있다. 다음은 그 인경에 양각(陽刻)해 놓은 비명이다.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여 주소서~

            -성 크란지스코

 

*. 철원 평화전망대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에 위치한 '철원평화전망대'에 오니, 모노네일이 전망대까지 우릴 실어 나르는데, 내려올  때 그 우측 도보로 걸어 보니 7~8분 거리였다.

 철원평화전망대는 지상3층, 지하1층 규모로 2007년 11월에 개관한 안보 교육장이다. 1층은 전시관, 2층은 관람관으로 만든 철원 평화 전망대였다.

 좌측이 백마고지(白馬高地)요, 우측 사이가 낙타고지(駱駝高地)다. 그 전후에 광활한 철원평야가 DMZ란 이름으로 지금은 가볼 수 없는 두고 온 산하가 되어 있었다. 저기가 역곡천 북안(北岸)의 백마(White Horse, 395m) 고지라는데, 화살머리(Arrowhead, 281m) 고지, 티본(T-Bone, 290m) 고지, 포크찹(Porkchop, 255m) 고지, 불모(Old Baldy, 266m) 고지 등은 어느 어느 것일까?

 

궁예가 쌓았다는 성곽과 함께 그 유적지도 저 DMZ 안에 있다고 하던데-.

전시관에는 초정밀 망원경이 있어서 평강 고원,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가 있었다.

*. 백마고지 (白馬高地) 이야기 

  6.25 직 전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수학여행을 개성(開城)으로 갔다. 개성이 38선 이남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는 백령도(白翎島)도 38선 이남이었는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백령도가 6.25  동란 이후 대한민국 영토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장 아름다운 산이 무엇일까 할 때 설악산(雪嶽山)이라고 하는 대답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산은 6.25 전에는 38선 이북으로 북한의 땅에 있던 산이다.

속초, 인제, 양구 화천, 산정호수도 마찬가지로 다 6.25 전에 북한 땅이었던 수복지구였다.

화천, 철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백마고지에 왔다. 백마고지는 철의 삼가지의 하나다.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란 말은 6.25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벤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 대장이 “적이 전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를 무너뜨려야 한다.”에서 유래했다는 말이다.

그 삼각지는 철원, 금화(강원도 철원군)와 지금 북한 지역의 평강군의 일부분 일원이다.

  그곳이 왜 전 전선의 생명선이었을까?

이 지역으로 서울서 원주까지 경원선이 통과 하고 있었고, 5번국도가  '철원에서는 연천-의정부-서울'로, 김화에서는  '포천-의정부-서울' 등으로 연결되고 있어 철의 삼각지는 서울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6·25전쟁 당시에 북한군과 중공군에게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선에 투입하는 최대의 책원지(策源地)가 원산항 일대다.

이를 수송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는 곳이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 일대였으니 철의 삼각 지대는 전략상 최대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철의삼각지대는 6 ·25전쟁 당시 '중부 전선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으로 남침을 위한 중부 전선의 본거지가 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을 장악하고 방위하기가 어려워서 전쟁의 전기간을 통해서 피아간(彼我間)에 최우선으로 어떠한 댓가를 치뤄서라도 먼저 점령해야만 할 곳이었다.

그러나 이 백마고지 남쪽에는 산이 없지만 북으론 산이 많아서 아군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고 적이 방어하기에는 난공불락의 지형이어서 백마고지는 더욱 사수(死守)해야만 했다. 중공군이 침략해 오기 전까지 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백마고지는 395m밖에 안되는 북의 효성산(619m) 부근의 무명의 야산이었다.

 

 고지는 중공군 군단으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제1포병단의 우수한 화력지원과 유엔군의 항공 지원에 힘 입어 중공군 14,000여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데 승리한 전투였다.

그 무렵 전투에서는 우리 제1포병의 우수한 화력과 UN군의 공군력의 지원으로 낮은 우리 9사단이 고지를 점령하였고 밤에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인하여  저들의 차지기를 24회나 되풀이 되였다.

그래서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38군 세 사단의 대공세가 시작된 후  10일 간 전투에서  피아간(彼我間) 30만 발의 포탄이 백마고지에 투하 되는 시산혈하(尸山血河)의 혈투가 계속되었다.

다음은 기념관에 전시된 당시 전투의 실화다.

 

  -1952년 10월 12일 아군이 고지 탈환을 위한 세 차례의 돌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발악적 기관총 화력으로 혼전만 거듭할 때 김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 세 영웅들은 우국충정의 군인 정신으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탄우(彈雨) 속을 헤치며 단숨에 고지 정상으로 돌진하여 적 기관총 진지를 박살내고 모두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에 전 장병은 육탄 3용사의 투혼에서 사기를 본받아 순식간에 정상 주봉에 태극기를 꽂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3 용사는 백마의 삼군 신(三軍神)으로 추앙받아 조국 수호의 별이 되었다.   

 그때의 기록의 하나하나가 기념관에 보존 되어 있다. 백마 고지 전적비를 지나 승리탑 가는 길에 백마고지의 위령비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검은 오석에 844명의 전사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철원읍 대마리 주민과 5사단에서 세운 위령비였다.



 

 

 

 

호국을 위해 몸바치신 영령들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원혼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승리한 교훈을 영원히 전하고파/ 여기에 기념비와 기념관을 세우다.                                            
 
승리 전적비 위에 종각(鐘閣)이 있다. 백마고지를 지키다 산화한 영령을 위한 종을 모신 것이다.

 호국 영령들이 염원하는 통일을 위해 북(北)을 향하여 울려 줄 종각일 것이다. 

목숨 바쳐 지킨 영령의 간절한 소원은 먼저 우리를 향하여 울려야 할 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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