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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변산(內邊山) 산행

ilman 2007. 2. 11. 11:19

 

 
내변산(內邊山) 산행 Photo 에세이
(2006. 6. 8/ 남여치매표소-월명암-자연보호헌장-직소폭포-재백이고개-관음봉3거리-내소사 -내소사매표소//

신도시산악회따라 http://cafe.daum.net/goyangjayooro/011-387-1883)

*. 가자, 내변산(內邊山)으로!

 변산 반도(邊山半島)에 가보고 싶었다. 내변산(內邊山)에 가보고 싶었다.
바다와 섬과 모래사장과 해식애(海蝕崖)가 어우러진 곳. 거기에다 산과 바다를 더한 국내 유일의 국립공원 변산은 '바다+해안선+해수욕장+섬+산+폭포+호수=변산'으로 요약된다.
산이 있어 운치가 있고 바다가 있어 낭만적이라는 이곳은 해변(海邊) 가에 산(山)이 있어 이름도 변산(邊山)이라 했다.
해안선을 따라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채석강(전북기념물 제28호)과 해식 동굴, 적벽강(전북기념물 데29호) 등의 외변산(外邊山)은 남들 따라 가다보면 자주 들리게 되는 명승지이지만, 내소사(來蘇寺), 개암사(開巖寺), 월명암(月明庵)을 품고 있는 호남 5대 명산이라는 의상봉(508m), 신선봉(486m), 쌍선봉(459m), 광음봉(433m) 등의 내변산(內邊山)은 마음을 먹어야만 가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변산은 평균 400m 내외의 작은 10여 개 나지막한 봉들이어서 나 같은 늙다리도 나이에 상관없이 부담 없이 가 볼 수 있는 곳이어서다.
직소 폭포(直沼瀑布)는 변산 8경 중 제1경이라는 봉래 구곡(蓬萊九曲)을 만들었고, 1995년에 완공된 부안 댐(扶安Dam)은 중계계곡을 호수로 하여 그 직벽의 기암절벽이 발을 호수에 담가두고 그 운치를 더하며 우리를 부르기 때문에서였다.

*. 빗나간 비 소식의 행복

. 내변산(內邊山)도 20여 년 전에 직장 산악회 따라 다녀간 곳이지만, 그때는 건성 따라 다녀서 기억 속에 분명한 것은 직소폭포요 내소사는 가봤다는 기억뿐이다.
그러나 요번에는, 찾아가는 내변산이라서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3일간이나 열심히 책과 인터넷을 뒤지며 오늘의 산행을 연구하였다. 나의 산행기(山行記)에 내변산을 추가하고 싶어서였다.
고양 '신도시산악회' 따라 온종일 내린다는 비 소식에 완전 무장하고 내변산을 향한다.
일산에서 740리, 295km 4시간 거리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인가. 들머리인 '남여치매표소'에 도착하였더니 비소식과는 달리 하늘은 더할 수 없이 쾌청한 것도 감지덕지한데, 30도를 오르내리는 요즈음 무더위에 산들 바람까지 더해 주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고어텍스 상의에 판초까지 배낭에 넣으니 가방은 만원이다.
우리는 남여치매표소에서부터 내소사(來蘇寺)까지 종주를 할 계획이다. 안내판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탐방4코스: 남여치매표소-2.2k-월명암- 2.0k-자연보호헌장탑-0.9k-직소폭포-1.5k-재백이고개-0.8k-관음봉3거리-1.3k-내소사"

*. 월명암(月明庵) 

  남여치매표소에서부터 시작되는 등산로는 잘 다듬어진 오름길에다가 20분 정도 오르니 전망이 확 트이는 능선이 나타나고, 다시 또 오름길이 시작되지만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니었다.
 관음암(해발 380m)을 0.5km를 남겨둔 그 1.7km 지점에 관음약수터가 있지만 불결하여 식수로는 부적하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사찰 경내인지 '살아있는 것들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법구경의 글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월명암 바로 뒤로 오솔길을 따라 한 20분가량 오르면 서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낙조대(落照臺)가 있는 모양인데 아까월라 출입금지 판이 앞을 막아선다.
육당 최남선 선생도 산을 좋아하여 여기 낙조대(落照臺)에 와서 시 한 수 남겼다는데 아쉽게 그냥 지나치고 말아야 하는구나!

