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仁川(인천)
仁川(인천) 행 전철에 오르니 생각이 옛날로 향한다. 그 어렵다는 명문 대학에 합격하고도 서울까지 지금은 1,000원이면 갈 수 있는 차비가 없어 입학식에 갈 수 없었던 내가, 47년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은 노인 우대권을 가지고 무임승차로 라디오를 들으며 서울에서 인천까지 가고 있다.
거지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의 물건 팔아주기 좋아하던 내가 방금 전철에서 산 라디오다.
비류 설화가 숨 쉬는 곳.
서기 372년 백제 시절에 최초로 당나라와 국제적 항구로 능허대(凌虛臺)가 개설되었던 곳.
1902년 최초의 해외 이민이 하와이로 향하여 떠나던 인천항.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 개항한 항구 도시 인천.
전 이대총장 김활란(金活蘭)과 민주당 장면 총리와 화가 이당 김은호(金殷鎬) 고향을 향하고 있다.
인천(仁川)을 왜 인천(仁川)이라 하였을까?
그래도 글을 쓴다는 그동안의 나의 무심을 탓하면서 며칠 전부터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 仁川(인천)이란 한자 그대로 '어질 인(仁), 내 천(川)' '어진 내'라는 뜻이 아니다.
인천(仁川)이란 이름은 비류왕 전설에 나오는 '미추홀'에서 시작하여, '매소홀(買召忽)', '소성(邵城)', '경원(慶源)'이라 하다가 '인주(仁州)'라 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인천 (仁川)은 5대에 걸쳐 왕의 어향이었던 고장이다.
어향(御鄕)이란 임금의 외가로 외향(外鄕)을 뜻하는 말이다. 고려 문종부터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 동안 인주(仁州) 이 씨(李氏) 집안에서 다섯 왕비가 나왔고 그중 다섯 임금이 인주(仁州) 이 씨(李氏) 왕비의 소생이었다. 인천은 고려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仁譽) 순덕 왕비의 고향이어서 경사 '경(慶)' 근원 '원(源') '경원(慶源)'으로 높이어 부르다가 아예 왕비의 본관(本貫)을 따서 인종(仁宗) 때부터 '인주(仁州)'라 불리게 되었다. 인예(仁譽) 순덕 왕비의 '인예(仁譽)'나 仁宗(인종)의 '인(仁)'도 이와 관계가 깊은 것 같다.
그 인주(仁州)를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주(州)가 들어있는 고을 이름을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꾸는 바람에 '仁川(인천)'이 되었다. 인주(仁州)가 물(바다)에 가깝다 하여 '주(州)'를 '천(川)'으로 바꾼 것이다.
세종대왕의 아내며, 수양대군의 어머니 소현왕후도 인천이 고향인 인주 이 씨(仁州李氏)였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했던가. 새해 들어 갑자기 고향 살던 동네가 생각나서 역에서 내려 송현(松峴) 시장을 향하여 걷기로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렇게 멀던 곳이 몇 걸음에 철룩다리가 나타나는데 주변 상가가 흉하게 헐려 있다. 지나가는 이에게 물으니 전철을 복복선(複複線)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이 경인철도는 1889에 노량진까지 210리를, 한강철교가 개통되던 1900년 7월 8일에는 서울역까지 260리가 한국 최초로 개통되었다는 바로 경인선(京仁線) 철교다.
나는 이곳을 통하여 용동 마루턱에 있는 한국 최초의 포교 지라는 감리교 내리 교회 역내에 있는 '영화초등학교'를 거쳐 '인천 중학'을 나와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작년 세모에 인천고등학교 동창회 모임 가서 백발이 성성한 친구들을 보고 다녀와서 이런 글로 지나간 날을 그리워한 일이 있다.
꼭 같은 나이를 살아온 우리 속에 묻히니
잊고 살던 옛날이 하나 하나 살아나더라.
별빛을 빼앗아 간 태풍 같은 긴 세월이
흰눈을 머리에 뿌리며
깊게 할키고 간 낯선 얼굴은
돌려주는 옛날이 그 속에 묻혀 있더라.
등록금 가져 오라 쫓아 보내던 담임 선생님도
그렇게 가난했던 우리들 아버지의 이야기도
이제는 궁상을 털고 사라져 간 그리움들….
우리들은
그때 없던 자식들이
떠난 자리에서
절주로 마셔야 하는 나이로 망년회에 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되찾은 젊디젊던 시절을 안고
반짝이던 그 별을 밟고
늙은 마누라로 돌아간다.
