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성철용 (Homepage) |
2005-08-23 18:08:11, 조회 : 398, 추천 : 1 |
동해안 답사 포토 에세이/ 시조시인협회 문학기행 <2005년 8월 16~17일/강릉대→정동진→경포대→오죽헌→화진포→고성→건봉사/한국시조시인협회 따라>
*. 강릉(江陵)을 향하며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일산(一山)에 누웠더니, 시조협회 세미나가 강릉에서 있다하여~’ 영동 고속도로 달려가다 보니 송강 정철 관동별곡(關東別曲) 일절이 생각나네. 江陵 大都護 風俗이 됴흘시고 節孝旌門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屋可封이 이제도 잇다 할다. 강릉은 ilman(지은이 아호)이 군에 제대한 후 젊어서 3년을 머물던 곳입니다. 거기서 만난 어느 여인과의 거시기는 가난한 젊은 고등학교 선생이라 하여 부모로부터 거절당하고 울면서 대관령을 넘어온 곳이라서 감회가 남과 다릅니다. 가는 길에 떡과 음료수와 술과 안주를 먹습니다. 동행하는 아름다운 여류 시인이 베푸는 온정입니다. 50만원을 희사한 아산의 박 시인도 있답니다. 나는 요번 문학기행에 기록 사진이나 찍어 남겨 놓을 계획입니다.
*. 시조시인 대통령을 뽑자 '시조(時調)의 위상론'을 주제로 하여 이우식 평론가와 정순량 우석대학원 원장님이 세미나 발표를 합니다.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는 17음절의 짧은 시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문학의 자존심인데, 우리한국 사람들은 현대시조는 외면하고 고시조에나 연연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대시조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시조 작품을 가곡화 시켜야 한다. 오늘날 시조문학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2005년 한국문협 기관지 월간문학의 문인 주소록에는 자유시를 쓰는 시인은 3,302명인데 시조시인은 622명밖에 안된다. 30억의 예산을 들여 금년 10월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되는 국제도서전 출품을 위해서 100권의 한국책을 번역 소개하는데 자유시 관련 서적은 그래도 7권은 되는데 시조 관계 서적은 한 권도 없다. 초,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시조작품이 8편, 15편, 6편으로 총 29편뿐인데 그중 현대시조는 겨우 8편뿐으로 시조가 지나치게 푸대접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시조시인들은 순수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위상을 높이고 그 문학성을 제고하여야 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대중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생활화를 하게 하자. 국가는 거국적 차원으로 시조의 외국어 번역으로 한국에만 있는 우리 고유의 시 시조의 세계화에 힘써 우리 민족 자존심을 고양하자. 그러니까 울분한 우리 시조시인들이 말합니다. 우리도 남들처럼 팔 걷어 부치고 거리로 나서자. 그보다 '시조 시인 대통령을 뽑자. 그도 안 되면 문교부장관만이라도 시조시인이 되게 하자.
