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忠州) 기행 .
충청북도는 우리나라 도(道) 중에 제주도 다음으로 작은 도(道)로 옛날에는 그 도청 소재지가 충주(忠州)였다.
그 충주를 나는 처음 간다. 그동안 내게 충주는 수안보나 박달재 그리고 단양을 가다가 탄금대를 잠깐 보고 지나쳤던 도시였을 뿐이다.
그런 교통 불편 때문에 충북도청소재지가 충주(忠州)에서 청주(淸州)로 바뀌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차가 없던 옛날에는 충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부산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영남대로를 통하여 조선과 일본의 통신사들이나 남북의 물물교류를 위한 보부상들이 서울을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충주(忠州)'란 이름 이전에는 '중원경(中(原京)'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왕건) 때 처음 ‘충주’라 하다가 오늘날처럼 충주(忠州)란 이름으로 굳어져 쓰이게 된 것은 갑오경장 무렵인 1895년인 조선 초 고종 때부터였다.
충청도(忠淸道)란 이름의 '충’(忠)과 청주('淸'州)의 앞 글자를 따서 ‘충청도’라 했다면, 충주(忠州)란 이름의 어원은 무엇일까?
충주 사람들은 충주 일원을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원(中原)’이라 한다.
'중원(中原)'이란 땅의 한 복판이란 뜻인데 한반도나 남한 지도를 펴 놓고 보아도 충주는 우리 국토의 중앙이 아니다.
충주에 있는 신라의 석탑 중 제일 높다는 중앙탑의 설명을 자세히 보면 이해가 되는 점이 있다.
-중원탑(中原塔, 일명 중앙탑, 坪里7層石塔,국보6호):
중앙탑은 통일신라기에 우리나라의 중앙에 세워져 ‘중앙탑’이라 한다. 탑 전체 높이가 12.951m로 높이에 비해 너비가 좁아서 강하고 웅대함이나 안정감보다는 상승감(上昇感)이 두드러지는 탑이다.
왜 충주라 하였을까를 나름대로 여러 문헌을 찾아 헤매었으나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충주(忠州)가 위에서 말한 땅의 한 복판이란 ‘중원(中原)’을 염두에 두면 다음과 같은 설도 가능할 것 같다.
‘忠州’에서 ‘忠’ 자를 파자(破字) 해보면 ‘中’ +‘心’ 으로 '중심(中心)'이 되어 ‘중원’이란 뜻이 된다.
오늘날의 충주가 ‘충주’와 ‘중원군’의 합친 곳이라면 이 설에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중원문화권의 중심지이라는 충주는 넓이. 984.02㎢에 인심이 후박한 인구 약 21만 명이 사는 소도시다.
우리는 그 탄금대 가는 길에 충주를 '관광 충주'로 바꾸어 놓은 ‘충주다목적댐’을 우선 구경하기로 했다.
*. 충주 다목적댐(多目的 Dam)
한 가지 용도에만 사용되는 ’전용댐(專用Dam)’에 비하여, ‘다목적댐(多目的 Dam)이란 수력발전(水力發電) · 홍수조절(洪水調節) · 상수도 용수(上水道用水) · 공업용수(工業用水) · 관개용수(灌漑用水) 등 여러 가지 목적을 겸하는 댐을 말한다. 충주다목적댐은 1985년 12월에 8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준공된 뎀(Dam)으로, 인근 지역이 수몰되면서 아름다운 충주호가 생겨 났다.
이 댐으로 인해 우리는 수도권, 충북, 경기 남동부 지역에 대한 용수공급 및 홍수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충주에서 단양까지 52km 130리의 물길의 선상유람(船上遊覽)으로 월악산 국립공원, 수안보온천, 청풍문화재단지, 단양팔경 등과 연계되어 내륙지방인 충주의 제1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충주다목적 Dam’에 도착하니 널찍한 주차장 바로 앞에 ‘물문화관(물文化館)’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멋진 '충주다목적댐 준공 기념비'가 서 있다.
'물문화관' 옆의 멋진 전망대(展望臺)에 서니 굽어보는 충주댐이 고즈넉하다.
거기서 5층 가량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면 가까이 내려서 충주호를 보다가 뒤돌아 보니 물문화관 뒤에 계명산이 보인다.
