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 국립공원 산행 Photo 에세이
(2009. 11.2/불국사매표소-순환도로탐방로-석굴암- 토암산-불국사: 단독 산행)
*. 토함산 가는 길
(2009. 11.2/불국사매표소-순환도로탐방로-석굴암- 토암산-불국사: 단독 산행)
*. 토함산 가는 길
경주(慶州)에 도착하였을 때는 저녁이 가까운 오후인데다가 강풍이 불어서 점심겸 저녁을 하려고 경주역 앞의 성동 시장에 갔더니 뷔페식 식당이 나를 유혹한다.
여행은 이렇게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다.
현지인과 만나 이런 저런 그 고장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내 또래의 가난한 노인에게 그의 밥값과 술값을 치러 주며 이야기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눌한 말에다가 강한 경상도 사투리는 30% 정도만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서로 대화가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손님으로부터 경주에서는 제일 유명하다는 ‘첨성대 한증막’을 소개 받아 10번 시내버스로 찾아갔더니 불국사 근처에 있는 찜질방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하였던 남산 탐방이 불국사와 토함산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제는 동래의 금정산(金井山)을 등반하고 부산에서 일박한 후 태종대(太宗臺)를 둘러보고 자갈치 시장에서 조반을 해결한 후 경주를 향하였다.
경주 남산에 들러 그곳에 유명하다는 불상(佛像)을 샅샅이 뒤지고 싶어서였다.
4,000원의 밥값을 치르면 뷔페식으로 반찬을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이어서 식사와 막걸리에 그 반찬을 술안주로 먹기로 하였다. 경주 남산에 들러 그곳에 유명하다는 불상(佛像)을 샅샅이 뒤지고 싶어서였다.
여행은 이렇게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다.
현지인과 만나 이런 저런 그 고장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내 또래의 가난한 노인에게 그의 밥값과 술값을 치러 주며 이야기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어눌한 말에다가 강한 경상도 사투리는 30% 정도만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서로 대화가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손님으로부터 경주에서는 제일 유명하다는 ‘첨성대 한증막’을 소개 받아 10번 시내버스로 찾아갔더니 불국사 근처에 있는 찜질방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하였던 남산 탐방이 불국사와 토함산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 외로운 순환도로 탐방로길
다음날 일찌감치 일어나서 불국사를 향하여 걷다 보니 다행히 불국사 행 버스가 온다. 첫차가 경주에서 6시에 출발한 모양이다.
불국사 근처에 도착하여 보니 이른 새벽이라 물어볼 한 사람도 없어서 그냥 큰 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 불국사 동쪽 후문이 나타난다.
불국사는 하산 길에 들르기로 하고 무심히 그냥 지나친 것 때문에 나는 금년 최고로 춥다는 영하의 날씨와 강풍에 시달리면서 순환도로 8.2km를 2시간 30분이나 걸어야 했다.
석굴암 가는 탐방로 갔다면 2.4km/ 50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말이다.
토함산 등산로는 아까 지나친 불국사 동쪽 일주문 우측에 있는 매표소에서 자연석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다.
그 길로 가면 옛날 고등학교 재직 시절 수학여행을 왔을 때 그 초입에 ‘청마 유치환시비’ 시비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는 순환도로 탑방로는 승용차로 갈 수 있게 만든 그 당시에는 없던 신도로다. 그래서 등산로 옛길처럼 직선길이 아니고 8.2km의 구비를 반타원형을 크게 그리며 멀리 돌아 우회하는 꼬부랑길이었다.
직진해야 하는 등산로를 지나치게 한 것은 ‘동리, 목월문학관' 간판에 한눈 팔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곳도 그냥 지나치다 보니 그 후문이 건물과 함께 나타난다.
‘동리, 목월문학관’ 내에는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에 나오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의 혼 탑’도 있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이 길은 갓길도 인도도 없는 길이지만 우측이 탁 트여서 펼쳐지는 경주 시내를 가끔 가끔 굽어보기에는 안상마춤이었다.
오르막 찻길은 군데군데 산쪽 축대에 멋진 샘물을 만들어 놓았고, 그 시멘트로 바른 벽에는 신라의 멋진 문양이 새겨 있었다.
