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6. 22/옛골-이수봉-마왕굴-혈읍재-매봉-매바위-돌문바위-옥녀봉-화물터미널/나와 일만과 우리 아내 남편과 함께)
*. 청계산의 유래 청계산(淸溪山)은 이름 그대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란 말이다. 원터골, 약초샘골, 어둔골, 두레이골 등 작은 산에 맑은 계곡곡이 많아서 그리 불렀던 모양이다. 곡이 많아 그리 불렀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과천 관아(果川官衙)를 줌심으로 하여 청계산의 진산(鎭山)을 관악산으로 보고 청계산은 좌청룡(左靑龍)이라 청룡산(靑龍山)이라 하고, 수리산은 우백호(右白虎)의 백호산(白虎山)이라 하였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하네.
청룡산이라 하던 예는 위 시를 지은 고려 말 목은 이색(李穡)의 시에 보인다 하고, 청계사란 이름은 고산자 김정호의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 대동여지도(1861년, 철종12년)에 보인다.
*. 미륵당 전설 지난 일요일에는 교단작가회 회원들과 청계산을 갔었다. 일행 중 산행을 버거워 하는 분들이 있어 그땐 원터 버스정류소에서 내려서 원터골을 끼고 매봉을 가다가 옛골로 내려와서 두부로 뒤풀이를 하다 왔다. 가다가 돌아오는 곳이 정상이라고 위로하면서. 그때 보던 청계산이 하도 좋아 다시 가고자 벼르다가 장마가 잠깐 빗겨 간 사이 오늘은 나 홀로 청계산에 왔다. 청계산 이곳 저곳에 얽힌 전설을 찾고 싶어서다. 양재 역에서 청계산 입구 행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가 원터 버스정류소에서 내리면 경부고속 국도 굴다리 들어가기 전에 원지동 미륵당(서울유형문화재 제93호)이 있다. 마당에 마모된 작은 3층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사지(寺址)로 추정하는 곳이다. 이 탑은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된 고려 말서 조선 초 사이의 석탑 같다. 미륵당이라는 현판을 달은 사당 같은 작은 이 건물은 굳게 닫혀 있지만, 내부에는 흰색의 2.25m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다. 이 미륵불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이 토속적인 석불에게 이곳 주민들이 1년에 한 번씩 동제(洞祭)를 올리는데 이 석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일제 강점기에 이 불상에 치성을 드리면 배꼽에서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길흉화복을 계시하여 주곤 했다. 다. 이런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이를 탐하여 마차를 동원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가 실패하자, 일본 경찰은 1926년 경 불상의 배꼽을 정으로 쪼아내는 바람에 그 영험한 능력을 지금은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래 그런가. 주위에 느티나무 고목 한 쌍이 장승처럼 서 있어 장승 목이 아닌가 추정케 한다.
*. 옛골 오름길 . 오늘은 원터골에서 네 정거장 더 와 있는 옛골을 들머리로 등산을 시작한다. 청계산 들머리에 서서, 상가가 밀집하여 있는 어둔골로 갈까, 능선을 탈까 망설이고 있는데 다른 등산객들은 모두 능선 길로 들어선 다. 이런 때는 그들을 따라 가는 것 이 상책이다. 안내도에는 두 코스가 있다. 등산1코스는 어둔골로 이수봉을 오르는 3km의 길이요, 등산2 코스는 3.2km의 능선(목배등,철쭉능선) 길이다.
길은 완만한 황톳길로 젊은 가족이 함께 하여도 좋은 길인데, 어제 종일 내리던 장맛비에 등산하기에는 여름 오뉴월 날씨인데도 쾌적하다. 나뭇잎이 모자처럼 내내 햇볕을 막아 주는 길도 있었고, 도중 도중 이 산의 나무로 만들었다는 의자가 있는 쉼터와 통나무층계가 있었다. 나무뿌리가 층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환상적인 조용한 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가고 있다. 쉼터 중 가장 멋있는 이름의 쉼터는 봉오재에서 3.5km, 이수봉을 400m 앞두고 있는 구름다리쉼터다. '구름다리'란 한길이나 철길 등을 건너질러 공중으로 놓은 다리인데 어디에 그런 다리가 있는가 하였더니 이수봉을 오르는 길목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을 막아서는 철조망 속의 봉이 이수봉이라고 좌우로 돌아가라는데 나무숲에 가려 속은 보이지 않는데 경고판이 자못 위협 적이다. -이 지역은 군의 중요한 시설이므로 사전 승인 없이 출입, 접근, 배회, 촬영, 묘사를 금하며 위반할 시는 관계법에 의거 조치함 탑돌이나 하며 이수봉을 지나치나보다 하였는데 뜻밖에 이수봉 정상이 나타난다. 그럼 표지 그림이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헷갈린다.
