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 산행
-2006. 5. 18(목)/경남 창녕 화왕산/관룡사-청룡사-관룡산-화왕산성-배바위-진달래능선-창녕여중고/ 고양시 늘푸른산악회 따라
*. 성(成)씨, 조(曺)씨의 고향 창녕
옛날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첫 시간에는 보학(譜學) 공부를 시키며 보냈다.
“아버님 함자는?” / 洪字 吉字 同字입니다.
-성 다음에는 ‘字’ 자를 쓰는 것이 아니니, ‘洪 吉字 同字’로 말해야지요.
“담임선생님 함자는?”/ “許 筠 字입니다.”
- 조상이나 남의 어버이 등을 말할 때만 이름 자 뒤에 ‘字’를 쓰는 거구요.
"어디 성(姓)씨이신가?" / "창녕 성씨(成氏)입니다."
-"창녕 성가(成哥)입니다. 해야지-" 스스로를 높이는 말이니까요. 그렇지만 개인적인 물음이 아닌 경우에는 "창녕 성씨(成氏)입니다." 가 맞지요. "성씨의 고향"할 경우까지 "성가의 고향"이라 하지 않는 이치와 같거든요.
"집에 족보는?" 하고 물을 때에는 ‘있다, 없다.’ 하거나, ‘샀다, 안 샀다’ 하면 안되고 “모셨다, 못 모셨다” 로 말해야 해요. 왜냐하면 자기 조상들의 성함이 있는 책이 족보인데 팔고 산다는 식으로 말하면 불경스런 일이 되거든요."
" 취직 같은 면접시험에서 종종 이러한 것을 묻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경우 그 분이 묻고 있는 것은 우리들 집의 가문을 묻고 있는 거예요."
일만 선생은 ‘창녕 성씨, 시조 成 仁 字 輔 字 할아버지의 24세 손’입니다.' 할 때,
여기서 ‘창녕’이란 본관(本貫)으로 시조 할아버지가 태어나서 사시던 고향입니다.
‘세(世)’란 시조 할아버지가 1세요, 나는 그분으로부터 24세 손이란 말이구요.
세상 살다 보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만나서 반가워서 “몇 세 손이요?” 묻을 경우가 있어요. 그때 상대방이 태연히 모른다는 대답을 들을 때는 안타깝습니다.
부모님 중에는 어려서 고향을 떠나 각박한 세상에서 살던 분이 계셔서 몰라서 자식에게 못 가르쳐 준 것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거든요.
같은 성씨를 만나서 항렬(行列)로 위아래를 구별하는 경우도 많지만, 동성동본(同姓同本)이라도 성(姓)에는 여러 파(派)가 있고 파(派)마다 돌림 자가 다른 것이니 몇 세손 정도는 꼭 알아야 창피를 면할 수가 있답니다. 우리들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까짓 것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어느 산(山)인지 모르고 등산해도 괜찮다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분입니다.
지금 나는 우리 창녕 성씨(成氏)의 고향이며, 창녕 조씨(曺氏)의 고향인 창녕(昌寧)에 왔다.
창녕 조씨(曺氏)와 우리 성씨(成氏)는 이성동본(異姓同本)이어서 가급적(?) 결혼을 피한다. 우리 성씨는 세조 대왕 능을 참배하지 않으며, 한때는 청주 한씨 후손과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우리 매죽헌 성삼문 할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 세조요, 그 하수인 한명희는 청주 한씨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사육신에 매죽헌 성삼문, 생육신에 성담수 할아버지는 의리를 앞세워 살아온 우리 창녕 성씨의 자랑스런 선조분이시다. 만고열녀 춘향이가 성씨를 빌어다가 성춘향이라 한 것처럼 나는 명가의 후손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묻는 이 있다면, 주저 없이 또 대답할 것이다. 창녕 성씨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친구들이 '성-'하고 성(姓)만 부르면 나는 그의 '형'(兄)이 되고, 고문(顧問)이 되면 '성고문'이 된다.
이만 하면 자랑할 만한 성(姓)이 '성가(成哥)'가 아닌가.
아, 벼르던 성씨의 고향 진산 화왕산을 처음 오르다 보니 신이 나서 그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구나.
