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지리산(智異山) 단독 종주(縱走記)/
아아, 그 아까운 귀중한 사진이 사라져 갔구나.
세월 탓인가. 내탓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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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리산 종주 길
2. 나와 나의 아내의 남편과 왔소
3. 아내와의 전쟁
4. 전설 따라 가본 샘터
5. 종주 길에 만나는 지명의 유래
6. 태풍 루사 덕(-벽소령에서)
7. 연하선경의 낙조
8. 천왕봉일 일출을 보고도
9. 일만(지은이 호)이 돌아왔습니다.
10.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e-mail
**1. 지리산 종주 길
우리도 늙어 회갑이 되면, 함께 회갑 기념 지리산 종주를 하자고 30년 지기(知己) 구(丘) 선생과 젊어서 굳게 약속하였더니, 회갑 진갑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리고 법정 노인 연령이라는 만 65세가 되어, 경로 우대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굳게 언약한 친구 구 선생(丘 先生)은 요즈음은 중풍에다 치매를 더하여 살면서도, 그래도 백두대간을 누비던 젊은 시절의 오기로, 발을 질질 끌면서도 상계동 뒷산이나 도봉산 무수 골을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고 있다.
나는 정년퇴직 후 신도시 일산에 있는 이산포 수로(水路)에서 새벽마다 아침을 열던 낚싯대를 접고, 오늘 구례행 기차 무궁화호를 예약하였더니 누구나 15% 할인해 준다는 화, 수, 목요일에다가 경로로 30%를 더 할인해 준다.
낚시터에서 참붕어를 잡으면서 흘리는 피, 찢어지는 입술, 눈에 찔린 낚시를 뺄 때마다 가슴을 아파하며, 먹지도 않으면서 산 놈을 이렇게 재미로 잡아도 되는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새벽이 되면 다시 낚시터를 향하곤 했었다.
그런 내가 산꾼이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지리산 산행 길에 오른 것이다. 낚시터에서 금년 들어 유난했던 물난리가 그치면 가겠다고 벼르던 대로-.
찾아갈 때 마음 설레게 하고, 돌아올 때 아쉬워하게 하는 산행 길. 그것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지리산 종주 길'을 말이다.
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지리산을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고,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술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산에 왜 가냐고요?
산은 아니 가고
물은 아니 와서
산을 찾아 나서면
물이 되고
물을 찾아 나서면
산이 돼서요.
-산에 왜 가나
정년퇴직한 의욕적인 사람에게 축복이 있다면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 부양에서 해방된 체 맞는 정년은 낚시를 할 나이고, 여행을 갈 나이고, 건강을 위해서 산에 다닐 나이였다.
그것은 직장 시절에 없었던 시간과 함께, 약간의 여유도 갖게 되어서, 젊은 시절 꿈꾸던 세계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꿈꾸던 자, 겨울에서 여름 나라로, 여름에서 겨울 나라로 환상적인 해외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월척을 꿈꾸는 자, 강과 호수로, 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금수강산(金水江山)을 찾아 언제나 떠날 수가 있다.
금수강산(金水江山)의 한자에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해외여행을 나서 보라, 한국처럼 약수(藥水)가 많은 나라가 있는가를-.
그래서 지리산 산장을 다음과 같이 준비하여 떠났다. 요즈음은 산장이라 하지 않고 대피소라 하며 예약제로 되어 있었다. 거리 전화는 현지에 가서 확인한 것이다.
종주길에서 만나게 되는 대피소 간 소요시간은 아래와 같았다.
성삼재 ∼1시간 2.5km∼ 노고단산장(☏061-783-1507/예약 061-783-9100) 270명 ∼3시간 6.3km∼ 뱀사골산장(☏063-626-1732/예약 063- 625-8911) 80명∼2시간 4.25km∼ 연하천산장(☏ 063-625-1586/예약 063-625-8911) 40명 ∼2시간 3.6km∼ 벽소령산장(☏011-854-1456/예약 055-973-0399) 143명 ∼3시간 6.3km∼ 세석산장(☏0131-45-1601/예약 055-973-03991600) 230명. ∼2시간 3.4km∼ 장터목산장장터목(☏ 0131-45-1750/예약 055-973-0399) 160명 ∼1시간 1.7km∼ 천왕봉~2시간 40분~치발목산장(전화 없음)
**2. 나와 나의 아내의 남편과 왔소
지리산은 넓이가 1억 3.348만 평이나 되는 제주도 만한 크기이고 여의도 공원 1,000배 크기의 한국 최대 최초의 국립공원 1호다. 전북 전남 경남 3도에 5개 시 군(市郡)이 걸쳐 있는 거창한 국립공원이다.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 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는 묘향산(妙香山)을 극찬하였다지만 그 산은 가 볼 수 없는 산하라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내 경험으로도 지리산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금강산도 산의 웅장함과는 견줄 수 없는 산이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거리를 흔히 100리 길이라고 하나 "월간 山"(1999.7)지에 의하면 그 길이가 34.2km, 우리나라 리(里) 수로 산길 86리나 된다.
나이 지긋이 들어 단독 등반을 하다 보니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누구와 같이 왔냐?'는 것이다.
'나와 나의 아내의 남편과 왔지요.'
이것은 내가 나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 6학년 6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15kg도 넘는 짐을 지고 왜 혼자 왔지?
젊어서 산꾼 친구들과 설악산이며 지리산을 등반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입술이 흉하게 부르텄다.
어떤 때는 너무 숨이 가빠 산속에서 초주검이 될 정도로 고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술의 탓이거니 하다가, 그 무서운 백혈병동 무균병실에 입원해 있을 때 종합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가 묻는다. 숨이 찬 경우가 없었냐고. 아, 그랬었구나! 전국 산하를 다니면서 항상 남보다 뒤처졌던 것이 그래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이번 산행에서 스스로 한 약속 중에 첫째가 '천천히 가는 자가 멀리 간다'라고' 중국 속담에 하였듯이, 이번 기회에 신기록을 세워보자. 가장 늦게, 가장 유유자적하는 종주 기록(縱走記錄)을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온 것이었다. 젊어서 지리산의 여러 코스 종주를 4번 한 경험도 있고, 만약의 경우에는 든든한 핸드폰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3.000장 이상 찍을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디지털 녹음기, 망원경을 메고, 이야기 속의 거북이 같이, 토끼 같이 여유 작작 금수강산 유람하려고 단독산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쫓아오나? 오라는 사람 있더냐?
거북과 토끼처럼 엉금엉금 쉬엄쉬엄
낙조(落照)의
몸을 이끌고
지리산 단독 종주 길
-낙조
*3. 아내와의 전쟁
앞에서 말한 것처럼 '누구와 같이 지리산에 오셨습니까?' 할 때 '나와 내 아내의 남편과 왔소'. 대답하였지만 '왜 혼자 왔느냐'라고 묻는 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서 왔지요.'
나는 늘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아내와 자식 자랑을 하다가 병신 소리를 듣는 게 내 소원이요.'
그 병신 소리를 한 번 더 듣기 위해 자식 자랑은 할 것이 없으니, 아내 자랑을 구체적으로 한 번 해봐야겠다.
뒤에 말하려는 아내의 거시기를 머시기만 하다가는 큰 변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내에 대한 칭찬은 일종의 억양법(抑揚法)으로 이해하여 달라.
'아내와의 전쟁'이란 제목의 글은 결론이야 어떻든 글 쓰는 이가 삼가야 할 제목이기 때문이다.