저 산마루에는 멋진 정자가 보이는데 길은 자꾸 우측으로 돌아 그 모습을 멀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홀로 가는 이 지루한 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중 초장 중장만을 쓰고 김황원처럼 미루어 오던 시조의 종장도 찾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음날 일찌감치 일어나서 불국사를 향하여 걷다 보니 다행히 불국사 행 버스가 온다. 첫차가 경주에서 6시에 출발한 모양이다.
불국사 근처에 도착하여 보니 이른 새벽이라 물어볼 한 사람도 없어서 그냥 큰 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 불국사 동쪽 후문이 나타난다.
불국사는 하산 길에 들르기로 하고 무심히 그냥 지나친 것 때문에 나는 금년 최고로 춥다는 영하의 날씨와 강풍에 시달리면서 순환도로 8.2km를 2시간 30분이나 걸어야 했다.
석굴암 가는 탐방로 갔다면 2.4km/ 50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말이다.
토함산 등산로는 아까 지나친 불국사 동쪽 일주문 우측에 있는 매표소에서 자연석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다.
그 길로 가면 옛날 고등학교 재직 시절 수학여행을 왔을 때 그 초입에 ‘청마 유치환시비’ 시비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는 순환도로 탑방로는 승용차로 갈 수 있게 만든 그 당시에는 없던 신도로다. 그래서 등산로 옛길처럼 직선길이 아니고 8.2km의 구비를 반타원형을 크게 그리며 멀리 돌아 우회하는 꼬부랑길이었다.
직진해야 하는 등산로를 지나치게 한 것은 ‘동리, 목월문학관' 간판에 한눈 팔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곳도 그냥 지나치다 보니 그 후문이 건물과 함께 나타난다.
‘동리, 목월문학관’ 내에는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에 나오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의 혼 탑’도 있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이 길은 갓길도 인도도 없는 길이지만 우측이 탁 트여서 펼쳐지는 경주 시내를 가끔 가끔 굽어보기에는 안상마춤이었다.
오르막 찻길은 군데군데 산쪽 축대에 멋진 샘물을 만들어 놓았고, 그 시멘트로 바른 벽에는 신라의 멋진 문양이 새겨 있었다.
저 산마루에는 멋진 정자가 보이는데 길은 자꾸 우측으로 돌아 그 모습을 멀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홀로 가는 이 지루한 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중 초장 중장만을 쓰고 김황원처럼 미루어 오던 시조의 종장도 찾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산 길엔 산이 점점 높아지는데
인생은
왜 올라가도 높아지고
내려가도 높아지는가?
-인생 길
그러다 보니 8시 40분부터 출발한다는 ‘불국사-석굴암 버스’도 지나가기 시작하였고 길 중간쯤에서는 나를 지나친 관광버스는 벌써 구경을 끝내고 돌아내려 가기도 하였다. 벌써 2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석굴암 가는 차도는 그 길의 최고 능선이라는 '감포 갈림길'에서도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그 길에는 노란 단풍잎이 강풍에 떨어져 있었고 그걸 밟고 지나는 낭만도 있기는 했다.
*. 토함산(吐含山)
석굴암 주차장에 이르니 아까 걸어오면서 보던 산 능선의 멋진 누각이 1991년에 지었다는 ‘토함산 불국사 석굴암 통일대종각이었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50m쯤 언덕으로 오르니 '토함산 1.4km' 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비로소 본격적인 토함산 등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토함산을 오르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난다.
석굴암 때문에 토함산이 유명해진 것인가. 토함산 때문에 석굴암이 유명해진 것인가.
토함산은 한자로 토할 '吐(토)', 먹음을 '含(함)'으로 ‘吐含’이라 쓰니, 먹음은 것을 토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먹음 것은 무엇일까.
이 산이 바다 가까이 있어서 안개가 자주 낀다. 그래서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습기 찬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낸다 하여 토함(吐含)이 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라 4대왕 탈해왕(脫解王)의 이름에서 연유됐다는 이야기다.
신라 탈해왕을 ‘토해왕(吐解王)’이라고도 한다.
옛날 서민들은 문자화 이전의 삶이라 ‘토해’와 ‘토함’은 유사한 음이라서 토해산이라 하던 것을 토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해왕과 토함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입에 붙은 표주박’이란 전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석굴암 가는 차도는 그 길의 최고 능선이라는 '감포 갈림길'에서도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그 길에는 노란 단풍잎이 강풍에 떨어져 있었고 그걸 밟고 지나는 낭만도 있기는 했다.
