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도립공원(金烏山道立公園)(2)
“이제 더 이상 무리를 하다가 걷지를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하며 만류하는 아내를 뿌리치고 이제 나는 홀로 금오산(金烏山) 주차장에 와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길 같이, 금오산(金烏山)을 오르는 코스도 여럿이 있다.
이를 '금오산 관광안내도'에서는 4코스로 말하고 있다.
1코스: 주등산로: 금오상가 주차장-케이불카 타는 곳-해운사-명금폭포-정상
2코스: 금오상가 주차장-케이불카 타는 곳-해운사- 명금폭포- 성안- 정상
3코스: 금오상가주차장- 법성사- 약사암- 정상
4코스: 경북환경연수원-취영정-칼다봉-성안- 정상
그런데 나는 상가주차장에 너무 이른 시간인 7시경에 도착한지라 케이불카는 물론 매표소도 굳게 닫쳐있어 안내도도 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1코스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2005년 11월 1일~2016년 5월 20일까지 등산로 폐쇄 구간이었다.
안내도 없는 단독등반이란 이정표만 따라 가야 하는 산행이라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을 놓지기 싶상이다. 허나 금오산의 이정표는 어느 산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해서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이번까지의 두 번의 금오산 산행에서 얻은 나의 이상적인 금오산 등산 코스로는 다음과 같다.
매표소-케이불카- 금오산성- 대혜문- 해운사- 명금폭포- 할딱고개- 정상/성안 갈림길- 금오정- 성안- 정상- 약사사- 마애보살입상- 오형탑- 할딱고개- 명금폭포- 케이불카 - 채미정- 대중버스/ 택시- 구미역
매표소를 지나 금오산 산행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자연보호발상지비'다. 금오산은 한국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였다.
1971년 9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 '명금폭포'에 도착하였을 때 깨어진 병 조각과 휴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박대통령은 "자! 우리 청소 작업부터 하자"고 말하면서 바위 틈에 박힌 유리병 조각을 일일이 주웠다. 이것이 자연보호운동으로 이어져서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캐이불카는 내려 올 때 타기로 하고 직진하다 보니 나무층계가 시작되는 오름 길에 원추형 돌탑 무리가 많았다. 새천년인 2000년을 맞아 금오산 정기가 온누리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34만(현 45만)시민의 뜻을 모아 금오산 오르는 길목에 세운 돌탑 21기들이었다. 21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 금오산성(金烏山城, 경북기념물 제67-1호) 이야기
거기서 얼마 안간 위치(관리소에서 0.6km)에 커다란 산성문이 나를 굽어 보고 있다. 금오산성의 외성인 '大惠門'(대혜문)이었다.
산성(山城)이란 적을 막기 위해서 산세(山勢) 따라 쌓은 성(城)을 말한다.
금오산성의 내성(內城)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다는데 둘레가 2.326m, 높이가 2.1m로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外城)은 1.253m, 높이가 4.2m 계곡을 감쌌는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성 내에다가는 평상시에는 군창(軍倉)에다 곡식과 무기를 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주민들을 모두 산성에 들어오게 하여 군인과 함께 농성(籠城)하는 것이다. 산성(山城)은 적으로 하여금 많은 힘을 기울여 공격하게 하고 아군은 적을 내려다보며 수성(守城)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 되게 하려고 쌓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는 약 1,200여 개의 산성 터가 있는 모양이다. 이 모두가 왜놈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함이었다.
*. 대혜폭포(大惠瀑布)
산성(山城)을 지나 오르다 보니 영흥정(靈興井)이란 멋진 약수터가 있다.
지하 168m의 암반층에서 솟아나는 양질의 지하수다.
절수를 위해서 사람이 다가서면 물이 나오는식으로 구미시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약수터였다.
그 영흥정 약수터 바로 위 천인절벽을 뒤로 하고 있는 절이 구름도 쉬어간다는 '해운사(海雲寺)'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의하면 금오산의 북쪽에 신라말 고승 도선(道詵)대사가 '대혈사(大穴寺)'라는 절을 창건(서기 827〜898)하였다 한다.
그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린 것을 1925년 4월 20일에 대혜폭포 북서쪽 언덕에 철화스님이 해운사(海雲寺)란 이름으로 지금 같이 복원하여 창건한 절이다.
등산길 가에 이층 누각으로 멋지게 서 있는 해운사(海雲寺)의 범종각이 발길을 붙든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니 거기가 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다.