-계명산(鷄鳴山, 775m) : 계명산은 오동산 또는 심항산이라 하다가 계족산(鷄足山)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에 얽혀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백제시대 이 산의 남쪽에 마고성(麻姑城)에 왕족이 성주로 있을 때 이야기다. 성주의 딸이 지네가 많은 이 심항산 기슭을 지나다가 지네에게 물려 죽었다. 잡아도 잡아도 없어지지 않는 지네를 없애게 해달라고 산마루에 제단을 쌓고 정성껏 산신령에게 빌었더니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현몽(現夢)하는 것이었다.
“지네는 닭과 상극이요, 천적(天敵)이니 산에 닭을 풀어 놓도록 하라.”
노인의 말대로 산에 닭을 방목하였더니 지네가 깨끗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 후 산에 닭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하여 이 산 이름을 계족산(鷄足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은 닭의 다리가 모든 것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복이 달아나 버려서 충주에 큰 부자가 나지 않는다는 풍수쟁이의 말이었다.
이에 1958년 충주시에서는 계족산(鷄足山) 이름을 계명산(鷄鳴山)으로 고쳤다.
닭이 우는 것을 계명(鷄鳴)이라 하니 ’계명’은 곧 희망의 새 아침의 여명(黎明)을 알린다는 소리라 생각해서였다.
이 산의 정상까지는 주차장에서 1시간 30분 거리였다.
‘물문화관’에 들렀다 나오면서 나는 행복하였다.
거기에는 충주다목적 댐으로 수몰되기 이전의 단양, 제천, 중주의 사진은 물론, 물에 관한 모든 정보가 있어 이를 하나하나 카메라에 모셨기 때문이다.
물의 역할, 물의 용도, 수질 오염, 수질관리나 한국 수도(水道)의 역사 등등을 전문가 다음으로 알게 된 기쁨이었다.
게다가 다음으로 가야할 우륵의 탄금대 이야기도 구체적인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 탄금대공원(彈琴臺 公園) 이야기
국가 명승 제42호로 지정된 탄금대(충주시 칠금동 산1-1)는 남한강 상류와 달천강(達川江)이 합류하는 강가 대문산(大門山) 구릉에 있다. 20여 년 전에 왔을 때는 길가에 탄금대(彈琴臺) 달랑 하나뿐이더니, 오늘 와서 보니 커다란 탄금대의 널찍한 주차공간에다 야외음악당, 산책로, 황토 광장, 궁도장, 감자꽃 노래비, 탄금대 사연 노래비 등 역사, 문화, 리포트 등의 시설로 충주 시민들의 휴식공원이 되어 있다.
탄금대에 모신 분은 악성 우륵 선생뿐만이 아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전적지라 신립(申砬)장군과 8,000 고혼을 모신 탑 등이 있다.
‘우륵당’을 지나 파란 잔디가 아름다운 그림 같은 ‘야외음악당'을 굽어보며 직진하니 ’조각공원‘이 시작되는데 여인의 나신상(裸身像)이 특히 눈길을 끈다.
다음은 탄금대까지의 순서대로 본 비석들의 이야기이다.
-임란충신 백기 장군 조웅 기적비(白旗將軍趙熊奇績碑):
임진왜란 때 왜놈의 한양까지의 북상(北上)을 저지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신립장군이 충주 달천 전투에서 대패하자, 국왕 선조는 할 수 없이 신의주로 몽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신립장군의 승리를 믿던 많은 백성이 허무하게도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충주의 조웅(趙熊) 장군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충주의 앙성면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여 서울로 향하여 북상하는 왜적의 후속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당시 팔도 의병 중 가장 용맹을 떨치던 유명한 장군이 호서(湖西)의 백기 장군 조웅(白旗將軍, 趙熊)과 영남(嶺南)의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祐)였다.
조웅 장군은 언제나 백기(白旗)를 날리며 싸워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호를 백기당(白旗堂)이라 하였으나, 어느 날 안개가 짙게 깔리어 어두운 무렵 왜놈들과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내 적의 탄환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사로잡히게 되었다.
생포되어서도 왜적 꾸짖기를 그치지 않다가 끝내는 사지(四肢)를 찢기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전후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성과 절의를 기리어 병조참판에 추증하였다.
-달천 팔천 고혼 위령탑(達川八千孤魂慰靈塔):
신립장군은 23세로 무과에 급제 한 뒤 북방의 야인(野人), 나탕개 등을 정벌하며 혁혁한 공을 세워 조정과 백성들의 신망이 두텁던 명장이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왕은 보검을 하사하며 신립을 삼도 순변사(三道巡邊使)에 임명하여 충주로 떠나게 하였다.
