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고향 단양
사람이면 누구나 성(姓)과 고향을 가지고 있다.
그 각각 성씨(姓氏)의 고향을 관향(貫鄕) 또는 본관(本貫)이라고 하던데 본관이란 어디일까. 각 성(姓)의 시조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다.
그렇다면 한국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時調)의 고향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최고로 오래된 시조가 우탁의 백발가 2 수이니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한국 최초의 시조시인이요, 그분의 고향이 단양이니 따라서 우리 시조 (時調)의 고향도 단양(丹陽)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역동 우탁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탄생과 호 역동(易東)에 얽힌 전설이 전하여 온다.
-우탁이 탄생하였을 때였다. 태어날 때에는 울지 않더니, 3일째부터 울기 시작하여 그치지를 않아 집안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지나가는 한 늙은 스님 과객(過客) 있어 말하였다.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 (周易)을 외우고 있구만-. 큰 인물이 될 거요" 하였다.
그 후 보름이 지난 후부터는 울지 않고 정상으로 자랐다.
- 커서 벼슬길에 올라서 중국 원나라에 가서 주역(周易) 책을 얻고 싶어 하는 우탁에게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가 물었다.
“그대는 역리(易理)에 통달하였는가?”
“비록 박통(博通)한 군자라 할지라도 어찌 역리(易理)에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역(易)은 이학(理學)의 두뇌이니 한번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천자가 역(易)을 주니 우탁이 옥하관(玉河館)에서 하룻밤을 읽고, 이튿날 순제 앞에서 배송(背誦)하는데 두루 외워 막히는 곳이 없었다. 황제가 경탄하여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정말로 변방의 작은 나라에 두기가 아깝도다. 주부자(朱夫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도다” 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던 소동파가 할거하던 시대여서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고 깔보고 외국인에게 책(冊)을 주지 아니하였던 무렵이었다.
우탁이 귀국하여서 외운 기억을 다시 더듬어서 주역(周易)을 완성하고, 문을 닫고 한 달쯤 연구하여 이를 해독하였다.
이에 중국의 학자들이 말하기를, '중국의 역(易)이 동(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여 당시 사람들이 우탁 선생의 호를 역동(易東)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사인암(舍人岩)
사인암(舍人岩)은 단양시 대강면 남조천 가에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있는 층암절벽의 명승지다.
이 사인암을 단원 김홍도가 그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면서 10 여일을 그 진면목을 화폭에 담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는 단양 8경의 하나다.
나는 이 사인암을 세 번 찾았다.
처음에는 단양이 고향인 시조진흥회 명예이사장 김영덕 시조시인의 안내였고, 두 번째는 그분이 시조진흥을 염원하는 서울서 단양 사인암까지 '자전거 국토 순례'길을 따라서 와서다. 회갑을 3달 앞둔 노인이, 월남전에 참전 중 다리에 파편을 23곳이나 맞고 인헌무공훈장(仁憲武攻勳章)을 타고 있는 연금 수혜자 상이군인이었다.
그때 김영덕 시조시인의 자전거로 서울서 충북 사인암까지 간 거리는 하루에 장장 223km, 560리 길이었다.
단산읍지(丹山邑誌)에 의하면, 팔곡(八曲)은 구곡(九曲) 2리 위에 서벽정(西壁亭)과 사선대(四仙臺)가 서로 보이며 물이 맑고 넓은 곳으로서, 고려 때 역동선생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당시 이곳에 와서 담수(潭水)에 배를 띄워 놀았으므로 마을 이름을 사인암(舍人岩)이라고 한다 하였다.
『丹山邑誌』. "八曲在九曲上二里許, 西壁亭四仙臺相望盤桓, 而潭水澄長, 高麗時禹易東先生, 官舍人時來居, 維舟於潭水, 故村名舍人岩."
이 사인암에는 710년 전에 썼다는 우탁의 친필과 바위 위에 신선들이 두었다는 전설과 함께 석국(石국)과 장기판(將棋板)이 암각되어 전하여 온다. 그래서 사인암 이름 외에 ‘운선 계곡(雲仙溪谷)’이라는 이름을 더한다.
사인(舍人)이란 이름은 벼슬 중 정4품인 '통사사인(通事舍人)'의 준말로 조회(朝會)의 의례를 맡아보는 지위였다.
이 사인 우탁 시절 역동선생은 자주 고향 단양의 산수구곡(山水九曲: 현 사인리)을 찾아 선유(船遊)하여 놀았으므로 그 후에 마을 이름과 함께 생긴 이름이다.
(八曲在九曲上二里許, 西壁亭四仙臺相望盤桓, 而潭水澄長, 高麗時禹易東先生, 官舍人時來居, 維舟於潭水, 故村名舍人岩.- 丹山邑誌).
거기 청령사(靑蓮寺) 우측 바위에 우탁의 시조 백발가 2수 중 하나가 음각되어 옛날의 역동 선생을 기리고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싀 쥐고
늙난 길 가싀로 막고 오난 백발(白髮)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白髮)이 졔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그런데 '백발가'라고도 하고 '탄노가'라는 시조를 쓰신 것을 보면 역동 선생은 장수하신 모양이다.
'한국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을 보니 그분의 사신 동안이 '1263~1342'이니 80세까지 장수하시었기에 쓰인 시조였다.
그런데 단양 우씨들이 제를 지내는 사진을 보니 이상하게도 제상에 도끼 한 자루가 놓여 있어 '이 무슨 해괴한 일인고?' 하였더니 거기에 딸린 역동 시조시인의 생전에 강직한 풍모의 일화(逸話)가 전하여 온다. 우탁선생은 우 씨 성 가진 이들이 자랑할 만한 강직한 선조였다.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여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범간(犯奸)하는 패륜을 범했다.
이에 격분한 감찰규정이었던 역동(易東) 선생은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자신의 상소가 잘못되었을 때는 도끼(斧)로 목을 쳐도 좋다는 상소였다.
이에 임금도 얼굴 빛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도 두려워 떨었는바, 천년 뒤에도 그 사람됨을 상상하여 볼 수 있고, 그 고충(孤忠)과 준절(峻節)은 우뚝하여 범인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倬抗疏敢言, 自分必死, 無一毫顧藉心, 王爲之動色, 左右亦震攝, 千載之下, 亦可想見其人, 而孤忠峻節, 卓乎不可及也.-史斷 )
그래서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역동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드는 상소를 올렸고 목은 이색(李穡)은 왕에게 청하여 역동선생에게 문희공(文僖公)의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조선조의 퇴계 이황도 역동선생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말년을 보낸 안동군 예안현 지산리 근처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며 역동 선생의 학문과 그 기개를 기렸다.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상에 힘쓴 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舍人巖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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