대혜폭포(大惠瀑布)는 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한 27m의 수직 폭포다. 그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금(金)오산을 울린다[鳴]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한다. 이 폭포는 금오산 정상 부근에 있는 고원분지에서 발원하여 남북 방향의 계곡 따라 흘러 내려서 이 고장 관개(灌漑)의 유일한 수자원이 되어 농사에 큰[大] 은혜(惠)을 주는 골(谷)이라하여 골짜기 이름을 '대혜골(大惠골)', 폭포 이름을 '대혜폭포(大惠瀑布)'라 한 것이다.
또한 그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경북 8경' 또는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폭포는 여름 장마철을 빼고는 수량이 적은 것이 흠이다.
대혜폭포에서 0.1km를 오르니 '2.2km정상/도선굴 0.2km' 이정표가 있다.신라 말의 풍수지리에 능한 도선(道詵)대사와 고려 충신 야은 길재(吉再)선생이 금오산에서 숨어 수도하였다는 천연동굴이라서 '야은굴(冶隱窟)'이라고도 하는 굴이다.
금오산 입구에 '채미정(採薇亭, 지방기념물 제55호)'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길재(1353~1419)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기려 이를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44년에 건립한 정자다.
채미(採薇)란 말은 고사리를 캔다는 말로 은(殷)나라의 충신 백이, 숙제(伯夷叔齊) 형제가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 나라를 치려는 것을 막다가 듣지 않자 주(周) 나라의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럾게 생각하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 정자 명을 '채미정(採薇亭)'이라 한 것은 성삼문(成三問)의 다음과 같은 시조를 생각하고 지은 정자 이름 같다.
首陽山 바라보며 夷齊를 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에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지루한 나무층계가 시작되고 있다. 바닥을 폐자동차 다이야로 깔아서 걷기에 편하였지만 끝없이 계속되는 층계가 몸을 지치게 힌다.
금오산 등반 코스 중에 가장 숨이 찬 지점이라 해서 예로부터 이 고개를 '할딱고개'라 불렀다는 정상까지의 1단계 지점이라는데 내 체력에는 할딱고개보다 '헐떡고개'란 표현이 더 맞는 말 같다.
비로소 뒤돌아 보는 전망이 있다.
대혜폭포, 대혜골이 만든 '금오저수지'도 보인다.
보통 산 같으면 이쯤해서 능선이 나타나련만 헐떡 고개보다 더 걷기 어려운 돌길이 계속되더니 이정표가 보인다.
'정상, 약사암0.9km/성안0.8km/0.6km마애석불'
나는 망설임없이 정상코스로 향하였으나 정상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성안'인 것을 내 어찌 모르랴.
*. '성안' 이야기
'성안'이란 내성(內城)이란 뜻으로 낙안읍성이나 남한산성처럼 '성안 마을'을 말한다.
금오산 정상(頂上)에서 서남쪽으로 800m 정도 내려가면 해발 800m 지점에 고위 평탄(高位平坦)한 넓은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왜구가 가장 극성을 부리던 고려 시대에는 금오산 부근의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난리가 나면 피난 오던 곳이 바로 '성안 마을'로 이를 산성 취락(山城聚落)이라 한다.
왜구가 쳐들어오면 백성들은 관군과 함께 왜구에 맞서 성을 지켰으며, 평상시에는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한 군창(軍倉)을 두었다. 예부터 금오 성안마을에는 9정 7택(九井七澤)이라 하여 금오정(金烏井)을 비롯한 9 개의 우물과 7개의 못이 있어서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가뭄이 들더라도 오히려 물 걱정이 적었다 한다.
성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있다 하는데 성안 마을은 등산 통제 구역이니 오늘은 생략해야 할 것 같다.
금오산이 '한국 최초로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지정되기 전에 여기서 살던 7~8 가구 민가가 있었다고 한다.
