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청량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6. 6. 1/ 경북봉화 청량사/입석대-응진전-경일봉-청량사/고양시늘푸른산악회 따라) *. 청량산 12봉 ![]() 99법은 갑오경장 이후 신학문과 함께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역사가 앞서기를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으며, 동양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서적에도 구구법을 기재한 것이 보이는데 조섲조 선조 때를 살던 지성인 퇴계(退溪) 선생이 설마 99법을 몰랐을까? 그러나 퇴계 선생이 말하는 '청량산 6.6봉'은 육육이 36봉이 아니고 12봉이다. 도산12곡이 자연을 노래한 전6곡과 학문을 노래한 후6곡인 것과 같다. 그 12 기봉(奇峰)이란 장인봉(丈人峰,=의상봉,870.4m), 선학봉(仙鶴峰, 821m), 자란봉(紫鸞峰, 796m) 자소봉(紫宵峰=보살봉, 845m), 탁필봉(卓筆峰, 620m), 연적봉(硯滴峰, 850m), 연화봉(蓮花峰), 향로봉(香爐峰), 경일봉(擎日峰, 750m), 금탑봉(金塔峰, 620m), 축융봉(祝融峰, 845.2m) 12봉우리를 말한다. 이 12봉이 내청량사를 병풍처럼 빙둘러 바위로 솟아 둘러싸고 있다. 이 12봉우리는 하나하나가 연꽃잎이요, 청량사 터는 그 연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상 청량사는 길지(吉地) 중에 길지(吉地)라 한다. 청량산의 최고봉은 870.4m의 의상봉인데 이를 장인봉이라고도 하는 것은 모화사상주의자 주세붕이 이 봉을 중국 태산의 장악( 丈岳)을 본 뜬 것이라 하여 고친 이름으로 의상봉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산악인들의 주장이다. *. 선인 묵객들이 노닐던 청량사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야은 길재의 시조대로라면 '의구한 산천'은 청량산일 터인데 '간 데 없다'는 옛인걸은 누구 누구일까? 청량산에 전하는 전설에서만 찾아 보아도 신라 시대에 김생, 원효대사, 의상대사, 최치원이 있고, 고려시대에 공민왕, 조선 시대에 주세붕, 퇴계 이황 등이 있다. -이것은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청량사나, 원효가 파서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元曉井), 의상대사가 참선했다는 의상대, 김생이 10년 동안 수도하면서 금자(金字)로 불경을 썼다는 김생굴, 최치원이 바둑을 두었다는 고운대(孤雲臺)와 글 공부하다가 마셨다는 총명수(聰明水)와. 독서를 하였다는 풍혈대, 공민왕이 황건적을 피하여 이곳에 있을 때 쌓았다는 축륭산성(祝融山城)이 있기 때문이다. 청량산(淸凉山)은 돌산으로 청송의 주왕산(周王山), 영암의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3대 기악(奇岳)으로 꼽히는 산이다. 청량산에는 6·6봉이라는 12봉과 함께, 12대(臺), 8굴(窟), 4정(井)이 있으며 청량사, 외청량산, 유리보전, 청량정사(吾山堂), 산성, 오마도, 공민왕당 등이 있다. *. 청량산 8 기굴(奇窟) 8 기굴(奇窟)로는 김생굴(金生窟,청량정사 뒤 절벽 중간 ), 금강굴(金剛窟,금강대 뒤 절벽), 원효굴(元曉窟, 원효암 뒤), 의상굴(義湘窟, 의상암 뒤), 반야굴(般若窟, 위치 미상), 방장굴(方丈窟, 위치 미상), 고운굴(孤雲窟=풍혈대), 한생굴(한生窟, 산성 건너 편)이 있다. *. 청량산 4정(四井) 이 산에는 청량산 4정(井)이라 하여 총명수(聰明水, 어풍대 상류 요초대), 청량약수(=산성약수, 산성입구), 감로수(=원효정, 응진전 옛암자 뒤), 김생폭(=김생굴)이라는 샘물이 있다. 그 중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총명하여 졌다고 해서 총명수라하는 곳이 있는데 오늘날은 세상이 혼탁해져인가 총명수는 마실 수 없는 흐린 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인들의 청량산 예찬 청량산은 낙동정맥(태백산)의 줄기 중앙에 있는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부르며 예찬한 시인 묵객들이 많았다. 이성(二聖) 사현(四賢)이 노닐다 간 곳이 청량산이다. 원효 대사와 의상대사가 이성(二聖)이요, 김생(金生), 최치원(崔致遠), 요극일(姚克一), 영랑(永郞)이 사현(四賢)이라 하였다. -해동 여러 산 중에 웅장하기는 백두산('頭')이 흘러내려온('流')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금강산이며, 명승지로 기이하기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장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여서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 이 산은 둘레가 백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서 그림같은 풍경이어서 참으로 조물주의 신기를 감탄할 만한 곳이다. 