저 해가 진다하여 눈물지고 돌아서니
어느덧 돋은 달이 벌써 나를 기다리네.
보낸가 맞았는가를 누가 안다 하리오

  거기서 한동안 계속되는 내림 길에는 오른쪽에 사찰 경계의 철조망을 끼고 도는 이전보다는 제법 커다란 산죽(山竹) 길인데 산중에 웬 부르도자 소리인가 하였더니 월명암(月明庵)의 담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 지은 대웅전 앞의 축대와 마당 공사를 하는 소리였다.


  그 축대를 겨우 겨우 올라 대웅전 앞에 앉아 보니 군부대 시설도 같고 천문대와도 같은 앞산이 멀리 보인다. 스님께 물어보니 그게 이 산에서 제일 높다는 의상봉(508m, =崎上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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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설거사(浮雪居士) 전설

월명사는 약 1,300여 년 전 신라 신문왕 11년(691)에 부설거사
(浮雪居士)가 창건한 사찰인데 현재 건물은 6.25 이후 새로 지은 당우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 무쟁처(無諍處)로 대둔산 태고사, 백암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 3대 영지의 하나다. 이 월명암에는 2기 부도(浮屠)가 있는데 그중 왼쪽 것이 부설거사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월명암의 가장 자랑이 변산8경 중 하나인 월명무애(月明霧靄), 서해 낙조(西海落照)인데 섭섭하게도 그냥 떠나려는 옷소매를 부여잡는 안내판이 있다.

하나는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요, 또 하나는 명월암 건설이야기인 부설거사의 전설이다.

-부설거사는 속명은 진광세요, 법명은 부설로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최거사와 더불어 세계불교 3대 거사로서 재가출가인(在家出家人)이다. 불국사의 원정(圓淨) 스님에게서 득도(得度)하고 영희, 영조 두 도반(道伴)과 오대산을 가던 중 구(仇)씨 집에서 하룻밤 여장을 풀었는데 그 집에는 방년 18세의 벙어리였던 구씨의 딸 묘화(妙華)가 있었다. 처자는 부설스님을 보자마자 말문이 열리는 신이가 일어났다. 그 딸이 죽기를 한하고 혼인해 줄 것을 원함에, 생명을 중히 여겨 부부의 연을 맺어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남매를 낳았다. 그후 이 가족들은 이곳 내변산에 들어와 각기 한 칸씩의 토굴을 짓고 살았다.
부설은 15년 동안 불도를 닦던 중 칭병(稱病)하고 있을 때, 헤어졌던 두 도우(道友) 영희, 영조가 찾아오매 각기 서로 법력을 겨루어 보기로 하였다.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 천정에 매달고 막대기로 쳐서 법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두 도우가 막대기로 치매 병과 물이 함께 깨어져 쏟아졌지만, 부설이 치는 병은 깨어졌으나 그 안의 물은 응고괸 상태로 공중에 달려 있었다. 이를 보고 부설거사(浮雪居士)가 말하기를 "병(甁)은 육신이요, 떨어지지 않는 물은 진성(眞性)이다.  눈에 보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거 없고, 귀에 듣는 소리가 없으니 시비(是非)가 끊이는구나.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버리니 오직 마음의 부처를 보며 스스로 귀의하노라" 하는 게송을 남기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자녀도 그 자리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수도를 시작하여 성불(成佛)하였고, 부인 묘화는 그 후 110세를 살다가 죽기 전에 사재를 털어 사원(寺院)을 지어 절 이름을 '부설(浮雪)'이라 하고 암자 이름을 딸의 이름을 따서 명월암(月明庵)이라 하였다. 아들 등운(登雲)은 계룡산 연천봉 아래 등운암(登雲巖)을 짓고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浮雪傳 要旨

*. 선녀탕(仙女湯)
  명월암에서부터 자연보호헌장탑(해발 90m)까지는 2.2km로 계속 되는 내리막길이었지만 직소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은 부안댐으로 인하여 생긴 호수에는 산영(山影)이 잠겨 있고, 그 호수를 감돌고 에돌아 가는 길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거기서 직소폭포까지는 완만한 0.9km의 오름길로 자칫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왼쪽 계곡에 설악산 12선녀탕과 같은 '변산 선녀탕(仙女湯)이 있어 나무꾼과 선녀를 생각게 한다.
 만약 오늘날 어떤 총각이 있어 나무꾼과 같이 목욕하는 처녀의 옷을 숨겼다면 어떻게 될까. 나무꾼은 성추행범(性醜行犯)이요, 사슴은 공범자일 터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무례한 일을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나무꾼이 감춘 것은 옷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 올라갈 깃옷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몽고, 일본, 중국, 베트남, 보르네오 등의 나라에도 이야기의 일부가 약간씩은 다르지만 전하여 오고 있다. 우리의 고대소설 '콩쥐 팥쥐전'이 서양의 신 델릴라에서 유래 되듯이. 이렇게 나라와 나라의 작품이나 작가들의 영향관계를 연구하는 문학을 비교문학(比較文學)이라고 한다.

