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 산행 Photo 에세이
(2009. 10월/. 강화대교 앞 검문소- 남문- 성동마을- 문수로- 북문- 문수산성- 정상- 홍예문- 문수사- 풍담대사부도.비- 성동저수지- 남문)
*. 문수산 가는 길
'김포국제공항'으로 인연해서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려진 김포(金浦)는 한반도와 같이 반도(半島)다.
동으로 한강을 사이 두고 고양시(高陽市)과 파주시(坡州市)가 있고, 서쪽에는 염하강(鹽河江)을 사이 두고 강화(江華)와 마주하고 있다.
북으로는 휴전선(休戰線)의 일부가 되는 조강(祖江) 건너에는 북한의 개풍군(凱風郡)이 있다. 반도이기 때문에 그 해안선 길이만도 56km나 되는 시다.
김포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는 강화대교 건너기 직전에 우측에 병풍처럼 둘러 서있는 것이 문수산(文殊山)이다. 그 이름은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하였지만 문수산은 문수산성(文殊山城) 때문에 더 이름 난 산이다.
문수산 가는 버스는 서울 5 호선 송정역이나 김포공항에서 떠나기도 하지만, 내가 사는 고양시 일산에서도 김포대교나 일산대교로 갈수 있는데 3호선 마두역에 강화터미널을 가는 버스가 있다.
차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강화 다녀 오는 길에 애기전망대(愛妓展望臺)를 들러서 지척에 있는 북한(北韓)을 바라보거나, 그 근처의 김포 조각 공원(彫刻公園)을 구경할 수도 있다. 문수산 등정은 길어야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강화에 가면 강화터미널 옆에 있는 풍물 시장(風物市場)에 가서 인삼막걸리에 안주 삼아 각종 회(膾)를 맛볼 일이다. 풍물시장의 회는 서울의 반값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어서 수도권의 인기 장터이기도 하다.
*. 문수산성(文殊山城) 이야기
강화대교 넘기 전에 있는 성동군 검문소에서 내려 성동마을을 향하다 보면 우측에 옛 깃발 휘날리는 아름다운 남문(南門)이 보인다.
-병자호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사도세자(思悼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이 강화도에 피신해 있을 때였다.
이를 함락하기 위해서 청 나라 군대들이 강화도 건너에 있는 문수산에 올라가 강 건너 강화를 살펴보니 강화의 방비가 허술한 것이 손바닥을 보듯이 내려다 보였다. 그래서 갑곶(甲串) 나루를 단숨에 건너 온 청군에게 강화도는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병자호란 후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이나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숙종 30년에 쌓은 성이 문수산성(文殊山城)이다.
당시 성 둘레는 6km이었고 성문 3개에 취예루(取豫樓)와 공해루(拱海樓)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이 있어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 성내의 크기가 600만평(20만 3511㎡)이었다. 성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치는 성가퀴(女墻)만도 2,173개나 되었다.
이 문수 산성은 강화의 갑곶진(甲串鎭)과 마주 보는 위치여서 강화도 입구를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갑곶진(甲串津)으로 해서 나루를 건너 강화도로 나오는데 취예루(取豫樓)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대원군의 천주교 학살(선교사 9명과 신도 8천명 처형)의 죄를 물어 7척의 군함과 근대 무기로 무장한 2천여 명의 프랑스 군대의 침략으로 불타 버린 것을 최근에 남문과 북문을 중심으로 복원한 것이 문수산성(사적 제139호)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란 말은 1866년이 병인년('丙寅'年)이요 양요(洋擾)는 서양(西'洋') 오랑캐의 소요(騷'擾')란 말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갑곶과 문수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통진현이 서남쪽으로 갑곶을 등지고 동쪽으로 세 봉우리를 바라본다."라 하였고 갑곶은 강화부로 건너가는 나루라 하였다.
여기서 3봉이라는 것은 성동마을에서 찍은 위 사진에서 보듯이 문수산의 3봉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서 조금 올라가다 보니 "주택가 한 구석에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란 입간판이 옛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갑곶나루는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섬의 갑곶리 사이를 오가는 나루이다. '갑곶'이란 명칭은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 할 때 이곳이 해안과 거리가 좁고 수심도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놓고 건너가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하여 온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이 없었으나 조선 세종 때 박신(朴信)이 개인 비용으로 만들어 1900년 초까지 강화를 오가는 중요한 통행로로 이용 되여 오다가 1970년대에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경기도 기념물 제108호가 되었다.