내 아내를 미녀라고 하는 친구도 많다. 45kg의 체중에 머리가 작고 여성답게 생겼다. 환갑 진갑 나이보다 한 대여섯 살 덜 먹어 보이기도 하여 꼬옥 안아 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질색을 하고 달아난다.
언제나 인색할 정도로 알뜰해서, 늘 '당신은 지금 내 복으로 사는지 알우-.' 하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아내가 지금까지 어떤 경우도 함께가 아니면 한 번도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옛날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하고 다녔다.
"저녁엔 만 원어치 술을 마시면서-. 아내의 통장에 돈이 고이면 아내 따라 해외를 나가고 돌아와선 그 여행기를 쓰지요."
생존해 계신 85세에 가까운 우리 장모, 장인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큰딸이라, 부모님 사랑 흠씬 받고 자란 아내를 얻고 싶다는 젊어서의 내 소원을 푼 셈이다. 아내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묻는다면 '우리 엄마'라고 할 아내이기 때문이다.
젊어서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아내의 시아버지가 중풍에, 치매에 걸려 병드신 아버지를 큰아들 큰며느리가 맡겼을 때, 말없이 묵묵히 거시기하는 병든 부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신 이가 둘째 며느리인 내 아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형네가, 작은아들도 자식이 아니냐고 제사를 다시 맡겨서, '이래도 당신도 형이냐?'라고 나는 형과 의절하고 말았다.
그때도 '진작 내편을 들어줄 것이지-' 하며, 말없이 차례 제사를 모셔온 것도 눈물겹게 고마운 아내요, 그것은 아내의 가정교육이 남과 달랐기 때문이다. 처제가 고려대를 나와 중국 대만대학원의 유학을 마친 인텔리고, 세 처남 중 둘은 그 어렵다는 서울대학교, 그중에서 서울대라는 문리대와 약대를 나왔다.
어떤가 이런 아내를, 처가 식구를 가진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이렇게 예쁜 아내가 세상에 다시 또 있겠는가?
나는 세상 아내들 중에 나쁜 측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첫째가 정조가 헤픈 여자, 둘째가 낭비하는 여자요, 셋째가 고집 센 여자로 나누어 왔다. 20여 년 전이던가? 집에 아내의 여고시절 동창생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면서 주고받던 말 중 이런 말이 있었다.
"얘, 너 지금도 그렇게 고집이 세니?"
그때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랬었구나, 아내는 역사가 있는 고집쟁이였구나. 여자는 모두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는데 우리 마누라의 고집에는 역사가 있었구나!'하고.
아내와 37년을 살아왔지만 한 번도 잘못했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고 다녔었다. 잘못했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아내가 있다면, 그 여인은 여우이거나 아주 현명한 여자일 거라고-. 자기 의견만을 굳게 내세워 버티는 것이 고집(固執)이지만, 이를 크게 쓰면 의지(意志)가 되는 법이니 여자의 고집은 과히 탓할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잔소리와 겹칠 때는 남편은 싫고 귀찮고, 피곤해지는 법이다. 그것이 우리 아내이고 나다.
잔소리란 무엇인가? 듣기 싫게 늘어놓는 잔말이다. 그것이 되풀이되면 괴롭고 두려운 잔소리가 된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앞에, 행하기도 전에 아내의 먼저 걸어오는 잔소리가 비위를 상하게 하기도 하였다.
남에게 말하듯이 조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걸러지지 않은 생각을 임의롭다고 그대로 말을 하면 되겠는가.
아무리 '세상에 잔소리 안 하는 아내가 있걸랑 손들어 봐! '한다지만, 나는 이야기 속의 호랑이가 곶감을 두려워한 것 같이 잔소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정년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내의 주문이 늘어간다. 청소를 해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가 되었고, 생수를 떠 와야 하고, 쇼핑을 같이 해줘야 하고, 아내의 외출 시 식사한 설거지는 스스로 해야 하고, 자기 팬티는 자기가 빨아야 한다나. 아내는 자기가 담당하던 그동안의 집안일을 서서히 나와 나누려 한다.
처음에 청소를 해주었더니 얼마나 감사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다니던지-, 벌써 도와주었어야 했을 것을- 하고 나도 신이 났었는데, 이제는 청소할 때마다 뒤 따라다니며 잔소리까지 하기에 이젠 아내 있는 데서는 절대로 청소를 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더니 얼마나 좋고 편하던지-. 잔소리도 성장하는 식물 같았다.
'나 같이 세끼 밥을 꼬빡꼬빡 차려주는 사람도 없을 거야'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리련만, 밥 세끼를 먹을 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서 한 끼 정도는 외식하지 않는 내가 미안해지기까지 하였다.
아내가 화가 났을 때가 가장 문제였다. 과거지사(過去之事)가 때마다 ㅂ빠짐없이 다시 또 등장하기 때문이다.
원망과 동반하는 잔소리는 뿌리가 깊다. 길가에 있는 풀처럼 단순히 뽑히는 뿌리가 아니다. 칡뿌리처럼 얽히고설킨 굵은 여러 갈래의 뿌리였다. 건드릴 때마다 남편의 부모, 그 형제 등 아픈 상처까지 되살아난다.
자식이 출가하면 아내의 외출이 잦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남편이 정년하고 놀고 있는 각양각색의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올 때, 우리 마누라가 이제는 나를 구체적으로 부려먹을 학습과 연구를 하고 오는 것이나 아닌가 해서 아내의 외출이 탐탁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아내가 외출한 뒤에 잔소리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나의 일에 전념할 수 있어 오히려 편한 것은 나만이 느끼는 일일까? 글쟁이가 글을 완성했을 때 기쁨이 어떤지 아는가? 그 글이 아내와 관계되어 있어 보라고 하다가 나는 곧 후회하고 말았다.
"나, 지금 연속극 보고 있는데 ―-."
이렇게 보면 자식도 다 키워놓으면 남이 되듯이, 늙으면 아내도 남인 것이다. 곱게 받들어 모셔야 할 남이 되고 마는 것이다. 누가 '늙어 재산이 늙은 마누라라 하였던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혼 생활이란 크게 보면 '아내와의 전쟁' 같다. 젊었을 때는 남편이 이기다가, 노년기에는 아내가 승자가 되는 전쟁 같다.
무력을 써서 행하는 싸움이 전쟁이라면, 아내와의 전쟁에서의 무기는 무엇이었던가?
주먹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 아내와의 전쟁에서 얼마나 속절없는 무기인 것을 우리 남정네는 얼마나 아프게 경험했던가.
주먹은 소의 뿔처럼 허무한 것이다.
현대 국가 간의 전쟁 무기는 경제력이다. 마찬가지로 아내와의 전쟁에서도 경제력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승패가 좌우된다. 세계를 다녀보니 선진국은 예외 없이 아내와 남편이 다 함께 벌어야 살 수 있는 사회였다. 둘 중에 약자가 집안일을 맡아하는 나라도 많았다. 서양에서 여권이 강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고로 경제력의 주체가 우리네 남정네였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남편들보다 잘 대접을 받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맞벌이 부부, 그중에도 여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아내에게 당하고 사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 대개의 경우 한 마디로 참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종처럼 살고 있지나 않는지?
대다수 쥐꼬리 월급쟁이의 경우, 나처럼 남자가 벌고 여자가 살림하는 식으로 살다 보면, 아내가 남편 월급을 관리하게 되고, 그러면 그 월급은 많든 적든 영원히 아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네 남편들은 머리 잘린 삼손처럼 힘을 잃고 아내 눈치나 살피며 아내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되찾으려면 6.25 전쟁, 아니 3차 대전 이상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
지금 사회는 조선의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중심의 사회로 바뀐 지 오래라.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TV다. 그중 드라마 시청자가 대부분 부인들이고, 드라마 작가마저 여류(女流)라, 우리들 남편들은 TV에 가련한 허수아비 힘없는 남편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한국의 아내들의 눈요기 감을 위해서다.
