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산행 Photo 에세이(2)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 남한산성 '종로(鐘路)' 답사 남한산성 버스종점에 있는종로 마을에서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곳이 산성로타리에서 동문(東門) 쪽으로 가다가 우측에 있는 '남한산성역사관'이다. 남한산성의 지도를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역사관이다. 이 산성의 올바른 순례를 위해서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지도는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적지가 종로에 몰려 있는데 기타 건물들도 거의 모두가 약속한 듯이 기와집들이어서 유적지와 구별이 안 된다. 역사관은 남한산성의 연혁,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 여러 역사서와, 척화파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분 삼학사의 필적, 남한산성의 항전(김내 그림) 모습과 남한산성의 모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관을 나와 보니 바로 동문쪽으로 해공 신익희의 동상이 멋지게 서있다. 나의 대학 학창시절 자유당 말기 독재자 이승만 정권에 맞서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전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뇌일혈로 급사한 정치가다. 그 해공 선생이 자랑스런 경기도 이곳 광주(廣州) 분으로 남한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분이기에 그 동상을 여기에 모셔 놓은 것이다. 그 동상에는 '民主爲到 同等樂域'(민주주의의 길은 동등하게즐거운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음식점 사이에 커다린 비석이 있는 것이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순교자현양비'였다. 현양(顯揚)이란 '세상에 높이 들어내는 것'을 말함이니, 천주교 박해에 맞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순교자 넋을 기리는 뜻이리라. 그 아래 '순교 정신을 기리며'란 글이 세월을 넘어 순교자들의 거룩한 생애가 속절없이 살아온 나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그 박해 내용이 너무나 가혹하여 거기 서 있는묘비로 대신한다. |
순교자들의 명단이 현양비 뒤에 음각되어 있는데 참수형, 교수형 아니면 옥사자들이었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되어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는 연무관(演武館, 경기 유형문화재 제6호)은 넓직한 터전에 있는데 그 주위에 400년 이상의 고목이 옛날을 말하여 주는 듯 즐비하다.
다시 역사관에 이르니 그 뒤에 이정표가 있다. '↑ 0.5km 개원사/ ↑ 남단사지/ ↑ 남장대지'
나는 개원사를 향한다.
-개원사(開원사)는 임진왜란에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지키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인 승군을 총지휘했던 본영사찰이다. 인조 2년(1624년)에 창건되어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370년 간이나 수도 서울을 지켜온 호국사찰이다.
이 사찰 주위에 있는 군기고지(軍機庫祉), 누각지, 종각지 등이 주춧돌, 석계(石階), 박석(薄石) 등으로 남아 있어 병자호란 당시 이 개원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여 준다.
천왕문을 막 넘어 좌측 기슭에 '승장조수전'이라는 다른 곳에서 못보던 당우를 보니 호국불교사찰 개원사임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한다.
정문을 나와 등산로 길로 접어 들어 남장대를 향하다 보니 갈림길인데 우측길에 '남단사지(南壇寺祉)란 표석이 서 있다.
남단사(南壇寺)는 성 수축 당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군막사찰(軍幕寺刹)이었는데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 수거 때 폭파해 버리는 바람에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이다.
남단사에서 남장대지를 향하여 가다 보니 드디어 성의 여장[성가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어제의 '남문→북문'에 이어 성터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남한산성에 백제의 온조왕을 모신 사당 숭열전(崇烈殿)이 있는 것은 이 성이 백제의 온조왕 때의 성이라는 것을 유추하게 한다. 신라 때의 한산주(漢山州)에 있었다는 주장성, 일명 일장성(日長城)이나 세종실록에 나오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은 곧 남한산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토성이었는데 광해군 13년(1621년)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장祉)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여 2년 5개월만인 인조 4년(1625년)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1년만인 인조 5년에 침입한 금(金, 후의 淸)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으로 형제지국(兄弟之國)의 평화조약을 맺은 후부터였다.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으로 청은 병선(兵船)과 군마(軍馬)와 병력 등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해오자 배청열(排淸熱)이 높아지면서 우리 조정에서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온 사신마저 만나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이에 격분한 청태조 누루하치가 인조14년(1636년) 12월 1일 한 겨울에 12만 대군을 이끌고 9일 압록강을 넘어 10일만에 서울 근교에 육박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 등을 우선 강화도로 보내고 그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청군이 그 앞을 막는 바람에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자, 청군은 20만으로 성을 포위하고 말았다.
이때 성안의 군사는 1만 3,000 명으로 성안에는 겨우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뿐이었다.
전국에서 원군이 남한산성을 향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청군에게 격파 당하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었다. 포위 된 지 45일이 되니 식량의 부족과 엄동설한의 추위에 장병들은 기력을 잃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어 왕자들이 청군에 잡혔다는 전갈이 왔다.
당시 궁녀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성일기'에는 그 당시의 촉박한 사항을 세세히 기록한 것이 있다.