*. 이수봉(貳壽峰) 전설 이수봉(546m) 정상석의 비명에 이수봉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 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니까 이 산으로 인연하여 두(貳) 번이나, 목숨(壽)을 건졌다는 뜻인데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어떤 사화(士禍)이며 정여창(鄭汝昌)은 어떤 분이신가? -조선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찬위(簒位)할 때 이를 도와 막강한 세력을 잡은 파에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강희맹 등 훈구파(勳舊派)가 있었다. 이에 맞서던 파로 전원에 묻혀 유학을 공부하면서 도학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던 사림파(士林派)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 유신 길재의 제자들로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 김종직과 김굉필, 정여창, 조위, 김일손, 유호인 등이다. 이 두 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사림파는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였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며 서로 앙앙불락하였다. 조선 연산군 4년에 훈구파 유자광이 성종실록에 실린 김종직이 쓴 사초의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트집 잡아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이 글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은근
-이수봉 원경 히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은 평시에 선왕인 성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림파를 좋지 않게 보던 참이라, 이는 김종직( 金宗直)이 선동한 것이라는 훈구파의 말에 격분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이에 연루되어 그의 문하 정여창,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배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것이 4대 사화의 처음인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런 사화로 남편이 희생당하자 하가나서 그런 공부, 그런 책은 필요없다고 남편이 지은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는 정여창 부인의 이야기였다.
*. 마왕굴과 금정수 전설 헬기장 같은 널찍한 안부의 이정표를 보니 직진하여 올라가면 석기봉이요, 좌측은 혈읍재 가는 길이다. 이 정표에 이 산의 최고봉인 청계산 만경대(618m)라 하지 않고 석기봉(608.2m) 가는 길이라 한 것을 보면, 만경대에는 군이나 통신 시설이 있어 못 올라간다는 말일 것이고, 대신 철조망을 사이 두고 있는 봉이 석기봉일 것이다. 그래서 좌측의 혈읍재로 내려가고 있다. 석기봉을 왼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전설이 깃든 마왕굴이 있다. 마왕 굴은 커다란 두 개의 굴이요, 오른 쪽 굴에는 맑은 샘이 흘러내리고 있어 수통 둘에 가득 채웠다. 집에 가지고 가서 냉장고에 차게 두었다가 청계산을 생각하며 두고두고 마시고 싶어서다. 이 근처에 약수터가 또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여기가 금정수(金井水) 같다. 금정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 등의 우국절사들이 청계사와 망경대, 금정수(金井水)에 숨어들어 고려의 국권회복을 꾀했다(-참길 향토사 연구회 전고).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여창이 스승이 부관참시 당하였다는 소식에 피(血)눈물을 흘리며(泣) 넘었다는 혈읍재(血泣峙)를 지나 망경대 바로 밑에 샘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연산군 시대에 정여창이 은거했다는 곳이다. 이 약수는 정여창이 사사(賜死)되자 핏빛으로 변했다가 이내 금빛으로 변하였다 한다.
-마왕굴 안내 -이곳은 1390년 대 고려말 충신 송산(松山) 조견 선생이 흘러나오는 샘물로 갈증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다. 고려가 망하자 두류산(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다. 이는 나라가 망했어도 죽지 않음이 개(犬)가 주인을 따른다(從)는 뜻을 취해서다. 이태조가 공의 절개를 찬양하여 호조판서를 명하였으나 사양하였고, 태조는 그의 의를 기려 그의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사로 찾아와서 도와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절의를 지키고 수락산 송산마을로 옮겨 은거하다 생애를 마쳤다. - (마왕굴 안내 표지 '송산 조견 선생과 마왕굴') 그런데 조윤(趙胤)이 개국공신으로 나오는 상반된 문헌도 있다. 혹시나 당시의 변절자를 절의자로 바꾸어 왜곡하게 기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나 않은가 해서 걱정스럽다. 다음은 이런 의혹의 근거가 되는 문헌의 자료다.-고견의 이름 초명은 윤(趙胤), 호는 송산(松山), 영의정 부사 준(浚)의 아우다. 어려서 중이 되어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 넘어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에 이르렀다. 형 준(浚)과 함께 이성계 추대에 가담하여 개국공신 2등으로 평양군에 봉하여 졌다. 그 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조선 초 국가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쳐서 평성군, 평성부원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한국인명사전' 한국인명사전편찬실편, 1967년신구문화사 865쪽) 이와 같은 글은 국사대백과사전(유홍렬 감수, 동아문화사 1036쪽 '보견)에도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조선 개국 초 이태조의 반역을 욕하면서 분연히 송도를 떠나 입산하여 송악을 바라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움막을 치고 칩거하였던 곳으로, 그곳에서 기와등의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는 식으로 전하여 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빠른 시일 내에 시비를 가려 바로 잡을 일이다.