*. 직소폭포(直沼瀑布)

계곡을 왼쪽에 끼고 오르다 보니 나무 사이로 직소폭포가 멋있는 자태로 얼굴을 내민다. 그 전망대에 멋진 나무층계가 꼬불꼬불 내려가고 있어 거기로 내려가면 폭포 밑이겠지 하였더니 그 아래 전망대에서 길이 끊기고 만다.
아래 전망대에서는 직소폭포는 보이지 않고 반석 위를 굽이굽이 감돌아 그 아래 제2, 제3 폭포를 만들며 분옥담, 선녀탕 등의 9곡 암지까지 백천계곡으로 이어지며 변산 8경 중 제1경이라는 봉래 구곡(蓬萊九曲)의 일부를 보여 주고 있다. 
봉래구곡(蓬萊九曲)은 신선대의 계류가 대소(제1곡 )를 지나, 직소폭포(제2곡)를 흐른 물이 꺾이고 감돌아 반석위로 흐르는 물줄기를 이루며 다시 분옥담( 제3곡), 선녀탕(제4곡), 봉래곡제5곡을 거쳐 암지(제9곡)까지 흘러가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직소폭포(直沼瀑布, 해발 110m)와 그 중계 계곡의 선경을 보지 않고는 변산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직소폭포는 계류 폭포로 폭포가 갖추어야 할 산세, 절벽, 계곡 등의 제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직소폭포는 육중한 암벽과 단애 사이로 평상 시는 높이 30m로, 장마 때는 폭 50m나 쏟아져 내린다는 물이 그 아래에 실상용추라는 직경이 50m 정도의 소(沼)를 만들며 흘러간다.

그 직소폭포 옆에 '폭포의 형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폭포는 물이 거의 수직으로 흐르는 상태이며, 폭포의 낙하점에는 소용돌이와 떠도는 돌과 모래에 바위의 밑 부분이 깎여서 용소(龍沼)가 생깁니다. 이렇게 계속 깎이면 지면 위에 있는 단단한 바위가 허물어져 밑으로 떨어지게 되고 그 위에 새로운 폭포를 형성하여 폭포가 조금씩 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용소(龍沼)를 선녀가 목욕하고 용이 사는 곳으로 신성시 해왔습니다.

*. 재백이고개

 쇠사슬로 엮은 바위 징검다리를 지나, 바다 가운데의 죽도(竹島)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전남 고창을 바다 너머로 굽어보며 오르다 보니 관음봉을 바라다보고 있는 커다란 암반 위에 서게 되었다. 
재백이 고개였다. 거기서 오름길로 0.8km 지점에 관음봉 삼거리가 있는데 관음봉(424.5m)까지 0.9m로 세봉 3거리를 통하여 하산할 수도 있지만 그 길은 내소사를 생략하고 매표소로 내려가는 길이어서, 내소사를 향한다. 가장 후미라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그 관음봉3거리에서 마지막 오름 통나무 길을 오르니 바로 아래 내소사가 보인다.
산 위에서 멀리 보는 절처럼 멋진 경치가 또 있을까? 산에서 풍광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계곡과 산과 어울려 처마를 맞대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산사를 보는 순간, 우리는 가벼운 탄성과 함께 찾아 헤매던 고향을 바라보는 듯한 편안함과 정겨움을 맛보게 된다.