-이십사 일의 대우(大雨)가 내리니, 성첩(城堞) 지킨 군사를 다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감께서 세자로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사되,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가 득죄함이니, 일성 군민(一城軍民)이 무슨 죄있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하옵건데 만민을 살려주옵소서."
군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청하되 허락치 아니하시더니, 미구(未久)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이십오 일의 극한(極寒)하다. 묘당[조정]이 적진의 사신 보내기를 청하오니, 상이 갈오사되. 아국이 매양 화친으로써 적에게 속으니, 이제 또 사신을 보내어 욕될 줄 알되, 모든 의논이 이러하니 이 때 세시라. 술, 고기를 보내고 은합에 실과를 담아 써 후정(厚情)을 뵌 후, 인하여 접담(接譚)하여 기색을 살피라." 하시다.
이십육 일에 이경직, 김신국이 술, 고기 은합을 가지고 적진에 가니, 적장이 갈오되, "군중이 날마다 소를 잡고 보물이 뫼같이 쌓였으니, 이것을 무엇에 쓰리오. 네 나라 군신이 돌 구멍에서 굶은 지 오래니, 가히 스스로 씀직하도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아니하고 도로 보내니라.
-이십칠 일에 날마다 성중의 구완하러 오는 군사를 바라되, 일 인도 오는 이 없고, 강원감사 조정호가 본도군(本道軍)이 다 모이지 못하였기로써 양근에 퇴진하여 후에 오는 군사를 기다리고, 먼저 영장 권정길로 하여금 영병(領兵)을 하여 검단산성에 이르러 봉화를 들어 서로 응하다.
당시에 척화파(斥和派)였던 윤집, 정온도 당시의 슬픔을 글로 노래하고 있다.
변경 밖 오랑캐군이 한 눈에 들어오네
장부의 큰 뜻을 이제 어디에 쓰리
영웅의 마음으로 칼 어루만지며 저녁 바람을 맞네
-윤집
세상 살기가 어찌나 험준한지
한 달 동안 달무리진 산성 가운데 있구나
이 한 몸 아까울 것 없으나
임금님께선 어찌 그리도 곤궁하실까
바깥에서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군사 끊기고
조정에선 나라 팔자는 흉한 소리 많도다.
늙은 신하는 무슨 일을 하려고
허리 아래 서릿발 같이 날카로운 칼을 찼는가.
-이조 참판 정온
*. 남장대지 암문(暗門) 이야기
이런 비화(悲話)가 어린 '남장대지(南將臺祉)'도 그 주춧돌만 덩그렇게 남아서 이제는 나그네의 쉼터로 고작 의자의 역할이나 하고 있다.
이곳이 오영(五營) 중 후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병을 자휘하던 타운우(唾雲樓)가 있던 남장대 터라는 것을 표지석이 말하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이정표를 보니 어제 들렸던 남문(南門)은 0.6km라서 1.1km의 동문(東門)을 향하려는데 시선을 빼앗는 곳이 있다. '치성'이었다.
치성(雉城)이란 성벽에 바짝 다가붙거나 성벽을 오르는 적을 사각(斜角)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다른 성벽보다 바깥으로 네모 모양으로 내어 쌓은 것이다.
이때 네모가 아니고 반원형이면 '곡성(曲城)'이라고 한다.
남장대 터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암문으로 나가 볼 일이다.
암문(暗門)이란 이 문을 통하여 적이 모르는 사이에 나가서 적을 뒤로부터 공격하거나, 상황이 불리할 경우에는 적이 모르게 성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위치에 다락집 없이 만들어 놓은 문이다.
남한 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16개가 있다. 그 암문을 통하여 나가보니 거기 옹성(甕城)이 있고 제2옹성에 대한 표지석이 이 옹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옹성은 둘레가 327.9m이며 87개의 여장이 있었다.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옹 성 끝에 동서남 방향으로 3개씩 9개의 포루가 있는데 그곳을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암문을 나오니 그 옹성도 보이고 담 아래로 성터를 끼고 도는 더 운치 있는 등산로가 열려있다.
다시 제3남옹성 직전의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들어서니 '한흥사' 가는 이정표가 있는 곳부터는 동문(東門)까지 내림길이다. 거기서 준비해간 점식 식사를 하다 보니 건너편 산으로 아스팔트 길이 올라가고 있고 그 끝에 오른쪽에 하얀 탑을 세워둔 절이 있다.
이 남한산성 성내에 있었다는 9개 사찰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망월사(望月寺)였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정할 때 한양의 '장의사'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 화엄경, 금정 하나를 옮겨 놓았다는 망월사지만 그것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1990년에 복원하여 놓은 사찰이었다.
*. 벌봉 가는 길
찻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하는 동문(東門) 눈에 들어온다.
동문 아래로 난 찻길을 건너기 전이 수구문이었다.
-남한산성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어서 대부분의 물이 이수구문(일명 水門)을 통하여 나간다. 통행시간이 지나 동문이 닫혔을 때에는 이 문을 통하여 출입하기도 한 비밀문이다.
성안에서 사망한 자가 있으면 4대문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고 이 문으로만 성밖으로 나갔으므로 주민들은 이 수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 부르고 있다..