청량산은 단정, 엄숙하고 시원하고 굳세어서 비록 작기는 하지만 없신여기지 못하는 산이다. ~산봉우리를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에게 힘이 솟고 폭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이 많은 자가 청렴해 질 것이다. -주세붕 '청산산록(淸凉山錄)'에서 -안동 청량산은 태백산맥이 들에 내렸다가 예안(禮安) 강가에서 우뚝하게 맺힌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묏부리 두어 송이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에서 석벽이 둘러 있고 수 만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도'에서 -신선이 사는 청량산은 안개 노을이 옥처럼 아름답게 솟아 있는 산이다 -퇴계 이황 백구야 헌사하랴만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 말아 어주자 알까하노라 -퇴계 이황 -청량산 육육봉을 우리 선조 장구쇠라. 추로지향 명승지에 주부자의 무이(武夷)로다. 일월산이 주산이오 낙동강이 홍대로다. 태백산이 공읍세요 영지산이 안대로다. -중략- 상빙우설 늠름 중의 보만절은 네가 좋다. 이 같은 좋은 경을 한 번 보고 다시 말냐. 동풍이월 연녹수와 녹음방초 승화시와 화국단풍 경감시와 한천설월 교결시에 어와 벗님네야 다시와 볼가 하노라. -청량산수가(작자연대 미상 한글필사본 가사) *. 내청량사와 외 청량사 ![]() 산악회를 따라 청량산에 와서 하청량산에서 시작되는 의상봉을 향하는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그분들의 하산 길인 입석대를 들머리로 하여 외청량사를 향하여 오르고 있다. 30도를 오르내리는 오뉴월의 더위에 죽을 힘을 다해서 따라 가기도 버거운데다가, 그분들은 전문적인 젊은 산꾼들이어서 절보다 산에 더 관심이 많아서 필경은 청량사를 건성 보고 오거나 아니면 못보고 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의 신록으로 가득한 산을 휘파람새 소리 들으며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산을 나 홀로 오르고 있다. 오늘 산행에서의 주 목적은 청량산과 청량사에 묻힌 전설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청량산을 다녀 가면서 내, 외청량사라는 말에 외청련사를 내가 못보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리둥절 하였었다. 청량사는 연화봉(蓮花峰) 기슭의 내청량사와, 금탑봉(金塔峰) 아래의 외청량사 둘로 나뉜다. 그 둘이 한 울타리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외로 구분하고 있지만 법당이 있는 내청량사가 본전(本殿)이고, 응진전(應眞殿)이 있는 외청량사는 이에 따른 당우(堂宇)라고 보면 된다. *. 동풍석(動風石, 건덜바위) 전설 입석대(立石臺)란 청량산휴게소를 가기 15분 전 거리에 있는 낙동강 지류의 큼직한 삼각형의 바위로 거기서 입석대까지는 완만한 오름길로 응진전을 1.1km 앞두고 있다. 길은 완만한 오름길로 청량사와 김생굴의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부터는 통나무 계단이 시작되더니 그 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1전망대가 있어 낙동강서 육각정을 지나 쿨티재로 향하여 꼬불꼬불 오르는 길이 멋지다. ![]() 산사(山寺)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만 한여름의 무성한 초록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응진전은 커다란 절벽 박위를 뒤에 두고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서 축융봉을 바라보고 있는 시원한 전망이라서 마치 관악산 연주암을 예서 다시 보는듯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 ![]() -옛날 한 스님이 있어 절터를 찾아 전국을 헤매어 다니다가 청량산 금탑봉 중턱에 아래에 명당의 절터를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의 걱정은 절터 뒤 바위 위에 건덜건덜 흔들리는 바위가 있어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힘이 세기로 유명한 이 스님이 올라가서 절벽 밑으로 바위를 밀어 굴려 버리고 다음날 절터에 가보았더니 분명 어제 밀어 굴려버린 바위가 제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마니를 깔고 돌을 끌어올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도깨비의 짓이라 하였지만 스님은 절을 세우지 말라는 부처님 계시로 생각하고 절을 짓지 않았다. 이곳에 의상대사가 건들바위가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고 지은 절이 응진전이라는 것이다. 그후사람들은 이 바위를 건들바위 또는 동풍석(動風石)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응진전에서는 또 하나 자세히 볼 바위가 있다. 웅진전 좌측에 있는 이 바위는 부처님의 발모양을 닮았다 해서 불족암(佛足岩)이라 한다. *. 공민왕의 전설 ![]() 응진(應眞)이란 '아라한'이니, '아라한(阿羅漢')을 흔히들 줄여서 '나한'이라고 하는 부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응진전(應眞殿)이란 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곳이다. 