*. 우리는 정동진(正東津)을 다녀온 것인가 사진출처: tourguide. 여행하는 사람 중에 가장 멋없는 이가 여행지에 와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캄캄한 어둠을 해치고 정동진을 향합니다. 강릉대에서는 버스로 20분 거리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정동진은 옛날에 와본 정동진이 아닙니다. 바다에는 둥근 모래시계가 내온사인으로 번쩍이고 있고, 저 산 위에는 전망대와 음식점을 겸한 커다란 배가 올라 앉아 바다를 향하고 있는데, 네온사인으로 배의 윤곽을 둘러서 휘황찬란한 불빛이 이국적 풍취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경포대로 향하는 차 속에는 우리 시조시인들의 볼멘 목소리가 한창입니다. 빨리 가야 한다고, 한번도 내려주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1분도 버스를 세워주지도 않고 그냥 경포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나에게 물어 봅니다. 지금 나는 정동진을 왔다가는 것인가, 아닌가? 이렇게 온 것도 왔다고 한다면 일만은 안가 본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먼 나라는 하늘을 건너서 항상 비행기 타고 내려다보면서 캠코더로 촬영까지 하면서 다녔거든요. 광화문 동아일보사 건너 조선일보사 옆에 ‘도로원표(道路元標)’가 있습니다. 도로원표(道路元標)란 서울과 국내외의 주요 도시 사이의 방위와 거리를 표시하는 기본점입니다. 한반도에서 서울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역, 한국에서 바다가 가장 가까운 역. 해돋이 공원의 명소, TV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가 바로 정동진입니다. 정동진에는 '밀레니엄 모래시계'라는 거대한 모래시계가 있습니다. 1월 1일 0시부터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여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모래가 아래도 다 떨어지는 시계입니다. 둥근 원 가에는 십이지(十二支)가 있고 그것은 12 달[月]을 상징하는 것이구요. *. 경포호(鏡浦湖)의 여정 경포호에 가서 술을 마시면 달을 다섯 개나 볼 수 있답니다. 하늘에 뜬 달, 호수와 동해 바다에 비친 달, 술잔에 떠있는 달, 임의 눈동자에 박힌 달. 그런데 나머지 달 하나는 무엇이지요? 잊어 생각이 안나내요. 그래서 일만은 청화, 송전, 고성 이 시인과 함께 회를 안주하여 경포호반에서 한국의 국민주 이슬을 마십니다. 일 만원씩을 갹출했기 때문에 오징어회입니다. 오징어나 명태는 동해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그네 지갑은 전투에서 총알과 같아서 아껴 가며 열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은 부산 해운대, 충남 대천해수욕장과 함께 한국3대 해수욕장의 하나입니다. 해안선 하얀 백사장이 6km나 계속되고 바다 가운데 5리 바위와 10리 바위가 있습니다. 5리 바위는 젊어서 수영으로 건너던 바위입니다. 일만의 고향이 인천의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거든요. 영동고속도로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기도 하지만, 관동8경의 하나로 일찍이 송강 선생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소개한 덕도 크게 본 고장이지요. 斜陽 峴山의 철쭉을 무니 발와 羽蓋芝輪이 鏡浦로 나려 가니 十里氷紈을 다리고 고쳐 다려 長松 울한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잘샤 모래랄 혜라로다 -중략- 從容한댜 이 기상 濶遠한댜 뎌 境界 이도곤 가잔 대 또 어듸 잇닷 말고 紅粧 古事랄 헌사타 하리로다. *. 이 율곡 설화 어린 오죽헌(烏竹軒) 어제는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냉방시설이 안된 강릉대 기숙사에서 밤을 보내느라 고생을 했습니다. 강릉이 집이 아닌 타지방 학생들이 유하는 2인 1실의 방인데 1학기에 기숙사 비가 70만원이라니 어찌 시설 탓을 하겠습니까? 마찬 가지로 달랑 3만원으로 1박 2일에 숙식을 하고 강릉서 고성까지 문학기행까지 하여 주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들의 특기인 인내를 본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어제 무더위로 인한 고생은 일찍 아침을 먹고 문학기행을 떠나게 하였습니다. 처음 간 곳이 이율곡이 태어나서 6세까지 살았다는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입니다.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처음 단장될 때에는 한 일자형의 평면집이더니 지금은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옛날 '율곡 이이의 발자취를 찾아서'란 답사기에 오죽헌 주인공 율곡 이이의 탄생 일화를 나는 다음과 같이 시조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사시던 율곡 아비 청룡 황룡 꿈을 꾸고 사임당 찾아갈 때 대관령 주모 유혹했지만 용꿈을 그대로 안고 아내 찾아 운우지락(雲雨之樂).
귀경하던 이 선비 대관령 주모를 유혹했지만 그 주모 시기가 다르다고 거절하고 말더라니, 어쩌면 이율곡 선비 주모 아들 될 뻔했네. 오죽헌에는 율곡 선생을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있습니다. 그 문성사 주위에 신기하게도 검은 대나무가 울창하여 검을 ‘오(烏)’ 대 ‘죽(竹)’, 오죽헌(烏竹軒)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파주에 있는 아아(李珥)의 본가는 밤나무가 많은 율곡리(栗谷里)란 고장이어서 밤나무 ‘율(栗)’ 골 ‘곡(谷)’, 율곡(栗谷)이라 호(號)한 것이구요. 문성사 아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오죽헌입니다. 오죽헌에서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태몽을 꾸었다는 몽룡실(夢龍室)이 가장 유명합니다. 몽룡실에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정을 모셔 놓았습니다.