동문을 지난다. 이로써 나는 어제에 이어 남한산성의 동,서,남,북의 문을 다 견학한 셈이다.
동문에서 아스팔트길로 계속 오르면 망월사이지만 그 길을 버리고 1.9km의 벌봉을 향하여 성을 끼고 난 멋진 통나무 오름길을 오르고 있다. 가파른 통나무길이 끝난 곳에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에 송암정(松岩亭)이란 정자가 있었다는 곳이다.
-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수명과 기생 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건장한 남자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심오한 불도의 설법에 감명 받은 무리 중 기생 한 명이 자과함을 느끼고 이곳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달밤에는 어디서인가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는 곳이다. 정조가 이곳에서 고사(枯死)한 소나무를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 주도록하였다 하여 대부송이라 불려졌었다 한다.
성터 길을 끼고 벌봉을 향하다 보니 등산로 치고는 제법 큰 길이 있어 성터길을 버리고 길을 따라가다보니 아스팔트길이 나타나더니 뜻밖에도 멋진 일주문(一柱門)이 있다. 이것봐라 하였더니 성내에 9개 절의 하나인 장경사(長慶寺)였다.
장경사는 개원사, 망월사와 마찬가지로 승군을 지휘하던 국방호국사찰로서 갑오경장(1894년)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명으로 산성을 쌓거나 방어하는 승군이 머물던 사찰이었다.
다시 산성길에서 만난 것이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信地饔城)'이었다.
옹성(地饔城)이란 큰성문을 옹호하여 외적의 직충(直衝)을 막으려고 성문 밖에 쌓은 성이다. 그 모양이 반달 같으면 월성(月城), 네모꼴 모양이면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 장경사신지옹성은 그 둘레가 150.9m로 여장(女墻)이 40개가 있고 끝머리에 대포혈(大砲穴) 2개소가 있다. 이 옹성은 암문을 통하여 안 밖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5개 옹성 중 가장 작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었다.
여행의 기쁨 중에 하나가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그 중에서도 옛날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행복이다. 내가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요번에는 무엇을 보여 줄까 하는 호기심의 연속이 여행이다.
그래서 '요번에는 또 무엇을 보게 되나 '했더니 다가서는 것이 '군포지'(軍鋪祉, 사적57호)였다
-군포(軍鋪)란 궁성 밖의 수라군이 머물러 있던 곳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哨所) 건물을 말한다.
옛날 이 남한산성에는 그 군포가 125군데가 있는데 지금은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아 여기 있는 것은 자료에 의하여 모조 초석을 설치하여 놓은 것이다.
*. 동장대 터에서 여장(女墻) 이야기
터만 남은 동장대(東將臺)는 해발 504.1m에 있었다.
이곳이 병자호란 때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지휘하던 곳인데 거기 '여장'에 대하여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다.
여장(女墻) 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성가퀴를 말한다.
전쟁시 이에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하여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길이 4.2m, 높이 1.3m 내외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주로 벽돌을 사용하여 쌓는다.
여장에는 흔히 근총안(近銃眼) 1개와 그 좌우에 원총안(遠銃眼) 2개를 만든다. 그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성가퀴[타구]가 있다.
일명 남한산(南漢山)이라고 하는 벌봉은 동장대에서 0.6 km 밖에 있는데, 아취형 성문을 나오면 외성(外城)으로 향한 또하나의 암문이 있다. 이 일대가 외성인 봉암성(蜂巖城)이다.
- 이 성은 숙종 12년(1685년) 부윤 윤지선이 쌓은 둘레가 2.71km다. 봉암에서 한봉에 걸쳐 축조되어서 2 암문을 통하여 출입하도록되어 있는데 그 암문이 4, 군포가 15 개소 있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호란 당시에 청군이 본성보다 높은 암봉인 벌봉(蜂峰)에 올라서 성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본성의 보강 차원에서 축조한 것이다.
벌봉 이정표에서는 '벌봉암문'을 정상(頂上)인 것처럼 쓰여 있지만 거기서 나무숲 사이의 바위가 그 정상이니 올라가 볼 일이다.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동장대로 와서 북문쪽으로 가다가 이정표에서 하산을 시작하다 보니 갈림길나타난다. 좌측으로 가면 망월사 길이요, 우측 길이 현절사 가는 길이다.
현절사(顯節祠)란 병자호란 당시 항복하지 말고 사수하자던 척화파 중 삼학사(三學士)인 홍익한, 윤집, 오달재와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야
古國 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나는 그 현절사 앞에서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이 고국을 떠나며 지은 우국 시조를 읊으면서 선인들의 호국을 위해 바친 거룩한 넋을 더듬어 보며 남한산성의 세 번째 날을 접는다. 개원사의 저녁 종소리가 이십팔수(二十八宿)을 울리는 저녁이었다.
내가 사는 일산을 가려면 '대화역~오금동역'을 왕복하는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야 한다.
다음은 병자호란과 연관된 그 '오금동' 어원과 '인절미' 유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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