*. 망경대(望京臺) 전설 -정여창이 무오사화를 피하여 이 산에 숨어들었을 때 스승인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피(血)눈물을 흘리면서 울면서(泣) 넘었다는 혈읍재(490m, 血泣재)를 지나니 비로소 망경대가 머리에 멋진 통신시설을 이고 서 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란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죽었을 때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자르는 극형 중에 극형이다.
-청계산의 주봉 망경대(望京臺)의 옛 이름은, 하늘 아래 만(萬) 가지의 경승을 감상할 만한 터라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 유신들이 맥수지탄(麥秀之嘆)으로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여 망경대(望京臺)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수봉 건너편에 있는 국사봉(國思峰, 538m)에도 연관된다. -나라가 망하자 목은 이색(李穡) 같은 우국지사나 고려 유신들이 청계산에 은거하여 살 때 이 봉에 올라가서 옛 나라('國)를, 생각(思)'하였다 해서 국사봉(國思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이 지은 이 시조의 상징 의미는 다음과 같다. '白雪': 고려 유신들/ 구름: 조선에 충성하던 신흥 세력/ 매화: 고려 충신들/ 석양: 고려 멸망
매봉의 안부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매봉에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매봉(582.5m) 정상석이 깊이 있는 음각으로 서서 나를 맞는데, 그 뒷면에 청마 유치환의 시(詩)가 나의 호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상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 하노라 -행복
시인들이여, 독자가 없다고 외로워 말라. 이렇듯 중요한 고비마다 시(詩)는 아름다움을 우러르고 있는 법이니-.
매봉에서는 과천 쪽의 대공원과 경마장과 그 너머 관악산의 전망이 멋지다. 거기서 조금 내려와 있는 매바위(578m)에 한 젊은 여인이 산하를 굽어보고 있다. 오른쪽에 무성한 빌딩 숲이 분당이요, 왼쪽에 넓은 공터가 여의도비행장을 옮겨온 서울비행장(성남비행장)이다. 수많은 세대 중에서 잠깐이나마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그 여인과 나와의 인연인 모양이다. 그래서 처음 만나고 헤어지는 숱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단 한번만의 나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문자모양의 봉이 과천매봉
그런데 이 청계산에는 과천 쪽 절고개 아래의 매봉(368m)과 청계산의 매봉(583m)으로 똑 같은 이름이 둘이나 있다. 왜 매봉이라 했을까? 보통은 산의 봉의 모양이 매 같다 하여 매봉이라 하지만, 매가 머무를 수 있는 높은 곳이라 하여 매봉, 매바위라 한 것 같다. 매는 눈이 밝아 높은 곳에서 먹이를 발견하면 수직으로 직하하여 꿩 같은 새들을 잡아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매는 큰 독수리류를 제외한 소형 또는 중간형의 새(천연기념물 제323호)를 지칭한다. 거기서 다시 또 얼마를 내려오다 보니 돌문바위가 있다. 바위에 다른 바위가 기대어 서서 삼각형의 문을 만들고 있는 바위다. 그 옆에 이런 소개의 글이 있다. -돌문바위 속에서 청계산의 정기를 받아 가세요. 젊은 부부 한 쌍이 그 돌문바위를 세 번씩 드나들며 돌고 있다. 그들은 기(氣)를 받으며 무엇을 빌었을까. 기(氣)란 무엇인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인 기운을 말한다. 기(氣)는 생활 활동의 힘이요, 원기요, 정기, 생기, 기력을 말한다. 많이많이 받아 가시라.