*. 왜 화왕산(火旺山)이라 하였을까
출처: 창녕군홈피
화왕산 오기까지는 나는 화왕산(火旺山)이 화왕산(花旺山)인지 알았다. 그러다가 제주도 성산포 일출봉과 유사한 거대한 정상 부근의 화산분구를 보고 나서야 불 '화(火)' 자 성할 '왕(旺)' 자 화왕산(火旺山)인 것을 알았다. 화왕산이 선사시대 화산이었다는데 더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삼국사기에도 이고장 이름을 '比自火郡'이라 하였는데-.
창녕의 '갈대제횟불'행진이나 '억새태우기'도 화왕산(火旺山)의 '火'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이 나면 창녕이 번창해 진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나 보다.
*. 옛길의 돌장승
옥천버스 정류장에서 관룡사까지 1km 의 아스팔트 길을 통하여 신록의 상쾌한 길을 오르다 보니 길 아래 화강암으로 만든 장승 한 쌍이 있다. 저 길이 아스팔트 길이 생기기 전 옛길이었던 모양이다.
왼쪽이 남장승,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 주먹코로 절을 키키는 수호신 답게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다. 잡귀에게 위협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 장승은 관룡사 소유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였다.
창녕은 남쪽 지방이라서 길가의 대나무가 유난히 굵고 높은데 춘흥을 못 이기는 휘파람새, 뜸북새, 꾀꼬리 새 울음소리가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창녕 성가(成哥)입니다. 해야지-" 스스로를 높이는 말이니까요. 그렇지만 개인적인 물음이 아닌 경우에는 "창녕 성씨(成氏)입니다." 가 맞지요. "성씨의 고향"할 경우까지 "성가의 고향"이라 하지 않는 이치와 같거든요.
"집에 족보는?" 하고 물을 때에는 ‘있다, 없다.’ 하거나, ‘샀다, 안 샀다’ 하면 안되고 “모셨다, 못 모셨다” 로 말해야 해요. 왜냐하면 자기 조상들의 성함이 있는 책이 족보인데 팔고 산다는 식으로 말하면 불경스런 일이 되거든요."
" 취직 같은 면접시험에서 종종 이러한 것을 묻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경우 그 분이 묻고 있는 것은 우리들 집의 가문을 묻고 있는 거예요."
일만 선생은 ‘창녕 성씨, 시조 成 仁 字 輔 字 할아버지의 24세 손’입니다.' 할 때,
여기서 ‘창녕’이란 본관(本貫)으로 시조 할아버지가 태어나서 사시던 고향입니다.
‘세(世)’란 시조 할아버지가 1세요, 나는 그분으로부터 24세 손이란 말이구요.
세상 살다 보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만나서 반가워서 “몇 세 손이요?” 묻을 경우가 있어요. 그때 상대방이 태연히 모른다는 대답을 들을 때는 안타깝습니다.
부모님 중에는 어려서 고향을 떠나 각박한 세상에서 살던 분이 계셔서 몰라서 자식에게 못 가르쳐 준 것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거든요.
같은 성씨를 만나서 항렬(行列)로 위아래를 구별하는 경우도 많지만, 동성동본(同姓同本)이라도 성(姓)에는 여러 파(派)가 있고 파(派)마다 돌림 자가 다른 것이니 몇 세손 정도는 꼭 알아야 창피를 면할 수가 있답니다. 우리들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까짓 것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어느 산(山)인지 모르고 등산해도 괜찮다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분입니다.
지금 나는 우리 창녕 성씨(成氏)의 고향이며, 창녕 조씨(曺氏)의 고향인 창녕(昌寧)에 왔다.
창녕 조씨(曺氏)와 우리 성씨(成氏)는 이성동본(異姓同本)이어서 가급적(?) 결혼을 피한다. 우리 성씨는 세조 대왕 능을 참배하지 않으며, 한때는 청주 한씨 후손과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우리 매죽헌 성삼문 할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 세조요, 그 하수인 한명희는 청주 한씨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사육신에 매죽헌 성삼문, 생육신에 성담수 할아버지는 의리를 앞세워 살아온 우리 창녕 성씨의 자랑스런 선조분이시다. 만고열녀 춘향이가 성씨를 빌어다가 성춘향이라 한 것처럼 나는 명가의 후손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묻는 이 있다면, 주저 없이 또 대답할 것이다. 창녕 성씨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친구들이 '성-'하고 성(姓)만 부르면 나는 그의 '형'(兄)이 되고, 고문(顧問)이 되면 '성고문'이 된다.
