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삿포로의 먹거리/ 라멘, 게 이야기
1961년에 군대에 가서 기동훈련을 받을 때였다.
훈련을 떠날 때 보급해 주던 건빵과 함께 전투 비상 식품은 끓이지 않고도 물에 불려 먹을 수 있는 찐 쌀과 물에 넣으면 부풀어 국이 되는 마른 국거리를 포장한 것이었다. 그 후 1970년대에는 한국에 라면의 선호도가 자장면을 밀어낼 정도로 인기 있는 것을 보고, 내심으로는 군대의 전투식량이 라면으로 개발된 것이로구나 하였다. 그 라면은 어느 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일까?
이에 대한 문헌의 기록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설이 있다.
- 중일 전쟁 때였다. 관동군이 중국인의 전쟁 비상식량인 건면(乾麵)의 맛을 보고, 종전 후 일본에서 건면을 식용유지로 튀겨 말려서 포장하고 별도의 수프를 개발함으로써 라면이 탄생하였다.
- 일본에 안도(安藤百福)이라는 사람이 술집에서 튀김 요리하는 요리사의 모습을 보고 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착안하게 되었다.
-이상 '동아 원색세계대백과사전'
이를 종합해 보면 라면의 원조가 일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홋카이도의 3대 먹거리로 삿포로맥주, 삿포로아이스크림에 이어, 라멘을 먹어 보려고 오늘 점심시간 우리는 삿포로의 명물 라멘 골목을 찾았다.
삿포로에서 유명한 라멘 거리로는 '싱생라면 타운'과 스스키노 거리에 있는 '라멘요코초(나면골목)'인데 우리는 후자를 찾았다.
겨우 교행할 정도의 좁은 골목에 닥지닥지 모인 라멘집은 그 식당 내도 어깨가 달 정도로 겨우 앉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도 7인이 겨우 끼어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인데 이렇게 가게가 좁은 것도 일인들의 무서운 상혼(商魂)이었다.
가개가 좁으니 사람들이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게 되고 ,그러면 유명한 곳인 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그뿐인가 좁으니 빨리 먹고, 빨리 일어서야 하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인 셈이다.
일본 라면은 '미소'(味粃, 된장), '시오'(소금), '쇼유'(간장) 크게 3 가지 종류 가 있다
된장을 돼지 뼈, 닭 뼈와 대파 등 채소를 넣은 물에 넣고 직접 우려내어 끓인 국물에 특별히 주문하여 만든 쫄깃쫄깃한 면을 말아 주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스턴트가 아니다.
우리가 먹은 라면은 交子(만두)가 따로 나오고, 국에 가리비와 게 다리, 새우가 들어간 특별한 것인데 그 값이 1,300엔(14,000원) 이었다. 그것을 삿포로맥주에 곁들여 먹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비싼 라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었네!'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한결 같은 푸념이었다.
여행은 잘 구경하고 , 잘 먹고, 잘 자는 것이다.
여행 내내 경기케이블TV 배려로 일류 호텔에서 독방을 쓰며 편하게 잤는데 오늘은 여행 마지막 밤이라 북해도의 별미 게(蟹) 요리 특식을 먹는다.
홋카이도는 동으로 동해, 서로 태평양, 북으로 오호츠크 해, 남으로 쓰가루해협(津輕海狹)으로 둘려 싸여 있어 싱싱한 해산물이 풍부한 섬이다.
가을이면 연어가 산란을 위해 홋카이도 강을 거슬러 올라 와서 9월이면 연어축제가 한창이다. 그러나 연어 맛이 어찌 게(蟹)맛을 당하랴.
우리가 회(膾)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은 첫째도 둘째도 비린내 나지 않고, 씹히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보다 더 펄펄 뛰는 싱싱한 맛이 있어야 한다.
게 중에도 가장 비싸고 맛있는 게가 털게(케가니)다. 길이 15cm 정도의 이 게는 살아 있을 때는 투명하고 씹히는 맛이 있어 회로도 먹을 수도 있다.
남이 보면 미친(美親) 놈이라고 오해 받을 정도로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며 다니던 술꾼 이 사람이 일본인도 오기 어려운 훗가이도로 건너와서 기모노의 여인이 일본식 서비를 베풀며 차려준 요리상을, 그것도 게 요리와 게 회 앞에 앉았으니 상상해 보시라, 행복해 하는 이 ilman의 모습을-.
가져간 진로 소주가 홋카이도 게 요리, 게 회를 만난 것이다.