*. 토함산(吐含山)
석굴암 주차장에 이르니 아까 걸어오면서 보던 산 능선의 멋진 누각이 1991년에 지었다는 ‘토함산 불국사 석굴암 통일대종각이었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50m쯤 언덕으로 오르니 '토함산 1.4km' 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비로소 본격적인 토함산 등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토함산을 오르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난다.
석굴암 때문에 토함산이 유명해진 것인가. 토함산 때문에 석굴암이 유명해진 것인가.
토함산은 한자로 토할 '吐(토)', 먹음을 '含(함)'으로 ‘吐含’이라 쓰니, 먹음은 것을 토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먹음 것은 무엇일까.
이 산이 바다 가까이 있어서 안개가 자주 낀다. 그래서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습기 찬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낸다 하여 토함(吐含)이 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라 4대왕 탈해왕(脫解王)의 이름에서 연유됐다는 이야기다.
신라 탈해왕을 ‘토해왕(吐解王)’이라고도 한다.
옛날 서민들은 문자화 이전의 삶이라 ‘토해’와 ‘토함’은 유사한 음이라서 토해산이라 하던 것을 토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해왕과 토함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입에 붙은 표주박’이란 전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토함산은‘탈해왕이 왕이 되기 전에 무술을 연마하던 산이었다.
어느날 이 산 중에서 목이 말라서 하인을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자기도 목이 마르던 하인이 남몰래 먼저 마시다 보니 표주박이 입에 딱 붙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탈해왕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을 맹세하자 표주박이 입에서 떨어졌다.’ 하는 전설이다.
‘今東岳中有一井 俗云遙乃井是也’란 말과 함께 삼국유사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다.
토함산(동악) 산 중에 한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요내정이 바로 이 우물이란 것이다.
그 우물이 등산로에서 만나게 되는 샘이라고도 하고, 석굴암 바로 아래에 있는 ‘甘露水’란 샘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 탓인가. 토함산에는 유난히 샘물이 많았다.
탈해왕과의 이러한 인연은 지금도 토함산에는 석탈해(昔脫解)의 사당을 모시게 하였다.
*. 토함산 성화대(聖火臺)
토함산을 오르다 보니 ‘성화대 50m’라는 이정표가 있어 올라가 보니 강화의 참성단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제단과 성화대(聖火臺)가 있는데 그 모양이 성화 봉송주자가 들고 달리던 성화 기구를 닮았다.
옛날 신라인도 그렇지만 지금의 영남인들도 이 토함산을 영산(靈山)으로 숭상한다는 증거다. 도내 체육대회 때마다 성화 채화지가 토암산인 모양이다.
신라시절엔 신라 오악(五嶽)에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오악이란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 부악(중악)이 그것이다.
그중 동악인 토함산은 높이 745m로 서라벌에서는 단석산(827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영산(靈山)이다.
토함산 정상 가는 길은 처음에는 잎을 떨군 잡목 사잇길이더니 정상이 가까울수록 억새밭이 무성하다.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억새 길 사이로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날 이 산 중에서 목이 말라서 하인을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자기도 목이 마르던 하인이 남몰래 먼저 마시다 보니 표주박이 입에 딱 붙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탈해왕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을 맹세하자 표주박이 입에서 떨어졌다.’ 하는 전설이다.
‘今東岳中有一井 俗云遙乃井是也’란 말과 함께 삼국유사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다.
토함산(동악) 산 중에 한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요내정이 바로 이 우물이란 것이다.
그 우물이 등산로에서 만나게 되는 샘이라고도 하고, 석굴암 바로 아래에 있는 ‘甘露水’란 샘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 탓인가. 토함산에는 유난히 샘물이 많았다.
탈해왕과의 이러한 인연은 지금도 토함산에는 석탈해(昔脫解)의 사당을 모시게 하였다.
*. 토함산 성화대(聖火臺)
토함산을 오르다 보니 ‘성화대 50m’라는 이정표가 있어 올라가 보니 강화의 참성단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제단과 성화대(聖火臺)가 있는데 그 모양이 성화 봉송주자가 들고 달리던 성화 기구를 닮았다.
옛날 신라인도 그렇지만 지금의 영남인들도 이 토함산을 영산(靈山)으로 숭상한다는 증거다. 도내 체육대회 때마다 성화 채화지가 토암산인 모양이다.
신라시절엔 신라 오악(五嶽)에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오악이란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 부악(중악)이 그것이다.