다음엔 나도 카드를 긁어서라도
술 한 잔 사고 싶구나
우리들 인고(仁高) 55회 친구들께
-동창회 다녀와서
누구나 가난하던 그 시절 그 무렵에 가난보다 더 가난했던 고교시절에, 수업료 독촉하는 담임 선생에게 점심 시간마다 쫓겨다니던 길을 따라 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살던 약우물 터 송현동 40번지에 가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술이라도 한 잔 사고 싶구나.' 그러나-.정지용 시인이 찾아간 고향은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는 제철에 맞추어 울어
주던 고향이었어도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노래 하였는데-,
아무리 오늘이 겨울의 끝자락이라지만 내가 찾아간 고향은 한 조각도 없이 사라지고, 입주(入住)를 두어 달 앞둔 낯선 대형콘크리트 아파트촌으로 송두리째 바뀌어 있었다. 천지개벽이 아니라 동네가 개벽을 한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로 성형 수술을 한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만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송현동 시장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뒷산 전체인 수도곡산까지를 깎아 27동 2,100여 가구가 아파트 촌락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내가 찾아온
고향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찾아올 필요가 없는 고향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경우 내 고향의 발전을 축하해야 할 것인가. 잃어버린 고향을 슬퍼해야 할 것인가.
옛날 고교 시절 동네 입구 공터 수평 대에서 기차 소리를 들으며 서울로 통학하는 동내 여학생을 기다리던 곳에는 보기 싫게도 건축 잔해가 가득히 쌓여 있다. 그 골목에 들어서면 입구에 있던 그래도 당시에는 잘 살던 왼쪽 쌍둥이집 구멍가게를 돌아 만나게 되던 쌍우물이 있었고, 거기서 좌측으로 올려다 보이던 숲이 무성하던 수도곡산은 보기 싫게 성형수술을 한듯 누런 황토 흙 속살이 드러난 것이 그 꼭대기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만이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변모하는 고향을 그리며, 그리움을 품고 살던 그 아름답고 시장하던 시절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설날 무렵.
가슴 속 깊숙한 마음을 열어 봤더니,
까맣게 잊고 살던
어린 시절 쌍우물 가,
겨울이 겨울답던
눈익은 골목 속에서
하나도 춥지 않게
밤을 서성대던 젊디젊은 내가 보인다.
백발을 이고 사는 지금
눈을 감아도
그 우물 속에
세월처럼 잠든
반짝이던 별들의 이야기를
두레박 가득 가득히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쌍우물을 두고도 수돗물을 사 먹었던 그 시절에
약우물 터를 바라보는 바다와 함께 듣던
기적 소리 때문일까
그 하얀 구름 속에 풍겨 오던 그리움을
억지로 지워버리려고
하얗게 부서지던
밀물과 썰물 때문이었을까
-쌍우물 가
거기서 한세월을 살았다는 노인을 만나 함께 허술한 목로 주점에 들렀다. 집이 헐린 대신 받은 26평짜리 아파트가 어느 정도 지어졌나 보러온 사람이다. 6.25때 연백에서 피난 나와 이곳에서 살아온 70 노인이다. 피난통에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평생을 부두에서 운치(짐나르는 일)로 쪼들리다가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은 사람. 돈 없어 병으로 42세에 아내를 잃어버리고, 홀로 1남 3녀를 키워 혼인시켰으나…. 더 말해야 무엇하랴. 그의 피곤한 얼굴에서 고단한 인생역정을 읽겠는데.
헤어져 돌아오다 보니, 올 때 기차에서 산 라디오가 주머니 속에서 손에 잡히니 갑자기 후회가 난다. 이걸 그 노인에게 주면 얼마나 요긴하게 쓸까 해서다. 우리 같은 나이에 라디오는 자식보다 가까운 친구던데-.
우리 아버지가 6·25무렵 조합장으로 있었던 중앙시장 모퉁이에서 만두를 굽는 50대 중반의 사람이 있었다. 소주로 점심을 때운 생각나서 만두 천원 어치를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하다 보니 내가 졸업한 인천중학에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 못 다녔다며 한숨 짓는다. '그럼 자넨 내 후배일세-' 하며 아까의 라디오를 주고 왔다. 안 받겠다는 만두 값을 굳이 치르면서-.
떠나올 때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 윤영신 교장이 동인천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그 친구의 머리는 백발로 변한 지 오래였고, 헤어져 살던 동안의 우리들의 대화는 우울하게도 병 이야기인데 우정은 술이 되어, 막걸리로 소주로 맥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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