그래서 예날에는 나한전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응진전에서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이 나한들 하나하나는 노국 공주와 시녀들이 깎았으며 그 중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형상한 상이 있다고도 한다. ![]() ![]() 출처: 청량상 청량사 김태환 저서에서 응진전에서 만난 스님께 축융산이 어딘가 물었더니 말없이 말없이 손으로 가리킨다. 그 스님의 손끝 따라 눈을 주니 맞은편 산 축융산이다. 축융산은 청량산과 청량사에서 외따로 있는 산이라서 대개는 못가보고 마는 곳이지만 거기 가보면 시대를 초월하여 고려말 공민왕(恭愍王)과 노국 공주(魯國公主)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량산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인 청량산 휴게소에서 약 1시간 정도 오르면 우뚝 솟은 봉우리 충융봉(845.2m, 주세붕이 중국의 荊山에서 따온 것)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난 와서 은신한 쌓았다고 하는 청량산성이 있고 그 아래 공민왕당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 1362년 10월 홍건적이 고려에 2번째로 침입하자 노국공주와 함께 청량산을 향할 때였다. 낙동강 나분들(廣石)이란 개울을 거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었다. 왕은 말을 타고, 노국공주와 시녀들은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의 등을 딛고 건넜다는데 이 일이 '놋다리밟기'라는 민속놀이가 되어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그때 공민왕이 다섯필의 말을 한꺼번에 몰고 갔다는 산 능선 주위의 40여리 산길이 오마도(五馬道)요 그 대(臺)가 오마대(五馬臺)다. 그때 왕이 거처하던 곳으로 지금은 조그마한 공민왕당(恭愍王堂)으로 남아 있는데 영정은 도난 당하고, 자금은 공민왕의 신위(神位)와 용(龍) 그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공민돵은 이 청량산에서 3개월 동안 피해 있었다 한다. *. 사형장 '밀성대(密城臺)' 전설 청량산성은 둘레가 1,350척(16km)이고 안에 우물 7개 소와 시내 2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여 없어졌다. 그 남 쪽에 궁전 옛터가 있고 그 밑으로는 천인절벽인데 그 절벽 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청량산유록(朴琮1735~1793)에 전하여 오고 있다. -청량산 남쪽 고개에 궁전 옛터가 있고 그 밑은 천 길 절벽으로 고려왕인 피난 왔을 때 죽여야 할 죄인이 있으면 처형하지 않고 이 절벽 아래에 밀거나 던졌으므로 그 아래에는 백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전하여 온다. 그래서인가. 날씨가 궂은 날이면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난다. 그 대(臺)의 이름이 밀성대(密城臺, 640m))인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城)'에서 '밀'(密)어서 죽인 '대(臺)'라는 말을 한자를 빌어 밀성대(密城臺)라고 차자(借字) 한 것 같다. *.풍혈대(風穴臺) ![]() 여기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바둑을 두었다는 곳으로 일명 독서대라고도 하는 곳이다. *. 청량산 12 기대(奇臺) 대(臺)란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흙이나 돌로 높이 쌓은 것을 말한다. 자연으로 된 그 대가 청량산에는 12대나 된다. 어풍대(御風臺), 밀성대(密城帶, 축융산성의 공민왕, 일명 사형대), 풍혈대((風穴臺, =최치원의 독서대), 학소대(鶴巢臺, 충융봉 서쪽 낙동강 변), 금강대(金剛臺, 장인봉 서쪽 낙동강 변), 원효대(원효봉 앞), 치원대(致遠臺, 고운대라고도 하며,자소봉이 9층 석탑으로 보이는 곳), 반야대(般若臺, 치원대 옆), 만월대(滿月臺, 자소봉 아래), 자비대(慈悲臺,안중암 앞), 청풍대(淸風臺, 자소봉 아래, 4~5인이 앉을 만함), 송풍대(松風臺), 의상대(義相臺)가 그것이다, 이 대들은 우리의 옛성현과 연관된 대가 많았다. 최치원의 유적으로 독서대(풍혈대), 치원대, 난가대가 있고, 원효의 원효대, 공민왕의 밀성대 주세붕의 경유대(景遊臺)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 청량사의 최고의 절승의 전경을 청량산과 아울러 가장 잘 음미할 수 있는 대(臺) 중의 대(臺)가 어풍대(御風臺)다. 어풍대에서 바라보면 청량산 12봉은 연꽃 잎이요, 청량사는 그 꽃 가운데에 있는 꽃술이다. 그 어풍대는 크게 말하여 치원대, 자하대, 요초대, 경유대를 아우르는 곳이니 여기서는 서둘러 지나치지 말 일이다. 어풍대는 청량사 가는 길에 있는 총명수를 조금지나서 있다. *. 