“사임당이 33세 되던 어느 봄날 꿈에 동해 바닷가에 갔을 때였습니다. 바다 속으로부터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불쑥-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습니다. 그해 12월 26일 새벽이었습니다.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날아와 부인의 침실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강릉 오죽헌에서 아기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 이이 선생입니다. 그래서 아명을 태몽에 용이 보였다 하여 보일 '見(현)' 용 '龍(용') 현용(見龍)이라 하였답니다.”
신사임당은 율곡에게는 어머니요,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48세의 젊은 나이에 이이가 16살 때 갑자기 돌아가시는 천붕지통(天崩之痛)을 당했습니다. 어머님을 고향인 지금의 자운산 산록에 안장하고, 어머님 무덤 서쪽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의 시묘살이에 들어갑니다. 못 다한 효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곡은 과거에 9번이나 장원 급제(九度壯元)하여 부모를 빛낸 분으로 후에는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일컫게 된 분입니다. 퇴계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다간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한 대학자였습니다.
*. 아아, 낙산사(洛山寺)여
출처:동아닷콤 낙산사에 왔습니다. 2005년 식목일에 불타버린 낙산사를 이제야 찾아 왔습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던 소방 당국이, 안 꺼진 불을 다시 안 봐서 2시간만에 전소된 우리나라 3대관음기도 도량의 하나가 낙산사입니다. 낙산(洛山)이란 말은 범어 보타라가(補陀洛伽)의 준 말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1,300여 년 전인 신라 문무왕 때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나 수차례 화재로 중창(重唱), 중수(重修)를 거듭하다가 6.25에 병화(兵火)를 입은 것을 1953년에 국군1군단의 협조로 재건된 절입니다. 홍예문(虹霓門)을 지나갑니다.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할 때(1466년)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문(강원도유형문화재제33호)인데 그 아름답던 문루가 허망하게도 불타버렸습니다. 성벽과 같이 사찰의 경 내외를 구별하여 주던 문이 홍예문입니다. 당시 26개 원님들이 세조의 뜻에 따라 하나씩 가져온 장방형의 26개 화강석으로 쌓은 문입니다. 여름은 왔는데 푸른 잎을 잃은 저 멋진 소나무가 빨갛게 죽어 있습니다. 사천왕문입니다. 절을 지키기 위하여 도서남북의 사천왕을 만들어 좌우에 세운 문으로 절을 지키기 위해서 사찰 입구에 세워둔 문입니다. 화마(火魔)도 사천왕이 두려워서 빗겨 갔나 봅니다. 불타버린 조계문을 지나 원통보전(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으로 갑니다. 낙산사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 대신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입니다. ‘ 원통(圓通)’이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융통하여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준다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낙산사의 법당 원통보전이 전소해 버렸습니다. 현수막이 그 재건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수난의 칠층석탑(보물 제 499호)- 원통보전 들어가는 대성문 에서는 7층 석탑을 향하여 스님이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 원통보전 재건을 기원하는 발원일 것입니다. 낙산사7층 석탑은 높이 6.2m로 보물 제499로 귀중한 문화유산인데 불에 일부가 그슬린 것 같습니다. 세조 때 지어진 이 탑은 당시에는 3층탑이었던 것을 1468년 중창할 때에 7층탑으로 개축했다는 이 절에서는 동종과 함께 귀한 탑입니다.