*.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峰)과 '약사사(藥師寺)'
정상은 선착객들의 두런두런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법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오르다 보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아내와 정형외과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남들이 2시간이면 오를 정상을 6시간 이상을 기진맥진하며 쉬엄쉬엄 올라왔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걸음은 거북이 걸음이 아니라 달팽이 걸음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 산의 등반이 끝나고 그 산행기를 쓰면 나의 저서 '韓國道立公園 山行記'의 편집에 들어간다. 그런 나름 대로의 꿈에 십여 년 전부터 아픈 무릎을 무릅쓰고 도립공원을 찾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만약 건강상의 불행이 닥쳐와도 나는 오늘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리고 이젠 고산(高山) 산행은 멈춰야겠다. 그러니까 이 산이 55년 간 나의 산행의 마지막 산행이 되는 산이 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는 백두산 종주를 위시하여 작년에는 5.000 계단을 걸어 태산(泰山, 1,945m)에 올랐고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덕유산 등을 목숨을 걸고 70을 넘긴 나이로 단독 종주하였다. 그런 모험으로 '韓國國立公園 山行記'를 발간할 수 있었더니, 이젠 30여 개의 한국 도립공원 산행을 마치고 이를 책자로 엮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무지 행복하다.
금오산 정상 바로 아래는 커다란 광장이 있다. 헬기장이다.
거기서 나보다 먼저 오른 선착객들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장기가 도는구나.
20여 년 전에 왔을 때는 정상은 엄두도 못 내고 약사사(藥師寺)만 들렸었다. 1953년 한미 행정협정에 의해 미군 통신기지가 정상 일원에 설치되어서 그 이후부터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다가 작년 2014년 10월 현월봉 정상 부분의 일부분을 미군 측으로부터 반환받았다.
그래서 등산객들은 약사암까지만 다녀오던 것을 이제는 정상 현월봉(懸月峰)에 서서 사방을 굽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상석은 걸 '懸', 달 '月', 봉우리 '峰'의 '懸月峰'이니 달이 봉우리에 달려 있다는 말로 산이 그만큼 높다는 표현일 것이다.
지금은 12월 중순 멀지 않아서 2015년 병신년(丙申年) 새해가 오면 나는 산수(傘壽)의 나이를 맞는다.
그러다 보니 허탈한 마음이 되어 금오산 현월봉에서 나의 벗들에게 새해 연하장으로 졸 시(拙詩) 한 수를 보내고 싶다.
머리가 희었다, 검었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틀니를 꼈다, 뺐다.
무릎이 아팠다 또 아팠다
반복되는 나이가
또 한 해를 보내고 맞습니다.
벗들이여
그래도 부디 금년 같이만 새해를 사소서.
새해를 금년 같이 사는 것이
우리들 늙다리 모두의 축복이니까요.
-세모에서
*. 약사암(藥師庵)
약사암(藥師庵) 들어가는 '東國第一門'(동국 제일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아름다웠다. 몇 발자국 들어서 굽어보니 산너머 산들의 산파(山波)가 사이사이 도시를 품고 있는 것이 세상도 역시 무릉도원(武陵桃園)이로구나 하였다.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여길 두고 생긴 말 같이 아름다와서다.
너무 위험해서인가 속인(俗人)을 꺼려서일까.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종각(鐘閣)까지의 구름다리는 천국에 이르는 길 같다.
이 약사암(藥師庵)은 금오산에서 가장 오랜 고찰(古刹)로 약사봉(藥師峰, 958m) 아래 너럭바위 위에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지리산 석불 삼구(石佛三軀) 중 일구가 현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그 약사여래는 수도산 수도암, 황학산 삼성암의 약사불과 함께 '3 형제불'로도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이 암자 동쪽 암벽에 약수가 용출하고 있다는데 옛날에는 쌀이 한 톨씩 떨어져 나왔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그래서 이 절은 예부터 참선 도량으로 이름이 난 절이다.
그런데 이정표에서 말하는 '마애보살 입상'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이정표 따라 약사암을 에돌아 휘돌다 보니 마애석불 가는 하산길이 나타난다.
신비로운 약사 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있다는 법성사(法城寺) 가는 3코스로 내려오다가 보니 리본이 닥지닥지 열린 것이 혹시나 여기가 마애석불인가 했더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마애보살입상이 빙그레로 나를 맞는다.
금오산 마애보살입상(金烏山磨崖普薩立像, 보물 제490호)은 금오산 정상 북쪽 아래 자연암벽에 조각된 높이 5.5m의 석불입상이다. 불상은 특이하게도 자연 암벽의 돌출 부분을 이용하여 그 모퉁이의 좌우를 나누어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으며 가는 눈, 작은 입 등에서 신라 보살상보다는 다소 진전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는 '보봉사(普峰寺)'란 절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은 무속인(巫俗人)의 것으로 보이는 불구(佛具)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어 귀한 불상 보물이 푸대접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이제 하산길에 '오형돌탑'만 보면 오늘의 일정은 마치는구나 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오형돌탑'에서 '오형'은 무슨 뜻일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 건너에 핼기장 같은 넓은 암반이 있고 거기에 수없이 많은 원추형 돌탑이 서있다. 기대 이상으로 찬란한 광경이었다.