이만 하면 자랑할 만한 성(姓)이 '성가(成哥)'가 아닌가.
아, 벼르던 성씨의 고향 진산 화왕산을 처음 오르다 보니 신이 나서 그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구나.
*. 왜 화왕산(火旺山)이라 하였을까
출처: 창녕군홈피
화왕산 오기까지는 나는 화왕산(火旺山)이 화왕산(花旺山)인지 알았다. 그러다가 제주도 성산포 일출봉과 유사한 거대한 정상 부근의 화산분구를 보고 나서야 불 '화(火)' 자 성할 '왕(旺)' 자 화왕산(火旺山)인 것을 알았다. 화왕산이 선사시대 화산이었다는데 더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삼국사기에도 이고장 이름을 '比自火郡'이라 하였는데-.
창녕의 '갈대제횟불'행진이나 '억새태우기'도 화왕산(火旺山)의 '火'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불이 나면 창녕이 번창해 진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나 보다.
*. 옛길의 돌장승
옥천버스 정류장에서 관룡사까지 1km 의 아스팔트 길을 통하여 신록의 상쾌한 길을 오르다 보니 길 아래 화강암으로 만든 장승 한 쌍이 있다. 저 길이 아스팔트 길이 생기기 전 옛길이었던 모양이다.
왼쪽이 남장승, 오른쪽이 여장승이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눈, 주먹코로 절을 키키는 수호신 답게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다. 잡귀에게 위협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 장승은 관룡사 소유토지의 경계를 위한 표지였다.
창녕은 남쪽 지방이라서 길가의 대나무가 유난히 굵고 높은데 춘흥을 못 이기는 휘파람새, 뜸북새, 꾀꼬리 새 울음소리가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관룡사의 멋은 돌층계 위 돌담의 일부가 되어 서 있는 암문 같은 석문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석문을 지나 보게 되는 운치 있는 범종각도 그렇지만 대웅전(보물제212호) 뒤로 얼굴을 내밀고 병풍처럼 절을 둘러 싸고 서 있는 관룡산이 더 멋지다.
우리들의 화왕산 등반은 옥천의 관룡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 이차돈의 전설
-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무교(誣敎)에 젖은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이차돈(506~527)은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 이적이 있을 것'이라며 순교를 자청하고 주살(誅殺) 당하였다.
이차돈이 죽자, 예언대로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나오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에 신하들도 마음을 굽혀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여 신라의 국교로 삼았다.
내가 관룡사를 말하다가 갑자기 이차돈을 말하고 있는 것은 불교가 고구려를 통하여 북방으로부터 전래된 것이 아니라, 달마산 미황사의 전설에서 보듯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서 가야(伽倻)에 전하여 졌다는 설을 관음사를 통하여 소개하기 위함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관룡사는 신라 제16대 흘해왕 40년(서기349년)에 지어진 절이라니 그 시기가 이차돈 순교보다 179 년이나 앞선다. 이 때문에 관룡사는 불교의 남방유입설의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 관룡산, 관룡사의 전설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 절에서 백일 기도를 드릴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 오색채운(五色彩雲)이 영롱하더니 벼락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화왕산 마루에 있는 3개의 못(月影三池)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볼 '觀'(관), 용 '龍'(용) 관룡사라 이름하였고 따라서 그 뒷 산을 구룡산(九龍山 혹은 觀音山)이라 일컫게 되었다.
- 관룡사 사적기
-신라 26대 진평왕 5년(서기583년)에 원효대사가 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량으로 신라 8대 종찰(宗刹)의 하나로 손꼽히던 절이 관룡사다.
돌문을 지나면 범종각 기둥이 시원한데 좁은 면적에 대웅전을 비롯,약사전 칠성각 등 모두 13채의 당우가 처마를 맞대고 있다. 절에 가서 불자가 아니면서 대웅전(보물 212호), 약사전(보물 146호), 명부전 등의 당우를 엿본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이 깊고 깊은 산 중의 절을 결혼도 하지 않고 지키며 사는 스님을 본다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그 중 이 절에서 내 시선을 끄는 것은 범종루에서 본 나무 해태 위에 모신 법고와 약사전에 모셔놓은 약사여래 석상이다.