이때 경상도 상주 전투에서 대패하고 돌아온 이일(李鎰)이 신립장군과 함께 내려간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왜군은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군이라 지형이 험한 조령(鳥嶺)에 잠복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신립 장군은 이를 듣지 않았다.
신립 장군은 “야인(野人)을 물리칠 때 크게 활약한 그의 500 정예 기병만을 믿어서이기도 했지만 자기가 거느린 8,000명이 군사는 여차하면 도망가 버리고 말 훈련받지 못한 농군(農軍)이므로 탄금대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쳐야 죽기로 싸울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다가 탄금대 전투에서 8,000명의 군인이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적이 예상되는 길이 아닌 우회하여 쳐들어 왔고, 푹푹 빠지는 논 밭은 신립 장군이 믿던 기마전을 벌이기에는 적당하지 않아서였다.
이에 신립 장군과 그 예하 김여물 장군을 비롯하여 8,000여 명의 전사한 농군들의 넋을 달래고자, 2003년에 건립한 위령탑이 달천 팔천 고혼 위령탑(達川八千孤魂慰靈塔)이었다.
이에 충주시에서는 매년 음력 4월 28일 위령제로 외롭게 간 신립 이하 8천 농군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 신립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전하여 온다.
-신립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밤늦게 산속의 어느 인가에서 유하게 되었다.
이 집에는 매일 밤 괴물이 나타나서 가족을 하나하나 잡아다가 죽여 왔는데, 오늘이 마지막으로 그 집 처녀를 잡아갈 차례였다. 이에 신립이 무술로써 그 괴물을 처치하여 처녀를 구해 주었다.
다음 날 신립이 길을 떠나려 할 때 처녀가 함께 따라나서기를 간청하다 거절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뒤로부터 신립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현몽하는 처녀의 암시(暗示)의 도움을 받아왔다.
신립이 부하들의 조언을 받아 새재에 진(鎭)을 치려할 때였다.
그날 밤도 처녀의 원귀기 나타나 권하는 것이었다.
“신 장군님, 대명(大命)을 받들어 왜적을 격멸하러 오셔서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려 하시나이까. 생각하신 대로 충청도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시면 크게 대승리다.”
-감자꽃 노래 비: 독립 운동가며 시인인 동천 권태응의 동시다.
권 시인은 독립운동을 하다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얻은 폐병으로 39세를 일기로 6.25 무렵 돌아가신 이 고장 충주 출신의 시인이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쉽고 짧은 시에 재치가 넘쳐난다.
이를 독립운동가인 시인 권태응의 눈으로 보면 ‘‘너희(일제)가 아무리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여도, 우리는 물어 보나 마나 조선인이다."가 된다.
-권태응의 ‘감자꽃’ 근처에 찌는 무더위 속에 조각 작품 옆 소나무 그늘 아래서 한 백수(白首)가 길게 앉아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다.
나도 동천 권태응 시인의 마음처럼 시흥이 일어난다.
조각 옆 솔나무 아래
낮잠 든 저 노인
보나 마나
한가한 노인
솔바람 기다리며
낮잠 자는 노인 보는 노인
보나 마나
백수 노인 ilman
'낮잠'
-열두 대: ‘대(臺’)란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이나 그런 곳에 지은 집을 말한다.
그 정자 집이 지금 내가 올라온 탄금대요, 그 탄금대서 굽어보는 강가 절벽 끝에 있는 바위가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했다는 바위다.
임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열을 받은 그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12번을 오르내렸다는 열두대 바위이기도 한데, 내려가는 층계를 새로 만들고 있는 중이라서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 ‘열두 대’ 앞의 비가 ‘신립장군 순국 지지(申砬將軍殉國之址)’의 비(碑)이니 거기가 바로 임란 때에 신립 장군이 김여물 종사관과 함께 몸을 던져 순국한 곳이다.
‘푸르른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르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논개의 시가 저절로 입가에 맴돈다.
그 벼랑도 열두 길이듯이 짙푸른 강물을 보니 그 깊이도 열두 길도 더 넘나 보다.
‘열두 대’에서 강물 따라 그 아래로 약 오리쯤 내려가면 한 바위가 있다 한다.
