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7.5. 19/해발500m 어의곡- 비로봉 -연화봉 -천문대--희방사 - 희방폭포 총14.5 Km/ '북한산연가' 따라 홈페이지:http://cafe.daum.net/ilovebukhansan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1872년 미국의 예로스톤공원(Yellowstone공원)에서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카나다 벤프공원(Banff공원 1885), 프랑스의 카마르그공원, 일본의 운센(雲仙), 아소(阿蘇),닛코(日光) 등에 이어,프라승의 카마르크, 일본의 운센(雲仙), 아소(阿蘇),닛코(日光) 등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국립공원은 1967년 12월에 지리산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1988년 월출산이 지정되기까지 2009년 현재 2 0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한국의 국립공원은 크게 자연경치 지역, 해양 지역, 고적 지역 3가지로 구분되는데, 경주 일원이 유일의 고적지역이요, 해상공원으로는 한려해상국립공원,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서산해안국립공원으로 나머지가 산악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치요, 유서 깊은 사적지로 대대로 보호해야할 할 할 국민 보건과 휴양의 보고가 되는 곳이다. 날이다. *. 어의곡 이야기 . 오늘은 근 2년 동안 문학저널에 연재하여온 ilman의 ‘국립공원 산행기’ 마지막 회 ‘소백산 국립공원’을 쓰는 는 날이다. 마감 임박해서 간다. 소 산을 타는 사람들은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 식성이 풀린다는데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 가장 빠르게 올라가는 곳은 어떤 코스일까? 어의곡(於衣谷)에서 오르는 길이 다. 희방탐방지원센터~비로봉 : 7.9km 삼가탐방지원센터~비로봉 : 5.5km * 비로사 방향 죽령탐방지원센터~비로봉 : 11.5km 천동탐방지원센터~비로봉 : 6.8km 어의곡탐방지원센터~비로봉 : 5.1km 그래서 서울 쪽에서 오는 산악회는 대부분 우리처럼 소백산 산행의 들머리를 어의곡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어의곡일까? 한자로 於衣谷인 것을 보면 옷과 관계있는 이름 같은데-. -이곳은 단양군 가곡면 지역으로서 두 골짜기가 어울러져 있으므로 엉의실 또는 어의곡이라 하다가 어의곡이라 하게 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더 찾을 길이 없다. 여기서 '엉의'가 '어울리다'의 방언이 아닌가 생각해 보지만 아직은 확인할 길이 없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어의곡 주차장의 들머리에 '국망봉→ 7.4km 비로봉→5.1km'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길은 어의계곡을 옆에 끼고 계류의 물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완만한 길이다. 처음에는 평지 같이 부드러운 길이다가 경사길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정성들여 설치해 놓은 통나무계단이라서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부드러운 산길이었다. 게다가 500m 간격으로 있는 푯말이 이정표 역할을 하면서도 지나온 길과 갈 길이 몇 km라는 것은 물론 해발 몇 m 높이라는 것까지를 친절히 알려 주고 있다.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는 희방사라서 비로봉을 향하고 있는데 국망봉의 갈림길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비로봉이 아닌 국망봉 쪽으로 가는 것이나 아닌가하고 내내 마음속으로 걱정하여 왔더니 마지막 긴 통나무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에 올라 가서도 한참만에 비로봉을 400m를 앞두고 '어의곡 4.7→km/국망봉→2.7km/ 비로봉→0.4km' 라는 이정표가 있다. 능선이 시작되는 곳부터는 평탄한 길이 열리는데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전나무인가 잣나무 같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며 무성하였고, 길 위에는 그 잎이 떨어져 있어서 푹신한데 간밤 내린 비에 촉촉이 젖어있는 것이 검은 양탄자를 밟고 거니는 듯 푹신푹신하다. 길가에는 이슬을 머금고 있는 풀잎과 막 피기 시작한 철쭉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오늘은 신록의 계절 5월 19일, 이틀 후부터 소백산 철쭉제라고 하지만 철쭉이 만발하려면 6월 초순이나 되어야 할 것 같다. 