우리들의 화왕산 등반은 옥천의 관룡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 이차돈의 전설
-신라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무교(誣敎)에 젖은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이차돈(506~527)은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 이적이 있을 것'이라며 순교를 자청하고 주살(誅殺) 당하였다.
이차돈이 죽자, 예언대로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나오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에 신하들도 마음을 굽혀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여 신라의 국교로 삼았다.
내가 관룡사를 말하다가 갑자기 이차돈을 말하고 있는 것은 불교가 고구려를 통하여 북방으로부터 전래된 것이 아니라, 달마산 미황사의 전설에서 보듯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서 가야(伽倻)에 전하여 졌다는 설을 관음사를 통하여 소개하기 위함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관룡사는 신라 제16대 흘해왕 40년(서기349년)에 지어진 절이라니 그 시기가 이차돈 순교보다 179 년이나 앞선다. 이 때문에 관룡사는 불교의 남방유입설의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 관룡산, 관룡사의 전설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 절에서 백일 기도를 드릴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 오색채운(五色彩雲)이 영롱하더니 벼락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화왕산 마루에 있는 3개의 못(月影三池)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볼 '觀'(관), 용 '龍'(용) 관룡사라 이름하였고 따라서 그 뒷 산을 구룡산(九龍山 혹은 觀音山)이라 일컫게 되었다.
- 관룡사 사적기
-신라 26대 진평왕 5년(서기583년)에 원효대사가 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량으로 신라 8대 종찰(宗刹)의 하나로 손꼽히던 절이 관룡사다.
돌문을 지나면 범종각 기둥이 시원한데 좁은 면적에 대웅전을 비롯,약사전 칠성각 등 모두 13채의 당우가 처마를 맞대고 있다. 절에 가서 불자가 아니면서 대웅전(보물 212호), 약사전(보물 146호), 명부전 등의 당우를 엿본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이 깊고 깊은 산 중의 절을 결혼도 하지 않고 지키며 사는 스님을 본다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그 중 이 절에서 내 시선을 끄는 것은 범종루에서 본 나무 해태 위에 모신 법고와 약사전에 모셔놓은 약사여래 석상이다.
관룡사는 용선대(700m)와 청룡암(1km)의 갈림길인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다?
관룡사 오는 길에 좌측으로 보이던 바위 위의 멋진 좌불 석상의 용선대가 보고 싶어서 몇 번 망설였지만 우리 일행이 남겨 놓은 리본 따라 청룡암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를 보니 여기서부터 구용산3거리 안부까지 등고선이 촘촘하여 제일 힘든 코스 같다.
관룡사의 7개 부도 중에 하나라는 곳을 지나니, 길 솟는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거기서부터는 숨막히는 오름길이 계속된다.
관룡사 오는 길에 좌측으로 보이던 바위 위의 멋진 좌불 석상의 용선대가 보고 싶어서 몇 번 망설였지만 우리 일행이 남겨 놓은 리본 따라 청룡암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도를 보니 여기서부터 구용산3거리 안부까지 등고선이 촘촘하여 제일 힘든 코스 같다.
관룡사의 7개 부도 중에 하나라는 곳을 지나니, 길 솟는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거기서부터는 숨막히는 오름길이 계속된다.
땀에 절은 스카프, 물 수건 되도록
오르락 내리락 내리락 더 오르락.
화왕산 (火旺山)
등반길인데
바람은 어디 숨었나?
*. 청룡사의 전망
약수 터다! 약수터에는 관룡사 1km 지점, 구룡산 1km 지점이라는 반가운 이정표도 있다. 그 왼쪽으로 40m를 오르니 시원한 전망을 앞에 모신 청룡암자가 있다. 암자라고 하기에 너무 초라하고 후락하다. '청룡암'이란 현판 하나 걸어 두지 못한 암자지만 산신각만은 절벽 위에서 운치를 발한다.
사람이 많이 사는 창녕읍은 이 산 너머에 있고, 청룡암은 본격적인 산행길로 745m의 관용산 바로 아래에 있어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관룡사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게 되니 사세(寺勢)가 넉넉할 수가 있겠는가.