*. 삿포로 개척 이야기
삿포로가 우리의 귀에 익은 것은 1950년부터 시작된 삿포로 눈 축재와 1972년에 개최된 제11회 동계올림픽 때문이다.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이 드넓은 땅 훗가이도는 아이누어로 '말라붙은 큰 강 바닥' 이란 뜻이다.
당시에는 아이누족의 땅 이 훗카이도를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은 국토확장의 차원에서 1869년부터 강렬한 아이누족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개발에 착수하면서 일인(日人)들을 이주시켜 일본의 국토에 편입 시키기 시작하였다.
1 971년에는 미국인 건축기사에게 설계를 부탁하여 국력을 기울여 교토시를 모방하여 오늘날과 같은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한 계획도시 삿포로를 탄생시켰다.
지금 삿포로는5,273,000명만이(2019) 사는 정치, 교육, 교통의 중심지로 일인들이 전국에서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지상낙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현재는 북해도 인구의 30%가 이 살기 좋은 삿포로에 살고 있다.
이렇게 일본은 선진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토를 넓히고 건설하고 있을 무렵 한국의 실정은 어떠하였던가.
당시 집권하고 있던 대원군(大院君)은 통상하러 온 미국을 위시한 서구 제국과 일전(一戰)을 불사하며 싸우고 있었다. 남들은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때, 공부는커녕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쌈질만 하는 학생 격이었다. 그것도 지는 싸움을.
그 결과로 우리는 36년동안 나라를 왜놈들에게 빼앗기는 비싼 댓가를 지불하게 되었던 것이다.
*. 삿포로 구경
어제 저녁 먹고 둘러본 狸小路(나누키코지) 시장은 130 여 년의 역사를 가진 홋카이도 최대 상점가로 7동에 200여 가게가 있는 아케이드 상가였다.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서 하늘을 덮개로 가린 우리나라의 재래시장 같았다.
거기에는 극장, 특산물, 음식점, 먹거리가 있었지만 막 저녁을 한 후라서 둘러만 보다 왔다.
마지막 날 삿포로 시내 관광에서 우리들이 처음 찾아간 곳은 '시계대'(時計臺,도케이다이)다.
'시계대(時計臺,도케이다이)'는 지금의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가 있던 자리의 연무장(演無場)에 있다. 당시에 학생들의 체육수업과 병영 훈련을 하던 이 연무장에 미국 건축양식으로 귀중한 건물을 세웠다. 그후 이 건물 위 탑에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표준 시간을 알게 하기 위하여 시계를 설치해서 그 종소리가 삿포로 시내를 울리게 하였는데 이 건물은 도시 계획에 의해 130m 남쪽인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으로 중요 시계대는 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진자식 시계인데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삿포로 역사관, 철도 모형 등 역사 자료 등이 전시 되어 있는 곳이다
우리들의 삿포로에서의 마지막 구경은 '北海道廳舊本廳舍'(,훗카이도초큐혼초샤)로 끝나는 것 같다.
시민들이 아카랭가(빨간 벽돌)란 이름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의 중요문화재 北海道廳舊本廳舍(훗카이도초큐혼초샤)는 앞서 말한 클락크의 고향 매사추세츠주 의사당을 모델로 하여 1886년에 세운 건물이다. 건물 창의 붉은 별은 북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삿포로의 상징물이다. 중앙 돔 위의 8각 탑도 미국 건물의 영향 하에 만든 것이고-.
이 건물 내에는 19만 여권의 자료가 있다더니, 내부에 들어가니 삿포로에 대한 각종 자료가 즐비하였다.
개척 당시부터 오늘날까지의 홋카이도 변천 모형 등 시청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친절히 한글로 설명해 놓은 것도 있었다.
*. 삿포로에서의 유감
우리들은 홋카이도에 와서 정작 보아야 할 삿포로 볼거리는 거의 생략하고 몇 군데만 보고 삿포로를 떠난다.
우리가 삿포로에서 보고 온 곳은 삿포로 시계탑과 삿포로 구청사뿐으로 그 유명하다는 홋카이도대학, 맥주박물관, 삿포로 팩토리는 고사하고 꼭 보고 와야 할 '오도리 공원' 등을 버스를 타고 그냥 지나가면서 설명만 들었을 뿐이다. 안내자란 일정에 없는 것이라도 관광객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 주려는 노력에 관광객들은 감격하는 법인데, 우리들은 일정에 있는 것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2시에 떠나는 비행기를 위해 어째서 3시간 30분 전에 모든 것을 생략하고, 어느 여행사보다 빨리 공항에 와서 허송세월을 해야만 하였는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또 못 올 곳을-.
시작부터 최선을 다한 정성스런 여행사 가이드의 하나하나에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감사하였던가. 그런데 그것이 끝에 와서는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고 말았다. '100 - 1 = 0' 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Zero'가 되는 세상이란 말이다.