왼쪽의 '문수산 산림욕장(文殊山山林浴場)' 입구를 지나간다. '문수산길' 이정표가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더 직진하면 해병대 훈련장으로 해서 문수사 가는 길이어서 왼쪽 길로 들어섰더니 강과 바다가 열린 저 멀리 멋진 또 하나의 문 북문(北門)이 보인다. 남문과 같은 크기의 같은 모양이다.
그 문루에 오르니 염하강 건너 '갑곶진'과 '강화대교'가 지척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이 성벽이 해안가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의 습격으로 소실되고 그 자리에 성동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북문 성위로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8분가량 오름길이더니 능선길이 나타난다. 뒤돌아보는 전망이 오를수록 넓어지기 시작한다. 문수산의 멋은 오르다 뒤돌아보는 재미요, 왼쪽으로 펼쳐지는 북한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전망이 북쪽에 조강 건너 북한의 개풍군의 건물까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지도를 갖지 않은 초행 산길은 정상(頂上)과 숨바꼭질을 하게 한다. 정상이라 생각하고 오르면 그 위에 또 봉이 있고, 그 봉 뒤에 또 봉이 계속된다.
그 봉은 다른 산과 달리 대개 토치카 구조물이 있어 우리 민족의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였다.
어제까지 불던 강풍이 황사를 몰고 온다 하였지만 그 강풍 덕에 개성의 송악 일대가 보인다. 망원경을 가지고 올 껄- 하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다. 자랄 때는 나도 모르게 크더니, 늙을 '때는 한 해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을 때마다 소원이 '작년 같이만 살게 해주소서.'다.
며칠 전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앞으로는 등산을 하지 마세요. 관절을 아껴 쓰셔야지요. 아니면 걷기도 힘드신 때가 올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요즈음은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15%의 체중을 절감한다는 2개의 스틱을 양손에 짚고도 서서히 천천히 산을 오르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야산을 찾게 된 것이다.
오로지
오르기 위해 오르는
나는 산(山)이 된다.
즐거운 산(山)의 하루가 된다.
누구나 오를 수 있는 376m 문수산은
오늘의 나에게는
알프스다. 히말라아 정상이다.
어느 산(山)이나
오르는 길은 길고도 멀어도
정상은
언제나 잠깐뿐이 아니더냐.
-문수산
정상 직전에 봉우리 위에는 콘센트 군 막사(軍)가 있고 그 아래에는 막사를 헐은 자국이 있어 우회하여야만 했다.
분한 땅이 보이는 곳이고, 완전히 철거할 수 없는 것은 여기가 최전방의 산이라 다시금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건 뭔가. 문수산 정상을 검은 그물 같은 것이 덥혀 있지 않은가. 다음은 그 설명이다.
-이곳은 문수산 정상부(해발 376m)로 옛날에 문수산성 장대(將臺)가 있었던 지역으로 복원을 위해 발굴 조사하는 중입니다. 장대(將臺)란 산의 정상부에 지은 망루로서 장수가 주변의 정세를 파악하여 지휘하던 곳을 말합니다.
그동안 문수산성 장대지를 발굴하다 보니 삼국시대 기와 조각과 고배 등이 발견되어 숙종 때 문수산성을 쌓기 이전에도 산성이 있던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아울러 장대지 기단부에 사용된 전돌들이 발굴되어 조선시대 전돌 축조법에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수산 정상 전체가 검은 비닐 그물로 덮여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 정상석을 카메라에 담아 놓고 쫓기듯이 급히 내려오는 바람에 문수산의 멋인 정상에서의 경치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북한산에 있는 동장대(東將臺) 같은 장대(將臺)가 완성되는 훗날 다시 한 번 와서 못 다한 전망을 보고 싶다.
하산길 성터를 따라 염강 너머 강화를 굽어보며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상에서 400m 지점에 헬기장이 있고 거기에 이 산에 셋 있다는 암문을 중심으로 성벽을 복원하여 놓았다.
암문(暗門)이란 성벽에다 누(樓) 없이 만든 문을 말하는데 남문에서 오를 때 가장 높은 봉 근처에서도 보던 것과 달리 완전히 복원하여 놓았다.