산에 가서 만난 돌탑으로는 치악산(雉岳山) 정상과, 마이산(馬耳山) 탑사에서였는데 그 유래담이 신비하듯이 이 오형 돌탑에도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전자는 원주시에 사는 과자 장수 용진수 씨가 산신령의 현몽(顯夢)을 받아 쌓았다는 세 미륵탑이요, 후자는 마이산 기슭 탑사에 100년 전 이갑룡 처사가 10년에 걸쳐 쌓았다는 80여 개 돌탑같이 그 신비로운 탑들이다.
구미시에 사는 한 할아버지(이갑룡)가 손자를 두었는데 손자 '형석'이는 불치의 병인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태나서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였다. 학교라고는 하루밖에 다니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10살이 되던 해 패혈증(肺血症)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탑들은 그 손자를 위해 할아버지의 못다 한 사랑을 9년 동안 금오산 곳곳의 돌을 모아 돌탑을 세워 손자를 추모한 것이라 한다. 오형 탑(烏亨塔)이란 금오산의 '오'자와 손주의 이름에 '형'자를 따서 '오형 돌탑'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라 한다.
탑 중에 지은이가 써놓은 '오형 돌탑'이란 글이 발길을 붙잡는다. 살아생전 손자 형석을 '석아, 석아'로 부르며 먼저 간 손자를 화장하여 낙동강에 그 재를 띠우며 울부짖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이 글에서 읽을 수가 있다.
큰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
차곡차곡 등에 업고 돌탑으로 태어나서
떨어질까 무너질까 잡아주고 받쳐 주어
비바람을 이불 삼아 산님들을 친구 삼아
깨어지고 부서져서 모래알이 될 때까지
잘 가라 띄워 보낸 낙동강을 굽어보며
못다 한 너를 위해 세월을 울고 싶다.
석아!
-오형 돌탑
이 오형 돌 탐을 살펴보면 돌을 쌓은 이가 약간은 장난기가 있는 것 같다. 탑이 그냥 탑이 아니라 탑 위나 탑 속에 불상이 있는가 하면 탑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새나 짐승 등 갖가지 물형(物形)이 있다. 원추형도 있고 정식 탑 모양의 것도 있다. 태극기도 있고 우주 여인 이소연의 우주여행 로켓도 보이니 말이다.
이제 오형 돌탑은 금오산의 명승지가 되었으니 이 탑도 마이산의 탑사처럼 영원히 무너지지 않게 시(市)에서 관리하도록 부탁하고 싶다.
금오산을 오르다 보면 이정표가 세 가지 종류로 나타난다.
하나는 방향과 거리를 가르키는 '보통의 이정표'요, 또 하나는 네모진 기둥에 현재 위치를 가르쳐 주며 해발 몇 m인가까지를 친절히 가르쳐 주는 것이요, 또하나는 '119 쏠라 표시등'으로 금오산에서만 보는 것이다. 이는 낮에는 햇빛에 충전되고 밤에는 점멸하는 야간 조난 방지 등(燈)이다. 이 고장 구미의 금오산을 찾아오는 등산객과 관광객의 안전을 위한 배려이니 이 얼마나 구체적인 겨레 사랑인가. 이 얼마나 훌륭한 고장 사랑인가. 구미 시민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오형탑을 쌓은 분도 그런 마음의 사람인 것 같다.
오형탑에서 100m 정도 내려가니 주 등산로인 아침에 올라왔던 폭포 가는 길이 나타난다. 해운사 옆에 케이블카가 있어 이를 타고 내려 왔다.
금오산 케이블카(cable-car)는 1974년 9월에 개통되었은데 15분 간격으로 운행구간이 금오산 주차장에서 대혜폭포까지 805m 거리를 운영하는데 6분 30초가 걸렸다. 폭포까지만 가려는 관광객의 이용을 위해 만든 것 같아 등산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거리였다. 운행은 아침 9시부터 일몰 시(하절기 19:30, 동절기 17:30)까지라 한다.
- 2023. 봄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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