잔소리에도 확대 성이 있다. 하나의 잔소리가 먹혀들 때 그 효용성에 대한 인식으로 잔소리는 배가되는 것이다.
남편의 좋은 점은 다 묻어 버리고, 자기만 당하고 사는 피해의식 속에 아내는 나와 살고 있지만 자꾸, 그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요즈음이다.
"여보, 비누로 깨끗이 세수할 수 없어요?"
"수건에서 냄새가 나요."
비누를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피부에 좋다는 것은 나의 철학인데- 수건은 사흘 정도에서 바꾸어 주기만 하면 되는 그까짓 것을 가지고-. 10년 넘게 아내가 나의 자존심마저 건드린다고 생각될 때, 그러면서도 그 아내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나도 허 생원전에서처럼 집을 뛰쳐나오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잔소리는 태풍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하고 왔냐구요? 나와 나의 아내의 남편과 왔지요." 하는 말은 그래서 하게 된 것이다.
*. 전설 따라가본 종주 길 샘터
지리산 종주 중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는 평균 1,300m의 능선 따라가는 길이다. 1,507m의 노고단, 1,424m의 돼지령, 1,432m의 임걸령, 1,514m의 삼도봉 등으로 이어지는 1,000m 이상의 봉우리만도 13개, 900m 이상의 고원만도 9개가 넘는다. 이 길을 보통의 경우 2박 3일로 가려면 그 식량만의 무게만도 만만치 않은데, 식수까지 짊어지고 간다고 생각하여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더구나 천천히 가면 더욱 많이 준비해야 하는 식량과 식수를-.
그러나 우리의 지리산은 산을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그 오아시스 같은 샘터를 목이 마를 만한 거리들 두고 곳곳에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 물을 열고 있다.
*. 임걸령 샘터
종주 길의 첫 발길에 해당하는 노고단 샘터를 지나 처음 만나게 되는 샘터가 임걸령 샘터이다.
'임걸령, 임걸령' 하며 벼르며 가다가 드디어 도착하였더니 입구에 가방이 즐비하다. 장비로 보아도 분명 전문적인 산꾼들이 나보다 앞서 왔나 보다.
내려가보니 2~30대 오륙 명이 '취사 야영 금지'라는 입간판 앞에 점잖게 앉아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계시다가 내가 카메라를 들이 대니 기겁을 한다. 나도 점잖게 타일러 주었다. 내가 누구냐? 의리의 사나이 매죽헌 성삼문의 자손이 아닌가.
만약 그들이 수를 앞세워 "당신이 뭐요?" 하고 대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나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요."
돌절구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잘 꾸며 놓은 물길로 시원한 물이 상큼하게 흐르고 있다.
그 물을 마시니 물맛이란, 아까 말한 금수강산(金水江山)처럼 생수(生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였다. 베개 겸으로 사용하려 지고 다는 물통에 무겁지 않은 만큼 물을 채웠다.
옛날 이곳은 녹립호걸(綠林豪傑) "임걸(林傑)"이라는 의적(義賊)의 은거지 되었던 소굴이었다는 데서 '임걸(林傑)"에다가 이 고개는 피아골로 내려가는 재라, 고개 령(嶺)을 붙여 임걸령이라 하였다고 한다.
*,뱀사골샘
노고단에서 6.3km 거리에 '뱀사골대피소'가 있고 그 앞에 샘터가 있다.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하는 이 물은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등에서 발원하여, 한국 계곡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뱀사골 계곡이 되어 흐른다.
왜 하필 이름이 '뱀사골'이라고 하였을까?
보통 생각하기에는 뱀이 많은 골인가 보다 하는데 그게 아니다.
배암사 골 입구에 석실(石室)이 있다. 그 건너편에 옛날에 '배암사(背岩寺)'란 절이 있었단다. 등 '배(背)', 바위 '암(岩)' 절 '사(寺)', 바위 뒤에 있는 절이라는 말이다. 그 말이 줄어 '뱀사'가 되었다든지, '뱀소(沼)'란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더 유명하다.
옛날 지금의 뱀사골 입구에 송림사란 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칠석날(7월 7일) 밤이 지나면 주지 스님이 사라지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로 승천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이곳에 왔다가 이 말은 듣고 이상히 생각하여, 칠석날에 비상(砒礵)을 넣은 장삼을 주지 스님에게 입고 독경하도록 하였다.
새벽이 되자 요란한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큰 뱀이 송림사 계곡을 황급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서산대사도 뱀을 따라 올라가 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 소(沼)라는 못에 죽어 있었다.
뱀의 배가 불룩하여서 배를 갈라 보니, 송림사 주지 스님의 시체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뱀'에다가 죽을 '사(死)'를 더하여 뱀사골이라 하였다. 그 송림사의 터가 지금의 반선 '전적기념관'이 있는 자리다.
.* 총각샘
'총각샘'은 토끼봉(1,534m)을 지나 연하천 가는 길에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위치에 있다.
이정표 남쪽으로 약간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있어 산삼 캐러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는 샘인데, 이런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듣고 1970년 7월에 지리 산악회의 노총각 2명이 드디어 이 샘을 찾아냈다고 해서 '총각샘'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장터목대피소에서 20m쯤 내려가서 샘이 있는데 이를 '산희(山姬) 샘"이라 한다.
이름을 지을 당시 지리산악회 회원 안기호(安琦浩) 씨의 사랑하는 딸 이름이 산희(山姬)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 여성적인 이름과 짝하기 위하여 이 샘을 '총각샘'이라고 명명하였다는 말도 있다.
이 총각샘에 흠이 있다면 지리산 다른 샘터와는 달리 갈수기에는 말라버린다는 것이다.
*. 선비샘
벽소령대피소에서 칠선봉(1,576m) 가는 길인 상덕평 능선에 널찍한 공터가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한 '선비샘'이 있다.
선비란 무엇인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사회의 지도적 계층이었다. 산림 속에 은거하게 되면, 유교의 도를 강론하여 이를 밝히고 수호하며 실천하는 사람이요, 관직에 나가면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는 계층들이다.
옛날 이 샘 아래의 상덕평(上德坪) 아랫마을에 화전민 후손으로 얼굴이 못생기고 무식하여 가난과 천대 속에서 한(恨)을 살아온 한 노인이 임종을 맞이하며 선비로 살고 싶었던 한을 두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하여, 그의 소원을 풀었다.
"내가 죽으면 마을 위 재 샘터가 보이는 위에 무덤을 써 달라."
이리하야 천하명승인 지리산을 유람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물을 마실 때마다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이는 것을 무덤 속에서 바라보는 노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나도 죽으면 화장하여 그 재를 예쁜 병에 고이 담아 노인 묘 위에다 묻어라 자식들에게 유언할까 보다.
이 아름다운 전설을 몰랐던가. 지금은 무덤이 없는 것은 물론, 축대를 쌓고 파이프 하나를 쿡 박아 '선비샘'의 멋진 명칭과 어울리는 것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샘터를 만들고 말았다.
*. 연하천(烟霞泉)
목이 타는 듯이 물이 그립다가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하니, 자욱한 연무 속에 바로 대피소 입구 앞에 물이 개울이 되어 흐르는 것이 지나온 어느 샘터보다 수량이 풍부한데, 그 시원한 물에 맥주를 담가 목마른 산꾼을 유혹하고 있다. 국립공원 대피소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곳은 민간인이 운영하는가 보다.