앞이 아득한 운무 속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정상이 가까워 오나 보다. 그 운무는 바람에 따라 재를 넘고 있었는데 옷깃을 적시며 추위까지 몰아와 황급히 반소매 위에 긴팔의 옷을 걸친다. 추위에 카메라가 얼어서 디카 밧데리를 새로운 것으로 벌써 두 번이나 갈아끼워야 했다. 가끔씩 바람에 운무가 물러날 때마다 문득 문득 정상이 보이는 곳부터는 자동차 폐타이어를 이용하여 정성껏 만든 나무 층계 길이 정상을 향하고 있다. 그 멋진 층계를 오가는 운무 속에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흐릿한 구름 속에 봉우리 위에 곰실곰실 움직이는 사람들이 점점 같더니 가까이 다가가니 와글와글 소리가 된다.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되었다. 소백산은 능선 오르기가 조금 힘들뿐 일단 능선 길에만 들어서면 평지 같은 길이고 봉우리만 지나면 길가에 잡목이 없는 산이라서 일망무제로 시야가 탁 트인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 그대로인데 그 중에도 '苦'(고)가 짧아서 좋았으나 짙은 연무는 안타깝게도 그 멋진 전망을 가리고 있었다. *. 소백산 이야기 국망봉은 마의태자의 한(恨)이 어린 산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군신회의를 소집하고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천년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좌절되자,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 봉에 올라 슬피 울며 나라[國: 신라 경주]를 멀리 바라보며[望]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곳이라 해서 국망봉(國望峰)이라 한 산이다. . 경주 바라 통곡하던 마의 태자 넋을 실어 지금도 서라벌 향하여 북서풍으로 울고 있나. 이 국망봉 아래에 있는 죽계(竹溪)는 신라에 이어, 고려 충숙왕 때 안축(安軸)이 죽계별곡을 지은 배경이었다. 죽계별곡(竹溪別曲)이란 그의 고향인 풍기 죽계(竹溪:영주시 순흥) 를 노래한 5장의 경기체가(景氣體歌)이다. 다음은 그 5장 중 1장이다.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죽령남 영가 북 소백산 전) *안동의 고려 시대 옛 이름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천재흥망 일양풍류 순정성리) *순흥의 옛 이름 *他代無隱 翠華峯 *天子藏胎(타대무은 취화봉 천자장태) *'다른 데 없는'의 이두식 표기* 爲釀作中興 景幾何如(위양작중 경기여하) 淸風杜閣 兩國頭御(청풍두각 양국두어) 爲 山水淸高 景幾何如(위 산수청고 경기여하) 죽령 남 안동 북 소백산의 앞에 천년 흥망 한결같이 순흥 성내에 딴 데 없는 왕의 태(胎) 취화봉에 모셔서 *.충렬, 충숙, 충목 세왕의 안태 아, 이 고을을 중흥하니 그것이야말로 어떠하니잇고 청풍의 두연(杜衍)의 높은 집에 양국의 관함 지니매 아 산수가 맑고 높은 것이 그것이야말로 어떠하니잇고 -소백산은 조선조 유명한 실학자이며 풍수지리가인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넘다가 이 산을 보고 '사람 살리는 산'이라고 하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고 지나갔다는 산이다. 이처럼 소백산은 금강산이나 지리산과 같이 우리민족이 숭앙하는 산이기도 하였다. 소백산의 국망봉을 발원으로 하여 흘러내리는 물은 옥이 구르는 듯한 소리로 백운동으로 흘러서 사천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유명한 죽계천이다. 이 계곡은 물 굽이 하나하나가 절경을 이루다가 백운동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준 이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1곡 백운동 취한대, 2곡 금성반석, 3곡 백우담, 4곡 이화동, 5곡 목욕담, 6곡 청령동애, 7곡 용추비폭, 8곡 금당반석, 9곡 중봉합류 *. 연화봉 이야기 -연화봉에서 시작되는 희방계곡은 높이 28m의 웅장한 희방폭포와 더불어 뛰어난 경관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북으로 흐르는 계곡들은 단양팔경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조선 전기 대문호 서거정도 소백산에 올라 '소백산'이란 시를 읊었다. 小白山連太白山(소백산연태백산)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위이百里揷雲間(위이백리삽운간) 백 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에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분명회진동남계)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괴破견(지설천성괴파견) 하늘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 공자의 호연지기(豪然之氣) 같이 어제는 그저께 다녀온 합천 황매산 산행기를 밤늦도록 쓰고 배낭을 꾸리느라고 너무 늦게 잠들어서 2시간밖에 못잤다. 