원통보전 터에서는 문화재청국에서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질서 있게 늘어선 주춧돌에 화재가 할퀴고 간 검은 자국이 선명합니다. 불탄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아까운 것이 동종이랍니다. 아버지 세조가 자주 들리며 좋아하던 절이 낙산사라서 그 아들 예종의 명으로 주성한 보물 제479호로 무늬 권운문(券雲紋)과 파상문(波狀文)의 조식(彫飾)이 특히 아름다운 종입니다. 불에 탔지만 그런대로 모양은 보전되어 있다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 낙산사를 불심(佛心)으로 불태우고 싶다 낙산사는 강원도 양양의 단순 하나의 사찰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불신자들이 사찰 순례에 빼놓을 수 없는 절이기도 하지만, 연인원 150만 명의 국내외 관람객이 찾는 사찰입니다. 성인 중에 낙산사를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 중의 사찰입니다. 낙산사 주지 정념스님의 말에 의하면, 복구비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말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동종, 칠층석탑, 건칠관음보살좌상 등 국가 지정 문화재 3점에 해당하는 말이며 조경이나 사찰 복원에 드는 250여 억 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전 국민에게 도와 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건립되는 교회를 보며 놀래온 기독인들의 신앙의 역사가 불교인들의 불심으로 어떻게 나타날 것이가 기대하여 보며 저도 기와 하나 기부하였습니다. 낙산사 37동의 건물 중 22동이 모두 불에 타는 버린 지금 다시 옛날처럼 아름다운 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낙산사에 이번에는 불심(佛心)에 불을 붙여야만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나라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기대하여 봅니다. 곳곳에 써 부친 낙산사 스님들의 발원이 조속한 시일 내에 이루어지기를 화마에 불타 죽은 나무 뒤에 저 해수관음보살님께 빌어볼 것입니다. *. 해당화 피고 지는 화진포(花津浦)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함께 한 여류시인들이 합창하는 노래 따라 창밖을 보니 16km의 자연 화진포호반을 따라 붉은 해당화가 피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해당화는 바닷가나 섬의 모래땅에서 수줍은 듯이 자라는 꽃입니다. 화진포(花津浦)란 이름은 해당 ‘화(花)’가 피어있는 나루‘[津]’요 바닷가 ‘포(浦)’란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순정을 바치고도 하염없이 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낙네처럼 애처로운 해당화는 지금은 화진포해수욕장과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등으로 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다리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오는 곳이 되었지요. *. 김일성의 덕(德) 나는 세 번째 찾는 화진포였지만 옛날에는 김일성, 이승만 대통령 별장이 있다는 말만 듣고 군사 통제구역이라서 가볼 수 없는 곳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김일성이 6.25만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찌 옛날 38선 이북인 속초에서도 한참이나 더 올라온 화진포에 올 수가 있을까요.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였다는 설악산을 무슨 재주로 마음만 먹으면 오늘날 같이 찾아갈 수가 있었을까요. 김일성 덕이 아닙니까? 철원평야를 뺏기고 김일성이 사흘을 울었다던데, 그때 금강산까지 쳐 올라갔다면 김일성이 석 달을 울었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화진포의 성(城) 김일성 별장 화진포해수욕장은 군사 통제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1973년에 개장하였습니다. 동해안 북쪽에서는 가장 좋고 큰 해수욕장입니다. 울창한 송림이 그렇고, 포구 주위에 기암괴석과 김일성, 이승만 대통령 별장 등은 비취빛 동해바다와 유난히 흰 ?? km의 백사장과 어울려 천혜의 해수욕장을 자랑합니다. 그 푸른 바다에 떠있는 금구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의 모습은 그 멋을 더해 줍니다. 이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예부터 화진포의 성(城)이라 불러왔습니다. 중일 양국의 전면 전쟁이 시작되던 1937년입니다. 일본 군부는 원산에 비행장 부지를 사용하기 위해서 거기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별장을 강제 철거하면서 이상적인 장소를 물색한 곳이 화진포였습니다. 그때 망명해온 건축학을 공부하였다는 독일인 베버(Weber)가 바다에 면한 암벽위에 회색 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것이 유럽의 작은 성(城)과 같다하여 '화진포의 성('The Castle of Hwajinpo)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 화진포의 성에서 6,25 이전인 1948년부터 김일성 가족들이 여름 휴양을 위한 숙소로 이용해서 김일성 별장이란 이름이 생긴 거구요. 