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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黑山島) 이야기

ilman 2019. 7. 7. 06:54

  흑 신도 이야기   

 

  흑산도는 목포에서는 92.7 km(/1:50) 떨어져 있지만, 홍도에서는 22km, 쾌속정으로는 30분 거리에 있다.

붉은 섬이라고 홍도(紅島)라 하더니, 바다와 섬 전체의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黑山島)라 하는 것을 보면 여느 섬과 달리 색깔로 섬 이름을 삼은 것이 흥미롭다.  

이 섬을 흔히 대흑산도(大黑山島)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70km 떨어진 절해의 고도인 가거도(可居島)를 일본 강압기 시절에 일인들이 소흑산도(小黑山島)라 일컫기 때문이다.

홍도, 대장도, 소장도, 영산도, 다물도 등 가거도(可居島)까지 흑산군도(黑山群島)를 이루고 있는데 흑산도는 크기가 여의도(7㎢)의 3배가 조금 못 미치는 19.7㎢요, 해안선 길이 42.8km에 인구 5,138명이 사는 섬이다.


*. 장보고(張保皐) 이야기 

흑산도에 처음 사람이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은 서기 828년(성덕왕 2년,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을 두고 당(唐) 나라와 교역하며 해상활동을 하던 무렵이었다.

 장보고(張保皐)는 신라 흥덕왕 때의 무장이요 해운가(海運家)로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무녕군 소장(武寧軍小將)으로 활동하던 무장(武將)이었다. 의협심이 강해서 신라에서 잡혀와 당(唐) 나라에서 노비로 생활하는 비참한 동포의 모습을 보고 비분강개하다가 당(唐)의 직을 사직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청해진(淸海鎭: 완도)을 설치하고 당시 이 일대에서 준동하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활동을 근절 시키킨 바다의 영웅이다.

장보고는 신라의 실권을 잡고 일본과 당나라와 삼각 무역을 실시하는 등 해상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딸을 왕비로 책봉 삼으려다가 반대파의 자객(刺客)에게 피살된 무인이다.

 나는 장보고 장군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나라 왕 중 장보고와 같이 바다에 관심을 가진 왕이 왜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왜 한 분도 없는가가 심히 유감스럽다.  삼면이 바다로 둘려 싸인 반도에서 장보고가 일찍이 해상권을 잡았듯이 조선 27대 왕 중에 단 한 분이라도 바다를 향한 열정이 있었더라면, 우리의 영토는 대마도는 물론이요 오늘의 국토보다 더 넓어졌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었다면 고려가 망할 정도로 극성을 부리던 왜구(倭寇)가 어찌 그리 발호하였으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흑산도(黑山島)에는 초등학교가 3개가 있는데 그중 신안흑산초등학교는 각 섬에 분교를 총 7개나 두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분교가 가장 많은 초등학교가 되었다.  중학교는 1개교가 신안 행정 중심 읍(邑)인 '지도(智島)'에 있다. 그 신안흑산중학교 섬이라서인가 금년(2017) 졸업생이 단 8명뿐이라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여유가 있는 섬사람들은 자식들을 목포로 유학(遊學) 보내는 것 같다.

. 흑산도 육로 버스 관광   

 

 

흑산도(黑山島) 예리항이 가까워져 선상 갑판에 올라가 보니 홍도(紅島)가 돌섬이듯이 흑산도에도  산이 많았다.

서에 깃대봉(382m), 동에 대봉산(125.6m), 남쪽에 선유봉(300m), 북쪽에 상라산(229.8m) 등으로,

섬 전체가 산지(山地)다. 

 집에서 떠나올 때 섬 여행을 위해서 사 두었던 접이식 자전거를 가지고 올까 망설이다가 '다도해 국립해상공원에서는 자전거 통행을 금지한다는 말'을 듣고 다도해는 산이 많은 섬들이라서 그런기 보다 하고 집에 두고 왔는데, 흑산도에는 자전거 도로가 설치되어 있어 관광객 중에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팀도 있었다.

 흑산도 관광코스에는 3가지가 있다.

버스 육로관광(15,000원, 1:30), 택시 관광(6만 원 2:00), 해상관광유람선(22,000원. 1:40). 그중 나는 택시관광은 너무 비싸서,  해상관광유람선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버스 육로 관광'으로 대신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택시 관광도 4인 기준 합승 택시(1인당 15,000원)가 있어 택시 관광을 했을 걸 하고 후회하였다. 그보다 유람선 해상관광(海上觀光)을 하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 홍도에서 유람선 관광을 하고 흑산도에 왔기 때문에 '흑산도 육로 여행'을 선택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시에는 해상유람(海上遊覽)이 흑산도에도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흑산도 유람 코스'이니 참고할 것이다.