법희(法喜) 스님이 반가이 맞으며 산을 소개를 해 준다.
"왼쪽의 봉오리는 영취산(737.2m)입니다. 서역의 지공(指空) 스님이 저 산을 보고 천축(天竺)의 영축산과 닮았다고 해서 영축산이라고도 했답니다. 우측의 뾰족한 산은 특별한 이름이 없는 내내 화왕산 줄기구요.
청룡암을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를 보세요. 자세히 보시면 바위 중에 아홉 마리 용 머리가 곳곳에 있구요. 삼각바위 오른쪽은 일출봉 그 왼쪽은 사자바위지요. 자세히 보면요 눈도 코도 다 있어요. 맑았더라면 시야가 더 좋을 텐데-"
암자 뒤에는 마애불도 있는데 움푹 들어간 홍여문 같은 바위에 꽃무늬를 양각으로 조각하여 놓았다.
거기서 20여 분 거리에 구룡산 삼거리가 있고 '←화왕산/→부곡온천 /↓관룡사'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밧줄로 이어진 능선길로 전망이 탁 트인다.
저 멀리 3km 아래에 관룡사도 보이고 산과 산 사이 분지에 옥천면이 아득하다.
그런데 아무데에도 관룡산 이정표가 없다. 관음사와 용선사의 갈림3거리 위에 있는 용선 헬기장이 관룡산 같은데 지나치고 말았다.
거기서부터 너무나 편안한 1.2km의 내림길이 더니 임도가 나온다. 청간재였다. 우리 늘푸른 산악회 분들이 식사를 막 마친 후였다.
화왕산성이 가까와 지니 갈대 숲길이다. 저 멀리 인기드라마 '허준' 촬영장 세트가 한폭의 그려놓은 그림 같다.
*. 화왕산성(火旺山城)과 곽재우
드디어 임란왜란과 정유재란 때 무공을 세운 홍의장군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이 성을 본거지로 영남일대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는 화왕산성(사적 64호)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광할한 갈대 밭이다.
창녕의 험준한 바위산을 등지고 남봉(南峰)과의 넓은 안부를 둘러싼 산정식석성(山頂式石城)이다. 그 둘레가 2,700m요, 넓이가 5만 6천평이나 되는 빛벌가야 때에 쌓았다는 고성(古城)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곳. 선사시대에 화산이었다는 분화구의 한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에 연못이 있는데 비닐로 그 물이 스며 들지 않게 물을 받아 놓았다. 바로 그 아래에 둥근 원으로 철책을 한 곳이 전설에 나오는 '용지연(龍池淵)'인가 보다.
화왕산에서 나는 무엇보다 '창녕조씨득성지지'라는 곳이 보고 싶었다.
*. 창녕 조씨(曺氏) 득성(得姓) 전설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남문으로 꾸불꾸불 흘러내리는 성길을 산책로 따라 내려 오면 자연석 10여개의 바위가 모여 있는데 그 중 "昌寧曺氏得姓之地"라 쓴 빗돌 하나가 우뚞 서 있다. 주위는 사각형으로 쇠 울타리를 둘러놓은 놓았다. 창녕 조씨의 득성비였다
창녕 조씨 시조 할아버지는 조계룡(曺繼龍)으로 태사공 벼슬을 한 부마도위 창성부원군(太師公 駙馬都尉 昌城府院君)이시다. 그런데 그 옆에 '主題始永 ?役成煥이란 글은 한문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데 이두인 것 같다. 무슨 뜻일까?
이 득성비와 연관하여 창녕 조씨 문중에 시조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진평왕 때 한림학사 이광옥에게 예향(禮香)이란 딸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속병이 있으나 백약이 무효였는데 화왕산 삼지(三池)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 드리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처녀 예향이 어느날 용지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 지며 캄캄해 지더니 예향이 갑자기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왔더니 신기하게도 속병은 씻은 듯이 나았는데 그날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그후 예향은 겨드랑 밑에 '曺'자 무늬가 있는 아들을 낳았다.
이상해 하는 예향의 밤 꿈에 한 대장부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해 신룡(神龍)의 아들 옥결로 이 아이의 아비요. 이 아이를 잘 키우면 크게되면 공후(公侯)요, 못되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이 될 것이요."