그때 김정일의 어렸을 때에 그 층계에 선교사들의 자녀들과 앉아 찍은 사진이 그때의 이야기를 말 해 주고 있습니다. 이 건물이 6 , 25 전쟁 통에 훼손된 것을 1964년에 재건축하였지만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가 1999년 이후에 안보전시관으로 개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진포에 옛날 다녀간 사람에게는 저와 같이 처음 보는 구경거리입니다. 서민의 꿈은 집을 갖는 것이지만, 큰집을 소유하고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별장을 동경 하게 됩니다. 그 제2의 꿈의 주택은 경치를 동반합니다. 산이나 강변, 호숫가에 그림 같은 집에 대한 꿈은 자동차화(Motorization)의 대중화로 이젠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콘도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까지 다가온 것입니다. 그 별장 중에 분단을 사는 우리의 두 우두머리의 별장을 찾아보고 비교하여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재미있게도 김일성의 별장은 화진포해수욕장의 끝인 북에, 이승만대통령의 별장은 그와 마주한 남쪽 끝에 있습니다. 전자는 돌로 쌓은 2층이고 후자는 단층 별장으로 김일성의 별장이 훨씬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먼저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지은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별장은 1954년 신축되어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별장으로 쓰였지만 그 후로는 군사시설 구역 속에 있는 곳이라서 폐허가 되어서 철거되었다가 1999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건물입니다. 내부 기념물들은 유가족들로부터 기증받은 놋그릇세트, 장갑, 낚시도구나 침대, 화장대, 두루마기 등 53점은 당시 사용하시던 진품으로 집무실, 침실, 응접실을 재현한 것이어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옛날을 뒤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들이 이승만 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화진포 해수욕장 -김일성 별장에서 본 화진포, 앞에 있는 섬이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금구도 그 섬 앞 산에 이승만 별장이 있다.- 화진포 해수욕장의 경치는 이 '화진포의 성'에서 보는 것이 가장 멋지지만 분단의 철조망은 아름다움만을 생각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가장 북쪽의 해수욕장으로 가장 크고 청정한 피서지가 이 화진포 해수욕장이 분명합니다. 바위와 조개가 수천 년 동안 부서져서 만들어진 모래가 폭 70m 길이 1.7km의 해안선으로 쭉 펼쳐졌습니다. 거기에 수심 1.5m 내외의 완만한 경사는 이 해수욕장의 자랑입니다. 게다가 담수인 화진포 호수와 교류가 된 염담호수(鹽淡湖水)는 국내 어느 해수욕장이라도 추종을 불허하는 곳으로 국내외인들에게 예부터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옛날에 왔을 때는 몰려다니는 전어를 투망으로 잡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볼 정도로 낚시터로도 유명한 곳이었는데 요즈음은 환경오염관계로 낚시를 금하고 있답니다. 낚시뿐만이 아닙니다. 제트 보트나 수상 스키와 같이 소음을 일으키는 일체의 레저 활동은 금하여 조용한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화진포를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 화진포 해양박물관 우리나라에는 해양박물관이 셋이 있습니다. 남해안에 부산해양박물관, 서해안의 충남 서천해양박물관과 함께 동해안에 2001년 봄 개관한 고성군 화진포 해양박물관입니다. 화진포해수욕장 입구를 지나다 보면 배 모양의 건물이 있고 그 현관 베란다에 물개 한 마리가 앉아있고 주위에 커다란 조개들이 늘어서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동해안이나 제주도에서 채집한 조개류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갑각류, 산호류, 화석류, 박제 등 1,500종 4만여 점이 전시되어 우리들의 눈을 황홀하게 합니다. 이곳은 바다의 꽃인 산호가 만발한 속에 각종 열대어와 동해 물고기 등 어류 125종 2,400여 마리가 살고 있는 물고기의 나라, 열대바다 고기의 축제장입니다. 살아있는 것을 보기 드물다는 고성군의 대표적인 군어(郡漁) 명태는 물론 연어, 대왕 문어가 유영하는 곳입니다. 이 박물관 관람의 하이라이트는 해저 터널 수족관입니다. 머리 위를 지나는 커다란 각종 상어들, 노랑강리 등 수백 마리가 유영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그 고기들이 180도 이상을 머리 위를 지나는 감동은 신비로운 세계에 들어선 감격입니다 보세요, 일만이 찍어온 그 경이로운 현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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