요즈음 나의 산행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자료수집이 주목적이어서 먼저 다녀온 산의 산행기를 마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리를 한 것이다. 그래선가 여기 오는 도중 차속에서 코피가 났다. 나에게 코피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그 코피가 하루 종일 멈추지 않다가 목구멍으로 피덩어리가 나와서 병원에 갔다가 보름 동안 생사를 다투는 투병 생활을 하였다. 입원했던 거기가 그 무서운 암중왕인 백혈병 환자가 가는 무균병실이었기 때문이다. 코피 이야기가 나왔으니 물어 본다 코피가 나올 경우에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솜으로 막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하는 것보다 코피가 나는 부위를 꼬옥 눌러 주어 지혈을 시킬 일이다. 그러니까 이번 산행도 남 몰래 코피를 닦으며 나의 귀중한 생명을 걸고 소백산을 찾아온 것이다. 비로봉이 보고 싶어서였다. 비로봉 사진 몇 장을 찍어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오늘 이후 어쩌면 나는 영원히 소백산을 다시 찾지 못할 것 같다. 나이도 나이지만, 내가 갈 곳이 천하에 소백산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登東山而小魯(등동산이소노): 동산에 올라 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더니 登泰山而小天下(등태산이소천하): 태산에 올라 보니 천하가 작게 보이는구나. 공자가 태산에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읊은 글이다. 태산은 중국인이 자랑하는 오악(五嶽)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산이다. 이 글은 공자가 몇 살 때 썼을까? 공자는 74세까지 살았으니 위 글을 돌아가시기 5년 전에 썼다고 가정하여도 70 전에 쓰인 글일 께다. 공자가 오른 태산은 높이가 1,450m인데, 오늘 내가 오른 우리의 소백산은 1,439.5m다. 고희(古稀)를 넘긴 ilman이 그저께 합천의 황매산(1,108m)에 이어 소백산 비로봉에 이렇게 올랐으니 어찌 흥이 없을까. 겸손을 배우려면 소백산에 가라 하거라. 부드러움 본받으려면 비로봉에 가보라 하거라. 철쭉에서 초원(草原)이다가, 단풍에서 대설원(大雪原)이 되는 곳. 죽어서 산이 되고 싶거든 소백산이 되라 하거라. *. 비로봉 이야기 이 산의 주봉인 비로봉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애써 오른 비로봉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하기도 했다. 그림:정선(鄭敾)의 비로봉도/국립박물관의 비로자나불 우리나라에 산 중에는 비로봉(毘盧峰)이란 이름이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 공통점은 모두가 산 정상 봉우리의 이름들이다. 묘향산 비로봉(1,909m),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 속리산 비로봉(1,057m) 등등. 그런데 비로(毘盧)란 무슨 뜻일까? -비로(毘盧)란 불교적인 용어로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원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종파마다 각각 달리 부른다.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불, 진언종에서는 대일여래, 천태종과 법상종에서는 법신불 등으로 부르는 부처다. 절에서 대웅전이란 석가모니를 모신 전각이니 그 큰 영웅[大雄]이 바로 불교에서 으뜸 되는 부처님이 석가모니이시라. 그래서 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비로봉(毘盧峰)이라 하는 모양이다. 비로봉에서 내려오다 보니 왼쪽에 대피소 같은 건물이 직진 코스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거기까지 멋진 길이 나 있지만 갔다가 되돌아 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나는 가장 후미에 떨어진 혼자의 몸이다. 그래서 서두느라고 먼 발치로 보고 온 것이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 그 건물은 대피소가 아니라 주목 관리소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길로 가야 그 아래에 있는 한국 제1의 주목군락지를 볼 수 있는 것인데 지나친 것이다. 지나치고 보니 그 길을 통하여 연화봉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었다. 이럴 때 후회한들 무엇하랴. 버스 지난 뒤에 손드는 격인데. *. 갈림길 민백이재 소백산을 여성적인 산이라 한다. 