그중 동악인 토함산은 높이 745m로 서라벌에서는 단석산(827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영산(靈山)이다.
토함산 정상 가는 길은 처음에는 잎을 떨군 잡목 사잇길이더니 정상이 가까울수록 억새밭이 무성하다.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억새 길 사이로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2008년 여름에 중국의 '실크로드(the Silk Road)'를 다녀왔다.
중국은 5천 년 전부터 비단을 갖고 있었지만 서양이나 인도는 그러지 못하였다.
그래서 터키, 로마, 인도 등지에서 그 귀한 비단을 구하려 중국을 향한 실크로드 길이 생겼다.
그 길은 지금은 중국의 자치구가 된 신강(新彊)의 우르무치에서 시작하여 돈황을 거쳐서 서안(옛날의 長安)까지 이어졌다.
그 무렵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도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인도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기었다. 죽을 ‘고비’라 할 때 ‘고비’라는 그 말이 고비사막에서부터 생겼다는 말은 그 여행 중에 들은 말이다.
나는 사막을 뚫고 생긴 고속도로를 관광버스를 타고 다녀왔지만, 옛날에는 몇 달 몇 년이나 걸려야 하는 고되고 위험한 죽음의 길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사막을 횡단하다 바위 절벽을 만나면 그 바위를 뚫고 석굴을 만들어 거기에 불상과 벽화를 만들어 모시고 여행의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둔황 석굴(焞煌石窟)이다.
그 영향으로 신라인이 만든 석굴이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고려 시대의 속요(俗謠)에 ‘쌍화점’에 이런 글이 나온다.
중국은 5천 년 전부터 비단을 갖고 있었지만 서양이나 인도는 그러지 못하였다.
그래서 터키, 로마, 인도 등지에서 그 귀한 비단을 구하려 중국을 향한 실크로드 길이 생겼다.
그 길은 지금은 중국의 자치구가 된 신강(新彊)의 우르무치에서 시작하여 돈황을 거쳐서 서안(옛날의 長安)까지 이어졌다.
그 무렵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도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인도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기었다. 죽을 ‘고비’라 할 때 ‘고비’라는 그 말이 고비사막에서부터 생겼다는 말은 그 여행 중에 들은 말이다.
나는 사막을 뚫고 생긴 고속도로를 관광버스를 타고 다녀왔지만, 옛날에는 몇 달 몇 년이나 걸려야 하는 고되고 위험한 죽음의 길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사막을 횡단하다 바위 절벽을 만나면 그 바위를 뚫고 석굴을 만들어 거기에 불상과 벽화를 만들어 모시고 여행의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둔황 석굴(焞煌石窟)이다.
그 영향으로 신라인이 만든 석굴이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도 있겠다.
고려 시대의 속요(俗謠)에 ‘쌍화점’에 이런 글이 나온다.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여이다.
이 소리 이 점 밖에 나명 들명~
이 노래의 쌍화는 만두요, 회회(回回)아비는 신강의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사는 위구르 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신라시대에도 교류가 중국 땅이 된 신강(新疆)의 위구르족과도 어울린 것을 입증하여 주고 있는 고려속요다.
*. 석굴암의 불상들
석굴암 가는 길은 일주문에서도 한참의 내리막길로 계속 되었다. 그러더니 나무 가지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던 석굴암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30여년에 걸쳐 완성한 석굴사원이다.
돌로써 비단을 짜는 것과 같이 화강석을 다듬어 부드럽고 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였다는 옛사람의 말처럼, 이 석굴암의 조각은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의 의 하나로 등록 되었다.
석굴암의 방향은 동해 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이라는 대왕암(大王巖)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문무왕처럼, 석굴암도 부처님의 가호(加護)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의 일환인 것이다. 문무왕의 대왕암(大王岩)은 죽은 뒤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수중릉(水中陵)이기에 하는 말이다.
아래 광장에 감로수(甘露水)가 있고 맨 위에 석굴암, 그 우측에 삼층석탑과 관리소로 쓰고 있는 수광전(壽光殿)이 있다.
이 당우는 원래는 승방이었으나 지금은 관리소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다.
석굴암은 영구 보존을 위해서 관람객들의 접촉은 물론 호흡기를 통한 수분을 막기 위해서 유리로 가로 막아 놓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이 석굴암은 그 앞에 목조 건물도 없었다. 관람객들은 그 실내를 자유롭게 들어가서 둘러 볼 수가 있어서 그때마다 가이드가 되어 나는 학생들에게 설명하여 주곤 하였다.