연하(煙霞)란 뜻 같이 안개가 고요한 산수의 비경과 어울린 속의 그 샘[泉] 바로 옆에서 행복하게 점심을 먹었다.
물을 뜨는 노인이 있어 커피를 대접하다 보니 그 유명한 소설가 이호철 씨였다. 71세의 노인이, 내가 뱀사골에서 연하천까지 젖 먹던 힘을 다해 온 4.2km보다 6.3km나 더 먼 노고단에서 성큼 달려온 것이다. 평소 30년의 등산이라는 좋은 습관은 나이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 노 작가와의 인연은 벽소령에서 다시 이어진다.
그분의 말 따라 벽소령에서도 장터목에서도 팔지 않는다는 팩소주를 2병이나 4배나 더 많은 값을 치르고 샀다.
장터목대피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1,730m의 연하봉(烟霞峰)이 있다. 그 연하(烟霞)를 따서 지리산 산악회[전신烟霞伴]에서 명명한 것이다.
* 세석 음양수(陰陽水) 샘터
산장이 가까워지면 인조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법이다. 둥근 나무로 만든 계단이나 나무 계단 등 잘 다듬어진 길이 그것이다. 세석이 가까워지니 지리산 비경(祕境)이 하나씩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영신봉을 넘어서니까 세석평전(細石平田)이 확- 눈에 들어오는데 심심산천에 헬기 소리 요란하다. 기다랗게 무언가 달고 왔다가 검은 상자 같은 것을 달고 지나간다..
카메라맨에게는 물실호기(勿失好機)라. 피곤을 잊고 달려가서 수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화장실을 짓느라고 그 자재를 운반하는 민간 헬리콥터였다. 내려갈 때는 인 분뇨통(糞尿桶)을 나르는 것이고-, 그 화장실은 장터목처럼 일을 보면서 그 멋진 철쭉 꽃핀 평전(平田)과 촛대봉을 볼 수 있도록 만든다 한다. 다가가 보니 포클레인으로 열심히 일을 하기에 어떻게 저 무거운 것이 올라올 수 있는가를 물었더니, 분해하여 헬기로 옮겨오고 여기서 다시 조립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큰 이 세석대피소는 정부가 23억 원을 투입하여 2층 6백53.33평방미터 규모의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는 화장실 확장이 시급했던 것이다. 지금은 취사장으로 쓰고 있는 구 대피소 앞이었다.
대피소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 '음양수(陰陽水) 샘터'가 예보던 모습으로 있다.
예로부터 자식 없는 사람들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로 국립공원이 지정되기 전에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이 물을 마시고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이 음양수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옛적 산 아래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곳에 곰과 호랑이가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 호야가 일하러 나간 사이 마음 착한 곰이 부인 연진에게, 세석고원에 자식을 낳게 해주는 신비한 음양수샘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이 음양수를 찾아와서 실컷 마셨다. 호랑이가 이 사실을 산신령에게 밀고하자 화가 난 지리산 신령이 천기를 인간에게 누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가두어 버리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으로 살게 하고, 연진에게는 잔돌[細石]밭에서 평생을 철쭉을 보살펴야 하는 형벌을 내렸다.
연진이는 잔돌에 터져 흐르는 다섯 손가락의 피를 철쭉에 뿌리면서 눈물의 나날을 살았다.
연진은 밤이면 촛대봉 정상에다 촛불을 켜놓고 용서해 달라고 옛날과 같이 남편과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빌고 빌다가 가엾게도 그만 돌이 돼버리고 말았다.
한편 사라진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가 제지당하여, 어쩔 수 없이 절벽 위에서 목메어 아내를 불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해마다 유난히 붉게 피는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마음이라 하고, 촛대봉의 바위는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세석(細石)이란 잔돌을 말하는 것이고 평전(平田)이란 높은 곳에 있는 평평한 땅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 세석평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원으로 그 주위가 12km나 된다.
*. 종주 길 따라 만나는 지리산 지명의 유래
*성삼재와 노고단
옛날 같으면 화엄사에서 3∼4시간 헉헉거리며 진을 빼고 나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던 노고단을 구례 버스터미널에서 노고단행 버스를 이용하였다. 버스도 힘들었는지 에어컨을 끄고 1,102m나 된다는 성삼재에 50분만에야 우리를 풀어놓는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 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여기서부터 노고단까지는 아스팔트길인데 함께 구례에서 버스를 타고 온 목발을 짚은 지체부자유 청년이 오히려 나를 앞서 가지만 짐이 무겁고 숨이 차서 쉬고 쉬었다. 이렇게 어찌 대원사 종주를 하지? 하며 의심이 자꾸 앞선다.
드디어 붉은색3층 노고단대피소가 보인다.
해발 1,507m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원래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란 뜻이다.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를 말한다. 서술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라고 하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이분을 나라를 수호하는 산신으로 받들고 봄, 가을마다 제사를 올렸던 곳이 바로 노고단이다.
옛날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명산이 있어 이를 오악(五嶽)이라 하였다.
신라에도 오악이 있어 동(東)에 토함산, 서(西)에 계룡산, 남(南)에 지리산, 북(北)에 태백산 중앙(中央)에 부악(父岳 팔공산)이 있어 매년 풍년과 나라 수호를 위한 제사를 올렸다.
노고단(老姑壇)의 노고(老姑)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의 높임말이며 단(壇)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의 '단(壇)이다. 그래서 '노고단(老姑壇)'이라 하였다.
이 노고단은 높이가 1,507m로 천왕봉(1,915 m), 반야봉(1,734 m)과 함께 지리산 3대 영봉의 하나로 꼽는다.
신라시대에는 주로 화랑의 연무장으로 쓰이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서양선교사 등의 휴양지로, 6.25 때는 빨치산의 근거지로 쓰이기도 하던 곳이다.
나이가 들어 노인 나라에서 살 때가 되면 라디오는 내 친구가 된다. 홀로 나들이를 할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듣거나 말거나 항상 나직이 속삭여 주는 변함없는 둘도 없는 외로운 황혼기의 친구였다.
남자보다 성을 빨리 잃어버리는 것이 여자라, 가족 해체 완료기가 끝날 무렵이 되니까 아내와 각방을 쓰게 되었다. 그게 벌써 5~6년이 넘었고, 지금은 화장실까지 각각 쓰고 있다.
노고단을 지나 뱀사골로 가면서 그 라디오로 일기 예보를 들어보니 태풍 루사[Rusa 말레시아어로 사슴]호가 우리나라 쪽으로 북상하고 있다 한다.
59년 9월 중순 한반도를 덮친 사라호에 849명이 사망하고 2천4백55억 원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는데 이번 태풍 루사도 시기와 진로가 사라호와 비슷하다고 겁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1,300m의 능선을 오르내리면서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등에 진 무거운 식량과 비상금이 넉넉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조용한 산장에서 한 열흘쯤 푹 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년퇴직한 한 물 간 일수거사(一水去士)이어서 급히 내려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내일까지 벽소령대피소까지 가기만 하면 되는데, 태풍은 제주도에도 미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부리게 할 수 있는 젊음이 아니고, 몸이 마음을 부리는 나이라, 충분히 잡은 일정 때문에 식량 준비가 많아서 배낭의 무게가 15kg이 훨씬 넘어서 산길을 오를 때는 한없는 땀과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허나 짐 속의 하나하나는 이럴 때를 위하여 준비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라, 어느 것 하나 헛됨 없이 산중의 생활의 나를 도와줄 물건들이라, 그 무게는 북상해 오는 태풍 소식 앞에서도 나를 오히려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었다.