그러나 능선의 부드럽기는 여성 같이 부드러우나 장대하였고, 장대하면서도 수려하다. 1,439m의 비로봉이 거느린 봉(峰)만도 국망봉(1,421m), 제1연화봉(1,394m), 제2연화봉(1,357m), 도솔봉(1,314m), 신선봉(1,389m), 형제봉(1,177m), 묘적봉(1,148m) 등 1,000m가 넘는 10여 개 영봉들이 만들고 있는 거대한 산이다. 그 넓이로만도 지리산 설악산 다음의 크기다. 나는 비로봉을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워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면서 연화봉을 향하다 보니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인 주목 관리소를 조금 지나 비로봉에서는 0.6km 지점에 민백이재(1,405m)에 이르렀다. 재는 영(嶺), 치(峙), 고개로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산이나 언덕을 넘어 다니는 힘든 비탈길을 말한다.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힘든 작업이다. 그래서 일의 어떤 고비나 절정을 고개라 한다. 인생의 넘기 힘든 나이를 10살 단위로 해서 오십 고개, 육십 고개, 칠십 고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민백이재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단양읍 천동리로, 비로사로 도(道)를 넘나드는 고개다. 민백이재를 넘어 천동계곡을 따라 2시간 20분 6.2km를 내려가면 다리안폭포와 소백산유스호텔을 만날 수 있다. 이 고개에서 비로봉을 거쳐 삼가탐방지도소쪽으로 가면 2시간 정도에 비로사를 만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희방사까지 6.1km를 더 가면 되는데 길은 순탄한 길로 겁을 먹게 하는 구간이 한 군데도 없다. *. 연화봉(蓮花峰) 이야기 비로봉에서 1.7km에 있는 기도원 갈림길[해발1340m]을 지나는데 아무리 보아도 갈림길이 없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없다. 길이 폐쇄된 모양이다. 비로봉에서 2.5km를 내려와서 그래도 약간은 힘들게 올라왔구나 했더니 여기가 '제1연화봉'(1,394.3m)인데 천문대가 2km 남았다는 싱겁게도 안부 같은 길가에서 정상석을 대신하여 이정표로 서있다. 봉이 높기는 한데 모양이 초라한 모양이다. 소백산에는 연화봉이 셋이나 있다. 여기가 제1연화봉이고, 죽령에서 올라오는 곳에 있는 제2연화봉(1,357.3m)과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383m)이 그것이다. 연화봉(蓮花峰)도 비로봉이 그렇듯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다. 나는 젊어서 부처 탄생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야 부인이 석가를 잉태하고 아이를 낳으려 친정에 가다가 마차 밑에서 고다마 싯다르타를 나을 때였다. 태어난 싯다르타는 울지 않고 벌떡 일어서서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오가더니 오른 손 엄지를 하늘로 향하고, 왼손 엄지를 땅을 향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작은 나를 벗어나 광대무변한 대아의 경지에 도달하자)이라 하더니 비로소 울었다. 그 때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받쳐 주던 꽃이 연꽃이었다. 불교의 상징이 연꽃이라면 그 이유를 불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로 처염상정(處染常淨)요,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더럽지만 그 더러움을 꽃잎에 묻히지 아니하고,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꽃과 열매가 같이 피고 맺는다는 것이다. 셋째, 봉오리가 막 피어날 때의 모습이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그림: 꾸미기 전 옛날 제1연화봉 오르는 길/ 현재 길 제1연화봉에서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까지는 2km인데 제1연화봉을 오르내리는 길은 옛날과 달리 말쑥하게 단장 된 것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도록 자랑스럽게 꾸며 놓았다. 나는 어느덧 제1, 제2의 연화봉을 거느리고 서 있는 진짜 연화봉에 올랐다. 연화봉은 소백산의 어느 봉우리처럼 사방이 툭 틔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희방사 쪽을 제외한 그 비경이 연무에 감추어져 있다. 정상석에는 한쪽에는 단양시와 뒤에는 영주시 이름이 음각된 것을 보니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이 되는 연화능선을 내가 타고 온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 연화봉의 멋 중의 하나는 국립소백산천문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건물 위에 우주망원경을 부착한 돔 형식도 멋지지만 그 왼쪽에 첨성대 모양 위에 얹은 돔 건물은 멋을 더하여 준다. 