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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모도(席毛島) 산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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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7 11:06:28, 조회 : 854, 추천 : 1 |
강화 석모도(席毛島) 산행기 (2005년 9월 4일/ 강화외포리-석모도천착장-전득이고개-해명산-낙가산-보문사/고양산악회 따라 011-347-5020)
*.석모도(席毛島) 가는 길 석모도(席毛島)는 강화도에서 서쪽으로 1.5km에 떨어져 있는 여의도의 6배 크기의 섬이다. 서울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곳이 정동진(正東津)이듯이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있는, 강화군 삼산면(三山面)에 속하는 섬이 석모도(席毛島)다. 삼산(三山)이란 석모도(席毛島)에 있는 해명산(327m), 낙가산(267m), 상봉산(316m)을 선으로 이어보면 그 모양이 뫼 ‘山’(산) 자와 같다 해서 생긴 이름이라지만 뫼 '山'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낙가산 보다는 북쪽에 있는 264m의 상주산이 들어가야 맞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 산들은 하나의 산이라기보다 하나의 능선에 연결된 봉(峰)들 같은 산이다. 석모도를 버스로 가려면 서울 신촌 역이나 김포공항 건너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편도 1시간 30분에 강화도 외포리 선창장까지 왕복 1만원의 투자를 요한다. 강화도가 온통 사적지와 전적지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석모도는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에다가 우리나라 3대관음기도처인 보문사. 민머루해수욕장, 천연 염전, 지금 한창 개발 중인 온천과 함께 아름다운 산이 어울린 강화의 보물로 일컬어지는 섬이다. 우리들은 외송리에서 카페리호를 이용해서 버스를 탄 채로 그대로 바다를 건널 수 있어서 오늘은 버스 여행에다가 배도 산도 타는 호강을 하는 환상적인 산행을 한다.
*.갈매기와 함께 석포선착장으로 한자 '島' 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鳥+山 '으로 섬을 간결하게 표현한 한 편의 시(詩) 같이 멋이 있다. 산에 가서도 새를 못 보는 세상에 살던 우리가 섬에 가면 어디서나 갈매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비정한 문명을 사는 현대인에게는 커다란 축복이다. 그 새가 우리들을 기다리다가 배를 따라 우리의 곁을 맴돌아 준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이던가. 옛날에는 배의 프로펠러에 뒤집히는 물결에 정신을 잃고 떠오르는 고기를 탐내던 갈매기가 요즈음에는 아예 유람객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얻어먹으며 산다. 그래서 외포리에는 그 새우깡만 팔아 먹고사는 인간 갈매기도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도 유람선에서도 그랬었다. 뉴질랜드를 갔더니 공원에서 휴식하고 있는 가족들 옆에서 비둘기처럼 천연덕스럽게 던져주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갈매기가 있었다. 새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가 되어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뉴질랜드 사람들을 스스로를 키위(뉴질랜드의 國鳥)라고 하며 산에 있는 밤, 도토리 등을 전여 먹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도토리와 밤을 줍는 것이 당연하다는 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것을 주워 가는 것을 동물들이나 새들의 먹이를 약탈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뉴질랜드 키위 같은 생각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몇이나 될까.
*. 발은 산을 딛고, 눈은 바다를 굽어보며 우리들은 석포리 선착장에서 좌측 길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진득이 고개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석모도에서 제일 높다는 327m의 해명산을 넘어 상봉산(316m)을 갔다가 중간에 있는 낙가산으로 되돌아와서 보문사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오늘 일정이다. 찬바람이 불어온 지가 오래인 것 같은데 매미와 쓰르라미가 마지막 가는 여름을 울고 있었다. 언제부터를 가을이라고 해야 할까? 화투로는 추석을 뜻하는 8공산이니, 8월과 9월 국화, 10월 단풍이니 가을이라 할 것이다. 기상학상으로 따져서는 9~11월이요, 천문학상으로는 밤이 가장 짧다는 추분(9월 23일경)으로부터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12월 21일 경)이다. 24절기상으로는 입추(8월 8일 경)부터 입동(11월 8일 경) 사이를 가을이라 하고, 온도 상으로는 일일평균 기온이 10~15도C가 초가을, 최저 온도가 5~10C가 될 때가 늦가을이다.