노고단에서 뱀사골까지는 6.3km로 보통 걸음으로는 3시간으로 넉넉한 거리인데, 등산을 십여 년 훨씬 넘게 안 한 데다가 쉬엄쉬엄 가다 보니 노루목에 도달할 무렵에는 손전등을 켜야만 했다.
인적 하나도 없는 1,300m가 넘는 높고 깊은 산중에서 달도 없는 그믐밤이라 칠흑 같은 어둠에 갇혔는데, 손전등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면, 짐승이 막 달려드는 것 같아 놀래기도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아무리 산중에 산이라 한들 나보다 체격이 큰 짐승이 없음을 익히 앎이라.
그보다 두려운 것은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지만, 길가에서 마주치는 나무에 대한 설명 표지나, 도중 도중에 있는 사고 신고 표지판이 흰색이어서 캄캄한 밤에 이정표의 역할을 훌륭히 하여 주어서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잠깐씩 쉴 때마다 손전등을 끄고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어렸을 때 보던 검푸른 하늘과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 눈이 시리도록 너무나 아름다워서 넋을 잃고 바라보곤 하였다. 태풍 전야의 하늘이기 때문인가 보다.
뱀사골대피소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별명이 '한량'이라는 대학생과 준비해 간 오십세주를 아낌없이 나누어 마시면서, 우리는 종주 길 따라 만나는 지리산 지명의 유래와 전설에 대하여 밤 깊게 이야기하였다.
**반야봉(般若峰)의 전설
노고단 전망대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봉이 여인의 벌거벗은 히프와 같은 산이다. 저 산이 천왕봉 다음으로 손꼽히는 그 유명한 1,732m의 반야봉(般若峰)이다.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의 참모습을 환하게 알게 되는 지혜가 반야(般若)의 참뜻이다. 이 지혜를 얻어야 성불한다는 것이 바로 반야인 것이다.
그 반야(般若)의 경지에 이른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옛날 마고할미라고 하는 천신(天神)의 딸이 도사 반야를 만나 결혼하여 천왕봉에서 살았다.
반야는 딸 여덟을 나아 놓고 반야봉으로 도를 닦으러 떠나가서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나무껍질을 벗겨서 정성껏 남편 옷을 짓고 남편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만 화가 나서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는 홧김에 그만 죽고 말았다.
그때 찢긴 옷이 남편이 있는 반야봉으로 날아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고, 여덟 딸들은 8도에 내려가 8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의 반야봉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이고, 반야 봉우리에 안개가 자주 끼는 것은, 마고 할머니와 반야가 저승에서나마 만나고 있는 것이라 한다.
* 토끼봉과 날라리봉
토끼봉 가는 길에 노루목이 있지마는 날이 저물어 갈 엄두를 못 내고 지나치고 말았다.
노루목에서 '목'이란 무엇인가.
지리산 종주 길에 만나는 '노루목'은 물론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뜻도 있겠지만 1,732m 반야봉에 오르는 길목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여야 한다.
반야봉에서 피아골 쪽으로 가파르게 흘러가던 산세가 여기[노루목]에서 잠시 멈추어 마치 노루가 머리를 지켜 들고 있는 형상의 바위 모양 때문에 노루목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목이란 말은 종주 길에 '장터목', '치밭목'에서도 만나게 된다.
노루목에서 토끼봉 가는 길에 1,499m의 '날라리봉'이 있다. 정상의 바위가 농기구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해 낫날봉으로 불리다가 '낫날'이란 발음이 불편하여 그 뜻을 잃고 편하게 국악기의 하나인 날날이의 날라리봉으로 변음된 것이다. 지도에서 날라리봉을 보면 삼도봉[날라리봉]으로 표기되어있다. 날라리봉이 전남, 전북, 경남의 3도를 나누는 기점이기도 하고, 날라리란 말은 미덥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낮은말이어서 삼도봉(三道峰)으로 고친 것 같지만, 예로부터 전해오는 지명을 편의상 함부로 고증도 없이 바꾼다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날라리봉[삼도봉]에서 20여분 가니까 1,534m의 토끼봉이란 표지판 앞에 커다란 헬기장 같은 공간이 있다. 돼지평전처럼 여기도 산토끼가 많이 사는 곳이로구나 하던지, 아니면,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렇게 부르는구나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야봉을 기점으로 이곳은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 '묘(卯)' 봉우리 봉(峰)이라 하여 '토끼봉(卯峰)'이라고 한 것이다.
* 형제봉(兄弟峯)
연하천 산장을 지나 벽소령대피소로 가는 길 중간쯤에 1,433m의 형제봉이 있다.
삼각고지에서 내려가다 왼쪽 능선 위에 있는 바위가 그것인데 자세히 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서있는 두 개의 석상이다.
지리산에서 수도를 하는 두 형제가 있었다. 이 형제를 사모하는 지리산 요정이 갖은 방법을 다해 두 형제를 유혹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도 지속되는 지리산 요정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하여 형제는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이를 경계하다가 그만 몸이 굳어 그대로 두 개의 석상 형제봉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 치밭목 대피소
천왕봉에서 대원사 쪽으로는 내림 길이지만 이 길은 지리산 옛 이름 두류산처럼 두리뭉실한 길이 아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돌길을 따라 천왕봉 다음으로 높은 1,874m 의 중봉(中峰)을 지나 봉우리가 없이 농기구 써레같이 생긴 1,602m의 써리봉을 지나 8km 지점에 '치밭목대피소'가 있다.
원래 이 길은 대원사(大元寺)에서 지루하게 올라오다가 여기서부터 가파르게 계속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치받아 올라가는 산이라 하여 이름이 유래된 것 같다. '내리받이', '치받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다른 뜻으로 말하면 곰취, 단풍취, 참취, 수리치 등 '취'는 식물 이름에 붙는 말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옛날 깊은 산속 나물[취] 캐던 밭이라 하여 '취밭'이라 하던 것이 경상도 사투리로는 '치밭'이어서 거기에 위에서 말한 '목'을 붙여 '치밭목'으로 된 말이다.
지리산 산장이 있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안다. 조용한 산 속이라 멀리서부터 요란한 발동기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전기를 켜기 위해서다. 거기에 쓰는 기름은 1년에 2번 헬리콥터로 운반한다. 그때 쓰레기도 함께 수거해 가지고 간다.
그러나 치밭목대피소에서 산꾼이 쉬어 가는 낮을 보내고 나면, 달과 별과 나뿐이 호롱불과 함께 잠들게 된다.
남국에서 십자성을 헤며 바라보던 하늘보다, 더 가깝고 더 크게 별들은 반짝이며 속삭여 주고 있었다. 태풍이 하늘을 씻고 지나가서 더욱 그러하였다.
동트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보면, 해는 천왕봉 같이 허공에 허무하게 그냥 떠오르는 일출이 아니라 1,425m에서 자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떠오르는 해였다.
자그마한 마당에 쉬어 가라 만들어 놓은 의자도, 대피소 입구 모습도 모두가 고사목으로 그 자리에서 자라난 나무같이 자연스러웠다.
돌아보면 중봉(中峰)이 나무 뒤에서 수줍은 듯이 갸웃이 바라보고 있었다.
게서 만난 산꾼 처녀가 나의 마음을 대신 말하고 있다. '산장 중에 가장 멋진 산장 중에 산장에서 우리가 1박한 거라고'.