진평 왕이 이 말을 전하여 듣고 불러서 확인하여 보고 겨드랑이의 한자 '曺'를 따서 '曺'라 사성(賜姓)하여 주고, 이름은 용지(龍池)에서 동해신룡의 정기를 이어받았다 해서 이을 '繼'(계), 용 '龍'(용), '繼龍'(계룡)이라 지어 주었다.
이 아이가 자람에 자기 사위(駙馬)를 삼았다. 조계룡이 왜구가 동래를 침범했을 때 군졸을 몰고 나아가니 왜구가 두려워 하면서 스스로 놀라 물려갔다. 이에 나라에서는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을 봉하여 주었다.
그 용지 터는 비닐을 덮어 물이 땅에 스며 들지 않게 한 바로 못 아래에 있는 커다란 원형인데 조씨의 후손들이 세 못을 파서 복구하여 용지(龍池)의 옛모습을 환원하고 '龍池洞天'이란 비를 세워 조상을 기리고 있다.
약수 터다! 약수터에는 관룡사 1km 지점, 구룡산 1km 지점이라는 반가운 이정표도 있다. 그 왼쪽으로 40m를 오르니 시원한 전망을 앞에 모신 청룡암자가 있다. 암자라고 하기에 너무 초라하고 후락하다. '청룡암'이란 현판 하나 걸어 두지 못한 암자지만 산신각만은 절벽 위에서 운치를 발한다.
사람이 많이 사는 창녕읍은 이 산 너머에 있고, 청룡암은 본격적인 산행길로 745m의 관용산 바로 아래에 있어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관룡사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게 되니 사세(寺勢)가 넉넉할 수가 있겠는가.
법희(法喜) 스님이 반가이 맞으며 산을 소개를 해 준다.
"왼쪽의 봉오리는 영취산(737.2m)입니다. 서역의 지공(指空) 스님이 저 산을 보고 천축(天竺)의 영축산과 닮았다고 해서 영축산이라고도 했답니다. 우측의 뾰족한 산은 특별한 이름이 없는 내내 화왕산 줄기구요.
청룡암을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를 보세요. 자세히 보시면 바위 중에 아홉 마리 용 머리가 곳곳에 있구요. 삼각바위 오른쪽은 일출봉 그 왼쪽은 사자바위지요. 자세히 보면요 눈도 코도 다 있어요. 맑았더라면 시야가 더 좋을 텐데-"
암자 뒤에는 마애불도 있는데 움푹 들어간 홍여문 같은 바위에 꽃무늬를 양각으로 조각하여 놓았다.
거기서 20여 분 거리에 구룡산 삼거리가 있고 '←화왕산/→부곡온천 /↓관룡사'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밧줄로 이어진 능선길로 전망이 탁 트인다.
저 멀리 3km 아래에 관룡사도 보이고 산과 산 사이 분지에 옥천면이 아득하다.
그런데 아무데에도 관룡산 이정표가 없다. 관음사와 용선사의 갈림3거리 위에 있는 용선 헬기장이 관룡산 같은데 지나치고 말았다.
거기서부터 너무나 편안한 1.2km의 내림길이 더니 임도가 나온다. 청간재였다. 우리 늘푸른 산악회 분들이 식사를 막 마친 후였다.
화왕산성이 가까와 지니 갈대 숲길이다. 저 멀리 인기드라마 '허준' 촬영장 세트가 한폭의 그려놓은 그림 같다.
*. 화왕산성(火旺山城)과 곽재우
드디어 임란왜란과 정유재란 때 무공을 세운 홍의장군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이 성을 본거지로 영남일대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는 화왕산성(사적 64호)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광할한 갈대 밭이다.
창녕의 험준한 바위산을 등지고 남봉(南峰)과의 넓은 안부를 둘러싼 산정식석성(山頂式石城)이다. 그 둘레가 2,700m요, 넓이가 5만 6천평이나 되는 빛벌가야 때에 쌓았다는 고성(古城)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곳. 선사시대에 화산이었다는 분화구의 한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에 연못이 있는데 비닐로 그 물이 스며 들지 않게 물을 받아 놓았다. 바로 그 아래에 둥근 원으로 철책을 한 곳이 전설에 나오는 '용지연(龍池淵)'인가 보다.