총명수(聰明水) 전설 ![]() - 총명수는 층암절벽 틈 사이에서 솟아나는 천연수로 큰 가뭄에도 물의 양은 일정하고 청결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말기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청량산에 들러 이 물을 마시면 정신이 더욱 맑아지고 총명하기가 배가(倍加)하여졌다고 하여 총명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과 곳이 다를 수가 있는가. 물 위에는 이물질이 떠 있고, 물은 썩어가는 듯하여 마시기는 고사하고 손을 담가 보기도 싫은 물이니 설명을 거듭 읽는 내가 오히려 고운선생께 부끄럽기 짝이 없어진다. 총명이란 무슨 뜻인가? 듣고 본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을 총명이라 한다. 그 힘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듣고 본 것을 오래 기억하려는 평소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다. 귀밝을 총(聰), 밝을 명(明)이라는 한자 그대로 누가 말하거든 자세히 듣고 되물어 두번 말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경일봉(擎日峰, 750m) 이정표가 0.1km의 김생굴을 갈 것인가? 아니면 0.7km의 경일봉으로 갈 것인가를 묻기에 경일봉(擎日峰)을 향하여 가고 있다. - 자소봉(紫宵峰=보살봉, 845m) 서남쪽에 있는 이 봉은 유리보전 앞 5 층석탑이 있는 연대(蓮臺)에서 춘분과 추분에 해 뜨는 것을 보면, 경일봉 정상의 한 가운데서 뜨기 때문에 동방에 해가 떠서 빛난다(寅賓旭日)의 뜻을 취하여 떠받들 '경(擎)' 해 '일(日)' 경일봉(擎日峰)이라 한 것이다. 이 산의 봉과 대의 이름을 유교식으로 명명한 주세붕의 생각이었다. 경일봉을 거의 다 왔을 지점에 두 갈래 길이 있다. 급히 매표소에서 구해온 팜플랫을 찾으니 아쁠싸 어디다 떨구 왔는지 없다. 게다가 이정표도 없었고 등산 내내 나 홀로라서 물어볼 이도 없다. 산악회에서 나누어 준 지도는 자세하지가 않는데다가 언뜻언뜻 보이는 저 산넘어 멋진 봉우리는 까마득하다. 나는 경일봉을 지나 자소봉, 보살봉으로 해서 김생굴이 보고 싶은데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한다? 왼쪽은 하산길 같아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큰 무덤이 나오고, 멋진 2단 층계가 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더니 봉분을 잃어버린 무덤까지 왔다. 길은 평탄한 능선길로 시간도 넉넉하였지만 ![]() ![]() 저 멋진 봉우리들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발길을 돌렸다. 단체로 와서 혼자 다른 길을 자청하여 택하고 다니다가 길을 잃고 헤멘다는 것은 다른 분들께 폐가 되는 일이고 도리가 아니라 삼가해서였다. 아까 갈림길에서 오른 능선을 직진하니 육산 능선에 약간의 평범한 언덕 같은 곳에 정상표지석이 서있다. 그곳이 싱겁게도 경일봉이었다. 그리곤 계속되는 원점 하산길이었다. 아아, 아까워라. 거기에 이정표가 있더라면 평생에 다시 또 올 수 없는 청량산의 탁립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을 1시간 내에 갈 수 있었는데-. *. 김생굴(金生窟) ![]() ![]() ![]() 김생굴은 경일봉의 중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월형(半月型)의 자연암굴로서 수십명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인데 맑은 날인데 바위 위에서 낙수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비오는 날이면 폭포가 되어 물이 떨어진다는 김생폭포였다. 나는 서예에 문외한이라서 역사상 명필가로 알고 있는 분은 몇 분밖에 없다. 한석봉, 추사 김정희, 이완용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일중 김충현 정도지만, 청량산에 와서 김생을 만났다. 김생은 통일신라시대를 살다 간 분으로 명은 필이요 별명은 구(玖)다. 예,행,초서(隸行草書)에 두루 능통하여 송나라에까지 서도 왕희지 버금가는 명필로 해동의 서성(海東書聖)으로 알려진 분이다. -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입신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금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 하였다. -삼국사기(권48제8 김생조) -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를 받았으며 이규보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김생이 두타행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金生寺)라 이름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그 김생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신라의 명필 김생이 이 김생굴에서 9년간 글씨 공부를 마치고 하산하려던 어느날 밤 길쌈을 수련하러 왔다는 젊은 여인을과 굴속에서 불을 끄고 솜씨를 겨루었다. 겨루기를 마치고 그 여인이 김생의 글씨를 보더니 미흡하다고 힐책한 후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선생이 크게 깨닫고 1년을 더 수련하여 10년을 마친 후 천하명필가가 되었다. 