거기에 책임자로 있는 옛날에 선생님이셨다는 목석 같은 사나이 민병태씨가 하얀 진돗개 보리와 그 새끼와 함께 사는데, 보리는 등산로 입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이놈도 산이 좋아 산에서 사는가, 산꾼이 오면 손님이 왔다고 반갑게 짖으며 마중을 나선다
*. 태풍 루사 덕을 톡톡히 본 사람/-벽소령 대피소에서
그 무섭던 사라호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고 간 태풍 루사호가 한 반도를 할퀴고 가던 사흘 동안을 나는 덤프트럭도 날린다는 그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곳은 1,340m나 되는 벽소령대피소였다. 커다란 철빔으로 기둥을 한지라 밖은 산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불고 있어도 불안하지가 않았다. 이름 그대로 대피소였다.
그 사흘 동안 바람에 날려 날라 갈까 봐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쪽 창문을 열고 컵을 내밀고 있으면 얼마 안 되어도 물이 가득 찼다. 그 물로 이를 닦고 양치를 하고, 고양이처럼 얼굴을 씻어야만 했다.
화장실도 밖에 멀리 있어서, 나면 봉지 하나에다 실례를 하고 창을 통해 몰래 버렸다.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은 수용인원 250명의 현대식 시설을 갖춘 이 대피소에 발이 묶여 있는 사람은 TV 뉴스에 나오는 대로 나를 포함하여 4 사람뿐이었는데, 2층으로 된 커다란 2호실 1층 창가에서 나 혼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 사람은 마음에 드는 직장을 찾고 있는 29세의 예쁜 처녀 최혜영 양과, 30대 후반의 부부인데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산행을 하는 이민을 준비하고 있는 염인호씨 내외였었다. 세 분 다 내 고향 인천에서 온 사람들인 데다가, 같은 처지를 당한지라, 우리는 장터목까지 함께 숙식을 하면서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난 후 내가 갈 대원사 길로 먼저 내려갔다.
벽소령은 지리산 종주의 중간쯤 되는 곳이어서 예서 사흘을 머물기 위해서는 식량과 가스와 술꾼인 나에게는 무엇보다 술이 필요하였지만 나는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였다.
거시기산악회 회원들이 산을 찾아 나섰다가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급히 하산한 사람들의 고운 마음씨 때문이었다.
자연 속에 묻히면 마음이 이렇게 자연처럼 너그러워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마음씨 고운 건강한 이들이 산을 찾아 나서기에 그런 것인가.
하산하면 필요 없다고 그 비싼 쌀, 햇반, 반찬, 가스는 물론 별로 짐이 되지 않는 귀한 인스턴트 국거리까지 다 주고 하산해 갔다. 뜯지도 않은 새로운 것들이었다.
이호철 소설가가 회장으로 있는 70대 '거시기 산악회' 팀에게는 나는 거지가 아니라고 비옷[雨衣]도, 약간의 노자도 드리고, 문단 선배 이호철 소설가에게는 기념하시라고 차고 다니던 나침반도 빼 드렸다.
한전산소산악회 대전에서 온 산소 산악회 팀에게는 얻어만 먹은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기 그지없다. 사진으로나마 갚겠다고 사진을 몇 장 찍은 것이 고작이니 말이다.
대전 산소 팀과 어울리게 된 것은 루사 태풍이 한창이던 날 통제를 하지 않는 코스를 통해 내친김에- 하고 전신이 비에 젖도록 무리를 해서 두려운 폭풍을 뚫고 올라온 모양이다. 천왕봉을 가겠다고 벼르면서 그 힘든 모처럼의 직장의 휴가를 얻어 지리산 기슭까지 왔는데 발길이 그냥 돌아서겠는가.
70대 서울 거시기 산악회 분들께 양식을 물려받고 대전 산소산악회 분들에게는 벽소령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술대접까지 받았으니 나는 분명 그분들의 고운 마음씨들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태풍 루사 호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수해 민에게는 한없이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그래서 앞으로 태풍이 올라온다 소식이 들리면 지리산을 서둘러 다시 와야지- 하는 엉뚱한 말을 하며 같이 웃곤 하였다.
어떻든 그 당시 내게는 절대로 필요했던 일용할 양식을 물려받은 덕분에, 나와 같은 처지의 분들과 나누어 쓰면서 여유 있고 행복한 산장의 사흘을 보낼 수가 있었다.
구례에서부터 앞니가 여섯이나 빠진 70이 가까운 사람이, 혼자 와서 천연덕스럽게 지리산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었으니, 태풍으로 문밖을 나설 수 없는 때 그분들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을까?
나는 혼자 온 덕에 어느 팀과도 함께 어울릴 수 있었으니, 다양한 색깔 있는 기행문을 쓰고자 떠나온 사람이라 마음속으로 다음에도 혼자 와야지 하였다. 먼 산을 찾아가려면 여행을 동반하게 된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처럼 나선 여행에 귀한 추억을 보태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서울에서 구례까지 오는 길에, 천안에서 포도밭과 양봉을 하며 산다는 60대의 낭만적인 노인 같지 않은 마음 착한 분을 만났다.
작년에 아내를 잃고 보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크던지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다고, 50대 여인을 만나러 이리로 가던 사람이다. 타이프로 곱게 쓴 연서(戀書)를 보여 주기에 보다가 보니 와락 옛날 젊었을 때 생각이 난다. 밤새워 쓰고 아침에 찢어버리던 소녀를 사랑하던 그 젊디 젊었던 시절이.
그때 그 소녀는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얼굴로 살고 있을까? 박인환 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지금 그 사람 이름도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한창 아름다운 가을 들판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예츠의 시(詩)도 나직이 읊어 본다.
다른 사람 나의 님이 되어오다.
너 깊은 맹세를 저버림이라.
허나
술에 취하였을 때,
잠의 높은 고비를 오르내릴 때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갑자기 너의 얼굴 마주친다.
-굳은 맹세
사람의 일생 중에 사랑을 하고 있을 때처럼 아름다운 때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 김동식씨가 목포 쪽으로 함께 가고 싶다고 하던데. 함께 가게 되었는가? 폭풍 오는 줄도 모르고 홍도를 권했는데, 만약에 갔다면 큰 고생을 하였을 텐데, 그 보다 사랑은 태풍을 타고 아주 결실을 맺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산하면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그 로맨티스트에게.
여기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태풍 속의 혼자만 있는 대피소라, 자꾸만 재미난 생각을 키운다.
태풍이 동해 속초 쪽으로 빠져 나갔다는 날 밤은, 밤새 밤하늘을 보러 들락거렸다.
달밤이면 고산의 푸른 숲 위로 하얗게 웃으며 떠오르는 달이 너무 고와서, 그 하늘 색깔이 푸르게 보인다 해서 푸를 벽(碧), 밤 소(宵) 벽소령(碧宵嶺)이 아니던가.
태풍에 씻겨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검푸른 하늘에는 요번 7월 뉴질랜드와 시드니까지 가서도 볼 수 없었던, 찬란한 별들의 가을 잔치가 한창이었다. 그 동쪽에 새벽 그믐달이 하얗게 떠 있었다.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에서 보던 밤새워 술 먹다가 오줌 누러 나온 술주정뱅이가 본다는 그믐달, 도둑놈이 담을 넘을 때 보는 달이라는 그믐달이 가느다란 눈썹 같은 모습으로, 지리산 10경 중에 하나인 벽소야월(碧宵夜月)에 취한 나의 카메라에 그 아름다운 포즈를 취해 주고 있었다.
*. 벽소령 일출
아침 일출을 기다리다 보니 40대 초반 산 사나이 하나 부지런히 가기에 물어보니 31일 계획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단다. 이런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물어보아 주는 것도 적선이 된다.