그래도 삿포로는 다녀왔으니 나름대로 못 가본 곳이지만 여행서적을 뒤적여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본다.
*. 홋카이도대학:
북해도를 찾아 온 사람이면 이 대학에 꼭 들려 봐야 하는 것은 이 대학의 설립목표가 홋카이도 개척과 개발을 위한 인재 양성이어서 그 개척의 역사를 곳곳에서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학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제2농장 모범 축사', '프랑스풍 기념강당'도 그렇지만 아이누족의 유물을 2만점이나 전시하고 있는 '아이누 박물관'이 있다.
1876년 일본 최초의 농업전문대학으로 출발하여 12개 학부를 거느린 종합대학이 된 홋카이도대학의 그 초대학장이 미국 매사추세츠농대의 초대학장이었던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박사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는 말은 이 분이 일본을 떠나면서 이 대학 학생들에게 남긴 고별사 중에 하나다. 그분의 흉상이 있는 곳이 훗카이도대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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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通公園(오오도리코엔):
삿포로 도시 계획을 하던 메이지 신정부는 삿포로의 한 가운데에다 남북으로 그린벨트 지역인 '오도리 공원(大通公園)'을 만들었다. 그 공원을 기준으로 하여 그 북쪽에 주요 관공서를, 남쪽에는 주택과 상점가를 건설하였다.
지진과 화재가 많은 삿포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중앙인 오오도리코엔(大通公園)은 방화벽의 구실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공원의 동쪽 끝에 있는 TV탑에서 서쪽 끝에는 삿포로 자료관(札幌市資料館)까지는 1.2km 폭은 65m이다.
그 사이에는 4,700 구루의 수목이 있고 '혼고신(本享新) 미술가'의 멋진 조각 14개를 둘러볼 수도 있다.
시내에 어디서나 보이는 오오도리공원의 상징인 TV탑은 50년 전에 세운 높이가 147.2m로 지상 90m 타워로 360도 파노라마 전망대가 있는 중간에 시계가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삿포로는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고장이라 눈의 도시란 애층을 갖는다. 그 제설작업 비용이 연간 200억엔이나 소요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매년 2월 5일부터 2월 11일까지 세계적인 눈 축제를 개최한다. 이를 위해 5톤 트럭 6,700여대의 눈을 실어 나르고 자원봉사자가 관광객을 친절히 맞는다. 그 1주일 동안에 세계에서 200만여 명이 삿포로를 찾고 거기서 얻는 수입금이 무려 300억 엔이다.
오도리공원에서 옛날 어린 학생들이 눈조각을 하여 전시한 것이 시초라라 한다.
옛날에 추워서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이 땅을 이렇게 천국으로 바꾼 일인의 저력을 우리는 옛날의 은원(恩怨)만 따지며 백안시만 할 것인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라 하였으니 옛날 일제의 만행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고 배울 것은 배우자.
이 사포로 눈 축제는 브라질의 '리오축제' ,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와 더불어 세계 3대 축제의 하나로 금년으로 54회 째의 오랜 역사를 자랑항고 있다.
다음 그림은 고국에 있을 때 사포로에 가 보고 싶어 TV에서 녹화한 눈 축제 장면이다.
이곳은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오는 고장이어서 집 자랑을 할 때는 한국처럼 그 평수를 따지지 않고 지붕이나 현관 등에 열선을 깔았나 않았나 하는 것이란다. 눈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이 훗크오카 여행의 일차적인 목적이 일본 지방케이불TV 견학이었지만 내가 써온 이 글은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하여 쓴 글이어서 업무적인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치토세국제공항에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오오타케 시에 있는 이 케이블 방송국은 500호의 주민들을 상대로 조그만 건물에서 시의 공무원 4~5명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 설립 목적은 첫째가 훗카이도 TV난청지역 해소. 둘째로 지진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일본이라서 시민들의 신속한 대피를 위한 방송 운영,
시가 운영하기 때문에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니어서, 아직 디지털방송은 계획 중에 있고 그곳 방송 장비도 한국과 달리 아나로그 수신기 수준일 뿐이었다.
시민들은 작지만 이 케이블TV방송국이 있어서 이곳의 중계로 일본 각종 체널 방송을 원활하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고, 지역주민들의 각종 소식과 지역 단체의 활동 등을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지역 친목과 발전 차원에서 활성화해 나아가고 있었다.
일본 주부들도 한국 주부와 같이 연속극을 즐기냐 물으니 여기서는 그보다 코메디를 더 좋아한다는 답변이었다.
-북해도 기행 끝/ 2023. 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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