맹하( 猛夏)에 이 가을이 더욱이 반갑고 산들바람 기쁨을 더하여 주고 있네 내 나이 가을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이 하루로 치면 밤을, 계절로는 겨울을 사는 사람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등산이 버겁고 속도가 느린 것인가. 흐르는 땀에 체면 불고하고 팔없는 넌닝셔스만 입고, 아래를 떼어 낼 수 있는 등산바지라서 반바지 차림으로 산을 오르다보니 30분도 안되었는데 벌써 전망이 시작된다. 230m의 첫 암봉이었다. 섬 산행의 멋은 이렇게 고생을 덜하고도 여유로운 능선 길을 가면서 바다를 굽어보는 쏠쏠한 재미에 있다. 이럴 때에는 이 깊은 나이에 내가 왜 기를 쓰며 왜 산행을 하나 하던 생각도 신통하게도 쏙 들어가 버린다. 죽방염도 보인다. 죽방염이란, 물에 썩지 않는 참나무를 개펄에 촘촘히 박아 밀물 때 들어오는 고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고, 썰물일 때 그 고기를 잡는 원시적 어업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경상도 남해 근처에서 많이 보던 죽방염이었다. 발은 산을 딛고 눈으로 바다를 좌우로 내려다보는 그런 섬 산의 능선길이 시작되고 있다. 이럴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난다. 아아, 아름다운 우리 산하여! 서유럽이나 동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망망한 지평선뿐 산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에 황홀해 하다가 몇 번을 더 보고 한국의 산하의 아름다움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제일 높다는 몽마르트 언덕이 겨우 129m 높이의 언덕이었다. 폴란드(Poland)의 '폴(Pol)'은 평야라는 말이고, '란드(land)'는 나라라는 뜻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 천일 삼량염전과 민머루해수욕장 오랜만에 염전(鹽田)을 본다. 옛날 젊었을 때 친구와 망둥이 낚시를 하러 다니며 보던 곳이 소사 포리 염전이었다.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 등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증발시켜 만들던 번거로운 천일제염이, 기계 발달로 빠른 시간 내에 소금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1990년대 들어 사양산업이 되어 추억 속에 사라져간 우리나라에 몇 개 안남은 염전이다. 그래서 이곳에 나오는 소금은 짜기가 일반 소금보다 덜하여서 소금 중에 상질로 치는 이 지방 특산물이기도 하다. 몇 년 전에 캐나다 로키산맥 여행 중에 종종 산양들이 길거리에서 바위를 핥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염분을 섭취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인간은 물론 초식하는 동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소금이다. 그래서 소금은 옛날에 물물교환시대에는 화폐노릇을 하였고, 지배자나 사원에 바치는 공물이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월급쟁이를 보통 샐러리맨(Salaried man)이라고 한다. 영어에는 없는 일본 사람이 만들어 낸 조어(造語)다. 급료란 뜻의 'Salaried'의 라틴어는 'Salarius'(소금, 돈)이란 뜻이었다. 옛날 로마의 군인들에게는 Salarium(소금)을 수당으로 주었다. 소금이 돈과 같거나 그보다 더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금은 조미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향미 촉진제일 뿐만 아니라, 방부제의 역할은 물론, 심지어는 길에 쌓인 눈을 녹여 주는 해빙제의 역할까지 하는 것이 소금이다. 그림의 왼쪽 끝이 석모도에 하나밖에 없다는 민머루해수욕장이다. 폭 50m에 1km의 모래사장과 바닷물이 빠지면 수십만 평의 갯벌에서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는 곳 이다. 그뿐인가. 여성에게는 피부가 좋아진다고 하여 개흙을 온몸에 바르는 머드 팩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해수욕장 양쪽으로 펼쳐지는 어류정항과 장구너머포구의 어촌 풍경 속에 풍덩 빠져 보거나, 염전의 소금 제조 과정을 살펴보고 살 수도 있는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특히 민머루해수욕장의 일몰은 서해 일몰조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세 개의 섬이 합한 석모도 석모도는 원래는 3개의 섬이었던 것을 1970년대 간첩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된 곳이다. 등산을 하다 보면 멀리 바라보이던 봉우리가 불현듯 가까이 다가서면 '다 왔구나' 하다가 다시 또 그 뒤에 봉이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만나게 되는 것이 반가운 정상이다. 이 산에서 제일 높다는 산이 해명산이다. 해명산 정상에는 정상석 대신에 정상 목이 있고 그 옆에 지적삼각점이 있다. 탁 트인 시야는 개펄 너머 바다와 바다를 건너서 섬섬들이 떠있고, 눈을 앞 길로 돌리면 다시 가야할 삼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산을 가다가 바윗길을 만나거나 기암괴석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 반가움이 이산에도 많았다.
