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북정마을 이야기
내 고향이
수도곡산 기슭 약우물터인 줄 알았더니-.
백발이 찾아온 내 고향은 수도국산 달동네이네.
'가난이란 고개를 넘어섰더니 넘어섰더니
가난도 행복이더라. 가난도 재산이더라.'
수도곡산 달동내 출신 노 시인이라서 그리 노래했던가.
달 보며 돌아와서,
달 보다 잠들어서,
월세방 사는 이들 마을이라서.
삭월세로 살 사람이 내집 갖고 살 수 있는
천국 같은 유일한 곳이라서,
산동네가 달동네서였을까.
예나 지금이나
서민 중에 서민이 모여 사는
달동네는 산동네.
산동네는 달동네.
나는 옛날을 만난다.
쌍우물을 두고도 수도물을 사 먹던 시절
수돗가에서 만나던 그 소녀를
그 좁디 좁은 컴컴한 골목에 숨어
기다리던
나의 사랑을 만난다.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소녀와
이 수도곡산 달동네 박물관 수돗가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나
옛날 이야기를 나누어 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작년 여름 백발의 나이로 내고향 인천(仁川), 내가 살던 송현동(松峴洞) 약우물터에 갔더니 고향은 송두리체 없어져 버리고, 그 자리에 낯선 대형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었다.
동네 앞 산이었던 수도곡산에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서 있어 윗 시는 그 감흥을 쓴 것이다.
나는 이 달동네에서 소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1940~ 50년대를 인천의 산동네 달동네서 살았던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서울 시내에 마지막 달동네라는 북정마을을 다녀왔다. 가서 보니 그 부근도 결혼해서 내가 난생 처음으로 집을 사서 살던 동네였으니 나는 달동네 출신 시인(詩人)이요, 여행작가(旅行作家)라서 남보다 한이 많았던가 보다.
*. '북정마을'의 어원
이 북정마을을 소재로 영화 한 편 만들고 싶다는 KCCA 신(申) 회장 따라 북정마을을 가려고 4호선 한성대역(漢城大驛) 6번 출구로 나와서 3번 미니마을 버스를 타고 우리는 성북동을 향한다.
옛날의 개천이 복개된 삼선교를 지나니 미니버스는 30도 이상의 언덕길을 굽이굽이 돌아 이 마을에서는 가장 넓다는 조그만 공터인 종점에서 내리니 거기가 북정마을의 중심가였다.
거기에는 구멍가게도 있고 카페도 있는데 겨울이라선가 카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곳곳에는 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요란하다.
마을 회관에 가서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 이 동내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려 했더니 노인정 문도 잠겨 있다.
우리가 가장 궁금한 것 중의 하나가 북정마을의 어원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왜 북정마을이라고 하는지 이를 모르고 있다.
다음은 문헌에서 찾아본 그 어원이다.
- 조선시대에 궁중에 바치는 메주 쑤는 권리는 지금의 청운동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 조선 영조 44년부터 북정 마을 사람들에게도 일부 주어졌다고 한다.그 후 온 마을에 콩을 삶는 소리가 보글보글 들렸고 분주히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이 '북적북적'댔다. 하여 그 소리를 본 따 이 마을 이름을 '북적마을'이라 하다가 우리말 음편(音便) 현상에 따라 '북정마을'이 되었다니 북정마을은 순 우리말 이름이다.
이 북정마을을 찾아온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나라의 1970년대로 온듯한 가난한 서민들이 사는 동내를 발견할 것이다. 그 좁디 좁은 골목길이나 닥지닥지 붙는 집들하며, 이를 아기자기 정성껏 꾸며 놓은 등등으로 해서 이 마을(성불로 29길)은 서울시가 선정한 '2013년 우수마을공동체'로 뽑힌 곳이다.이 고장에 독립운동가며, 시인이며, 승려인 만해 한용운님의 가옥 심우장(尋牛莊)이 있어서인 것 같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 가옥(서울시민속자료 제11호)이 있어 그런 것 같다.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한 소설가다.
이태준은 정지용, 가람 이병기와 더불어 '문장'지에서 소설 분야를 맡아 곽하신 , 최태응(崔泰應), 임옥인 등을 추천해준 1940년대 한국 대표적인 소설가다.
이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되면서 주거지로 개발되었는데 지금은 500호의 서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옛날 내가 살 때는 지금처럼 성곽이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성(城)을 새로 중축해서 처음에는 낯선 마을인지 알았다.
서울시는 이곳을 민속촌 같은 명소로 개발하려는 모양이다.
저 현수막들은 그래서 주민들이 기득권을 찾고자 서울시에 맞서서 데모하는 현수막 같다.
우리는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란 토박이 전직 고교 선생님을 구멍가게에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홀로 왔다면 그 분이 말하는
이 고장의 역사를 담아 전시하고 있다는 미술관도 보고, 1960, 70년대 같은 이발소에서 머리도 깎으며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함께온 동료 따라 심우장을 향한다.
심우장(尋牛莊)은 시인인 만해 한용운(4879~1944 64세)이 1944년까지 살던 집이다.
일인을 미워하여 당시 일어를 모르는 것을 자랑스로 생각하며, 망국의 서러움을 검은 고무신, 검은 두루마기를 평생 입고 다니시던 분이다.
3.1 운동에서는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서대문형무소로 직행하신 분이다.
심우장은 남향을 하지 않고 북향하고 있다. 왜놈들의 본거지인 총독부들 등지기 위해서였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이 심우장 본체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있다. 부엌 뒤로는 식사를 준비를 하는 공간인 찬마루방이 있다. 심우장에서는 향나무를 보고 올 일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이 직접 심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5칸에 불과한 작은 집으로 한용운 서재였던 온돌방에는'尋牛莊'이란 액자가 걸려 있다.
'尋牛'(심우)란 심우도((尋牛圖)의 준말로 불도의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동자가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한 불교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만해 선생의 집 심우장은 그 규모나 꾸밈이 화려하지 않다.
여기서는 만해의 겸손과 소박함을 배우고 올 것이다.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 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북정마을은 고향 같다. 지나가는 길에 들린 마을이 아니라 찾아 온 길이라서 그런가. 마음이 울적할 때, 옛날이 그리워질 때 찾아올 수 있는 고향 같다. 형편이 닿는 대로 주머니를 맘껏 열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고향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같다.
내가 달동네 살던 사람이라 그런가. 달동네 출신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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