석굴암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외국 관광객이 많았다.
그런데 유리로 막아 접근할 수 없어서 석굴암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데다가 사진도 못찍게 한다.
중국의 둔황의 석굴은 직접 들어가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직접 살펴 볼 수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개방은 않더라고 전각을 짓고 그 모형이나마 살펴 보게 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석굴암이 이렇게나마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의 유물이 모래 속에 묻혀 있다 발견되었듯이 신라의 멸망과 함께 덥혀져 잊혔다가 발견 되었다는이야기도 있다.
전하는 말에는 1907년 한 우체부가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이 근처에 이르러서 비를 긋기 위해 피신처를 찾다가 비에 무너진 석굴암을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일화가 있지만 전설 같다.
조선 중기의 화가 겸제 정선(鄭敾)이 1733년(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帖)> 2권 중에 석굴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크게 세구조로 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하여 땅을 상징하는 네모진 전실(前室)과 우주(하늘)를 상징하는 석가불을 둘러싸고 있는 나한과 11면관음보살 문수보살 등 39구의 불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주실(主室)과 사바세계인 땅과 부처님의 세계를 이어주는 비도(扉道)가 그것이다.
그 비도 앞 양쪽에 있는 것이 불교의 수호신 금강역사(金剛力士)요, 비도 양쪽에 양각되어 있는 것이 사천왕(四天王)이다.
그래 그런가. 석굴암을 보면 하나의 사찰을 축소하여 놓은 것 같다.
주실(主室)의 '본존불'은 대웅전(大雄殿)이요. 그 뒤 '11면관음보살'은 관음전(觀音殿)을 상징하고, 다른 부처는 천불(千佛)을 모신 전곽과 같다.
라오스, 캄보디아나 베트남, 중국 등 동남아 불교 국가를 가 보았더니 관광지가 사원(寺院)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곳 사원들은 더 많은 부처와 더 큰 부처를 조성하는데 신경을 썼을 뿐 정교하고 아름다운 면에서는 한국불상을 따라올 수 없는 불상들이었다.
석굴암의 불상들의 이마에는 옛날에 귀한 보석이 모두 박혀 있었다 한다.
그 보석이 일출 때면 빛을 발하여 서로 그 번쩍이는 모습이 저 동해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왜구들이 이를 보고 그 보석을 탐해 임진왜란을 일으켜 쳐들어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굴암이 발견 되었을 때에가 일제강점기라서 몹시 파괴된 전체를 일본으로 가져 가려하였다는 말을 접하고 보면 오금이 떨려온다.
*. 불국사(佛國寺) 이야기
이는 신라시대에도 교류가 중국 땅이 된 신강(新疆)의 위구르족과도 어울린 것을 입증하여 주고 있는 고려속요다.
*. 석굴암의 불상들
석굴암 가는 길은 일주문에서도 한참의 내리막길로 계속 되었다. 그러더니 나무 가지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던 석굴암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30여년에 걸쳐 완성한 석굴사원이다.
돌로써 비단을 짜는 것과 같이 화강석을 다듬어 부드럽고 아름다운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였다는 옛사람의 말처럼, 이 석굴암의 조각은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1995년 12월 9일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의 의 하나로 등록 되었다.
석굴암의 방향은 동해 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이라는 대왕암(大王巖)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문무왕처럼, 석굴암도 부처님의 가호(加護)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의 일환인 것이다. 문무왕의 대왕암(大王岩)은 죽은 뒤에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수중릉(水中陵)이기에 하는 말이다.
아래 광장에 감로수(甘露水)가 있고 맨 위에 석굴암, 그 우측에 삼층석탑과 관리소로 쓰고 있는 수광전(壽光殿)이 있다.
이 당우는 원래는 승방이었으나 지금은 관리소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다.
석굴암은 영구 보존을 위해서 관람객들의 접촉은 물론 호흡기를 통한 수분을 막기 위해서 유리로 가로 막아 놓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이 석굴암은 그 앞에 목조 건물도 없었다. 관람객들은 그 실내를 자유롭게 들어가서 둘러 볼 수가 있어서 그때마다 가이드가 되어 나는 학생들에게 설명하여 주곤 하였다.
석굴암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외국 관광객이 많았다.