*.충혼비 앞에서 그 매바위와 매봉 사이의 하산 길에 '청계산 충혼비'가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1982년 6월 1일 군작전 중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한 53인 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입니다.' →50m. 이곳은 저기 보이는 비행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우리의 영공(領空) 수호하다가 산화한 장소로 순직한 용사는 조종사인 공군 대령, 소령을 위시해서 공군이 4명, 육군 2명의 대위를 포함해서 49명의 육군인데 그 중에 일등병만도 44명이니, 살아있으면 지금 40 전의 나이라 얼마나 통탄한 일이던가. 그 슬픔을 비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忠魂의 숨소리
그대들의 흘린 뜨거운 피와 忠魂의 얼로 祖國은 살아 크게 숨쉬나니 그대들의 靈魂은 祖國의 山河에서 永遠히 살아 꽃 피리라. 그대들은 祖國을 사랑하고 또한 祖國은 그대들을 사랑하노니 거룩한 英靈들이여 祖國의 품속에 고이 잠드소서. -1985년 6월 1일 오수 2시 49분
*. 옥녀봉에서
통영의 사량섬 지리망산에도 '옥녀봉'이 있는데 옥녀의 친아버지가 딸을 범하려 하자 옥녀가 옥녀봉에서 몸을 던진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있던데, 여기에는 지명 유래담은 없는가 하는데 멋있는 통나무 팻말이 청계산 종주를 마치려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오래 걸으셨습니다. 옥녀봉이 보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판서 김노경(金魯敬)의 묘터가 있던 곳이 옥녀봉(375m)으로 이 일대를 공동묘지로 하려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지역이다. 옥녀란 어원의 유래는 없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하산길인데 팻말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황토맨발길'-맨발로 걸어보세요.
*. 산을 가꾸는 사람들 옥녀봉 가는 길에 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짙은 황적색 바탕에 흑자색의 반점이 있어서 호랑나비 무늬와 닮아서인가. 호랑나비가 즐겨 찾는다는 우리의 꽃 참나리다. 참나리를 보면 하나도 감춤 없이 나를 들어내는 솔직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정이 간다. 뒤로 사르르 말린 잎으로 멋을 부리면서 모가지를 길게 뽑고,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수줍은 듯이 머리를 땅을 향하여 숙이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듯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런 참나리 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 고장에 살면서 이 산을 가꾸고 있는 모양이다.
공중전화박스를 지나 곧바로 가라는 어느 산꾼의 말대로 그곳을 지나는 이 길은 깨끗하고 유난히 쉼터가 많고 이정표가 친절하다.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층계는 통나무 따로, 길 따로여서 허들 경기를 하듯 힘이 들었는데 이곳의 통나무 길은 매일 정성을 다하여 가꾸어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오색의 통나무 길은 비가 와서 흐르는 물길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만들어 놓으라니 만든 층계일 뿐이었다. 그러나 청계산에는 통나무 층계는 물론 물길까지 곱게 내어서 물길이 할퀴고 간 흔적이 전연없다. 떨어진 이정표 팻말도 그냥 두지 않고 끈으로 정성스럽게 묶어 놓았다. 쉼터 통나무 팻말에 이를 감사하는 글이 바로 내 마음을 읽은 이가 쓴 글 같다. - 청계산에 가면 '개나리골 삼림욕장'이 있다. 이곳은 입산료를 받는 국립공원이 아닌데도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관리가 정성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찾는 사람이 주인대접을 받는 것을 실감케 한다. 곳곳에 쉼터와 의자가 있는가 하면 '황토맨발 등산길' '임꺽정 길' 등 멋스런 이름이 팻말에 새겨 있다. 이 공원을 관리하는 구청직원은 분명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가 섬겨야 할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실천하는 진정한 공봉(公僕)이다. -배종대 고대 법대학장의 '동아일보 칼럼' 중에서
쉼터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시원한 '산바람 쉼터'가 있고, 거기 나이테가 있는 통나무 조각 팻말에 동요 '산바람 강바'람 가사가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산 위에서 부은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데요. ♫♩♪♬~
장마가 오다가 잠깐 빗겨 갔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한여름인데 바람 한 점 없다. 집에 있어도 무더운 날씨를 산행을 하였으니 얼마나 바람이 그립겠는가. 그윽한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휘파람새와 뜸뿍새의 소리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청계산 속에서 혼자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심(詩心)이 절로 동한다. 그 시심을 불태우며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옥녀봉에서 2,500m에 있는 양곡도매시장까지 하산 길로 행복했던 청계산의 하루의 여정을 접는다.
아, 淸溪山
온종일 淸溪山 품에서 하루를 낚았더니, 山은 내가 되고 나는 山이 되다.
하늘은 큰 湖水 나뭇잎이 그리는 바람은 魚信처럼 입질도 없다.
陵線에 오르니 시원히 열리는 全景 뒤돌아 본 貳壽峰, 望京臺, 매봉은 벌써 즐거운 追憶의 하나 하나가 되고 있구나.
