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故鄕)이 수도국산 기슭 '약우물터'인 줄 알았더니-.
백발`되어 찾아온 내 고향은 '수도국산(水道局山) 달동네'로 개명하여 나를 맞으니
조금은 창피하다.
가난이란 얼마나 서럽고 힘든 고개였던가.
가난은 불행이었고, 의식주와의 필사적인 전쟁이었으니,
가난보다 더 큰 죄악은 없지 않았던가.
그런 가난을 드디어 넘어섰더니
가난도 행복이더라.
가난도 그리워 꿈 꿔오던 재산(財産)이더라,
수도국산 달동 내 출신 노 시인(老詩人)이라서
그리 노래하며 살았던가.
달 보며 돌아와서, 달 보다 잠들어서,
월세방(月貰房) 사는 이.
사글세집(朔月貰-)으로 살 사람이
내 집 갖고 살 수 있는 천국 같은 유일한 내 집이라서,
산동네가 달동네서였을까.
달동네가 산동네였을까.
나는 옛날을 만난다.
쌍우물을 두고도 수돗물을 사 먹던 시절
그 수돗가에서 만나던 그 소녀를-
그 좁디 좁은 컴컴한 골목에 숨어
기다리던 나의 사랑을 만난다.
가난해서 헤어졌으나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소녀와
이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수돗가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나
옛날 못 나눈 서럽던 이별의 역사를 나누어 봤으면
죽어도
원(願)이 없겠다.
몇년 전이던가. 백발의 나이로 내 고향 인천(仁川),
내가 살던 송현동(松峴洞) 약우물터를 찾았더니,
고향은 송두리째 없어져 버리고 그 자리에 낯선 대형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었다.
동네 앞 산이었던 수도국산에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서 있어서 그때 감흥을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나는 이 달동네에서 '영화 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1940~ 50년대를 인천의 산동네 달동네에서
모두가 어려웠던 당시를 남들보다도 더 어렵게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4년 동안 고학(苦學)으로 대학을 나왔고,
서울 객지에 내 집 한 칸 마련하느라고 젊음을 온통 다 바쳤다.
그렇다고 당시에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난이란 가져야 할 나이에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붙이는 부끄러운 말일뿐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옛날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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