*. 내소사(來蘇寺)

오늘의 내소사 탐방은 일주문과 천왕문 중간쯤 되는 전나무 숲 터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600m에 150년 나이를 자랑하는 500여 구루의 전나무 숲 터널은 삼림욕이란 설명을 구태여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부터 속세의 티끌을 벗어버리고 떠나온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고려 시대에 변산은 국중지재부(國中之材府)라 불렸다.
숲이 깊고 산은 낮아서 궁실(宮室)을 짓거나 배를 만들 때 건축재와 주선지재(舟船之材)로 이곳 나무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변재(邊材)라고 하는 이 유명한 나무로 몽고가 고려를 침입한 뒤 일본 정벌을 위해서 전함을 만든 것도 이고장의 변재(邊材)였다.
이렇게 유명한 변산의 삼림이 6.25 동란 당시 공비소탕 작전으로 그 아깝게도 전부 불태워 버렸다니 골육상쟁(骨肉相爭)의 6.25의 비극은 죄 없는 삼림(森林)까지 망쳐 놓고 만 모양이다.
내소사(來蘇寺)는 선운사의 말사로 633년(선덕여왕 2) 혜구(惠丘) 스님이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한 절이다. 원래는 대소래사(大蘇來寺)와 소소래사(蘇來寺) 둘이었는데 대소래사는 임란 때 불타버리고 지금의 내소사인 소소래사만 남았다.
그런데 임란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나당연합군 합동 작전 시 부안 앞바다 석포리에 상륙하였을 때 이 절에 찾아와서 시주하였기 때문에 사액(寺額)을 내소사(來蘇寺)라 바꾸었다 하지만 이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일환으로 한 말이니 취할 바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면 소래사의 뜻은 무엇일까?
다시 살아날 '소(蘇)', 올 '내(來)'로 '태어나 찾아온다.'는 윤회사상에서 말하는 뜻이지만, 혜구 스님의 뜻은 '여기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다 소생(蘇生)하게 하여 주십시오.' 란다.


  이 절이 자랑하고 있는 보물로는 고려동종(제277호)과 법화경발본사경(제278호)이 있다.
  고려 동종(보물 제277호)은 종신에 삼존상이 양각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지만 그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봉래루(蓬萊樓)다.
절의 경내로 들어가는 문루에 해당하는 것이 내소사의 봉래루인데 그 중 1층에 해당하는 기둥을 받친 자연석 그대로의 주춧돌이 멋지다. 단청(丹靑)을 하지 않은 것도 고풍스런 맛을 더하여 주거니와, 생긴 그대로의 자연 주춧돌이 반듯하게 깎은 주춧돌보다 오히려 더욱 신선한 멋을 풍기고 있다.

  봉내루를 지나 내소사 경내에 들어 두 번째 계단 위 좌측에 수령 1천년이 넘는 나무는 입암마을의 할머니 당산나무다.
  호남, 영남에서는 마을 입구에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가 있다.
사당이 없는 곳에서는 한 쌍의 장승을 세우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데 그것을 한 쌍의 고목으로 대신하는 곳도 있다. 내소사 할아버지 당산 목은 매표소 입구 오른 쪽에 새끼를 두르고 있는 느티나무 고목이 그것이다.

법화경발본사경( 法華經拔本寫經,보물 제278)은 이 절을 찾는 부인네들은 꼭 보고 갈 일이다.

-조선조 태종 15년(1415)에 묘법연화경을 필사하여 7권 7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씨 부인(夫人)이란 분이 있어 죽은 남편 유근(柳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 많은 글자의 불경을 한 글자(一字)를 쓰고 한 번씩 절(一拜)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여 쓴 필사본이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이씨 부인의 남편이 살던 남성 공화국의 조선 시대의 남정네들을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때 모든 것을 지금은 여성들에게 빼앗기고 여성공화국이 되어 오히려 마누라의 잔소리에 시달리며 오늘을 사는 남정네이기에 하는 말이다.

*. 내소사 대웅전의 전설 

지금의 내소사 대웅보전(부물291호)은  조선조  때 세워진 것으로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交合)하여 만든 것이다. 그 런데 대웅전 천정에 그 교합이 어긋난 곳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어떠한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을까?