사진을 찍어 주며 시 한 수 넣어 보내 주면 나에게는 무얼 주겠냐고 물었더니 말한다.
'주문진으로 오시기만 하세요. 회 한 접시 터-억 대접해 드릴 테니.'
하고는 바람을 가르며 신선처럼 사라진다. 강릉시주문진읍에 있는 '명주회관' 정주교사장이었다.
신선이 무언가? 펑-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펑-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던가.
바람 같이 왔다가 구름처럼 가는 이야
천왕봉서 미시령까지 백두대간 마쳤는가
벽소령
나그네 기억하오?
들르리다, 말 빚 받으러.
2002. 9. 2
**7. 연하천(烟霞泉) 선경의 낙조
기진맥진한 채, 맥진기진한 채 무거운 짐을 진 몸으로, 지리산 지도 무늬의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땀을 온몸에 흘리면서 기암괴석 무성한 바위에 오르니 여기가 지리산 10경 중에 하나인 바로 해발 1,667m의 연하봉이었다.
옛날에 친구 따라와서도 그냥 넘던 곳, 가족 산행을 하며 짐이 너무 무거워 다음 목적지의 표지판만 보고 무심히 지나치던 곳이, 나이 들어 시인과 수필가가 되어서 글쟁이의 눈으로 보니, 산과 봉은 예보던 산이 아니다. 무심히 지나치던 봉우리가 아니다. 와락 품에 안겨, 눈에 잠겨 속삭여 주는 꿈의 산이고, 꿈의 봉우리였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산에서 지는 단순한 해가 아니라 1,667m에 선 나무 사이로, 눈 아래 1,000m가 훨씬 넘는 봉우리 너머, 구름과 구름 밖에 노을을 이끌고 지는 낙조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일산 평야가 보이는 신도시 일산 서쪽 끝이라서, 겨울이 가까워 오면 강화 쪽으로 지는 장엄한 낙조를 감탄하며 살아왔지만, 심심산천 고봉에서 지는 해를, 그것도 천하의 선경이 펼쳐있는 연하천 봉우리 탁 트인 시야에서 지는 해를, 나도 기암괴석의 하나가 되어 그것도 나 혼자서,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연하선경을 제석과 천왕봉과 같이 바라보며 카메라로 연신 기념을 기록하고 있는데, 흐르는 땀을 시원하고 서늘한 저녁 산바람이 식혀 주고 있었다.
장터목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제석봉 천왕봉을 뒤에 두고 아름답게 솟아있는 모습이 경치가 그렇게도 좋다는 스위스 어느 한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근처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다. 저걸 무어라 하지? 하늘을 나는 저 고무 비행기를.
종주 길에 '목'이란 지명은 세 번 만난다. 노루목, 장터목, 치밭목. 목은 사람의 육신 중 몸과 머리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곳인 것처럼, 다른 곳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한 좁은 곳이다. 목은 낚시로 보면 포인트요, 산으로 보면 길목에 해당하는 말로, 장사꾼으로 보면 황금의 노다지를 가져다주는 길목이다.
이와 같이 장터목은 청왕봉 가는 길에 연하봉과 능선이 만나는 길목이요, 마천면 주민과 시천면 주민이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을 열어 물물 교환하는 장터였지만, 요즈음은 천왕봉을 탐내는 무리들이 오가는 길목이요, 자고 가는 장터목대피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8. 천왕봉 일출을 보고도
엊저녁 장터목대피소의 옆 사람이 하두 코를 골아서, 산장 책임자에게 부탁하였더니 고맙게 도 2층으로 자리를 옮겨 준다.
침낭에다가 귀중품 카메라와 베개 삼아 지고 다니던 물통을 넣어 가지고 잠을 청하니 훨씬 덜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 비로소 잘 것 같다.
자자, 잠을 자야 내일 일출 보지- 하다 잠들었는가 했는데 주위가 바시락바시락, 수선수선 하기에 야광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경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서둘러 짐을 꾸리고들 있는 것이다.
나도- 하고 침낭을 움켜쥐고 배낭이 있는 1층으로 조심조심 내려가는데 무언가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게 있다. 이어 "아이쿠! 누구야," 하는 비명이 울리고 점잖은 욕설이 들린다.
큰일이 난 것이다. 나의 베개 겸 물통으로 쓰던 것이 아래에서 잠자는 이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춘 것이다. 이마 한가운데 피가 흐르는 것을 함께 온 친구가 닦아주고 있었다.
몇 마디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되지?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1.7km 코스지만 느림보인 나도 정신없이 남들처럼 1시간에 올라왔다. 장터목에서 자고도 천왕봉 일출을 못 보면 어쩐다 하는 생각도 생각이지만, 아까 이마를 다친 이가 쫓아올까 해서였다. 젊은 날에 배워온 얄팍한 지혜로는 이런 경우에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자리를 모면하기만 하면 어둠 속에 있었던 사람을 어떻게 기억할라구? 시침을 딱 띠면 고만이지, 하는 불순한 생각에서였다.
도망갈 수 있는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고 보니 피곤이 와락 엄습해 왔다.
천왕봉의 자매봉인 1,806km의 제석봉이었다. 자유당 말기 장터목에 제재소까지 채려 놓고 무자비하게 도벌하다가 탄로 되자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질렀다던가. 나쁜 놈들 지옥도 못갈 놈들.
그 고색창연한 고사목(枯死木) 지대를 지나, 부정한 자 출입을 못한다는 하늘과 통한다는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하여 천신만고 끝에 천왕봉에 오르니, 붉은 운무 속에 햇살이 막 부채처럼 찬란한 오색광채를 이끌고 하늘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다가 한순간에 불쑥 솟구쳐 올라오려 한다.
나는 천왕봉 정상에 오르기도 전부터 카메라 셔터를 수없이 눌러댔다.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천왕봉 구경 온 사람들을 향하여, 천왕봉 표지 석을 향하여, 천왕봉을 둘러싼 동서남북 사방의 조망을 향하여-. 산꾼이라고 이름 할 수 없는 내가 이렇게 힘들게 1,915m 남한에서 둘째로 높은 산을 정복했는데, 언제 다시 오를 수 있을까 해서였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보다 아름답다고 했던 설악산 등 다른 수없는 명산을 두고 또다시 이 힘든 짐을 지고 다시 올까 해서였다. 남명 조식선생이 지리산에 올라 와 일출을 보고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明猶不明)"라, 만고에 천왕봉에 하늘이 밝을 무렵이 오히려 밝지가 않구나 하고 일갈하던 마음으로,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은 지리산 10경 중에서도 그 제1경에 해당한다. 찍고 또 찍다가 남들이 하산하고 몇 사람이 다녀간 후에도 계속 머물면서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천왕봉 아래 산을, 그 산 아래에 겹겹이 쌓인 산을 완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욕망은 꽃 피우나 소유는 시들게 한다고 했던가. 이 천왕봉의 일출을 천재일우로 처음 보고도,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하산하였더니, 그날 일 박하기로 한 치발목대피소의 책임자 진주 산악인 민병태(마차푸레산악회원)선생이 명쾌하게 나의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해석하여 주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천왕봉에 시간에 맞추어 올라간 사람의 거의가 천왕봉 일출을 보고 갑니다. 전체적으로는 1/3이 보고 가는 것이죠. 예로부터 3대의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은 오늘 아침 같은 일출이 아닙니다. 운무가 산허리를 감싸고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구름 위에 떠있는 섬과 섬과 같은 봉우리 사이에 붉게 떠오르는 일출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어저께 장터목을 향하면서 연하봉에서 보고 촬영한 봉우리 지나 구름 뒤에 지는 낙조가 바로 3대가 적선으로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 아니, 낙조였었구나.