화왕산에서 나는 무엇보다 '창녕조씨득성지지'라는 곳이 보고 싶었다.
*. 창녕 조씨(曺氏) 득성(得姓) 전설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남문으로 꾸불꾸불 흘러내리는 성길을 산책로 따라 내려 오면 자연석 10여개의 바위가 모여 있는데 그 중 "昌寧曺氏得姓之地"라 쓴 빗돌 하나가 우뚞 서 있다. 주위는 사각형으로 쇠 울타리를 둘러놓은 놓았다. 창녕 조씨의 득성비였다
창녕 조씨 시조 할아버지는 조계룡(曺繼龍)으로 태사공 벼슬을 한 부마도위 창성부원군(太師公 駙馬都尉 昌城府院君)이시다. 그런데 그 옆에 '主題始永 ?役成煥이란 글은 한문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데 이두인 것 같다. 무슨 뜻일까?
이 득성비와 연관하여 창녕 조씨 문중에 시조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진평왕 때 한림학사 이광옥에게 예향(禮香)이란 딸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속병이 있으나 백약이 무효였는데 화왕산 삼지(三池)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 드리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처녀 예향이 어느날 용지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 지며 캄캄해 지더니 예향이 갑자기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돌아왔더니 신기하게도 속병은 씻은 듯이 나았는데 그날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그후 예향은 겨드랑 밑에 '曺'자 무늬가 있는 아들을 낳았다.
이상해 하는 예향의 밤 꿈에 한 대장부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해 신룡(神龍)의 아들 옥결로 이 아이의 아비요. 이 아이를 잘 키우면 크게되면 공후(公侯)요, 못되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이 될 것이요."
진평 왕이 이 말을 전하여 듣고 불러서 확인하여 보고 겨드랑이의 한자 '曺'를 따서 '曺'라 사성(賜姓)하여 주고, 이름은 용지(龍池)에서 동해신룡의 정기를 이어받았다 해서 이을 '繼'(계), 용 '龍'(용), '繼龍'(계룡)이라 지어 주었다.
이 아이가 자람에 자기 사위(駙馬)를 삼았다. 조계룡이 왜구가 동래를 침범했을 때 군졸을 몰고 나아가니 왜구가 두려워 하면서 스스로 놀라 물려갔다. 이에 나라에서는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을 봉하여 주었다.
그 용지 터는 비닐을 덮어 물이 땅에 스며 들지 않게 한 바로 못 아래에 있는 커다란 원형인데 조씨의 후손들이 세 못을 파서 복구하여 용지(龍池)의 옛모습을 환원하고 '龍池洞天'이란 비를 세워 조상을 기리고 있다.
*. 배바위 이름의 유래
화왕산의 산행의 하일라이트는 정상이 아니라 이 분화구라서,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파노라마로 이 아름다운 화왕산성과 초원과 산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오늘도 나는 또 가장 후미가 되었다. 이런 때 나의 산행 스타일을 이해하고 먼저 가주는 후미를 맡은 청산님이 고맙다. 뒤에 줄곳 따라 붙으면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하고 싶은 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배바위 저 멀리 배바위 위에 오르더니 이제 내려가는 모양이다.
왜 배바위라 하였을까? 어떤 이는 배를 매어놓은 곳이라고 해서 배바위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배 모양으로 생긴 바위라서 배 바위라고 하지만 그보다 배 바위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출처: 창녕군 홈피
그걸 말하려면 조금 전 청룡암으로 해서 오느라고 가보지 못한 관룡사에서 300m 더 오르면 있는 용선대(龍船臺, 보물 제295호) 이야기를 먼저 이야기 해야겠다.
-용 '龍'(용) 자, 배 '船'(선) 자 '용선대'(龍船臺)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盤若龍船'(반야용선)의 준말이다. 반야의 지혜로 사바세계와 극락 사이에 있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배란 뜻이다.
이 배의 선장이 부처님이요, 이를 이끄는 것은 용이다. 한 마디로 이승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구하여 열반의 세계로 이끌 때 타고 가는 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흔히 대웅전(大雄殿)을 반야용선(盤若龍船)'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음사 용선대 바위 끝에 선장이신 석가여래불이 결가부좌를 하고 석굴암의 여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화왕산 분지를 굽어보는 자리에 켜켜이 쌓인 돌을 '배바위'라 하는 것도 용선대와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진달래 능선 하산 길
정상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저리로 가면 이름도 멋진 환장고개로 하산할 터인데, 목마산성을 가는 코스이기도 한데-, 하면서.
