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와 굴비 이야기
해방 되었을 무렵 내가 살던 인천(仁川)에서는 서민들의 밥상에도 오를 정도로 조기가 많이 잡혔다.
그 크기도 30cm 내외의 큼직한 것이어서 우리네도 그 조기를 사다가 항아리에 첩첩이 소금을 뿌려 저린 위에 돌로 눌러서 쪄 먹고 말려서도 먹었다.
우리가 지금 제상(祭床)에 올리거나 조석으로 먹기도 하는 조기는 참조기가 아니라 조기 과에 속하는 부시 아니면 보구치, 수조기, 부세, 흑조기 따위 들이다.
*. 참조기
그 조기 중에서도 상품(上品)으로 치는 것이 참조기다.
참조기는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몸이 길고 옆으로 납작하며 꼬리자루가 아주 가늘고 길다. 모양은 붕어와 비슷하나 붕어보다 조금 더 크며, 몸빛은 잿빛을 띤 황금색에다가 특히 입술이 불그스름한 홍색을 띠고 있는 점이 민어와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다.
참조기는 산란을 위해 동지나 해역에서 추자도, 흑산도 해역을 거쳐 음력 3월 중순 곡우(穀雨) 무렵 서해 칠산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쪽으로 북상하는 회유성(回遊性) 어종이다.
조기는 주로 기선저인망, 선망, 유자망, 안강망 등으로 잡는다.
이때 잡은 참조기를 영광에서 가공 건조한 것을 '염광굴비'라 한다.
*. 조기의 어원
조기는 순우리말로서 한자어로는 '석수어(石首魚)', '석어(石魚)', '종어'(鯼魚)라 한다.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 “ ‘鯼’ 조기 ‘종’”이라는 글이 보인다.- ‘석수어(石首魚)’의 속명이 조기(助氣)인데 이는 사람의 기(氣)를 도와(助) 주는 것이다
- ‘석수어(石首魚)’를 ’조긔‘라 하고 몸이 평평하고 몸은 담흑색이며 몸 전체는 황백색인데 이는 참조기를 말한 것이다.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석수어(石首魚)는 중국의 종어(鯼魚)를 말하는데 ’종어‘라는 이름을 급하게 발음하니 ’조기‘로 변하였다는 기록이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보이고 ’송남잡지‘란 문헌에도 ’종(鯼)‘의 음이 ’조기‘로 변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조기의 어원은 종어(鯼魚)에서 온 것 같다.
석수어(石首魚)라 하는 것은 조기 머리에 돌 같은 다이아몬드형의 뼈가 있어 석수어(石首魚) 하였다는 말이 송남잡지(松南雜識)에 전하여 온다.영광에서는 조기를 석수어(石水魚)라 쓰는데 이에 대한 다음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염광굴비는 토굴 속에서 조기 한 마리씩을 소금에 절여 3일간 돌로 눌러놓았다가 물이 빠지면 열 마리를 한 두름으로 엮어 걸대에 걸어 7~14일간 해풍에 건조시킨다 해서 석수어(石水魚)라 한다.
옛날 전라도에서는 함경도의 명태처럼 조기가 많이 잡혔다 하여 조기는 ‘전라도 명태라’는 별명을 갖기고 했다.
그래 그런가 이런 호남지방에는 이런 뱃노래가 전하여 온다.
돈실로 가자 돈 실로 가자 칠산 바다로 돈 실로 가자
*. 굴비 이야기
그 조기 중에서도 상품(上品)으로 치는 것이 굴비다.
굴비란 조기를 소금절이 하여 그냥 바람에 말린 조기로 '건석어(乾石魚)'라고도 한다.
그 굴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영광 '법성포 굴비'다.
곡우(穀雨) 무렵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서 참조기 때가 제주도에서 추자도를 거쳐서 남으로부터 서쪽으로 회유하며 연평도와 북의 덕도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 청정 지역인 영광법성포 칠산 앞바다를 지나게 된다.
이때 조기를 잡아다가 청정해역의 자연의 힘으로 생산된 영양 염류가 풍부한 염광 천일염을 조금 뿌려서 참조기를 해풍에 말려 가공 건조한 것을 염광굴비라 한다.
영광굴비가 유명한 것은 그 맛 때문인데 그 맛의 비결은 천연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 같다.
-염광지방의 낮의 습도는 45%요, 밤은 95% 이상이다. 그래서 습도가 낮은 낮에는 건조가 되고, 습도가 높은 밤에는 어체(魚體) 내부의 수분이 외부로 확산 되어 염증효과를 내며 숙성되는 천연적인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어 건조 과정에서 맛있는 굴비로 가공되는 것이다
.
그런 굴비가 먹고 싶어 백화점에 갔더니 10미 한 상자에 520만원 이상으로 말 그대로 금값이다.
그건 그렇고 그런데 왜 조기 말린 것을 굴비라 했을까?
-고려 16대 예종 때 이자겸(李資謙)은 그의 딸 순덕을 왕비로 들여 그 소생인 인종(仁宗)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이자겸은 외손자 뻘인 인종에게도 3녀와 4녀를 시집보내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독차지하고 은근히 왕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되었다. 이에 최사전이 이자겸 일당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체포한 후 이자겸을 염광법성포로 유배시켜 버렸다. 이자겸은 유배지인 염광에서 염광굴비를 먹어보고 “이 염광 굴비 맛을 모르고 개경에서만 살았구나!' 하고 후회하였다 한다.이자겸은 그 굴비를 나라님께
진상(進上)하면서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한 '비굴'한 아부가 아니고 뜻을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굴비'라 명명하였다'는 일화(逸話)가 전하여 온다.
조기의 최상품은 곡우 때 잡힌 산란 직전의 조기를 ‘곡우살 조기’ 또는 ‘오사리 조기‘라 하여 특상품으로로 친다.
굴비의 다른 이름으로는 구비석수어, 구을비석수어(仇乙非石首魚)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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