또다른 내일도 부디 오늘처럼 山을 우러르며 貪하는 하루를 살고 지고.
|
2006-06-24 01:16:47, 조회 : 675, 추천 : 3 |
청계산(618m성남) 산행 Photo 에세이 (2006. 6. 22/옛골-이수봉-마왕굴-혈읍재-매봉-매바위-돌문바위-옥녀봉-화물터미널/나와 일만과 우리 아내 남편과 함께)
*. 청계산의 유래 청계산(淸溪山)은 이름 그대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란 말이다. 원터골, 약초샘골, 어둔골, 두레이골 등 작은 산에 계곡이 많다. 옛날에는 청계사(淸溪山)를 청룡산(靑龍山)이라고 불렀다. 과천관아의 진산을 관악산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청계산은 좌청룡(左靑龍)이라 청룡산(靑龍山)이요, 수리산은 우백호(右白虎)의 백호산(白虎山)이라 하였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하네. 청룡산이라 하던 예는 위 시를 지은 고려 말 목은 이색의 시에 보인다 하고, 청계사란 이름은 고산자 김정호의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 대동여지도(1861년, 철종12년)에 보인다.
*. 미륵당 전설 지난 일요일에는 교단작가회 회원들과 청계산을 갔었다. 일행 중 산행을 버거워 하는 분들이 있어 그땐 원터 버스정류소에서 내려서 원터골을 끼고 매봉을 가다가 옛골로 내려와서 두부로 뒤풀이를 하다 왔다. 가다가 돌아오는 곳이 정상이라고 위로하면서. 그때 보던 청계산이 하도 좋아 다시 가고자 벼르다가 장마가 잠깐 빗겨 간 사이 오늘은 나 홀로 청계산에 왔다. 청계산 이곳 저곳에 얽힌 전설을 찾고 싶어서다. 양재 역에서 청계산 입구 행 마을버스를 타고 가다가 원터 버스정류소에서 내리면 경부고속 국도 굴다리 들어가기 전에 원지동 미륵당(서울유형문화재 제93호)이 있다. 마당에 마모된 작은 3층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사지(寺址)로 추정하는 곳이다. 이 탑은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된 고려 말서 조선 초 사이의 석탑 같다. 미륵당이라는 현판을 달은 사당 같은 작은 이 건물은 굳게 닫혀 있지만, 내부에는 흰색의 2.25m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다. 이 미륵불은 원터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이 토속적인 석불에게 이곳 주민들이 1년에 한 번씩 동제(洞祭)를 올리는데 이 석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일제 강점기에 이 불상에 치성을 드리면 배꼽에서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길흉화복을 계시하여 주곤 했다. 이런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이를 탐하여 마차를 동원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가 실패하자, 일본 경찰은 1926년 경 불상의 배꼽을 정으로 쪼아내는 바람에 그 영험한 능력을 지금은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그래 그런가. 주위에 느티나무 고목 한 쌍이 장승처럼 서 있어 장승 목이 아닌가 추정케 한다.
*. 옛골 오름길 . 오늘은 원터골에서 네 정거장 더 와 있는 옛골을 들머리로 등산을 시작한다. 청계산 들머리에 서서, 상가가 밀집하여 있는 어둔골로 갈까, 능선을 탈까 망설이고 있는데 다른 등산객들은 모두 능선 길로 들어선다. 이런 때는 그들을 따라 가는 것 이 상책이다. 안내도에는 두 코스가 있다. 등산1코스는 어둔골로 이수봉을 오르는 3km의 길이요, 등산2 코스는 3.2km의 능선(목배등,철쭉능선)길이다.
길은 완만한 황톳길로 젊은 가족이 함께 하여도 좋은 길인데, 어제 종일 내리던 장맛비에 등산하기에는 여름 오뉴월 날씨인데도 쾌적하다. 나뭇잎이 모자처럼 내내 햇볕을 막아 주는 길도 있었고, 도중 도중 이 산의 나무로 만들었다는 의자가 있는 쉼터와 통나무층계가 있었다. 나무뿌리가 층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환상적인 조용한 길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가고 있다. 쉼터 중 가장 멋있는 이름의 쉼터는 봉오재에서 3.5km, 이수봉을 400m 앞두고 있는 구름다리쉼터다. '구름다리'란 한길이나 철길 등을 건너질러 공중으로 놓은 다리인데 어디에 그런 다리가 있는가 하였더니 이수봉을 오르는 길목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을 막아서는 철조망 속의 봉이 이수봉이라고 좌우로 돌아가라는데 나무숲에 가려 속은 보이지 않는데 경고판이 자못 위협적이다. -이 지역은 군의 중요한 시설이므로 사전 승인 없이 출입, 접근, 배회, 촬영, 묘사를 금하며 위반할 시는 관계법에 의거 조치함 탑돌이나 하며 이수봉을 지나치나보다 하였는데 뜻밖에 이수봉 정상이 나타난다. 그럼 표지 그림이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헷갈린다.