그러나 배 바위서부터 도성암까지 1.7km는 암릉구간으로 전구간에 걸쳐서 밧줄이 매어 있는데 연홍빛 진달래가 아직지지 않고 나의 하산길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정상을 고집하였더라면 창녕조씨 득성비도, 배바위는 물론 이렇게 아름다운 진달래 암릉길을 못갔으리라 생각된다.
도봉산과 도락산의 암릉을 타며 느끼던 고국 산하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엉엉 울어보고 싶도록 나는 우리 산하에 감격하고 있었다.
여행은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것인데 이렇게 한국의 자연이 숨어있다가 그 아름다움을 탐하는 사람에게 그 비경을 하나하나 열어줄 때마다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창녕은 우리 시조할아버지가 화왕산 정기 받아 태어나시고, 자랐으며, 사시다가 묻히신 곳이다. 그 맥산재를 참배하지 못하고 창녕을 떠지만 아름다운 고장을 성씨(姓氏)의 고향으로 한 '성씨(成氏)의 고향 창녕'이 화왕산으로 해서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화왕산의 산행의 하일라이트는 정상이 아니라 이 분화구라서,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파노라마로 이 아름다운 화왕산성과 초원과 산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오늘도 나는 또 가장 후미가 되었다. 이런 때 나의 산행 스타일을 이해하고 먼저 가주는 후미를 맡은 청산님이 고맙다. 뒤에 줄곳 따라 붙으면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하고 싶은 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배바위 저 멀리 배바위 위에 오르더니 이제 내려가는 모양이다.
왜 배바위라 하였을까? 어떤 이는 배를 매어놓은 곳이라고 해서 배바위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배 모양으로 생긴 바위라서 배 바위라고 하지만 그보다 배 바위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출처: 창녕군 홈피
그걸 말하려면 조금 전 청룡암으로 해서 오느라고 가보지 못한 관룡사에서 300m 더 오르면 있는 용선대(龍船臺, 보물 제295호) 이야기를 먼저 이야기 해야겠다.
-용 '龍'(용) 자, 배 '船'(선) 자 '용선대'(龍船臺)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盤若龍船'(반야용선)의 준말이다. 반야의 지혜로 사바세계와 극락 사이에 있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배란 뜻이다.
이 배의 선장이 부처님이요, 이를 이끄는 것은 용이다. 한 마디로 이승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구하여 열반의 세계로 이끌 때 타고 가는 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흔히 대웅전(大雄殿)을 반야용선(盤若龍船)'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음사 용선대 바위 끝에 선장이신 석가여래불이 결가부좌를 하고 석굴암의 여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화왕산 분지를 굽어보는 자리에 켜켜이 쌓인 돌을 '배바위'라 하는 것도 용선대와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진달래 능선 하산 길
정상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저리로 가면 이름도 멋진 환장고개로 하산할 터인데, 목마산성을 가는 코스이기도 한데-, 하면서.
그러나 배 바위서부터 도성암까지 1.7km는 암릉구간으로 전구간에 걸쳐서 밧줄이 매어 있는데 연홍빛 진달래가 아직지지 않고 나의 하산길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정상을 고집하였더라면 창녕조씨 득성비도, 배바위는 물론 이렇게 아름다운 진달래 암릉길을 못갔으리라 생각된다.
도봉산과 도락산의 암릉을 타며 느끼던 고국 산하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엉엉 울어보고 싶도록 나는 우리 산하에 감격하고 있었다.
여행은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것인데 이렇게 한국의 자연이 숨어있다가 그 아름다움을 탐하는 사람에게 그 비경을 하나하나 열어줄 때마다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창녕은 우리 시조할아버지가 화왕산 정기 받아 태어나시고, 자랐으며, 사시다가 묻히신 곳이다. 그 맥산재를 참배하지 못하고 창녕을 떠지만 아름다운 고장을 성씨(姓氏)의 고향으로 한 '성씨(成氏)의 고향 창녕'이 화왕산으로 해서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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