*. 낙가산(洛伽山)은 어디인가 내가 예정에도 없던 이 고양산악회를 따라 나선 것은 옛날에 몇 번씩이나 가서도 건성 보고온 보문사를 다시 보겠다는 마음도 커서였지만, 그보다 보문사를 품고 있는 낙가산을 오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해명산으로 해서 낙가산을 찾아가는데 이정표는 있는데 낙가산(洛伽山)이 어디인지 표지가 없었다. -낙가산에서 본 보문사/ -삼봉산 쪽에서 본 낙가산 원경 보문사로 가는 엉성한 이정표를 지나 커다란 위험한 마당바위를 넘으니 손에 잡힐듯한 보문사가 보이는 눈섭 바위 위의 바위를 지나 무덤이 많은 곳을 통하여 멋진 산불초소가 있는 245.7m 직전 안부인 절고개까지 가봐도 산봉산 가는 길일 뿐이다. 오른쪽으로 동떨어진 산이 보문사로 유명해진 낙가산일 리는 없고-. 그러니까 지나온 보문사 바로 위 눈섭바위 위의 큰 너럭바위가 낙가산인 모양이다. 저 바위는 서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강화8경의 하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 보문사 눈섭바위 눈섶바위를 보려면 삼봉산 가는 길의 안부인 절고개에서 되돌아와서 우측으로 낙가산이 보이는 바위(洛伽山?)를 넘어 낙가산 이정표를 따라 하산해야 한다. 거기서 10분쯤 내려오니 눈섶바위의 공양물을 실어 나르는 삭도가 있고 바로 그 밑에 눈섶 바위를 오르는 418개의 층계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조금 오르니 눈섶바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커다란 바위 절벽에 두 눈섶 같이 길게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마애좌불상(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9)이 있다. 자연적으로 이 불상의 풍우를 막아주는 절묘한 위치에 조각해 놓은 920cm(32척), 너비 330cm(11척) 마애불(磨崖佛)이었다. 높이 32척은 관음보살의 32 응신(應身)을 나타내며,폭 11척은 11면관음보살의 화신(化身)을 상징한다고 한다. 응신(應身), 화신(化身)이란 말은 신불이 인간형상으로 세상에 나오는 일을 뜻한다. 네모진 얼굴에 보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에는 세속의 모든 번뇌와 마귀를 씻어주는 깨끗한 물을 담은 정병(淨甁)을 들고 연꽃 받침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넓고 각이진 양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있고, 가슴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卍(만)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뒤를 둥근 광배가 두루고 있다. 정교함이나 예술적인 미와는 동떨어진 순진한 아이들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단순한 모습인데, 그것이 오히려 더 우리 서민에게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이 마애석불좌상은 금강산의 표훈사 주지 이화응 스님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이 1928년 낙가산 중턱의 눈섶바위에 조각한 것이다.