*. 이수봉(貳壽峰) 전설
이수봉(546m) 정상석의 비명에 이수봉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 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니까 이 산으로 인연하여 두(貳) 번이나, 목숨(壽)을 건졌다는 뜻인데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어떤 사화(士禍)이며 정여창(鄭汝昌)은 어떤 분이신가? -조선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찬위(簒位)할 때 이를 도와 막강한 세력을 잡은 파에 정인지, 신숙주, 최항, 권람, 강희맹 등 훈구파(勳舊派)가 있었다. 이에 맞서던 파로 전원에 묻혀 유학을 공부하면서 도학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던 사림파(士林派)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 유신 길재의 제자들로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 김종직과 김굉필, 정여창, 조위, 김일손, 유호인 등이다. 이 두 파들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사림파는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小人輩)라 하였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며 서로 앙앙불락하였다. 조선 연산군 4년에 훈구파 유자광이 성종실록에 실린 김종직이 쓴 사초의 <弔義帝文>이라는 글을 트집 잡아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이 글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은근
-이수봉 원경
히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은 평시에 선왕인 성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림파를 좋지 않게 보던 참이라, 이는 김종직( 金宗直)이 선동한 것이라는 훈구파의 말에 격분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이에 연루되어 그의 문하 정여창,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배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것이 4대 사화의 처음인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런 사화로 남편이 희생당하자 하가나서 그런 공부, 그런 책은 필요없다고 남편이 지은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는 정여창 부인의 이야기였다.
*. 마왕굴과 금정수 전설 헬기장 같은 널찍한 안부의 이정표를 보니 직진하여 올라가면 석기봉이요, 좌측은 혈읍재 가는 길이다. 이 정표에 이 산의 최고봉인 청계산 만경대(618m)라 하지 않고 석기봉(608.2m) 가는 길이라 한 것을 보면, 만경대에는 군이나 통신 시설이 있어 못 올라간다는 말일 것이고, 대신 철조망을 사이 두고 있는 봉이 석기봉일 것이다. 그래서 좌측의 혈읍재로 내려가고 있다. 석기봉을 왼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전설이 깃든 마왕굴이 있다. 마왕 굴은 커다란 두 개의 굴이요, 오른 쪽 굴에는 맑은 샘이 흘러내리고 있어 수통 둘에 가득 채웠다. 집에 가지고 가서 냉장고에 차게 두었다가 청계산을 생각하며 두고두고 마시고 싶어서다. 이 근처에 약수터가 또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여기가 금정수(金井水) 같다. 금정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분개한 정공산, 이색, 조윤(?), 변계량 등의 우국절사들이 청계사와 망경대, 금정수(金井水)에 숨어들어 고려의 국권회복을 꾀했다(-참길 향토사 연구회 전고).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여창이 스승이 부관참시 당하였다는 소식에 피(血)눈물을 흘리며(泣) 넘었다는 혈읍재(血泣峙)를 지나 망경대 바로 밑에 샘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연산군 시대에 정여창이 은거했다는 곳이다. 이 약수는 정여창이 사사(賜死)되자 핏빛으로 변했다가 이내 금빛으로 변하였다 한다.
-마왕굴 안내
-이곳은 1390년 대 고려말 충신 송산(松山) 조견 선생이 흘러나오는 샘물로 갈증을 풀고 쉬어가던 곳이다. 고려가 망하자 두류산(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다. 이는 나라가 망했어도 죽지 않음이 개(犬)가 주인을 따른다(從)는 뜻을 취해서다. 이태조가 공의 절개를 찬양하여 호조판서를 명하였으나 사양하였고, 태조는 그의 의를 기려 그의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사로 찾아와서 도와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절의를 지키고 수락산 송산마을로 옮겨 은거하다 생애를 마쳤다. - (마왕굴 안내 표지 '송산 조견 선생과 마왕굴') 그런데 조윤(趙胤)이 개국공신으로 나오는 상반된 문헌도 있다. 혹시나 당시의 변절자를 절의자로 바꾸어 왜곡하게 기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나 않은가 해서 걱정스럽다. 다음은 이런 의혹의 근거가 되는 문헌의 자료다.-고견의 이름 초명은 윤(趙胤), 호는 송산(松山), 영의정 부사 준(浚)의 아우다. 어려서 중이 되어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 넘어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에 이르렀다. 형 준(浚)과 함께 이성계 추대에 가담하여 개국공신 2등으로 평양군에 봉하여 졌다. 그 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조선 초 국가 최고 요직을 두루 거쳐서 평성군, 평성부원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한국인명사전' 한국인명사전편찬실편, 1967년신구문화사 865쪽) 이와 같은 글은 국사대백과사전(유홍렬 감수, 동아문화사 1036쪽 '보견)에도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조선 개국 초 이태조의 반역을 욕하면서 분연히 송도를 떠나 입산하여 송악을 바라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움막을 치고 칩거하였던 곳으로, 그곳에서 기와등의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는 식으로 전하여 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빠른 시일 내에 시비를 가려 바로 잡을 일이다.