힘이 넘치는 46세의 신립이 이곳까지 떠내려 와도 죽지 않으니 그 바위에 머리를 찧고 비로소 죽었다는 비극의 바위라 한다.
‘달천’은 일명 ‘달래강’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남매간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고민하다 죽은 남매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옛날 어느 해 여름 젊은 남매가 함께 산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앞서가는 누나의 얇은 모시옷이 성숙한 몸에 착 달라붙은 그 여체의 아름다운 몸매에 동생은 그만 참을 수 없는 성적 충동을 느꼈다.
누나에게 자기가 앞서 가자고 하였으나 동생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누나는 ‘무섭다’고 말을 뿌리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리적인 욕구라도 이런 생각만이라도 큰 죄를 짓는구나!' 생각하던 남동생은 자기를 탓하며 자기의 거시기를 돌로 쳐서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앞서 가던 누나가 뒤 따라오지 않는 동생이 이상하여 뒤돌아 가보니 동생이 거시기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비로소 안 누나는 동생을 끌어안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차라리 달래나 보지 그랬어, 말이나 해 보지 그랬어!”
누나도 이 달래강(達川)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후세 사람들은 ‘달래나 보지 고개’라 하였다.
달천을 한자로 ‘達川’이라 쓰는데 ‘達川’에서 ‘川’이 내 ‘천(川)’ 자이니 , ‘達(달)’에서는 음(音)인 '달'을, ‘川’에서는 훈(訓)인 '내'를 따오니 '달내'가 된다. ‘달내 → 달래’로 소리가 나니 거기에 전설이 접목되어서 생긴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달래나 보지 고개'가 충주, 철원, 부산, 진주에도 달래강, 달래산, 달래고개 등이 민간 전설과 함께 전하여 온다 한다.
*. 우륵(于勒) 이야기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에는 고구려 왕산악(王山岳), 신라 우륵(于勒) 그리고 조선 초 박연(朴堧)이 있다. 그중 우륵은 가야국 사람이었다.
가락국 가실왕의 명으로 12 현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은 가야금의 명수였다.
가야국이 망할 무렵 신라에 투항하여 가야금곡을 궁중음악이 되게 하였다. 신라 진흥왕도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륵 선생 탄금대: ‘탄금대 낙조’는 충주 8경 중 ‘제6경’이다.
신라 진흥왕(551) 때 당대의 악성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하면서 음악을 연주하던 곳이다.
가락국이 멸망하는 것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나라님은 우륵을 국원(國原, 충주) 지금의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大門山)에 살게 하였다.
여기서 우륵은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탄주(彈奏) 하니 그 미묘한 음악소리에 이끌려 모여든 사람들이 부근에 부락을 이루어서 그 후 이곳을 탄금대(彈琴臺)라 하게 되었다.
우륵 선생은 가야금을 궁중음악으로 삼게도 하여 국악의 시초를 연 음악가가 되었다.
탄금대는 단양에서 흘러내리는 남한강(南漢江)과 충북의 젖줄인 달천(達川, 길이 124.7km 일명 달래강)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 잡은 대문산(大門山)의 구릉 강가에 있다.
탄금대 정자에서 굽어보며 강섬(江島)과 그 뒤로 사장교가 어울려 수려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것을 나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요즘 중국인이 만든 TV 드라마‘삼국지(三國志)’를 즐겨 시청하고 있다.
거기에 ‘千古江山如詩如畵’(천고강산여시여화)란 말이 나온다. 천고 강산이 시(詩)와 같고 그림(畵) 같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나의 친구들이나 내 나이 또래들은 ‘하루는 기어가고 한 해는 날라 간다.’ 한탄하며 할 일을 다 외면하고 사는데, 나는 컴퓨터에, 스마트폰에, 카메라에, 자전거에 미쳐서 가을장마가 긏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로 기다리고 있다.
如詩如畵(여시여화) 같은 ‘한국의 미’를 찾아 떠나기 위해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우리 아버지께 큰 유산(遺産)을 물려받은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건강이라는 유산(健剛遺産)’ 말이다.
'국내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 태종대(太宗臺) (0) | 2017.04.09 |
---|---|
오이도(烏耳島) 이야기 사진 무 (0) | 2017.04.02 |
남한산성 산행 Photo 에세이(2)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0) | 2014.09.17 |
*. 운정호수공원(雲井湖水公園) (0) | 2014.08.30 |
인구 100만 도시, 고양시(高陽市) (0) | 2014.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