막 하산하려 하는데, 장터목 대피소에서 그 미안했던 60대 초반의 사람이 친구와 함께 올라왔다. 또 쥐구멍이라도 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미안한 마음에 세석대피소 산장책임자에게서 선물로 받은 배낭에 달고 다니는 종을 드리고, 사진을 찍어 드리면서 명함을 청하여 보니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을 지내고 고대의대 교수이신 박용균 박사다. 흉이 이마에 한일 자 일(一)로 그어져 있었다. 그동안 세수하는데 얼마나 불편했을까? 지금은 일주일쯤 지났으니 다 나셨겠지-.
"이상한 인연으로 뵙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까는 경황 중에 심한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만나서 가족처럼 평생을 함께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한 번만의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늘 친절하게 살려고 하였는데, 우리들의 인연은 이렇게 악연(?)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마는 것인가.
**9. 일만이 돌아왔습니다.
-산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무사히 일만이 돌아왔습니다.
구례에서 그동안 흔들거렸던 앞니가 6개나 통째로 빠져서 앞길을 막았지만, '사라' 이후 43년만에 가장 큰 5조 4천억 원의 피해를 주었다는 태풍 '루사'가 1,340m의 벽소령대피소에서 사흘이나 발을 묶었지만, 그동안 별러 오던 일만의 꿈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산꾼이면 누구나 꿈꾸는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 장장 46.2km의 1백 2십리 산길을 6학년 6반 나이에 단독 종주했습니다.
벽소령의 그믐달,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황봉의 일출은 물론 3,00여 컷의 지리산 모습을 촬영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려서 가난을 살던 일만의 OQ [역경지수(逆境指數)]가 남보다 높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가난도 재산이더군요. 오랫동안 태풍 속에서 만난 뱀사골, 벽소령, 장터목, 치밭목대피소의 아름다운 사람과의 아름다운 밤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치밭목대피소에서 대원사 길에서 만난 무재치기폭포, 뱀과 태풍에 떨어진 다래와 밤은 눈과 입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폭포에서 기념석 하나 주워온 지리산의 한 조각이며 내 산행의 즐거운 표석입니다.
지리산 수석(壽石) "평원석"
두 갈래 물줄기 바위 타고 흐르다가
*뚝- 뚝- 뚝- 뚝- 떨어지는 폭포수
나그네
발길을 묶어
소리 구경에 취했습니다.
천년을 먹음 고서 닦기고 흐른 세월
서재에 모셔다가 두고두고 듣고 싶어
지리산
조각 돌 하나
고이 품고 갑니다.
*점점 큰 활자로
-2002년 8월 29일(목)~9월 4일(수) 일만 성철용
**10. 지리산 등반에서 만났던 그리운 사람들이 보내온 e-mail
*대전 한전 "0₂산악회" 류홍우 박사
벽소령 대피소에서 루소가 오는 오후에 만나 하룻밤을 같이하였던 산소팀의 류홍우입니다.
우선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치시고 귀가하신 일만선생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저희 산소팀원들은 종주의 아쉬움을 접고 음정마을로 하산하면서 보았던 루소의 할퀸 자국들을 보고는 저승이 우리와 그렇게 멀지 않구나 하는 생각들이 모든 대원들의 가슴에 와닿았던 것 같았습니다. 길이 허리쯤 파이고 산사태로 길이 동강 나고, 낙석주의라는 곳의 낙석으로 인한 길 막음, 국립공원의 지프차가 방향을 180도 틀어서 돌멩이에 묻혀 있는 네 바퀴, 그리고 넘어진 나무들.. 들...들..
루소가 할퀸 자국은 산사태로 인하여 길을 막아 한참을 기다리다 그날 밤 늦게사 대전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밤이 푸른 벽소령에서 심한 바람소리와 빗소리로 보낸 시간들이지만 같이한 시간들이 잔잔한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들려주신 그 많은 얘기들을 메모리 용량 부족으로 모두 다 주워 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합니다.
* 유미정 치발목 대피소에서 만난 대구 처녀
지난 9월 초의 어느 날,
혼자 떠난 지리산 종주산행에서
우연히 스쳤던... 치밭목에서의 인연을 기억하시는지요~? *^^*
치밭목에서의 하루를 묵고 각자의 길로 떠나기 전 하신 말씀이 너무도 생생해서 잊히지가 않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버릴 세상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많이 배려하고, 더 친절히 대하라는 아저씨의 그 말씀이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좋은 말씀해 주시던 아저씨의 그 따뜻하고 포근했던 표정까지도.... *^^*
그날 이후,
혼자서 씩씩하게 벽소령과 노고단 산장에서 1박씩을 하고
지리산 서북능선(노고단~성삼재~만복대~정령치~바래봉까지)까지 종주를 하고 대구로 돌아왔답니다.
혼자 떠난 지리산으로의 산행이 너무도 좋아서 또 떠나고 싶어 져서 큰일입니다. 히히~~
언제고 화창한 가을엔 또다시 지리산으로의 산행을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저요~. 오늘밤에도 지리산의 그 화창했던 능선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낸답니다.....
*-김은성 포항 산꾼
일만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지리산 종주는 무사히 마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29일 종주를 하기 위해 지리산에 갔지만 벽소령에서 태풍 루사로 인해 통제를 하여 30일 날 뱀사골로 하산하였 습니다.
연하천에서 화개재로 되돌아오던 중 토끼봉에서 일만 선생님을 만났지요.
토끼봉의 새로 만든 헬기장에서 괴나리봇짐을 끌러 넓적한 돌 위에 놓고 선생님은 토끼봉과 뱀사골의 유래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하산하는 길의 뱀사골의 비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문자로 어찌 이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지금쯤 둥지로 돌아와 계시겠지요.
건강하시구 이 산하의 아름다움을 찾아 유람하시는 일만
선생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엄희문 0₂산악회 대장
일만 선생님 !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지리산 종주 무사히 잘 마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저는 그날 태풍루사가 막들이 닥칠 때 그 폭우를 짊어지고 산소팀을 이끌고 제일 먼저 벽소령 산장에 도착했던 엄희문 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때 기가 막히던 순간 마구 문을 두들겼을 때 조그만 구멍 같은 문으로 선생님과 제가 제일 먼저 조우를 했지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안녕히계십시요,
* 신영철 사장(롯데 명금사) 택배
또 한 번 큰 일을 하 내셨군요.
선생님 글 중에 나침반을 또 선뜻 남에게 선물하셨다는 대목을 보고서 '참 천성은 못 버리시는구나' 했습니다.
나침반과 돋보기안경을 보냅니다. 도수를 몰라 몇 개 보내오니 사모님, 선생님 나누어 쓰시고 남은 건 좋은 분 만나시거든 그 천성을 또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2002.9.16
시인/수필가
▣ 청파 윤도균 - 지난 5월 지리산 종주를 떠나기전 부터 일만 선생님의 지리산 종주기 탐닉 했습니다 보고 또 보고 그러기를 아마 너댓번은 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지리산 종주 산행기는 지리산 산행기의 대명사 지리산 교과서라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6학년 7반의 년세에도 젊은이들의 용기 보다도 더 강열하게 활략하시는 일만 선생님은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느낌을 생각합니다 일만 선생님의 지리산 종주기를 지리산 교본으로 강력히 추천을 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요
'☎ 일만 산행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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