 도목리 가리비 마을- 옆 목동굴- 다물도 홍어 마을- 수리 해녀마을- 풍년 학바위 - 칠성 동굴- 만물상- 고래섬- 낙타섬- 촛대바위- 도승 바위 - 남근석- 스님 바위 - 금강산 코스- 어머님 바위- 원숭이바위- 연꽃 섬- 물개바위- 금강산 절경- 천지연 연못- 돌부처 바위 -할아버지와 할머님 바위 - 슬픈 여- 공룡섬과 고래 - 쌍용 동굴 - 공바위 - 해골바위 - 갓바위- 홍어굴 - 토끼와 거북(1:40)

 

 해상유람에서는 주변 섬인 영산도(永山島)와 다물도(多勿島) 유람도 따로 있는 모양이지만 흑산도에서도  태풍 탈리로 인하여 오늘 오후 3:10분 배가  목포로 향하는 마지막 배로 이후에는 며칠간 없다 하여 서둘러 육상 버스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육상관광을 호객하는 사람이 있어 따라갔더니 함께 할 일행은 전주에서 온 5~60대 아줌마 일행이다. 그분들은 새로운 관광지 구경보다는 저속한 안내 기사의 언어 희롱에 동조하며 즐거워하는 분들이라서 다도해 자료수집차 온 나에게는 일행을 잘못 만난 분들이었다. 

 

육로 코스는 해안(海岸) 따라서 26km의 1시간 30분의 관광버스 여행인데

예리항- 진리 지석묘 - 상라산 가는 12 굽이 도로- 산마루의 흑산도 아가씨 기념비- 한반도 지도바위- 하늘 도로- 한다령- 유베문학 공원-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 예리항"으로 섬을 오른쪽으로부터 시작하여 해안선 따라 섬을 일주하는 코스였다.

  관광안내는 관광버스 기사가 겸하고 있었는데 버스관광에서는 택시 관광과 달리 도중 '흑산도 아가씨 노래탑' 등 두어 군데 세워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는 외에 운전기사는 '오른쪽, 왼쪽' 하며 버스를 타고 가며 안내하는 것이어서 그의 설명 따라 시선을 돌리게 하며 대충 안내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여 필자는 지금부터 흑산도에서 구해 온 자료에 의하여 흑산도의 이곳저곳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산이 많은 흑산도라서 상라산 오르는 뱀처럼 굽이굽이 오르는 가파른 구절양장(九折羊腸)의 12 굽이 도로를 오르다 보니 통일신라 말기에 장보고(張保皐)가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했다는 반달 모양의 상라산성(上羅山城)이 보인다.

 산성은 성 둘레가 280m로 남쪽은 반월형(半月形) 쌓았고 북쪽은 해안 절벽을 이용한 산성이다.

산마루에서는 북쪽으로 대장도와 소장도가 길게 바다로부터 흑산도를 막아주고 있다. 주민 100여 명이 살고 있는 대장도에는 산 습지(山濕地)가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장도 습지는 능선 170m 높이에 면적 9만 414㎡의 습지로 국제 람사르 협약 1,423번째로 지정된 곳으로 멸종 위기의 수달과 매, 솔개와 조롱이, 제주도롱룡 등이 서식하는 곳이다.
람사르 협약(Ramsar Convention)이란 습지의 보호와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국제 조약을 말하는 것이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흑산도 아가씨

             - 장두수 작사/박춘석 작곡/이미자 노래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말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 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 ~ ♩♪♬ ~

 

 흑산도 12 굽이 길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니 그 산마루에 그 유명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와 이미자의 핸드프린팅(Hand Printing)이 있다. 

흑산도(黑山島)는 옛날 돛단배 시절 목포에서 흑산도에 가려면 좋은 날씨라도 잘해야 새벽밥 먹고 떠나면 밤 늦게 12시경에나 도착할 수 있는 섬이었다. 풍랑을 만나면 1주일 이상을 걸리는 육지에서 아주 멀리멀리 떨어진 외로운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섬이었다. 

그런 섬을 장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의 '흑산도 아가씨'를 이미자가 노래 부르면서 일거에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흑산도 아가씨' 노래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 노래를 만들게 된 이야기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는 '흑산실미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이 게기가 되어 제작되었다 한다.

당시 학생들은 뭍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그 무렵의 배편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때였다.
이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들은 고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해군 함정을 주선해 주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게 하고, 영부인은 학생들을 청와대로 직접 초청하였다는 미담 기사가  "흑산도 어린이들 꿈 이루어지다!"로 석간신문을 장식한 일이 있었다.


  이런 미담(美談)
에서 영감을 얻은 박시춘 작곡가는 흑산도 출신인 정두수 작곡가를 신카나리아 가수가 운영하는 다방에서 만나 가사(歌詞)를 쓰게 되었다 한다.  

거기에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강진(康津)에 귀양 갔던 다산 정약용과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간 형 손암 정약전(丁若銓)을 그리워했다는 내용을 얹어 노래를 만들었다는 일화(逸話)가 전하여 온다.

1989년 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개봉한 이 영화는 감독 권혁진 주연 윤정희, 이예춘에 목포출신의 남진의 출연진으로 영화를 제작해 두고도 주제가를 정하지 못해 애타던 때였다.