  -청민선사가 이 대웅전을 중건할 때였다. 목수는 3년 동안 말없이 나무만 깎고 있었다. 사미승(沙彌僧)이 있어 장난끼로 그 중 하나를 몰래 숨겨 놓았다. 목침을 다 깎은 목수는 깎은 목침 수가 부족한 것을 알고 이는 자기의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 하며 절을 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청민스님은 그 목침 한 토막은 이 절과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강행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우측 5출목 한 부분이 지금도 비어 있다.
그 미완성 공사는 대웅전 내부 중앙의 벽화에도 있다.
  -그렇게 지은 대웅보전 내부를 단청할 때였다. 화공이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단청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100일 동안은 아무도 이 안을 들여다 보지 말라" 고 당부를 했다. 인기척도 없이 먹을 것도 들이지 않고 계속되는 공사가 선우스님에게는 너무나 궁금하여서 99일이 되던 남몰래 살짝 문을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는 화공은 없고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하늘로 날아가더니 능가산 중턱에 앉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노스님이 암자를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 스님을 관음조(觀音鳥)의 화신이라 하였다. 이후에 그 암자 터는 복원되어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봉안하여 관음기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래서 대웅보전 안에 한 쌍을 그려져야 할 그림이 좌측 방향 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다. 이 새가 관음조요, 목수가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지금도 새벽녘마다 울고 간다 하였다.
대웅보전 안의 후불 벽화 백의관음보살좌상은 국내 제일로 크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정면 8짝의 연꽃과 국화로 화사한 꽃밭을 생각나게 하는 창살의 사방연속무늬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영원히 지지 않고 피어있는 하나의 꽃대궐은 문살을 넘어선 예술의 세계를 엿보는 것 같다. 이를 법당 안에서 보면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비치는 것이 학이 날개를 펴는 듯하다 한다. 이 대웅전은 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고, 장중함보다는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건물로 뒤로 관음봉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이 밖에도 ·내소사에는 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24),내소사 선실당과 요사(지방유형문화재 125) 등을 소장하고 있다.


 대웅전 섬돌에 앉아 보면 우측에 높이 3.46m의 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3층 고려 석탑이 서 있고 상하좌우 열십자로 난 돌길 너머에 소나무 한 그루가 굽으려 법당을 찾는 이를 공손히 맞고 있는데 그 뒤에 2층 봉래루가 문루로 서 있다.

*. 변산 8경
  내변산에 있는 4개의 매표소는 '000탐방지원센터'로 그 명칭부터가 다른 산들과 사뭇 다르다.
산은 평균 400m  내외이어서 정상을 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안내판에도 관음봉을 제외하고는 그 정상을 거쳐 가는 코스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도 폭포와 계곡과 산사 등을 탐방하는 것으로 종주를 그친다. 바닷가에 왔으니 회맛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주최측이 준비한 모양이다. 가장 맛있는 술이 공술이요, 감불청고소원(敢不請固所願)이 공으로 먹는 회다.
  변산에도 이 고장 분들이 자랑하는 8경이 있다는데 내변산에는 그 중 5개가 있다..
웅연조대雄淵釣臺(곰소 앞 웅연강에서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의 풍치).
직소폭포(直訴瀑布, 내변산의 옥녀담 계곡에 있는 높이 30m의 폭포).
소사모종(蘇寺暮鐘, 내소사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와 어우러지는 울창한 전나무숲의 경치).
월명무애(月明霧靄, 쌍선봉 중턱의 월명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안개 낀 아침 바다의 신비로움).
채석범주(採石帆柱, 채석강에 있는 층암절벽의 장관과 그 아래의 푸른 바다에 돛단배를 띄우고 노니는 선유).
지포신경(止浦神景, 지지포에서 쌍선봉까지 산봉우리의 진경),
개암고적(開岩古跡, 개암사와 우금산성·묘암골의 유서 깊은 유적지와 아름다운 경치).
서해낙조(西海落照월, 명암 뒤의 낙조대에서 황해 바다로 해가 지는 장엄한 장관)

*. 일산의 산악회들

일산에는 30여 개의 산악회가 있는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친목회 같은 산악회가 더 많았다.
말 그대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산악회였다.
우리가 함께 사는 동네 사람들과 좋아하는 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귀가 걱정이 없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산행이란 얼마나 행복한 여행인가.
오늘도 우리가 되어 함께 한 신도시산악회도 서로 친절하기가 가족이나 직장 등산모임 같았다.
 우리가 다녀온 내변산이 우리의 고향 부안(扶安)이라고, 내 고향에 왔으니 대접하고 싶다고, 내 고양에서 쓰고 싶다고 오늘도 두 분이 거금을 내어 죽도가 보이는 바닷가 변산 회집에서 뒤풀이를 하여 주었고, 운영진에서는 6월이 생신인 분을 가려 생일 축하 케이크로 축하하여 주는 등 다정하기가 형제자매와 같다.
  나는 산행을 이제 고만 접어야 할 나이에다가 사진 촬영까지 욕심하다 보니 오늘도 최후미로 다른 분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내소사에서는 해설 안내원까지 만나 그걸 들으며 녹음 하느라고 나 혼자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하였지만 내색도 하지 않고 이해하여 주던 우리들이 눈물겹게 고맙더라.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고장에서 산을 바라 사는 사람들이기에 더욱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