*. 망경대(望京臺) 전설 -정여창이 무오사화를 피하여 이 산에 숨어들었을 때 스승인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피(血)눈물을 흘리면서 울면서(泣) 넘었다는 혈읍재(490m, 血泣재)를 지나니 비로소 망경대가 머리에 멋진 통신시설을 이고 서 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란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죽었을 때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자르는 극형 중에 극형이다.
-청계산의 주봉 망경대(望京臺)의 옛 이름은, 하늘 아래 만(萬) 가지의 경승을 감상할 만한 터라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 유신들이 맥수지탄(麥秀之嘆)으로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여 망경대(望京臺)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수봉 건너편에 있는 국사봉(國思峰, 538m)에도 연관된다. -나라가 망하자 목은 이색(李穡) 같은 우국지사나 고려 유신들이 청계산에 은거하여 살 때 이 봉에 올라가서 옛 나라('國)를, 생각(思)'하였다 해서 국사봉(國思峰)이라 했다는 것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이 지은 이 시조의 상징 의미는 다음과 같다. '白雪': 고려 유신들/ 구름: 조선에 충성하던 신흥 세력/ 매화: 고려 충신들/ 석양: 고려 멸망
매봉의 안부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매봉에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매봉(582.5m) 정상석이 깊이 있는 음각으로 서서 나를 맞는데, 그 뒷면에 청마 유치환의 시(詩)가 나의 호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에 항상 푸른 하늘 우러렀으매 이렇듯 마음 행복 하노라 -행복 시인들이여, 독자가 없다고 외로워 말라. 이렇듯 중요한 고비마다 시(詩)는 아름다움을 우러르고 있는 법이니-. 매봉에서는 과천 쪽의 대공원과 경마장과 그 너머 관악산의 전망이 멋지다. 거기서 조금 내려와 있는 매바위(578m)에 한 젊은 여인이 산하를 굽어보고 있다. 오른쪽에 무성한 빌딩 숲이 분당이요, 왼쪽에 넓은 공터가 여의도비행장을 옮겨온 서울비행장(성남비행장)이다. 수많은 세대 중에서 잠깐이나마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그 여인과 나와의 인연인 모양이다. 그래서 처음 만나고 헤어지는 숱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단 한번만의 나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문자모양의 봉이 과천매봉
그런데 이 청계산에는 과천 쪽 절고개 아래의 매봉(368m)과 청계산의 매봉(583m)으로 똑 같은 이름이 둘이나 있다. 왜 매봉이라 했을까? 보통은 산의 봉의 모양이 매 같다 하여 매봉이라 하지만, 매가 머무를 수 있는 높은 곳이라 하여 매봉, 매바위라 한 것 같다. 매는 눈이 밝아 높은 곳에서 먹이를 발견하면 수직으로 직하하여 꿩 같은 새들을 잡아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매는 큰 독수리류를 제외한 소형 또는 중간형의 새(천연기념물 제323호)를 지칭한다. 거기서 다시 또 얼마를 내려오다 보니 돌문바위가 있다. 바위에 다른 바위가 기대어 서서 삼각형의 문을 만들고 있는 바위다. 그 옆에 이런 소개의 글이 있다. -돌문바위 속에서 청계산의 정기를 받아 가세요. 젊은 부부 한 쌍이 그 돌문바위를 세 번씩 드나들며 돌고 있다. 그들은 기(氣)를 받으며 무엇을 빌었을까. 기(氣)란 무엇인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인 기운을 말한다. 기(氣)는 생활 활동의 힘이요, 원기요, 정기, 생기, 기력을 말한다. 많이많이 받아 가시라.