이 곡노래가 완성되자 박시춘은 부산에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이미자를 서울역에서 만나 녹음실로 데리고 와서 완성한 것이 바로 '흑산도 아가씨" 노래였다. 그래서 이 노래 끝 부분은 출장에 지쳐 이미자의 목 쉰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영화가 먼저 만들어진 '흑산도 아가씨'의 주제곡이기 때문에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영화 스토리를 알아야 한다. 

 여름방학을 맞아 어부(이예춘, 이덕화 아버지)의 딸 소영(윤정희)은 학우인 유미와 함께 흑산도로 내려간다
그 곳에서 소영은 자기 학비 때문에 발동선을 장만하지 못하고 돛단 배로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 깊은 시름에 잠기게 된다
. 상경한 소영(윤정희)은 아버지에게 발동선을 장만해 드리기 위해서 당시로는 천한 호스티스 생활을 시작한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이예춘)는 낙망하고, 친구 유미는 소영의 효성에 감동하여 자기 아버지를 졸라 발동선을 친구 소영에게 마련해준다

이 노래 가사 속에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 아닌 죄로 귀양 와서  15년을 살다가 흑산도에서 죽은  '손암 정약전' 유배기를 넣어보면 모든 것이 척척 드러맞는 노래가 된다. 불후의 명저인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黑山'을 번번이 '자산(玆山'이라 쓰고 있었다. '玆'(자)는 흑(黑)자와 뜻이 같다'.

 그렇다면 화자인 '흑산도 아가씨'는 누군가.
지금은 흑산도에 사는 모든 처녀를 '흑산도 아가씨'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흑산도 아가씨란 물질을 하며 햇볕에 섬의 색깔처럼 검게 타버린 해녀들의 얼굴이라 흑산도 아가씨는 이곳에 사는 해녀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어려운 시절 어촌(漁村)에 돈 벌러온 외지(外地) 아가씨들이 흑산도의 식당이나 술집과 다방 등의 종업원으로 오면서 갖가지 사연이 생겨났는데, 흑산도의 경기가 한창 좋을 때는 술집 아가씨만도 700명이 더 되었다니 섬 사람들은 이들을 모두 '흑산도 아가씨'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런 아가씨들은 몸은 흑산도에 있지만 못 견디게 아득한 저 육지를 그리워 했을 것이고, 흑산도에서 나그네로, 귀양살이처럼 애타게 보고 싶은  머나먼 서울(고향)의 가족을 그리다가 그 마음이 검게 검게 타버렸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 흑산도에 관광으로 와서는 꼭 둘러봐야 할 마을로 '예리(曳里)'와 진리(鎭里) 그리고 읍동(邑洞) 마을이 있다. 
예리(曳里)는 흑산도 선착장이라서 그렇고, 진리(鎭里)는 면소재지라서 그렇다는데, 한자로 '鎭里'(진리)라 쓰는 것은 옛날에 흑산진(黑山鎭)이라는 군(軍)의 진영(鎭營)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란다. 

읍동(邑洞) 마을에 관아터(官衙址)가 있는 것을 보면 진리는 옛날에 흑산도의 중심 마을이어서 읍동(邑洞) 마을이라 한 것 같다. 옛날에는 '고을 기미', '골 기미', '읍리'로 불렸던 곳이다.  

 흑산도에서는 예리(曳里)와 진리(鎭里)가 흑산도의 중심 마을인데 서로 가까이 있는 마을이니 바빠도 잠깐이라도 둘러볼 만한  마을이다.
이 두 마을은 울릉도의 저동(苧洞)과 도동(道洞)과 견줄만하다.

예리(曳里)가 저동(苧洞)처럼 고기잡이 어선과 상가나 주점 등으로 흥청대는 분위기라면, 진리(鎭里)

는 울릉도의 도동(道洞)처럼  면소재지, 학교, 교회나 성당 등 차분한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흑산도에 와서 시간이 남거든 다음의 '진리 해안길' 8km를 걸어볼 일이다.

 
자산문화 전시관- 지석묘- 최익현 일신당터- 철새전시관- 잔라덩(신들의 정원)- 배상기미 해수욕장- 새 조각 공원- 12 굽이 도로- 상라산성- 12 굽이 도로-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상라산 정상- 되돌아오는 길.

 

 위 코스는 흑산도 안내서의 소개인데 최익현의 유허비와 지장암의 위치가 이상하다.

너무 동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흑산도항 예리 앞 바다는 호수 모양인데 북쪽을 내 영산도와 외 영산도가 가로막고 있어서 어떠한 풍랑이나 태풍도 견뎌 낼 수 있는 천연의 양항(良港)이다.  그 예리에서 볼거리로는 여객터미널에서 흑산항 가운데에 있는 등대로 가는 우측 길을' 가다가 등대 제방 입구에 서 있는 '흑산 아가씨 동상'이다.

나는 벼르고 벼르다 흑산도에 왔지만 태풍 텔리호에 쫓기듯이 흑산도에 겨우 4시간을 머물다 목포로 떠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직접 가보지 못한 곳곳의 글을 쓰는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다음  다시 가거도(可居島)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흑산도에 들려 며칠 묵으면서 그 유명하다는 흑산도 홍어도 먹어보며 못다한 나의 흑산도 사랑을 다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