김생의 글씨를 보고 중국 원 나라 조맹부도 "신라 김생의 글씨는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이라도 이를 능하하지 못한다." 라고 부러워하던 서도가였다. 고려인들도 김생을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 하였고, 이규보도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 '라 하던 서도가여서 당시에 사신들은 중국에 갈 때는 김생의 글을 보배 같이 여겨 선물로 가지고 갈 정도였다. *. 청량사 유리보전 ![]() 드디어 내청량사 경내로 들어섰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2층의 시원한 범종각인데 그 옆에 약수터가 있고 그 밑에 기념품 가개가 있다. 여기서 '청량산 청량사'(김태환 저) 책 한권을 샀다. 이 글을 쓰는데 많은 자료를 참고로 한 책이다. 한 사람의 노력이 이렇게 산의 이모저모 절의 구석 구석을 찾아 고증하고 정리하였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청량사(內廳凉寺)란 신라 문무왕 3년에 원효대사가 연화봉 기슭에 창건한 절로, 법당 인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제 47호)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연화봉 기슭에 있다하여 연대사 蓮臺寺라 하였는데 번성할 때에는 27개의 절과 암자를 관리하였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 그 이름을 주세붕이 지금의 청량사라 고친 것이다. ![]() ![]() 내청량사의 유리보전이(유璃寶殿)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란 뜻이어서 여기서 정성으로 기원하면 병을 치료하고 장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소원을 성취에 영험이 있다는 유명한 도량이라 한다. 이곳에서 반드시 유념해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민왕의 친필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제47호)이라는 현판이고, 또 하나는 유리보전에 모신 지장보살, 약사여래, 문수보살 삼 불상 중에 중앙의 약사여래 금불상이다. 금칠을 해 놓아 금불로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의 종이를 녹여만든 귀중한 지불(紙佛)이다. *. 삼각우송(三角牛松) 전설 ![]() -명호읍 북골리에 남민(南敏)이라는 농삿군의 집에 뿔이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크기 시작한 이 송아지는 몇 달 사이에 낙타만큼이나 자랐지만 어찌나 사납고 힘이 세던지 농사 일에 부려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연대사(蓮臺寺, 후에 청량사) 주지 스님이 찾아와 소를 시주할 것을 청하메 기꺼이 주고 말았다. 스님이 이 소를 몰고와 암자를 짓게 하였더니 의외로 이 소는 순순히 따르고 힘이 세어서 돌과 재목을 나르며 대역사를 쉽게 끝내게 하더니 소가 죽어 버려서 절 앞에 묻었다. 그 소가 죽은 자리에 소의 뿔처럼 가지 셋인 소나무가 돋아나서 세인들이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하였다. *. 이규보의 청량산 사랑 고려 시대 대문장가 이규보는 걸출한 시호(詩豪)로서 그의 호탕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하던 시인이다. 도연명의 영향을 받다가 시,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자칭하면서 독자적인 시 세계를 이룩한 분이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친구도, 집도 돌아보지 않고 청량산에 들어가 오직 시부(詩賦)를 일삼고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호하며 살았다. 젊었을 때 백운암에서 독서를 하며 '백운암기'를 지었고 만년에는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 *. 퇴계와 청량산 ![]() 그는 청량산을 내 집같은 산(吾家山)이라 부를 정도여서 후인들이 공부하던 곳에 청량정사라는 건물을 지어주었는데 지금 보니 폐가 같이 남아 있다. 그때 지은 청량산에 대한 시편이 51편이요, '청량산록발(淸凉山錄跋)'이라는 글도 썼다. 중종, 명종, 선조 역대 왕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명종은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는 퇴계를 그리워 하며 거소인 도산의 경치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둘러두고 바라 보았다고 한다. 그의 시조 청량산가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전국 학생들이 청량산을 알고 그리워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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