이정표는 8각 전망대로 해서 문수산산립욕장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문수사로 가겠느냐고 묻고 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문수사 길로 들어선다. 처음 가는 절이요, 이 문수산의 이름의 유래가 된 절이기 때문이다.
문수사 길 반대쪽은 김포대학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문수사도 그렇지만 정상에서 보던 멋진 부도(浮屠)도 보고 싶어서였다.
*. 문수사 이야기
헬기장에서 문수사까지는 내리막길로 500m라는 이정표와 달리 너무 길이 멀었다.
드디어 나타난 문수사는 다른 절의 암자보다도 더 작고 초라하였다.
-신라 혜공왕 때 창건 되었다는 문수사(경기유형문화재 제91호)는 한국불 교태고종에 속하는 절이다. 옛 당우는 전쟁에 소실되고 현재 당우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과 요사체가 있는데 그 사이에 허물어진 고탑(古塔)을 모아 세운 5층 석탑과 그 탑의 뒤에 연화 좌대(蓮花座臺)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보다 이 절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 주는 것이 그 아래에 있는 '풍담대사부도 및 비'다.
문수사 풍담대사 부도는 조선시대 고승 풍담대사의 사리를 모신 묘탑(廟塔)이고 그 옆에 있는 비는 풍담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였다.
*. 길을 잃고
이렇게 나의 문수산 답사를 거의 다 마친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홍예문으로 다시 돌아가 8각정 정자 전망대로 해서 산림욕장을 가고 싶었으나 그곳은 자주 갔던 길이라서 그냥 하산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강화 풍물시장에 가서 인삼막걸리에다가 가을의 별미라는 전어회(錢魚회)가 불현듯 먹고 싶었다.
전어 구운 고기 냄새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 하지 않던가. 그 맛을 한번 보면 부자도 가난뱅이도 '錢[돈]'을 아끼지 않고 먹게 된다는 '魚[물고기]'라서 '전어(錢魚)'가 아닌가.
무심코 부도를 지나 직진하여 가다 보니 이상하다. 분명 낙엽이 덮인 길인 것 같은데 갈수록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산에 가면 이정표 대신에 있던 리본을 못 본 것이다.
수많은 낙엽이 길을 덮었을 것이라고 편하게 생각한 것이다.
문수산은 많은 사람이 오는 산이 아니어서 낙엽이 길을 덮은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길을 잃었구나 '하였을 때는 벌써 20분 가까이 내려왔을 때여서 뒤돌아갈 수도 없었다.
낙엽이 쌓인 곳은 모두가 길 같았다.. 이렇게 길 밖에서 길을 찾으면서 길 '道(도)' 자를 생각하게 되었다.
득도(得道)하기 쉬우랴.
길 밖에서 길을 찾다보니
도(道)를 찾듯 어렵다.
무심코
다녀오던 길
그 길이 도(道)였구나.
-도(道)
길을 잃고도 이렇게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은 저 아래 해병대 막사에서 신병들의 훈련 소리와 개 짖는 소리 때문이다. 그 군부대를 피해 가려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그런 내 앞에 드디어 나타난 사람의 자취는 버려진 사이다병이었다.
이어 나타나는 밤나무 숲. 까먹은 밤송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밤을 따러온 인적일 뿐 길이 없다. 사람 흔적이 있으면 길이 있으리라 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러다. 그만 훈련 중인 부대 내 운동장에 들어가고 말았다.
해병 신병들이 공중 로프를 타는 유격 훈련을 하며 기압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의 산행은 단독산행이 많아서 만약에 길을 잃는 경우를 대비해서 유비무환(有備無患)으로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고 다닌다. )
스틱 2개, 호루라기, 좋은 성능의 손전등, 5m 정도의 비상로프, 비상식( 건빵, 미숫가루, 검은 콩 중 한 가지), 지도와 나침반, 휴대폰 등이다.
집에서 떠나올 때 문수산 지도를 복사하여 오렸더니 이름난 산이 아니라서 적지 않은 등산 서적을 가진 내 서재에도 없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가급적이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한다.
계곡을 향해 내려가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가급적이면 주위에 있는 능선을 향할 것이다. 계곡은 낭떠러지가 있음에 유념하고 사람의 흔적이나 개 짖는 소리 쪽을 향할 것이다.
이젠 강화풍물시장에 가서 인삼주에 전어화를 먹는 일만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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