전에 왔을 때 못보던 모습이다. 그런데 안개가 걷힐 때 언뜻언뜻 보이는 것은 이 심심산골의 산상을 향하여 꼬불꼬불 오르는 차도였다. 그 차도는 제2연화봉 중턱을 끼고 오르는 천문대 전용의 차도로 이 높은 해발 1,380m까지 오르고 있었다. 나는 연화봉을 땀으로만 올라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였다. *. 천년 고찰 회방사 지금까지의 완만한 내리막길이 연화봉서부터 희방사까지의 2.4km는 급경사의 위험한 돌길이었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철쭉이 핀 곳은 있었으나 대개는 망울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쪽은 산의 남쪽이라 연분홍 철쭉꽃이 제법 피고 있는 꽃길이었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희방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 염불 소리를 들으며 천신만고 끝에 안부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거기부터가 악명 높은 깔딱고개였다. 길은 돌길로 널찍한데 그 가운데에 쇠 손잡이가 계속되는 500m길이지만 산의 거리는 왜 그렇게 길게 생각되는지-. 어떤 여인은 뒤걸음으로 내려 갈 정도로 가팔랐다. 그 돌길이 끝나는가 싶은 곳에 샘 같은 석간수가 있고 거기서도 한참이나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희방사를 들어가는 산길이 있다. 희방사 폭포 및 희방사입구 들머리에 '소백산희방사(小白山喜方寺) 비에 다음과 같은 전설을 음각하여 놓았는데 그 내용이 계룡산의 남매탑 전설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였다. 도승 두운조사(杜雲祖師)께서 계림[경주] 유호장(兪戶長)의 무남독녀가 호환(虎患)에 당한 것을 구하여 주었다. 호장이 기뻐하여 그 은공으로 절을 지어 드리고 희방(喜方)이라 이름하였다. 이 '희방'은 곧 기쁘다는 말['喜]'와 도사가 거처하던 방('方')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 뒤로 조선 철종대왕 때에 화재를 당한 것을 강월대사(江月大師)가 중창하였으나 불행히 6.25의 병화로 절집들이 다 전소하여 버리는 바람에 사찰에 간직한 국보 훈민정음 판목과 기타 문화재가 재가 되어 버렸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작전상 출입금지 지역이어서 잡초만 우거진 절이 되었다. ~ 하략 그래서 옛것이라고는 영조 때 제조 되었다는 종뿐인데, 그 종마저 단양의 대흥사에서 쓰던 것을 절이 폐사 되는 바람에 희방사로 옮겨온 것이라는데 그 크기마저 사람의 앉은키에도 못 미치는 작은 종이었다. *. 한국 내륙 제1의 희방폭포 기대하였던 천년고찰 희방사가 옛날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희방사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얽인 전설뿐인데다가, 지금까지 전설 속에 나오는 유호장 같은 공양주를 만나지 못하여서 현재의 당우가 이름값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 같았다. 나라의 국보를 불태운 사람이 공산당의 짓이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전시라고 하더라도 어찌 우리 국보급 문화재를 스스로 불태울 수 있었으며 전후에 그런 지휘관을 왜 그냥 두었는가. 당시 우리들의 지도자의 소중한 우리 문화재에 무관심하였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쉬움 속에 절 아래에 희방폭포를 보았더니 지금까지 한국의 폭포를 보며 실망하던 마음을 바꿀만큼 폭포가 우람하다. 간 밤에 온 비에 물이 불은 것이다. 내려준 비가 고맙기 그지없다. -소백산의 으뜸가는 절경이며, 영남 제1의 폭포로 손꼽히는 이 폭포는 높이가 28m로 해발 700m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 영봉의 하나인 연화봉에서 발원하여 몇 천 구비를 돌아서 흐르다가 이곳에서 한바탕 천지를 인종시키고 있는 장관이 넋을 잃게 한다. 이 폭포를 본 조선시대의 석학 서거정 선생이 '하늘이 내려 주신 꿈속에서 노니는 곳'(天惠夢遊處)라 읊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주차장에 왔더니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 일행들은 절을 안 보거나 대충 보고 내려 갔나 보다. 버스 주차장까지 걸어 30분 걸린다는 기사 아저씨들의 협박에 차를 타려고 하였더니 요금이 거금 일만원이란다. 택시를 타면 내 마지막 돈을 다 써버려서 우리들의 뒤풀이 요금이 없어지게 되니 나는 어떻게 하였겠는가. 주차장까지1.5km의 거리를 시속 거시기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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