*. 한국 3대 해상 관음영지 기도처 보문사(普門寺)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인데 이 보문사(인천시 유형문화재27호)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천연동굴인 보문사 석실(경기도유형문화재 제 57호)이다.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호리병 모양의 이 동굴 안에 23개의 감실(監室)을 만들어 불상을 모시었다. 석실 면적은 97평, 높이는 8m로 큰 편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뜻한 곳이다. 아름다운 곳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 다음과 같은연기(緣起) 설화가 전하여 온다. " 선덕여왕 시절에 삼산면애 살던 한 어부가 있었다. 어느날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같은 돌덩이 22개가 두 번이나 걸려나와서 버리고 돌아왔다. 그 날 밤 꿈 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 어부를 책망하며 이르기를 내일 돌덩이를 건져서 명산에 잘 봉안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 돌덩이를 낚은 어부가 지금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이곳이 영장(靈場)이로구나 하고 그 안에 단을 쌓고 모시었다. 고려 초기에 이곳에 와서 돌들을 살펴본 회정(懷正) 스님이 크게 놀라 22존 중 18 나한은 굴 속에다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낙가(洛伽)'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산 이름이고,'보문(普門)'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10여전 전에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석모도를 올 때 대구에서 온 세 여인을 차에 태워 준 일이 있었다. 신도시로 이사오면서 집이 팔리지 않아서 고생할 때였다. 그 중 한 여인이 막 신내림을 받고 기(氣)를 모으러 비행기로 와서 보문사를 택시를 대절하여 배에 싣고 건너 찾아가려던 무당이었다. 고마와 하던 그에게 아내가 언제 우리 집을 팔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그때 대답이 이러하였다. "매달 보문사에 와서 기도 하세요. 그도 어렵다면 한 번이라도 오셔서 기도 하세요. 댁의 집이 2층 남향집이지요? 두고 보세요. 내달 15에 계약하러 온 사람이 있을 터니니-." 팔리지 않아서 그렇게 애태우던 서울 장위동에 있는 2층이 팔리던 날을 정확하게 맞춘 것이다. 미신이라면 질색하며 살아온 내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의문이었다. 그래 그런가 눈섶바위 마애불이나 보경사 석굴을 찾아와 빌면 소원을 이루는 이 많다는데 그중 자식을 점지해 주어서 이 절을 찾는 불자부녀자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어떤 분인가 기독교인들이 '할렐루야' 하듯이 불교 신자들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이라 하는데 그 뜻이 무엇일까? '나무(南無)'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요,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중생이 이 부처를 염하면 죽어서 극락에 보내 준다는 서방정토에 살고 있다는 부처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왼쪽에 모시고 있는 보살로서 중생들이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인간 모습으로 나타나서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보살(菩薩)'이란 위로는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이란 말은 '아미타불에 돌아가 의존하겠습니다.'란 뜻으로 '관세음보살님. 도와 주세요.'하는 말이다.달리 말할 수도 있지만 자고로 종교를 믿는 궁극의 목적이 기복(祈福)이라면, 부처님께 중생이 빌고 있는 그 복을 직접 구체적으로 해결하여 주는 보살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다. 보문사는 남해 금산의 보리암, 양양의 낙산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장의 하나다.
*.보문사에서 꼭 보고 가야 할 것들 보문사에 와서 꼭 보고 가야 할 것이 눈섶바위의 마애불이고, 천연석굴암 석실 다음에 무엇이 더 있을까?그 중 하나가 천연암 석굴 홍예문 앞에 있는 600년 묵은 향나무요, 그 향나무 앞에 있는 보문사가 번성할 당시 300여명의 승려가 쓰던 맷돌이다. 지름이 69cm, 두깨가 20cm로 일반 맷돌의 두배 정도나 되었다. 천인대(千人臺)도 가 보고 싶었지만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생략할 수 밖에 없었다. 석실 북쪽에는 있는 이 천인대는 길이와 폭이 40m, 5m의 크기로 1,000 명을 앉히고 설법을 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천인대(千人臺)라 하는 곳이다. 종각 옆에 요즈음 만들어 놓은 것으로는 난간을 두른 8각의 집 모양의 윤장대(輪藏臺)가 있다. 윤장대(輪藏臺)란 그 속에 경전을 넣거나 자기의 소원을 써서 안에 넣고 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팽이 모양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는 불교신자보다 기독교 신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산에 와서는 꼭 절을 지나치지 않고 그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나의 사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산을 지키고 서서 이 산의 역사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역사가 절이요, 그 사찰 하나하나가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 유산이라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부처를 향하는 마음이 이리 큰 것은 부처님께 빌어 태어난 나의 어머니의 발원에서일까. 아니면 불심이 내안에 잠들어 있어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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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람사는이야기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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