그런데 유리로 막아 접근할 수 없어서 석굴암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데다가 사진도 못찍게 한다.
중국의 둔황의 석굴은 직접 들어가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직접 살펴 볼 수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개방은 않더라고 전각을 짓고 그 모형이나마 살펴 보게 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석굴암이 이렇게나마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의 유물이 모래 속에 묻혀 있다 발견되었듯이 신라의 멸망과 함께 덥혀져 잊혔다가 발견 되었다는이야기도 있다.
전하는 말에는 1907년 한 우체부가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이 근처에 이르러서 비를 긋기 위해 피신처를 찾다가 비에 무너진 석굴암을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일화가 있지만 전설 같다.
조선 중기의 화가 겸제 정선(鄭敾)이 1733년(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帖)> 2권 중에 석굴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크게 세구조로 되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하여 땅을 상징하는 네모진 전실(前室)과 우주(하늘)를 상징하는 석가불을 둘러싸고 있는 나한과 11면관음보살 문수보살 등 39구의 불상들이 둘러싸고 있는 원형의 주실(主室)과 사바세계인 땅과 부처님의 세계를 이어주는 비도(扉道)가 그것이다.
그 비도 앞 양쪽에 있는 것이 불교의 수호신 금강역사(金剛力士)요, 비도 양쪽에 양각되어 있는 것이 사천왕(四天王)이다.
그래 그런가. 석굴암을 보면 하나의 사찰을 축소하여 놓은 것 같다.
주실(主室)의 '본존불'은 대웅전(大雄殿)이요. 그 뒤 '11면관음보살'은 관음전(觀音殿)을 상징하고, 다른 부처는 천불(千佛)을 모신 전곽과 같다.
라오스, 캄보디아나 베트남, 중국 등 동남아 불교 국가를 가 보았더니 관광지가 사원(寺院)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곳 사원들은 더 많은 부처와 더 큰 부처를 조성하는데 신경을 썼을 뿐 정교하고 아름다운 면에서는 한국불상을 따라올 수 없는 불상들이었다.
석굴암의 불상들의 이마에는 옛날에 귀한 보석이 모두 박혀 있었다 한다.
그 보석이 일출 때면 빛을 발하여 서로 그 번쩍이는 모습이 저 동해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한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왜구들이 이를 보고 그 보석을 탐해 임진왜란을 일으켜 쳐들어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굴암이 발견 되었을 때에가 일제강점기라서 몹시 파괴된 전체를 일본으로 가져 가려하였다는 말을 접하고 보면 오금이 떨려온다.
*. 불국사(佛國寺) 이야기
석굴암 주차장에서는 불국사 가는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정시에 있었다.
2.4km의 등산로로 내려갈까 망설였지만 불국사를 둘러보고 남산을 향하고 싶은 욕심에 버스를 타니 15분만에 불국사에 닫는다.
불국사의 다보탑은 수리 중이라서 천으로 막아서 볼 수 없었고 옛날에 없던 새로 지은 좌우 회랑이 인상 깊었다.
불국사 이야기는 너무 많은 시간을 석굴암과 토함산 이야기로 보냈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비화가 얽힌 무영탑으로 유명한 석가탑(국보 제21호)이나,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 다보탑(多寶塔,국보 제20호)도 그러하지만, 부처의 세계에 오르게 하는 33계단의 청운교 백운교(국보제23호) 등을 함부로 언급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불국사도 토함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신라 26대 경덕왕 때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石佛寺: 현 석굴암)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였다는데 그에 얽힌 김대성(일명 金大城)과 관련한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설로 이 글을 맺는다.
신라 어느 마을에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가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 아들은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어서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가난한 어머니는 부자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는데 인심 좋은 그 집에서 밭 몇 마지기를 줌으로 그것으로 겨우 겨우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 부자집이 스님께 시주하는 모습을 보고 대성은 자기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은 전생에 착한 일을 하지 않은 탓이라 하여, 어머니와 상의하여 자기 밭 전부를 시주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 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 집의 하늘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가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
이날부터 문량의 부인이 태기가 있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아들이 7일 동안이나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았다. 그러다 펴 본 왼손 바닥에 대성이란 글자가 있어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대성이 자라서 어느 날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낮의 그 곰이 나타나 대성을 잡아먹으려 하면서 ‘네가 나를 위해서 절을 지어 주면 안 잡아먹지-.’ 하였다. 이로 인연하여 김대성이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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