*.충혼비 앞에서 그 매바위와 매봉 사이의 하산 길에 '청계산 충혼비'가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1982년 6월 1일 군작전 중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한 53인 용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입니다.' →50m. 이곳은 저기 보이는 비행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우리의 영공(領空) 수호하다가 산화한 장소로 순직한 용사는 조종사인 공군 대령, 소령을 위시해서 공군이 4명, 육군 2명의 대위를 포함해서 49명의 육군인데 그 중에 일등병만도 44명이니, 살아있으면 지금 40 전의 나이라 얼마나 통탄한 일이던가. 그 슬픔을 비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忠魂의 숨소리
그대들의 흘린 뜨거운 피와 忠魂의 얼로 祖國은 살아 크게 숨쉬나니 그대들의 靈魂은 祖國의 山河에서 永遠히 살아 꽃 피리라. 그대들은 祖國을 사랑하고 또한 祖國은 그대들을 사랑하노니 거룩한 英靈들이여 祖國의 품속에 고이 잠드소서. -1985년 6월 1일 오수 2시 49분 *. 옥녀봉에서 통영의 사량섬 지리망산에도 '옥녀봉'이 있는데 옥녀의 친아버지가 딸을 범하려 하자 옥녀가 옥녀봉에서 몸을 던진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있던데, 여기에는 지명 유래담은 없는가 하는데 멋있는 통나무 팻말이 청계산 종주를 마치려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오래 걸으셨습니다. 옥녀봉이 보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판서 김노경(金魯敬)의 묘터가 있던 곳이 옥녀봉(375m)으로 이 일대를 공동묘지로 하려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지역이다. 옥녀란 어원의 유래는 없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하산길인데 팻말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황토맨발길'-맨발로 걸어보세요.
*. 산을 가꾸는 사람들 옥녀봉 가는 길에 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짙은 황적색 바탕에 흑자색의 반점이 있어서 호랑나비 무늬와 닮아서인가. 호랑나비가 즐겨 찾는다는 우리의 꽃 참나리다. 참나리를 보면 하나도 감춤 없이 나를 들어내는 솔직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아서 정이 간다. 뒤로 사르르 말린 잎으로 멋을 부리면서 모가지를 길게 뽑고,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수줍은 듯이 머리를 땅을 향하여 숙이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사람을 보는 듯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런 참나리 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 고장에 살면서 이 산을 가꾸고 있는 모양이다.
공중전화박스를 지나 곧바로 가라는 어느 산꾼의 말대로 그곳을 지나는 이 길은 깨끗하고 유난히 쉼터가 많고 이정표가 친절하다.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층계는 통나무 따로, 길 따로여서 허들 경기를 하듯 힘이 들었는데 이곳의 통나무 길은 매일 정성을 다하여 가꾸어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오색의 통나무 길은 비가 와서 흐르는 물길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만들어 놓으라니 만든 층계일 뿐이었다. 그러나 청계산에는 통나무 층계는 물론 물길까지 곱게 내어서 물길이 할퀴고 간 흔적이 전연없다. 떨어진 이정표 팻말도 그냥 두지 않고 끈으로 정성스럽게 묶어 놓았다. 쉼터 통나무 팻말에 이를 감사하는 글이 바로 내 마음을 읽은 이가 쓴 글 같다. - 청계산에 가면 '개나리골 삼림욕장'이 있다. 이곳은 입산료를 받는 국립공원이 아닌데도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관리가 정성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찾는 사람이 주인대접을 받는 것을 실감케 한다. 곳곳에 쉼터와 의자가 있는가 하면 '황토맨발 등산길' '임꺽정 길' 등 멋스런 이름이 팻말에 새겨 있다. 이 공원을 관리하는 구청직원은 분명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가 섬겨야 할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실천하는 진정한 공봉(公僕)이다. -배종대 고대 법대학장의 '동아일보 칼럼' 중에서 쉼터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시원한 '산바람 쉼터'가 있고, 거기 나이테가 있는 통나무 조각 팻말에 동요 '산바람 강바'람 가사가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산 위에서 부은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데요. ♫♩♪♬~
장마가 오다가 잠깐 빗겨 갔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한여름인데 바람 한 점 없다. 집에 있어도 무더운 날씨를 산행을 하였으니 얼마나 바람이 그립겠는가. 그윽한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휘파람새와 뜸뿍새의 소리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청계산 속에서 혼자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심(詩心)이 절로 동한다. 그 시심을 불태우며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옥녀봉에서 2,500m에 있는 양곡도매시장까지 하산 길로 행복했던 청계산의 하루의 여정을 접는다.
아, 淸溪山
온종일 淸溪山 품에서 하루를 낚았더니, 山은 내가 되고 나는 山이 되다.
하늘은 큰 湖水 나뭇잎이 그리는 바람은 魚信처럼 입질도 없다.
陵線에 오르니 시원히 열리는 全景 뒤돌아 본 貳壽峰, 望京臺, 매봉은 벌써 즐거운 追憶의 하나 하나가 되고 있구나.
또다른 내일도 부디 오늘처럼 山을 우러르며 貪하는 하루를 살고 지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